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점필재길을 걷다.(방장문에서 곧은재까지)
▣ 일 시 : 2023년 06월 03일(토)~05일(월)
▣ 코 스 : 광점동-방장문-청이당-영랑대-상봉-장터목-삼신봉-세석-좌고대-창불대-영신암-곧은재-백무동
▣ 인 원 : 3명
▣ 날 씨 : 맑음
지난 2년간 집필위원으로 참여한 '지리산 마천면사'가 간행되어 6월 2일 마천면 면사무소에서 출판기념회가 열렸다. 산행에 비유하면 '마천면사'라는 장거리 종주산행을 완주한 셈이다. 마천면사 편찬위원회 문호성 위원장님을 비롯하여 함께하신 많은 분들의 노력으로 결실을 맺었다. 지리산 인문학을 제대로 모르는 사람이 지난 2년 동안 지리산 팔아 마천에서 식객 노릇을 하였다. 다른 말로 하면 됫박 글을 배워 말 글로 써먹었다. 그냥 지나쳤던 곳도 이곳저곳을 숱하게 찾아다녔고, 박회성 항일 의병 전적지를 발굴하였을 때에는 온몸에 전율을 느꼈다. 앞으로 '지리산 마천면사'는 많은 사람들의 재삼 검증을 거쳐서 '지리산 마천면의 역사'가 될 것이다.
지난주 적조암에서 점필재길을 다시 시작하였다. 최근에 노장대가 독녀성이라는 단서를 찾았기 때문이다. 산음 현감을 지낸 어득강(魚得江, 1470~1550)과 이민구(李敏求, 1589~1670)의 산음12영과 산음8영 중에 같은 제목의 독녀심선(獨女尋仙: 독녀암에서 신선을 찾다.) 시가 있다. 어득강은 시 제목에 "오석강(烏石岡) 서쪽에 석성터가 있는데 속칭 독녀암이다. 옛날에 독녀가 도를 연마하여 하늘로 올라갔다. [烏石岡西有石城址 俗稱獨女岩 古有獨女 鍊道冲空]"라는 주석(註釋)을 달아놓았다. 산음 12경과 8경에 독녀암이 들어있으니 당시에 독녀암은 산음의 행정구역이었다. 현재 이곳의 행정구역은 함양군 휴천면 운서리이다. 최근에 우연히 '함양독바위'라고 이름을 붙인 사람도 알았다. 지리산에 진주독바위와 하동독바위가 있으니 뜨거운 애향심에서 함양독바위를 만들어낸 듯하다. 독바위가 음은 같지만 의미는 엄연히 다르다. 진주독바위 독(甕)은 항아리, 하동 독바위 독은 독(獨) 또는 항아리(甕), 함양독바위 독은 독녀(獨女)이다. 당나라 정원(貞元, 덕종 10년) 갑술(974)년 '과주(果州)의 여신선 사자연(謝自然)이 대낮에 하늘로 올라갔다.'라는 고사에 견주어 독녀암이라고 한 것이다. 상대날등에서 바라보면 독녀암이 하늘로 승천하는 여인의 형상이다. 모름지기 지명은 땅의 얼굴이고 언어의 화석이다. 지리산의 지명은 속인들이 섣불리 성형이나 리모델링을 할 대상이 아니다. 잘 모르면 제발 그냥 냅둬라.
