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230 / 주님 발길 머무는 곳에 (막10:46-52)
오늘은 2018년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그래서인지 얼마 전부터는 지인들로부터 한해를 잘 마무리하라는 인사와 문자를 자주 받습니다.
참 고마운 분들이다 생각하다가 문득 생각했습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한해를 잘 마무리하는 것일까?’를.
대부분의 사람들이 마무리를 잘 하라는 말은 하면서도 어떻게 해야 잘 마무리하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알려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어떻게 해야 한해를 잘 마무리할 수 있을까요?
한참을 생각하다가 내린 결론은 이렇습니다. ‘시작이 그랬듯이 마무리 역시 예수님과 함께 해야 한다!’
1. 예수님과 관련해서 오늘 본문에는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라는 말이 나옵니다.
성경을 보다 보면 예수님께서는 특별한 이유 없이 사역을 중단하신 적이 없으셨습니다. 그런 예수님께서 사역의 발걸음을 멈추셨다는 것은 뭔가 중요한 일이 벌어질 것이라는 예상을 하게 합니다.
무엇이 예수님으로 하여금 발길을 멈추시게 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무리 속에서 누군가가 외친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라는 부르짖음이 당신의 마음을 사로잡았기 때문에 순간 발걸음을 멈추어 서셨습니다.
티비를 보다보면 한류 스타들이 외국 공항에라도 갈라치면 그곳 팬들이 몰려나와 이름을 연호하며 열광하는 걸 보게 됩니다.
수적으로 그 정도까진 아닐지라도 예수님 역시 소문을 듣고 모인 허다한 무리들에 둘러싸여 이동하고 계셨습니다. 그러니 제자들은 몰라도 둘러싼 허다한 무리들이 얼마나 예수님을 연호하고 열광하며 따랐겠습니까?
그럼에도 묵묵히 본인의 길만 가시던 예수님께서 어느 순간, 어느 한 외침을 들으시고는 걸음을 멈춰 서셨습니다.
제자들이 부르는 소리도 아니었습니다. 무리들 중 특별히 여길만한 사람의 외침도 아니었습니다.
외치는 음성의 주인공은 의외로 당시 소경이자 거지였던 바디매오였습니다.
여러분 바디매오의 이름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디매오가 바디매오지 뭔 소리냐고 하실 분이 계시겠지만 사실 바디매오는 그의 이름이 아닙니다.
헬라어로 접두사 격인 ‘바’는 ‘누구누구의 아들’이란 뜻으로, 바디매오란 ‘디매오의 아들’이란 뜻입니다. 그러므로 바디매오는 태어날 때부터 정식 이름조차 없던 사람이었습니다.
어느 날 그가 길거리의 거지로 나타났는데 보니 디매오의 아들이기에 사람들이 ‘바~ 디매오’ ‘바~ 디매오’라고 했던 것이 그의 이름처럼 되어버렸습니다.
통상적으로 길거리에서 거지가 사람들에게 외치는 말이라면 뭐겠습니까?
‘한 푼 줍쇼.’ ‘도와줍쇼.’ 등일 것입니다.
때문에 당시 앞 못 보는 거지였던 바디매오의 외침도 세상과 사람들을 향한 동정이나 인정에 호소하는 구걸과 하소연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만큼은 달랐습니다.
그는 지금 사람들이 아닌 예수님을 향해 외치고 있습니다.
‘누구를 향해 외치는가?’ 이 사실이 중요합니다.
그의 외침이 주님을 향한 것이었기에 그것은 그의 기도가 되었던 것입니다.
주님을 향한 그의 외침이 기도였기에 주님은 그런 기도를 들으셨고 머물러 서셨으며 기도한 그에게 응답해 주셨습니다.
이쯤에서. 잠시 올 해 살아온 날들을 되돌아보세요.
지난 한 해 동안 여러분의 외침과 비명과 하소연과 소망은 어디의, 누구를 향한 것이었습니까?
성경 속 예수님을 향한 바디매오의 외침이 오늘을 사는 여러분의 외침이 되게 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을 향한 우리의 외침이 우리의 기도가 됩니다.
그 기도는 주님을 내게 머무르시게 하는 기회이자 방법입니다.
성도들의 외침이 있는 곳에 예수님의 관심은 머물러 주십니다.
그래서 바디매오에게 하셨듯이 주님이 우리 앞에도 머물러 서 주시면 우리에게도 바디매오가 받은 것과 같은 은혜와 기적이 임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기에 오늘, 지난 한 해 동안의 모든 회한과 아쉬움과 소망을 안고, 올해 남은 날들 동안에라도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라고 주께 외쳐 기도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해서 응답받는 기쁨이 있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 예수님의 발길이 머물러 서시는 곳이 어디입니까?
