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東史綱目第十三[上] 起辛丑高麗忠烈王二十七年。盡己卯高麗忠肅王後八年。 凡三十九年。[辛丑]
신축년 충렬왕 27년(원(元) 성종(成宗) 대덕(大德) 5, 1301)
춘정월 서흥후(瑞興侯) 전(琠)을 원(元)에 보내어 숙위(宿衛)하게 하였다.
전은 서원후(西原侯) 영(瑛)의 아들로 신종(神宗)의 후예인데, 왕이 종실 가운데에서 가장 사랑하였다.
〔辛丑〕二十七年春正月。遣瑞興侯琠。如元宿衛。
琠。西原侯瑛之子。神宗之後也。王於宗室中最愛之。
三月。元罷征東省。召還濶里吉思。
吉思擅權納賄。自宰相以下。稍忤於心。或杖或囚。一國之人。無不行賂。元以吉思不能和輯人民。王又表奏。增置省官。百姓不安。請罷之。於是。罷行省平章事。徵還吉思。吉思還奏元主。以本國越禮濫罰官冗民弊等事。元主遣使下詔曰。王以宗國生靈爲念。威福與奪。當自己出。事軆有未便。民情有未安者。其審圖之。繄爾群僚。悉心奉正。各修乃職。敢有蹈襲前非。專恣不法。王雖爾容。朕必不貸。中書省移咨曰。王近表奏置省官不便。乞不改祖風等事。已有詔旨。其奴婢一事。則以本國舊俗爲辭。此猶可說。至如王國而用天子禮。大會三擧凈鞭山呼萬歲。有此僭越。又刑罰不中。因人誣告。不問證左。只憑元告。三問不招。無問輕重。流配海島。遇赦不還。刑獄枉濫。覩此可見。又京外諸衙門州縣。揔三百五十八處。設官大小四千三百五十五員。刻削於民。甚爲冗濫。加之賦役頻倂。綁縛凌虐。痛寃無伸。城郭州縣。虛有其名。民少官多。按廉官半年一代。令民自備牛馬路費。迎送新舊。道路如織。妨農害物。民甚苦之。又元立站赤。每處三四十戶。近來不問公移有無。皆乘馹馬。百色科擾。因此逃散。本國近因權臣不法。百姓困弊。其餘難以縷陳。
元置耽羅軍民揔管府。尋罷之。○夏四月。僉議參理金賆 卒。
賆。就礪之孫。王之爲世子入元。賆從之。及尙公主東還。賆功居多。賜誓券曰。爾功之多。余報之微。爾雖有罪。十犯九宥。至于子孫。世世如之。賆性純厚無華。奉公以正。謚文愼。
五月。元行省左丞耶律希逸還。
希逸承詔還。希逸喩王以理民之術。責宰輔以憂國之事。甞以國學殿宇隘陋。失泮宮制度。言於王。遂新文廟。以振儒風。希逸。楚材之孫也。
倂省內外官。
其官名同上國者。悉改之。又以芝黃代赭袍。紅傘代黃傘。除舞蹈警鞸之禮。承元旨也。後。元塔察兒來言。黃袍黃傘。朝廷未有明禁。遂復之。
遣知都僉議司事閔萱。如元。請改嫁公主。
時。廢王與公主。益不相叶。而奸臣王惟紹宋邦英吳祁之徒。憚廢王之英敏。日夜交搆於王。欲以離間父子。宋玢恐事不濟。以元主乳母子。爲壻以爲援。於是。王遣萱。奉表請改嫁公主。又言忽剌歹金忻等。憑恃上國。奪人田土。自古。安有旣去其國。而仍食其田。又取其民者乎。伏乞張不漏之網。闢無私之門。忽剌歹等所占田民。請還本主。其請改嫁表。萱不敢進而還。
安東界大雨雹。
麋鹿鳥雀。或有中死者。雹一枚。數人不能擧。
六月。置田民辨正司。○秋七月。忽赤享王。
忽赤各番宰樞房庫重房。輪日享王。群少媚悅。日以成習。
贊成事致仕任翊卒。
翊。濡之孫也。博聞強記。諳鍊典故。有質疑者。辨之如響。甞撰璿源錄。又承命。與金賆。撰元世祖事跡。奏于元。
| 김변(金賆) 1248 ~ 1301 |
| 언양(彥陽) |
| 김씨(金氏) |
| 손지(損之) |
| 문신(文愼) |
| 한국 |
관계인물 : 6 명
· 정렬: 선택 이름 관계구분 본관 생년 몰년 관계인물 선택 오름차순 내림차순