지리산 마천면사를 내려놓고 가벼운 마음으로 산행에 나섰다. 광점동에서 영랑대까지는 약 9km이다. 이번 산행은 방장문에서 이어간다. 구롱길은 추억이 많은 길이다. 길을 찾고도 방장문 석각을 발견하기 전까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허공달골을 건너면 길이 깊게 파여있어 우마가 지나간 흔적이 뚜렷하다. 우마길은 별도로 석상용 장군 무덤으로 허리길이 있고 길이 급하게 휘어져서 다시 능선으로 붙는다. 우리는 능선으로 진행하였다. 급경사를 서너 번 거듭 지나면 다시 평탄한 곳에서 길이 합류된다. 화전민들은 우회 길로 우마를 올려 농사를 지었을 것이다. 일곱 모랭이 능선 구롱길 아래에 샘이 있다. 조금 진행하면 작은 건계곡의 길에 넓은 반석을 깔아 놓았다. 쉼터 바위를 지나 여덟 모랭이를 넘어가면 방장문이 나타난다. 방장문골도 사립재골처럼 습지가 발달되어 있고 평탄하다. 방장문의 고도가 1070m, 고도를 150m쯤 높여 쑥밭재로 향한다. 산청목이 있는데 밑둥이 잘리고 가녀린 곁가지가 겨우 생명을 유지하고 있다. 쑥밭재를 넘어 청이당터 앞 계석에 닿았다. 광점동에서 여기까지 약 4시간이 걸렸다. 청이당 터는 석축과 무너진 집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다. 계곡 가운데에는 점필재가 쉬어간 계석이 있다. 이곳에서 물은 산청으로 흐르는데 함양의 행정구역이다. 하봉 옛길의 능선이 산청과 함양의 경계이다. 지리산길 지도에 표기된 곳이 일수불퇴 청이당터일까. 지리산에 사람이 있다면 확인할 필요가 있다.
마암에서 물을 취수하였다. 큰조개골 상류에 샘을 만들어 놓았지만 거리 100m에 고도 100m로 45 º 급경사를 내려가야 한다. 그래서 항상 고민을 한다. 점필재의 숙고열암 시에 '송도비명월(松濤沸明月)'이라는 시구가 있다. '소나무 물결 달빛 아래 들끓는다.'라는 의미인데, 영랑대에 누워서 파도소리를 들을 수 있다. 이 소리를 들으면 머릿속을 탕척(蕩滌)하는 느낌이다. 세상을 살아가는데 '二로움'이 있다고 한다. 하나는 괴로움이고 하나는 외로움이다. 하나로는 부족해서 사람들은 두 가지 짐을 지고 살아간다. 영랑대는 '二로움'을 깨끗이 씻어낼 수 있는 곳이다. 영랑대 다음으로 하이라이트는 영랑대를 바라볼 수 있는 조망 바위이다. 어떤 분은 영랑대부터 하봉까지 여러 개의 바위군을 군신봉조(群臣奉朝)의 형으로 설명하는데 나는 그냥 바위로만 보인다. 몇 년 전 어름터 준현 씨로부터 소년대(하봉) 굴을 알았다. 블로그에 사진을 올린 내 실수로 알려지게 되었다. 지금은 아예 길이 반들반들하다. 이곳을 지나갈 때마다 준현씨에게 늘 미안함을 느낀다.
하봉 헬기장의 야광나무는 밤에도 하얀 꽃을 드러낸다. 이 꽃은 5월 말이나 6월 초에 피는데 때를 맞추기가 어렵다. 야광나무는 일제 강점기에 추성리 사람을 동원하여 심었다고 한다. 수령이 100년에 가깝다. 유두류록에 하봉헬기장을 해유령(蟹踰嶺)으로 소개하고 있다. 영랑대에서 바라보면 실제로 운해가 해유령을 넘어간다. 운해를 바다로 생각했는지... 몇 걸음 더 진행하면 선암(船巖)이 있다. 어느날 이 바위가 사면불(四面佛)로 보였다. 물론 가짜 뉴스이지만 선암(船巖)과 해유령(蟹踰嶺, 게가 넘어가는 고개)이라는 이름이 상상력을 만들어 낸다. 중봉으로 향하는 길은 온갖 기화요초가 산객을 반긴다. 고도를 높일수록 바람은 시원하다. 지난 겨울 영랑대까지 왔다가 중봉을 넘지 못하고 다음날 그냥 내려갔다. 중봉에서 사위에 보이는 모든 풍광을 눈에 담으며 한참을 쉬어간다. 이래서 한치 앞 속이 보이지 않는 속세보다 하늘 끝까지 보이는 선계가 좋다. 써리봉에서 올라오는 마지막 계단에서 좌측으로 중봉을 우회하는 길이 있고, 진짜 중봉샘이 있다. 현재 중봉샘 이름을 붙인 김경렬 선생은 이 샘의 존재를 몰랐던 것 같다.