물론 우리가 기도하는 그 자리가 주님이 머물러 서시는 자리입니다. 그러나 좀 더 세부적으로 말씀드린다면,
주님은 ‘주님을 필요로 하는 사람 곁’에 머물러서십니다.
바디매오는 가난한 사람이었습니다. 게다가 맹인입니다. 길거리에 앉아 사람들을 향해 구걸하고 도움을 청하는 일이 그가 할 수 있는 전부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게다가 지금 사람들의 웅성거림을 통해 예수님이 자기 가까이로 지나가고 계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순간 바디매오는 뭔가 이제까지와는 다른 일을 해야만 한다는 것을 직감했습니다. 그리고 그 일을 했습니다.
본문 46-47절을 보세요. ‘디매오의 아들인 맹인 거지 바디매오가 길 가에 앉았다가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이제까지 사람들을 향했던 그의 외침이 주님께로 옮겨졌습니다.
지금까지 세상에서 구했던 동냥과 한 푼 대신 예수님을 향해 소원을 간구하고 있습니다.
기회가 없었을 때는 세상에 얹혀살아야 했지만 기회가 오자 바디매오는 곧바로 기도하는 믿음으로 주님을 향해 돌아섰습니다.
그런 바디매오의 외침을 들으시고 주님도 가던 걸음을 멈추고 그의 곁에 머물러서셨습니다.
우리도 그리해야 합니다. 우린 이미 예수님도 알고, 예수님을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도 기도할 수 있는 기회는 있습니다.
우리 역시도 기도하는 믿음으로 주님을 향해 돌아서야합니다.
'부르짖다'라는 말이 원어로는 '크라제인'입니다. 이 말은 단순히 소리친다는 정도가 아닙니다. 오히려 외마디 비명에 가깝습니다. 살려달라는 애원과 몸부림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바디매오의 외침의 정도가 크라제인이었습니다. 그랬기에 그가 했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외침은 ‘내겐 예수님의 능력이 필요합니다.’란 고백인 동시에 ‘예수님 나 좀 살려주세요.’라는 절박한 몸부림이었던 것입니다.
보세요. 평생을 세상에 구걸하며 살았고 사람의 동냥에 의지해 살았던 바디매오의 삶은 살아도 사는 게 아니었습니다.
그랬기에 예수님을 만난 바디매오는 예수님을 향해 절박한 외침으로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 나 좀 살려주세요.’라고.
지난 날 여러분의 삶 중에 혹 이런 날들이 있었습니까? 사는 게 사는 것 같지 않은 날들이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이제라도 우린 바디매오가 되어야 합니다. 그의 믿음을 가져야 하고 그의 외침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의 발길이 머무는 곳에 응답이 있고 기적이 있습니다.
그 주님의 발길을 머물게 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기도입니다.
여기서 우린 한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기도하는 사람일까요? 누가 주님께 기도하려 할까요?
‘주님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기도하는 사람이며, 그런 그가 기도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떠셨습니까?
주님이 필요하셨습니까? 그래서 주님께 기도했습니까?
혹시라도 기도하지 못했다면, 혹 기도한다고는 했지만 절박하지 않았다면 여러분은 본의는 아니었을지라도 그동안은 ‘난 주님이 필요 없습니다.’라며 살아온 것입니다.
‘난 아니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결과가 그렇습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내게도 응답이 있고 기적이 있기를 원하신다면 주님의 발길이 나를 위해서도 머무르게 하세요.
살려주시라고. 주님이 기뻐하시고 나도 내가 원하는 삶을 살게 해달라고 주님을 향해 외쳐 기도하세요.
혹, 난 기도했는데 응답이 없더라고 볼멘소리를 하실 분도 계실 것입니다. 그런 분들을 위한 좋은 말이 있습니다.
스파르타의 한 장군에게 아들이 와서 자기가 가진 칼이 적을 찌르기에는 너무 짧다고 불평을 하자 아들에게 이런 충고했습니다.
"칼이 짧으면 네가 한 걸음 더 전진 하려무나!"
우리도 그래야 합니다. 여러분의 한계가 무엇입니까?
여러분의 고통이 무엇이며, 여러분의 절망은 무엇입니까?
우리에겐 ‘한 걸음 더’ 만큼의 기도가 필요합니다.
문제를 끌어안고 주님을 향해 한걸음만 더 나가세요. 그러면서 외쳐 보세요.
“주여 나도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라고.
그때 여러분 곁에서도 예수님은 발길을 멈추어 주십니다.
본문 48절에서도 보면 그토록 예수님의 도우심을 구한 바디매오를 향해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고 했습니다.
바디매오의 상황이 쉽지만은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난관도 있고 장애도 있고, 낙심할 꺼리, 좌절할 꺼리들이 앞을 가로 막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한걸음 더 나가는 믿음을 우리에게 보여주었습니다.
