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계
지은이:벌마로(김윤식)
영우가 시외버스를 타보기는 처음이다. 중고등학교 수학여행 때 속리산 가는 관광버스를 타본 게 처음이고, 경기도를 벗어나 본 것도 그때가 처음이라, 생각해보면 자신의 의지로 멀리 가는 버스를 타는 것은 처음이다. 횡계라는 곳을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곳이니 궁금증만 더하고 어렴풋이 먼 곳일 거라는 상상만 할 뿐 사실 횡계가 얼마나 먼 곳인지 어떤 곳인지 감도 안 잡힌다.
영우는 그만큼 우물안 개구리 였다. 병휘오빠에게 들은 사전지식으로는 산중시골
마을이고 사람이 몇 명 밖에 없다는 정도이다.
서울을 벗어난 버스가 고속도로를 달리기 시작하자 병휘의 어깨에 얼굴을 기대고
있던 영우가 물었다.
“오빠 거기 전기는 들어와? 공중목욕탕은 있어?”
“그런 산골에 전기가 어딨어. 당연히 목욕탕도 없지”
“그럼 밤에는 어떻게”
“호롱불로 살고 있어. 그런데 밤에도 그렇게 어둡지 않아. 하늘이 맑아서 달뜨는
밤에는 도시의 가로수 불빛처럼 환해”
영우는 어릴 적 아버지가 호롱불에 불붙이는 모습을 떠올려 본다. 어두운 밤에
호롱불을 밝히는 순간 방 안이 환해지고 어머니가 준비한 가래떡과 조청이 방 한
가운데 놓여 있었는데, 오빠들의 빠른 손놀림과 먹성에 영우는 가까스로 한 조각의 가래떡을 차지하고도 오빠들의 정당하지 못한 게임에 속아서 그중에 반을 빼앗기고 서러움에 울었던 기억, 영우가 한바탕 울음을 터트리고 난 후 감춰 두었던 가래떡을 꺼내주며 영우를 달래던 오빠들이 한층 미웠지만, 하는 수 없이 울음을 그칠 수밖에 없는 방안 분위기에 억지로 헬죽 웃어주던 기억들,,,
“그럼 아주 산속이야?”
“그렇다고 봐야지 해발 700미터가 넘는 고산지니까,,,”
“산짐승도 있어?”
“산짐승도 많이 있지 깊은 산중마을이라 산짐승들이 간혹 마을로 내려오는데 지난번에는 호랑이가 황씨 아저씨네 송아지를 잡아간 적도 있었데,”
“진짜? 정말 호랑이가 있어”
“응 호랑이는 간혹 나타나고 표범하고 늑대는 수시로 나타나”
“그럼 어떡해”
“그러니까 해지면 사람들도 밖으로 나오는 것을 무서워해”
“그런 얘기를 이제 하면 어떻게 해. 나 집에 갈래”
“여기 차 안이야 영우가 이제 물어봤잖아”
사실 횡계가 산골 마을이기는 해도 호랑이가 있거나 표범이 마을로 내려오는 일은 없다. 버스를 타고 가는 동안 무료함을 달래려고 병휘가 거짓말을 한 거였다.
그 말에 영우는 곧이곧대로 알아듣고 무서워하고 있는 거다.
이제 영우는 오직 병휘 밖에 믿을 데가 없다. 물론 처음부터 병휘만 믿고 따라왔으니 다른 선택의 여지도 없다. 무서움도 잠시 긴 여행에 지친 영우가 병휘의 어깨에 기대어 잠이 들었다. 그 사이 버스는 어느덧 횡계 시외버스터미널에 도착했다. 버스에서 내린 영우의 눈에 비친 횡계마을의 광경은 병휘오빠 말처럼 고요했고 정말 깜깜했다. 보이는 거라고는 별빛과 달빛뿐이다. 밤하늘의 반짝이는 별이 쏟아질 듯이 가득했고 달빛은 고요히 흐르고 있었다. 다행히 병휘오빠가 사는 집은 버스터미널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고 낯선 곳이라는 것 빼고는 두렵거나 걱정되지 않았다.
저녁 늦게 도착한 병휘의 하숙집은 어두운 밤에도 제법 크게 보였다. 대문은 있어도 닫혀있지는 않았다. 마당도 꽤 넓었고 담장쪽으로 꽃이 피어 있는 나무가 달빛에 보였다. 현관으로 들어서서 거실왼쪽이 병휘가 사는 방이다. 병휘가 먼저
방문을 열고 들어가서 천장에 매달린 전등을 붙잡고 불을 켰다. 순간 갑자기 환해지면서 방안의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방안은 첫눈에 보기에도 정갈하고 깔끔하게 정돈돼 있었다. 병휘오빠의 성격이 그대로 스며있는 느낌이다. 작게뚫린 창문 밑에 조그만 앉은뱅이책상과 그 위에 17인치 티브이가 놓여있고 몇 권의 책과 알록달록 색깔의 소품이 있었다. 영우도 한 발짝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이상하게 생긴 소품을 집어 들었다. ‘뭘까?’ 하는 궁금함에 자세히 보았다.
담배종이를 접어서 만든 냄비받침이었다. ‘꼼꼼하게도 접었네, 누가 이렇게 솜씨좋은 작품을 만들었을까?’ 냄비받침을 내려놓고 고개를 돌려서 반대편 벽 쪽을
보았다. 한쪽에 가지런히 접어놓은 이불 그리고 작은 비키니옷장이 있었다. 이것이 전부이다. 옷장 옆으로 문이 하나 더 있는데 아마 부엌으로 통하는 문 같아
보였다. 버스 안에서 병휘오빠는 전기도 없어서 호롱불로 밝히고 산다고 했는데
거짓말이었다.