상봉에 오르기 직전에 우측 칠선계곡 쪽으로 영랑대를 바라보는 두 개의 미륵 형상의 바위가 있다. 이 바위가 혹시 영신대에서 가섭존자가 석가의 가사를 가지고 선정에 들어가 기다리는 미래에 도래할 미륵불이 아닐까. 물론 내 생각이다. 오늘 따라 미륵 바위가 선명한 것은 어째서일까. 상봉은 정상석을 우회하여 헬기장 아래 망해정 터에서 잠시 쉬어간다. 망해정은 1922년 진주의 부호 강위수가 지었다고 한다. 제석봉 전망대에서 한참을 쉬었다. 계획했던대로 장터목에서 점심도 먹고 수낭에 물도 채웠다. 연하선경으로 가는 길은 사시사철 아름답다. 오늘의 목적지는 ○○봉인데 정확한 지명을 모르겠다. 이곳 매막터가 오늘의 숙영지이다. 시계는 사통팔달 열려있고, 남과 북은 물론 동으로는 천왕봉, 서로는 반야봉을 조망할 수 있는 곳이다. 숙영지에서 달빛 아래 바람소리를 들으면 시간의 흐름이 잠시 멈춘다.
3일차 세석 가는 길은 청량한 바람과 꽃의 향기가 얼굴에 스민다. 1km쯤 가면 불꽃 형상의 촛대봉이다. 1611년 유몽인은 사자봉이라고 하였다. 1807년 하익범은 촛대봉 옆을 지나는 길목을 사자항이라고 하였다. 바라보는 방향에 따라 갈기를 한 사자의 형상으로도 보인다. 안내하는 사람에 따라 그 이름이 구구각각이다. 그러나 그마다 이야기가 있고 유래가 있으니 숨은 뜻을 살필 수 있어야 한다. 최근 촛대봉에서 석각을 또 발견하였다. 낙운거사 이청련서 옆에 있다. 사진으로 보니 바위암(岩) 자만 육안으로 판독이 가능하다. 촛대봉에 올라 오래도록 망중한을 즐긴다. 산에 들어 산 이외의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 오늘은 창불대와 영신대를 둘러보고 하산하는 예정이다. 서두를 것이 없다.
▶선인들의 유람록에 나오는 촛대봉의 명칭
순 | 유람록 | 촛대봉 | 비고 |
1 | 1472년 김종직의 유두류록(遊頭流錄) | 증봉(甑峰) | |
2 | 1487년 남효온의 지리산일과(智異山日課) | 빈발봉(賓鉢峰) | |
3 | 1611년 유몽인의 두류산록(頭流山錄) | 사자봉(獅子峰) | |
4 | 1807년 하익범의 유두류록(遊頭流錄) | 사자항(獅子項) | |
5 | 1851년 하달홍의 두류기(頭流記) | 중봉(中峰) | |
6 | 1879년 송병선 두류산기(頭流山記) | 촉봉(燭峯) |
영신대에 석가섭을 본 것은 참으로 우연이었다. 석가섭을 찾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최석기 교수님의 '황준량의 지리산 기행시에 대하여(遊頭流山紀行篇을 중심으로)'라는 논문이다. 금계(錦溪) 황준량(黃俊良)은 1545년 4월 지리산을 유람하고 장편고시(176韻, 352句, 2516字)를 남기는데 석가섭을 이렇게 노래했다. '천 길의 가섭상은 햇빛에 그림자 드리웠는데/흉악한 섬 오랑캐의 칼날에 상처를 입었구나.' 황준량의 시를 읽고서야 2017년 9월 23일 영신대에서 가섭의 형상을 보았다. 햇빛에 드리운 바위가 가섭이 깃든 자연불로 보인 것이다. 이후에 여러 차례 영신대를 찾았으나 가섭의 형상은 보이지 않았다. 2020년 10월 25일 아침 영신대 석문 기도터를 지나 암봉 위에서 영신대를 바라보았다. 이곳에서 마음의 눈을 열면 석가섭의 형상을 친견(親見)할 수 있다. 이 위치는 점필재가 창불대에서 영신대 석문으로 내려오는 지름길의 암봉 전망대에 있다. 점필재는 창불대에서 영신암으로 내려오며 좌고대와 석가섭을 보고 석문을 통해 영신대로 들어온 것이다.