48절 하반절에 기록되기를 ‘그가 더욱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기도가 쉬울거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기도를 만만하게 여기지 마세요.
우리가 어떤 상황에선가 또는 어느 누구에겐가 ‘살려주세요!’라고 애원해야 한다면, 그때의 상황이 쉬운 상황이겠습니까? 그때의 사람이 만만한 사람이겠습니까?
쉽지 않으니까 우린 더 기도하려고 해야 합니다.
만만하지가 않으니까 우린 기도하고 또 기도해야 합니다.
바디매오가 더욱 크게 소리 질렀을 때 예수님은 허다한 군중들이 떠드는 소음들 속에서도 그의 외침을 또렷이 들으셨고 그에게 머물러 서셨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가 소경 바디매오가 눈을 뜨는 기적의 현장이 되었습니다.
주님 발길 머무는 곳이 응답의 현장이며 기적의 현장이 됩니다.
이 기적은 머물러 서신 주님이 주신 것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주님을 향해 살려달라고 외쳐서 주님을 자기 앞에 머물러서시게 했던 바디매오가 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주의 이름을 부르는 저와 여러분이 받을 기적이기도 합니다.
이젠 그냥 기도하는 정도가 아니라 ‘제발 나를 살려주시라.’고 절박하게 기도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솔직히 제 개인적으로는 지난날들에 했던 기도들을 반추해 보면 ‘도와주세요.’ 정도의 것들이 태반이었음을 고백하게 됩니다.
여러분은 어떠셨습니까?
이제까지의 믿음생활 중에, 또한 지금까지 드린 기도 중에 이번만큼은 반드시 주님을 만나뵈야겠다거나 아니면, 문제를 놓고 하나님과 소위 담판을 지어봐야겠다는 영적 몸부림이 있었습니까?
주님의 마음을 감동시켜서 주님을 내 곁에 머물러서시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하나!
"나를 살려 주세요." 라고 외쳐 부르짖는 기도뿐입니다.
살려달라고 기도하세요.
그렇게 기도해서 여러분 모두가 살려주시는 기적의 주인공들이 되시기를 축원을 드립니다.
3. 외쳐 기도했던 바디매오의 그 다음 상황은 어땠을까요?
머물러 서신 주님은 바디매오에게 물으셨습니다.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주님께서 정말로 바디매오가 원하는 것을 몰라서 그렇게 물으셨을까요?
아닙니다. 주님은 바디매오가 원하는 것을 아셨습니다. 다만 주변 사람들은 몰랐습니다.
군중들은 바디매오가 예수님을 부르며 다가서자 평소 바디매오가 자기들에게 했듯이 예수님께도 구걸하려고 치근거리려는 것으로 알았습니다. 그랬기에 그를 제지하며 꾸짖어 잠잠하라 했던 것입니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은 알게 하려 하신 것입니다.
지금 바디매오는 구걸이 아니라 기도하고 있는 것이라는 것을.
그래서 예수님은 공개적으로 고백하라고 일부러 그에게 물으신 것입니다.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이에 바디매오가 대답했습니다.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예수님의 질문에 대한 바디매오의 대답이 곧 기도였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기도가 무엇인지를 물으셨고, 그의 기도를 들으신 예수님은 그의 기도에 응답해주셨습니다.
‘그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따르니라.’
오늘, 이 예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향해서도 묻고 계십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이젠 우리가 대답할 차례입니다. 아니 기도해야 합니다.
‘주여 (이러이러한) 응답 받기를 원하나이다.’ 라고!
좀 더 절박하게는 ‘주여 살려주세요.’ 라고!
여러분의 기도를 물으신 예수님은, 여러분의 기도를 들으시고, 여러분의 기도에도 응답해주실 줄로 믿으세요.
그렇게 믿으신다면, 이제라도 주님이 내 기도를 들으시게 하세요.
성경에 이르기를 믿음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음으로 난다고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응답은 주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으셔야 납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듯, 주님은 우리 기도를 들으려 하십니다. 그리고 기도가 들려 온 그 자리에 주님은 머물러서십니다.
이렇듯, 우리에게 주님을 머물러서시게 할 수 있는 기도만 있다면, 우리의 문제는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해결될 수 있습니다. 주님이 응답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 기도를 들으시고 내게로 와서 머물러 서시는 주님을 만나기만 하면, 바디매오가 받은 응답과 기적이 우리에게도 일어날 줄로 믿습니다.
믿기에, 2018년 한 해를 마무리함에 있어서 바디메오가 그랬듯이 여러분 모두가 예수님의 걸음을 멈추시게 하고, 예수님의 발길이 머무는 그 곳에 여러분이 함께 있어,
바로 여러분들이 기적의 주인공이 되심으로, 바디매오처럼 저와 여러분도 ‘일어나 주님을 따르는 길’에 동행하는 삶을 살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