번호이름관계구분생년몰년본관아버지관계인물출처정보
| 1 | 김부(金富) | 증조부 | 언양(彥陽) | 1명 | 바로가기 | |||
| 2 | 김취려(金就礪) | 조부 | 1172 | 1234 | 언양(彥陽) | 김부(金富) | 2명 | 바로가기 |
| 3 | 김전(金佺) | 부 | 1271 | 언양(彥陽) | 김취려(金就礪) | 5명 | 바로가기 | |
| 4 | 김륜(金倫) | 자 | 1277 | 1348 | 언양(彥陽) | 김변(金賆) | 10명 | 바로가기 |
| 5 | 김군(金頵) | 형제 | 언양(彥陽) | 김전(金佺) | 5명 | 바로가기 | ||
| 6 | 김보(金保) | 형제 | 언양(彥陽) | 김전(金佺) | 5명 | 바로가기 |
김군(金頵)
고려 후기의 문신. 본관은 언양(彦陽). 김취려(金就礪)의 손자이며,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 김전(金佺)의 아들로, 광정대부(匡靖大夫) 도첨의참리(都僉議參理)를 지냄.
.............................
| 국립문화유산연구원이(가) 개방한 김변처허씨묘지(金賆妻許氏墓誌) 저작물은 공공누리 제 1유형 "출처표시" 조건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개관 묘지명은 안정복(安鼎福)이 편찬한 『잡동산이(雜同散異)』제 4책(아세아문화사)에 수록되어 있다. 1324년(충숙 11)에 김개물(金開物)이 작성하였다.부인 허씨(許氏 : 1255~1324)는 김변(金賆)의 처이며, 안남(安南) 양천(陽川;지금의 서울 강서구 일대)사람이다. 부인의 증조는 경(京), 조부는 수(遂), 아버지는 공(珙)이다. 외조(外祖)는 이유실(李惟實)로 이자연(李子淵)의 현손(玄孫)이다.묘지명에 따르면 부인은 남편이 죽자 명복을 빌기 위해 감응사(感應寺)를 창건하고 『원둔경전(圓頓經典)』을 사경(寫經)했다. 1304년(충렬 30) 철산화상(鐵山和尙)으로부터 대승계(大乘戒)를 받았다. 1315년(충숙 2) 머리를 깎고 비구니가 되었다. 법명은 성효(性曉)다. 부인이 죽자 국왕은 변한국대부인 진혜대사(卞韓國大夫人 眞慧大師)로 추봉하였다. 묘지명은 이같이 남편의 사후 행했던 각종 불사(佛事)와 승려가 된 후 부인의 승력(僧歷)을 자세하게 소개하고 있다. 또한 고려시대 여성으로서 승려가 되어 국왕으로부터 법호(法號)를 받은 경우는 허씨 부인이 유일한 경우일 것이다. 묘지명의 자료적 가치는 이 점에서 매우 크다.부인의 남녀 형제는 9명으로 같은 어머니의 형제가 5명, 배다른 형제가 4명이다. 부인은 그 중 맏이다. 셋째 동생 양천군(陽川君) 숭(嵩)의 아들 종(琮)은 수춘옹주(壽春翁主)에게 장가들어 정안군(定安君)에 봉해졌다. 여섯째 동생은 원종(元宗)의 조카인 평양공(平陽公) 현(胘)에게 시집갔으며, 다시 충선왕비인 순비(順妃)가 되었다.부인은 아들 4명과 딸 3명을 낳았다. 