명량해전 때 진도군수 문제제기 글
1. 명량과 노량해전 때의 진도군수는 보성선씨 선의문이다.
2. 선의문은 명량해전에 참전했으며 노량해전 직전에 2달간 벌어진 순천왜교성전투에서 전사한다.
3. 정작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진도군수 선의문은 문중과 지역에서조차 400년간 잊혀졌는데 엉뚱한 인물이 진도군수로 둔갑해버린 것이다.
4. 명량과 노량해전에 참전한 선의문조차도 호남절의록에 없다.
문제제기 모순
명량해전--1597년(선조 30) 음력 9월 16일(양력 10월 25일)
순천왜교성전투--1598년 음력 10월 2일
노량해전--1598년 12월 16일(선조 31년 음력 11월 19일)
순천왜교성전투에서 전사했으면 노량해전 때는 참전할 수 없음, 죽은 뒤이므로.
노량해전 때의 진도군수, 노량해전에 참전한 선의문이라면 노량해전 두 달전의 왜교성전투에서 전사하지 않은 것임
왜교성전투에서 전사, 노량해전에서 전사, 사람이 두 번 죽나, 택일해 입증해야 함
문제 아닌 증거자료
1. 선의문은 왜교성전투에서 탄환에 맞았으나 죽지 않았다.中丸不死
李忠武公全書卷之八 / 亂中日記四 / [戊戌1598,선조31]十月
初一日癸丑。晴。都督曉到劉提督處。暫時相話。
初二日甲寅。晴。卯時進兵。我舟師先登。至午相戰。多致殺賊。蛇渡僉使逢丸戰亡。李淸一亦爲致死。
薺浦萬戶朱義壽,蛇梁萬戶金聲玉,海南縣監柳珩,珍島郡守宣義卿,康津縣監宋尙甫。中丸不死。
2. 선의문은 노량해전에서조차 전사하지 않고 그 6년 뒤에도 공을 세움, 진도군수는 종6품, 도호부사는 종3품
선조실록 선조 37년 갑진(1604) 7월 15일(갑자)
37-07-15[02] 적선과 싸워 공을 세운 전라좌수사 이정표 등에게 가자하다
장수들 가운데에 발포 만호(鉢浦萬戶) 김성옥(金成玉),
전 부사(府使) 선의문(宣義問)은 한마음으로 일을 함께 하여 목숨을 걸고 힘껏 싸웠으니, 그 공은 전적으로 이 두 사람에게 있는 것으로 또한 가상합니다.
''김성옥ㆍ선의문에게도 모두 가자할 것인지를 의논하여 아뢰라.'' 하였다.
3. 명량해전 때의 진도군수 선의문이 참전한 명증이 없음
선의문이 이순신을 방문한 것은 사실이나 참전한 것은 사실인지 알 수 없음, 명량해전, 노량해전 때의 진도군수가 선의문이라 해도 참전한 명단이나 공적을 제시해야 함. 군수라고 무조건 참전은 등식이 아님.