注 황준량(黃俊良, 1517~1563): 본관은 평해(平海). 자는 중거(仲擧), 호는 금계(錦溪). 사온서주부 영손(永孫)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효동(孝童)이고, 아버지는 치(觶)이며, 어머니는 교수 황한필(黃漢弼)의 딸이다.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靈神菴(영신암)
김종직(金宗直, 1431~1492)
箭筈車箱散策回 : 전괄(창불대)와 거상을 산책하고 돌아오니
老禪方丈石門開 : 노선사의 방장(영신암)은 석문이 열려있네.
明朝更踏紅塵路 : 내일 아침이면 다시 속세의 길을 밟으리니
須喚山都沽酒來 : 촌장을 불러서 술이나 받아오라고 해야겠네.
注 전괄(箭筈)과 거상(車箱) : 전괄은 화살 끝처럼 좁은 산마루를 말하고, 거상은 마치 수레의 짐칸처럼 우묵한 골짜기로 깊이를 가늠할 수 없음. 또는 전괄령(箭筈嶺)과 거상곡(車箱谷)의 명칭으로도 쓰는바, 두보(杜甫)의 망악시(望岳詩)에 “거상의 골짝에 들어서니 돌아갈 길이 없고 전괄로 하늘을 통하는 문 하나가 있구려.(車箱入谷無歸路 箭筈通天有一門)”라고 한 데서 인용한 시어이다. 전괄은 창불대와 병풍바위 상단을 가리키고, 거상은 창불대골을 가리킨다. 산도(山都) : 비비(狒狒, 원숭이)의 일종으로 긴 주둥이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蒙山畫幀迦葉圖贊 (몽산화상이 그린 가섭도의 비해당 贊)
匪懈堂 李瑢(안평대군)
頭陁第一 是爲抖擻 : 마하가사파존자께서는 두타 수행인 두수를 바르게 실천하시어
外已遠塵 內已離垢 : 밖으로 이미 번뇌를 떨치시고, 안으로 離垢의 경지에 오르셨네.
得道居先 入滅於後 : 앞서 道(아라한과)를 깨달으시고 뒤에 적멸의 경지에 드셨으니
雪衣雞山 千秋不朽 : 눈 덮인 계족산에 깃들어 천추에 사라지지 않고 길이 전하리라.
注 몽산 : 원나라 고승 몽산화상. 贊(讚) : 다른 사람의 書畵를 기리는 글. 匪懈堂 : 안평대군의 호. 三絶 ; 시서화. 雞山 : 계족산 영신봉을 가리킴.
석가섭은 '마하가섭존자가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사를 가지고 미래에 오실 미륵불께 전하기 위해 인도의 꿋꾸따빠다기리(계족산)의 바위 동굴에서 선정(禪定)에 들어갔다.'라는 이야기에서 유래하였다. 산스크리스트어에서 꿋꿋따는 '꼬꼬댁'의 의성어이고, 빠따는 발, 기리는 산이다. 불교가 중국에 들어오면서 계족산으로 한역(漢譯)되었고, 인도에 있는 계족산을 지리산 영신대에 옮겨다 놓은 것이다. 다시 정리하면 마하가섭이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사를 미륵불에게 전하기 위해, 설의 계산(雪衣雞山) 영신대 바위 속에서 적멸의 경지(선정)에 들어 미래에 도래할 미륵불을 기다린다는 이야기가 들어있다. 설의계산(雪衣雞山)은 눈 덮인 계족산, 바로 영신봉을 가리킨다. 영신대를 깊이 이해하고자 한다면 김종직의 영신암 시와 안평대군 비해당의 몽산화정가섭도찬(蒙山畫幀迦葉圖贊)을 숙독할 필요가 있다.