장남은 륜(倫), 차남은 우(禑), 3남은 청오대사(淸悟大師)로 감은사(感恩寺)의 주지이다. 4남 역시 선사(禪師)이다. 장녀는 이계감(李季瑊)에게 시집갔다. 차녀는 동녀(童女)로 선출되어 원나라에 들어갔다. 막내딸은 원선지(元善之)에게 시집갔다.참고로 남편 김변(金賆)과 여동생 충선왕비 순비(順妃)의 묘지명이 있다. ............................. 追封卞韓國大夫人眞慧大師行陽川郡夫人許氏墓誌銘幷序」 愚溪晚進金開物述」 坤輿方大萬品該牝馬之行姆範陵遲千載聞良姬之出間或著聞後當勤辭大夫人」 姓許氏以國俗不名安南陽川人許氏自平章事許載始大曾祖王父諱京禮賓少卿」 知制誥祖王父諱遂銀靑光祿大夫樞密院副使禮部尙書翰林學士承旨致仕學士」 之外祖王父李公諱惟實閣門舍人舍人其中書令諱子淵之玄孫也王考諱珙忠烈」 王配享功臣匡靖大夫僉議中賛修文殿大學士監修國史判典理司事世子師贈諡」 文敬公 추봉 변한국부인 진혜대사 행양천군부인 허씨묘지명 병서(追封 卞韓國夫人 眞慧大師 行陽川郡夫人 許氏墓誌銘 幷序) 우계만진 김개물 술(愚溪晩進 金開物 述) 세상은 넓고 커서 만물이 어울리고 암말과 같은 유순한 덕도 행해진다. 여성의 행실과 모범이 점차 쇠퇴하여 오랜 세월 훌륭한 여인의 나타남에 귀를 기울였다. 간혹 그러한 소문이 뚜렷이 드러난 뒤에는 마땅히 글을 지어 알려야 할 것이다. 대부인(大夫人)의 성은 허씨(許氏)이며, 나라의 풍속에 따라 이름은 적지 않는다. 안남(安南)의 양천(陽川;지금의 서울 강서구 일대)사람이다. 허씨는 평장사(平章事) 허재(許載)때 비로소 큰 가문이 되었다. 증조 경(京)은 예빈소경 지제교(禮賓少卿 知製誥)였다. 조부 수(遂)는 은청광록대부 추밀원부사 예부상서 한림학사승지(銀靑光祿大夫 樞密院副使 禮部尙書 翰林學士承旨)로 벼슬에서 은퇴하였다. 학사(學士;遂)의 외조(外祖)는 합문사인(閤門舍人) 이유실(李惟實)인데, 중서령(中書令) 이자연(李子淵)의 현손(玄孫)이다. 아버지 공(珙)은 충렬왕의 배향공신(配享功臣)으로, 광정대부 첨의중찬 수문전대학사 감수국사 판전리사사 세자사(匡靖大夫 僉議中贊 修文殿大學士 監修國史 判典理司事 世子師)이며 문경공(文敬公)이라는 시호를 추증받았다. 공은 검약하고 스스로를 잘 지켜 덕망이 당대의 제일이었다. 어머니는 영평군부인(鈴平郡夫人) 윤씨(尹氏)이다. 금자광록대부 정당문학 예부상서 수문전대학사(金紫光祿大夫 政堂文學 禮部尙書 修文殿大學士)이며 문평공(文平公)으로 시호를 추증받은 극민(克敏)의 딸이다. 문평공은 시중 관(瓘)의 후손이다. 1등 공신으로 광정대부 도첨의참리 집현전대학사 동수국사 상장군(匡靖大夫 都僉議參理 集賢殿大學士 同修國史 上將軍)이며 문신공(文愼公)으로 시호를 추증받은 변(賆)은 남편이다. 공은 봄날의 구름과 같은 기상이 있었고 조상이 서로 돌보아 주고 계승하여준 덕으로 시호를 얻어 공이 되었다. 부인의 남녀 형제는 9인다. 같은 어머니의 형제가 5명, 배다른 형제가 4명이다. 부인은 그 중 맏이다. 셋째 동생 양천군(陽川君) 숭(嵩)은 죽었는데, 아들 종(琮)은 수춘옹주(壽春翁主)에게 장가들어 정안군(定安君)에 봉해졌다. 