“전기가 있네, 오빠 거짓말 했구나”
영우의 말에는 대답도 없이 병휘가 창피한 듯 작은 소리로 속마음을 뱉었다.
“방이 너무 좁지”
“아니야 괜찮아. 혼자 사는 방이 이 정도면 충분하지”
방이 조금 작은 듯 했지만, 두 사람이 그럭저럭 지내기에 크게 불편할 정도로 옹색하지는 않아 보여서 가볍게 대답을 했다.
“영우랑 같이 생활하기엔 방이 너무 좁지. 나중에 좀 더 큰 방으로 이사를 가야
겠다”
병휘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병휘오빠는 나하고 오랫동안 함께 살려는 상상을
하고 있었나 보다!’ 병휘오빠는 혼자말처럼 중얼중얼 하더니 먼저 씻기 위해 부엌으로 나갔다.
방안에 혼자 앉아 있는 영우가 고개를 들어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은색 바탕에
연한 꽃무늬가 새겨져 있는 벽지를 보면서 부천 자기네 집 벽지와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부엌에서 병휘오빠의 몸을 씻는 물소리가 생생히 들렸다. 물소리가 괜스레 민망해서 의도적으로 안 들으려고 태연한 척 앉아서 다른 생각에 몰두했다.
하지만 아무리 태연한 척하려고 해도 고요한 적막감 속에서 병휘오빠 물소리만
자세히 들렸다. ‘병휘오빠 씻는 물소리를 처음 듣는 것도 아닌데 여기서는 왜 이리 신경이 쓰일까?,,,‘공연히 어색해서 책상 위에 놓여 있는 만화책을 한 권 집어 들고 책장을 넘겼다.
영우는 지금 이 시간이 어색하고 불편하다. 그도 그럴 것이 부천에서 한나절 만에 강원도의 횡계 산골 마을에 왔으니 자기 자신이 신기하기도 하고 한편으론 남의 집에 왔다고 생각하니 어딘가 불편한 것이 당연했다. 오늘 일을 되집어 보면
병휘오빠를 따라오겠다고 결정을 하고 행동으로 옮긴 것이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그녀는 지금까지 살면서 어떤 생각을 행동으로 옮길 때 깊게 고민하고 행동으로
옮겼다. 오늘처럼 가볍지 않은 행동을 하면서 고민을 깊게 하지 않은 경우는 없었던 것 같다. 그렇다고 오늘의 행동을 후회하거나 걱정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 순간 어색한 시간 만이라도 빨리 지나갔으면 하는 마음이다. 마치 오래전부터
살고 있는 자신의 방에 앉아있는 느낌으로 자연스럽고 편했으면 좋겠다.
잠시 후 병휘가 젖은 머리에 수건을 걸친 채 방으로 들어서며 열려있는 부엌문
쪽으로 영우를 불렀다. 부엌의 구조를 설명하려는 모양이다. 방바닥 높이보다 두세 단 낮은 구조의 부엌 바닥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조심하라고 한다. 부엌으로
내려설 때 발을 헛디뎌서 넘어질까 봐 그게 걱정이 돼서 알려주려는 것이다. 영우가 웃으면서 걱정 말라고 했다. 영우네 집 부엌도 이곳과 비슷한 구조였기 때문에 한눈에 익숙함을 느꼈다. 영우가 적당히 부엌을 훓어 보고나서 입고 있던
바지와 윗옷을 벗어 한쪽에 곱게 접어놓고 속옷 바람으로 부엌에 들어갔다.
희미한 전등불에 보이는 부엌은 생각대로 좁았다. 연탄아궁이가 있고 그 위에 녹슨 두꺼비집이 덮여있다. 아마 지난겨울 이후로 연탄불을 한 번도 지피지 않은
모양이다. 간신히 한 두 사람 정도 움직일 만큼의 공간에 커다란 고무 다라가 가운데 놓여있고 그 옆에 세수 대야와 비눗그릇이 있었다. 밖으로 통하는 문이 있어서 살짝 열어봤다. 평소에 자주 사용하지는 않았던지 문이 뻑뻑하고 낡았다. 문을 열자마자 밤바람이 부엌으로 쏜살같이 달려왔다. 아직은 더운 기운이 남아있는 계절인데도 늦여름 바람이 생각보다 서늘했다. 밤이기도 하지만 아무래도 겉옷을 벗고 있어서 그렇게 느껴지나 보다. 넓지 않은 뒤뜰에는 풀들이 어지러이
자라고 있었고 장독대가 보였다. 얼른 문을 닫고 세수 대야에 물을 퍼 담았다. 머리를 감으면 말리는 시간이 오래 걸릴 것을 감안해 머리는 감지 않고 수건에 물을 적셔서 몸만 닦았다. 씻은 물을 뒤뜰에 버리고 방문을 열었다. 전등불이 꺼져 있고 피곤했는지 병휘오빠는 먼저 이불을 덮고 누워 있었다. 병휘오빠에게 무슨
말이라도 걸어볼까 하고 머뭇머뭇하다가 병휘오빠가 덮고 있는 이불을 살며시 들추고 그 속으로 들어갔다. 포근함이 모든 잡념을 지워주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두 사람은 깊은 잠에 빠졌다. 먼 길을 오느라고 너무 피곤했었나 보다.
첫댓글 계속 보니까 재미가 생기내요
다음이야기가 기대 됩니다 ~^^
고맙습니다. 끝까지 읽어 보세요
재밋게 보고 갑니다 ~^^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