영신대와 창불대를 둘러보고 천천히 곧은재로 향하였다. 1472년 김종직의 직지(直旨)와 1610년 박여량의 직령(直嶺)을 곧은재로 이해한다. 유람록을 국역하는 분이 현장을 답사하지 않고 원문 해석에 충실하다 보니 직지를 '직지봉'으로 오역한 것이다. 서복 연구회 문호성 회장님은 1953년 백무동에서 태어나서 백무동에서 평생 살아온 토박이이다. 돌아가신 어머니께서 현 느티나무 산장 자리에서 장사를 하셨고, 문회장님께서 물려받아 1978년부터 45년 동안 느티나무 산장을 운영하셨다. 문회장님과 점필재길 산행을 함께하면서 '곧은재'에 대한 이야기를 자세히 들었다. 주민들 중 한신능선이라고 하는 사람은 없다고 한다. 영신대로 제물이나 쌀을 올리는 길이라고 하셨다. 곧은재는 백무동에서 세석으로 오르는 주통로였던 셈이다. 한신능선은 지리산에 없다.
下山吟[하산음 : 산에서 내려와 읊다]
김종직(金宗直, 1431~1492)
杖藜纔下山 : 지팡이 짚고 겨우 산에서 내려오니
澄潭忽蘸客 : 맑은 못이 문득 산객을 담그게 하네.
彎碕濯我纓 : 굽은 물가에 앉아 내 갓끈을 씻으니
瀏瀏風生腋 : 시원한 바람이 겨드랑이에서 나오는구나.
平生饕山水 : 평소 산수 욕심을 과하게 부렸는데
今日了緉屐 : 오늘은 나막신 한 켤레가 다 닳았구나.
顧語會心人 : 마음을 함께한 이에게 돌아보며 말하노니
胡爲赴形役 : 어찌 육체의 노역에 나아갔다고 하겠는가.
注 杖藜 : 지팡이 짚다. 蘸 : 담글 잠. 彎碕 : 굽은 물가. 饕(도) : ① 탐하다. ② 탐욕이 과하다. 緉 : 신 한켤레 량. 屐 : 나막신 극. 形役 : 마음이 육체나 물질의 지배를 받음. 또는 공명과 잇속에 얽매임.
필자는 유람록에 나오는 '直旨(직지)'를 곧은재로 이해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현재 곧은재의 경사가 심한 곳은 산죽밭 속으로 우회길이 있다. 2021년 11월 15일(월) 마천면사 사무실에서 70년대에서 80년대 초반까지 백무동에서 지게를 지고 곧은재를 경유하여 영신대로 제물을 올렸던 분을 만났다. 백무동 고점(古店) 마을(인민군사령부 터) 출신인 이재현 님(반달곰펜션, 경남 함양군 마천면 백무동로 307)이다. 한말 5대조께서 전북 진안에서 백무동 고점(古店) 마을로 17가구가 이거했다고 한다. 이재현 님은 장터목펜션 이봉수 사장(마천 개인택시)의 사촌형님이고, 옛고을펜션이 백무동 전주이씨 집안의 종가집이라고 한다. 이분들은 모두 곧은재라고 부른다. 곧은재를 다 내려오면 백무동 한신계곡에 닿는다. 이 지점이 김종직이 하산음을 읊은 지점이다. 계곡을 건너서 폭포 앞에서 잠시 쉬는데, 실제로 겨드랑이에서 시원한 바람이 나오더라. 끝.
첫댓글 졸업장 받고 다시 유람록 기행을 떠나셨네요
갈때마다 새로운 길입니다.
선생님 글을 따라 지난 여정들을 되짚어 봅니다
지명은 땅의 얼굴이요 언어의 화석입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나오는 독녀성의
실체를 확인하는데 꼬박 4년이 걸렸습니다.
오석강을 찾으려고 갔는데 琴巖만 보고 왔습니다.
멋진 후기입니다..오랫 동안 회자될 것 같습니다.
인문 산행 초벌 답사기입니다.
앞으로 많은 분들의 답사가 이어져
수정과 보완이 되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