여섯째 동생은 처음에 평양공(平陽公) 현(胘)에게 시집갔는데, 평양공은 원종(元宗)의 친 조카이다. 지금은 순비(順妃)가 되었으며 건강하다. 그 나머지는 적지 않는다. 이것이 부인의 집안과 친척에 관한 전부이다. 씩씩한 아들 4명과 딸 3명을 낳았다. 장남인 전밀직부사(前密直副使) 윤(倫)은 부지밀직사사(副知密直司事)로 벼슬에서 은퇴한 최서(崔瑞)의 딸에게 장가갔다. 차남인 전원윤(前元尹) 우(禑)는 밀직사사 보문각대학사(密直司使 寶文閣大學士) 전승(全昇)의 딸에게 장가갔다. 3남은 어려서 출가하였다. 현변(玄抃)이라 하는데 청오대사(淸悟大師)가 되어 지금 감은사(感恩寺)의 주지이다. 4남 역시 어려서 출가하였다. 여찬(如璨)이라 하는데 가지산문(迦智山門)에 투신한 후 수좌(首座)에 네 번이나 뽑혔다. 상상과(上上科)에 합격하여 명성을 떨쳤다. 남쪽지역을 순례하여 천목산(天目山)에 갔다 오자 선사(禪師)로 임명한다는 비답(批答)이 있었다. 장녀는 이계감(李季瑊)에게 시집갔으나 일찍 죽었다. 차녀는 동녀(童女)로 선출되어 원나라에 들어갔다. 막내딸은 밀직부사 상호군(密直副使 上護軍) 원선지(元善之)에게 시집갔다. 여러 손(孫)과 사위는 쟁쟁하여 번성한 집이라 할 것이다. 부인은 을묘년(1255, 고종42)에 태어났는데 성품이 정숙하고 신의가 있으며 아름답고 절조와 신중함이 있었다. 어렸을 적에 특이함을 보였으며 비녀를 꼽기 전에 품격이 완성되어 밖으로 드러나 여러 번 놀라게 했다. 14세에 혼인했는데 능히 남편을 섬김에 합당하여 먹을 것을 넉넉히 하고 길쌈을 힘썼으며 부도를 다하여 섬겼다. 집안에서 제사를 드리려하면 법도를 조금 알아 돕지 않은 적이 없었다. 안에서는 자녀들의 어미가 되어, 자식이 태어나 어려 생각이 없을 때 각기 마땅한 업을 가르쳤다. 일찍이 “남자는 삼가 힘쓰지 않으면 음흉하여 부정하게 되고, 여자가 삼가 힘쓰지 않으면 잘못되어 편벽하게 되어 스스로 쓰러지게 된다”고 하였다. 부인의 절조와 힘씀이 이와 같아 온 가문의 모범이 되어 집안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공은 신축년(1301, 충렬27)에 먼저 죽었다. 부인은 몹시 슬퍼하여 나라의 의식을 거절하고 스스로 장구(葬具)를 마련하여 대덕산(大德山)의 남쪽 언덕에 묘소를 마련하였다. 장례가 끝나자 이 산의 서남쪽 가까운 곳에 가히 서로 볼 수 있는 곳에 집을 짓고, 이곳에서 1 리도 못 되는 곳에 절을 지어 고인의 명복을 비는 곳으로 하였다. 이름을 감응사(感應寺)라 하였다. 집안의 재화와 보물을 기울여 승려를 청하여 『원둔경전(圓頓經典)』을 사경(寫經)했는데, 금과 은을 섞어 글자를 꾸몄다. 그 나머지 불사(佛事)에 대해서는 적지 않는다. 임인년(1302, 충렬28) 무선사(無禪師)가 강회(江淮)로부터 배를 타고 오자 부인은 사모하여 뵙고 처음으로 법요(法要)를 들었다. 갑진년(1304, 충렬30) 철산화상(鐵山和尙)이 남쪽으로 와 교화를 하자 대승계(大乘戒)를 받았다. 