李忠武公全書卷之八 / 亂中日記四 / [丁酉]十一月
初一日戊子。雨雨。夕。北風大吹。達夜搖舟。人不能自定。
初二日己丑。陰。下坐船滄監造橋。因上新家造處。乘昏下船。
初三日庚寅。晴。早上新家造處。宣傳官李吉元。以裵楔處斷事入來。裵楔已至星州本家。而不往于彼。直來于此。其循私之罪極矣。
初四日辛卯。晴。早上新家造立處。珍島郡守宣義卿來。
4. 송덕일은 선조말기 진도군수를 지낸 사실이 증명됨
선조실록 206권, 선조 39년 12월 14일 무신 1번째기사 1606년 명 만력(萬曆) 34년
양계 인물의 쇄환을 방기한 양도의 감사를 추고하고 진도 군수 송덕일을 파직하다
5. 송덕일은 명량해전 때 진도군수라고 문집자료에서 증언함, 이 증언이 거짓이라고 증명해야 함
性潭先生集卷之十八 / 碑 / 南陽宋氏雙忠墓碑銘 幷序
丁酉(1597,선조30)除珍島郡守。旣赴任。忠武公甚喜之。卽以公爲裝船使兼舟師前部將。
公樂爲之用。大破倭艘於鳴梁。未幾見忤於監司。棄官而歸。自號釣隱子。
감사에게 밉보여 군수 그만두고 은거함, 미움받은 이유 -- 관아에 좋은 말이 있었는데 감사가 달라고 하자 왜구 대비용이라서 줄 수 없다고 하니 딴일로 엮으므로 즉시 그만두고 귀향함
重菴稿册三 / 神道碑 / 唐津縣監宋公神道碑銘 代人作
官廐有良馬。監司欲取之。公曰置此馬。所以待冦。遂不許。監司啣之。按以他事。公卽解紱歸。一畜驢一小艇。往來江湖間。自號釣隱子。
6. 명량과 노량해전에 참전한 선의문조차도 <호남절의록>에 없다.고 했는데 선의문이 명량해전과 노량해전에 참전한 기록은 제시되지 않았고, 왜교성전투부상, 상이군경국가유공자이긴 하나 <호남절의록>에 수록되고 않고는 편찬자의 역량문제이지 비난거리는 아님. 편찬자가 모를 수도 있고 자손이 자료를 제출하지 않았을 수도 있고 서로 관심밖이었을 수도 있고 누구 잘못인지 알 수 없는 상황 가지고 비난할 필요는 없음
7. 이규필 씨가 자료를 만든 각주가 사실과 역사를 왜곡하는 내용이 되어버렸다.고 했는데 결과는 왜곡이지만 고의성은 없었고 오히려 문헌고증에 충실한 셈인데 잘하지 못한 흠결이 있다. 그러나 한 사람에게 완벽을 요구할 수는 없는 법이다.
우암 송시열의 5대손이며 조정의 산림, 대학자로 막강한 권위자인 성담(性潭) 송환기(宋煥箕,1728~1807)에게 <南陽宋氏雙忠墓碑銘>을 받아냈으니 권위를 갖춘 셈이다. 이 비문에 정유재란 때 진도군수에 임명되고 명량해전에 왜적을 크게 격파했다고 하였으니 사실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누가 의심하고 부정할 수 있겠는가. 송환기가 귄위가 있는 대학자라도 조선왕조실록을 볼 수는 없고 진도군선생안을 보지도 못했으니 문헌고증이 부실한 것을 어찌 책할 수 있겠는가.
송덕일이 정유재란 참전유공자이고 진도군수를 지낸 것도 사실인데 연대가 틀리고 과찬이 들어간 것일 뿐이다. 자손들이 제대로 기록을 갖추어 비문을 의뢰하지 못한 일차 책임이 있다. 진도군도 이 비문에 의거해 서술했으니, 근본이 틀린 것을 어찌 파악했으랴. 너무 힐난할 일이 아님
丁酉(1597,선조30)除珍島郡守。旣赴任。忠武公甚喜之。卽以公爲裝船使兼舟師前部將。公樂爲之用。大破倭艘於鳴梁。
기록은 끊임없이 착오와 실수가 발생한다. 발견하여 바로잡고 보충하면 된다. 시정을 촉구했는데 외면하는 사람은 비난받아 마땅하다. 잘 모르는 사람을 힐난할 필요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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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의문은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것이 아닙니다.ㅎ 살아남았죠.
맞습니다.옳바른 지적입니다.
선의문은 1597.7월에 진도군수로 부임하여 1600.2.28에 임기만료로 돌아갑니다.
제가 글을 급히 쓰다가 제대로 확인 못한 실수가 있군요.
송덕일은 1605년 11월 10일에 진도군수로 제수되어 조정에서 1606년 12월 14일에 파직이 결정되었고,1607년 정월에 파직되어 떠났죠.
조정 또는 비변사의 군관이 진도 현지에 도달하여 명령을 전달한 것이 보름이상 걸렸죠.
송덕일은 정유재란때는 전라감사 황신의 별장을 했죠.진도군수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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