신해년(1311, 충선3) 미륵대원(彌勒大院)에 올라 장육석(丈六石)에 예를 올리고 여러 산천을 순례하여 열반산(涅槃山)과 청량산(淸凉山)의 성지까지 갔다. 을묘년(1315, 충숙2) 머리를 깎고 비구니가 되었다. 법명은 성효(性曉)이며 계단주(戒壇主) 백수(白修)는 그 스승이다. 47세에 과부가 되었는데 초하루와 보름의 제사 때 반드시 묘소에 몸소 갔다. 삼년상을 치르면서 춥거나 덥거나 해이함이 없었다. 그 뒤 명절의 제사 때에 바깥 나들이를 하지 않고 처음과 같이 직접 묘소에 가지 않은 적이 없었다. 출가한 후에야 그만두었다. 병진년(1316, 충숙3) 통도사(通度寺)에 가서 사리 12과를 얻었고, 동쪽 경주에 갔다. 경주는 볼 만한 곳이 많은 까닭에 여기서 그 뜻을 다하고 돌아왔다. 거쳐 간 산천은 수 없이 많지만 이에 대해서는 여기서 마친다. 경신년(1320, 충숙7) 서울 남산의 남쪽에 자리를 보아 초당을 짓고 머물렀다. 장남의 집이 그 서쪽에 있었다. 뜻은 지아비가 죽으면 맏아들을 따르는 교훈을 본받는 것이었다. 태정(泰定) 원년(1324, 충숙11) 2월 11일 병들어 누웠으니 향년 70세이다. 이해 3월 4일 초당에서 죽었다. 임종 때 말이 어지럽지 않고 동작이 살아있는 것과 같았다. 관청에서 임금께 보고하자 그 절의가 시종일관 왕제(王制)를 따른데 대해 찬탄하였다. 왕의 명령을 따라 변한국대부인 진혜대사(卞韓國大夫人 眞慧大師)에 추봉되었으니, 드문 일이었다. 이해 4월 4일에 선영에 합장하려 하는데 선영으로부터 서쪽으로 약간 보 떨어져 있다. 남편을 따르는 부인의 뜻이었다. 상주가 동생에게 상의하고 슬픈 모습으로 와서 나에게 부탁하기를 “돌아가신 아버님의 묘지명은 둔촌(鈍村;金喧)선생이 작성했습니다. 지금은 우계(愚溪;金開物)가 써주셔야 하겠습니다” 하고, “후손은 집안끼리 잘 지내며, 다시 족속(族屬)이 되었습니다. 행장을 대충 갖고 있으니 사양하지 마십시요” 라고 하였다. 그 말은 어머니의 덕을 기리려는 절실한 것이었다. 상주의 말이 아니더라도 어려서 가까이 살면서 부인의 행실이 아름다움을 들었다. 입으로 표현하지 못하면서 감히 사양하면 사사로이 스스로를 높이는 것이 될 것이다. 또 상주와의 정이 두터우니 죽은 대부인(大夫人)에게 수치를 끼칠 수야 있겠는가. 『예기(禮記)』에 “묘지명은 조상의 이름을 드러내는 것이다. 조상의 아름다움이 없으면서 이를 칭찬하면 무(誣)가 된다. 조상이 선한 일을 했는데도 알지 못하면 불명(不明)이다. 알고도 전하지 않으면 불인(不仁)이다. 이 세 가지는 군자의 부끄러움이다” 라고 했다. 대부인은 행실이 아름답고, 여러 아들이 밝고 어질다. 이 세 가지 수치와는 거리가 먼 것은 의심할 나위 없다. 그러므로 부인의 공과 행실을 다 적어 무덤에 넣는다. 명(銘)에 이르기를, 귀하면 현명하지 못한데, 현명하고 또 귀했네. 오래 살면 어질지 못한데, 오래 살면서 어질었네. 부인의 행실은 장부의 기운. 많은 아들 사위 모두가 뛰어나다. |
.............................
양촌집(陽村集) 권근(權近)생년1352년(고려 공민왕 1)몰년1409년(조선 태종 9)자가원(可遠), 사숙(思叔)호양촌(陽村)본관안동(安東)초명진(晉)시호문충(文忠)특기사항이색(李穡)의 문인, 정도전(鄭道傳)ㆍ이숭인(李崇仁) 등과 교유
陽村先生文集卷之三十八 / 碑銘類
有明朝鮮國追贈推忠直節守文秉義輔祚功臣,特進輔國崇祿大夫,門下右政丞,判都評議使司事,兵曹事,修文殿太學士。領藝文,春秋館事。西原伯。諡文簡公。行光祿太夫,刑部尙書,集賢殿學士李公神道碑銘。竝序。
| 李挺1 | 1299 | 1361 | 李春吉 | 淸州 | 文簡 | 西原伯 |
永樂元年秋八月。領司平府事西原府院君李公。以先君墓碑屬予而言曰。吾先君子種德不食。以遺我後人。仍父子荷寵榮。位崇祿厚。追爵先世。焚黃展祀。用昭恩數。而其墓道尙未有碑。無以示後。且吾不幸幼孤。三兄亦皆先逝。惟先人德行。莫得而詳。堙晦不傳是懼爾。子其爲考世系歷官而爲之銘。予不獲辭。謹按李氏淸州之籍。爲國望族。最顯且久。高麗大祖之肇興也。有諱能希。克左右有功。封爲國公。圖形壁上。至六世孫諱公升。操行修潔。相仁王,毅王。嘗奉使于金。不受一錢。淸德益彰。毅王於秋夕翫月。天朗無雲。嘆賞久之。乃曰。今宵明月。猶公升胸中無一點塵埃。卒諡文貞。上下數百年間。子孫濟美。世德相承。逮文簡公。益自飭理。以貽後慶。司平公與其子上黨君。協心戮力。相我朝鮮。再有定社佐命之功。同啑勳盟。竝崇台鼎。上黨與第淸平君皆尙公主。積善之慶。益大以昌。吁其盛哉。文簡公諱挺。古名春吉。泰定乙丑。公年二十九。始以門陰拜入關寶判官。明年冬。中丙科弟二人及第。繇奉車直長。歷移典法佐郞。致和元年。以版圖正郞出知草溪郡事。有惠政。後拜監察,掌令,典法摠郞。察訪慶尙道。閑居十載。優游自逸。至正癸巳。復拜中正成均祭酒。加奉順。判典校寺事進賢館提學。甲午。正順判通禮門事。乙未。判尉衛寺事,寶文閣提學。階加奉翊。俄遷右常侍。丁酉。改授榮祿大夫,右散騎常侍,集賢殿學士。戊戌。光祿大夫刑部尙書。館職如古。此其歷仕也。公嘗以淸儉自律。循蹈禮則。不隨俗俯仰。世俗服其正直。退居鎭州之常山。不求官達。恭愍王在潛邸。久聞其賢。及卽位。召至于京。嘉其淸愼。提調內佛堂事。親書文貞公操履大節及毅王翫月嘆賞之語。繼以公志慕祖先。亦薄世味之事累百餘言以賜之。方將大用。遽歸舊隱。辛丑六月十九日。以疾卒。春秋六十三。葬于常山之南麓。父諱季瑊。重大匡琅城君。諡正憲。祖諱昌祐。版圖摠郞。贈密直司使。
| 이계감(李季瑊) 고려 후기의 문신. 본관은 청주(淸州). 판도총랑(版圖摠郞)을 지낸 이창우(李昌祐)의 아들이며, 문간공(文簡公) 이정(李挺)의 아버지. |
曾祖諱粧。殿中監。贈知門下省事。郞文貞公子參知政事諱椿老之子也。外祖諡文愼公金賆。某州人。夫人溟州金氏。某官繼貂之女。享年七十。後公十五年。以洪武乙卯四月二十一日卒。葬于公瑩之傍。又其後二十餘年。以司平之功。贈公門下右政丞西原伯。封夫人卞韓國。推恩典也。有男四人女二人。男長曰由信。登壬午科。以刑部郞中出按慶尙道。先公歿。次曰居仁。檢校左政丞。卒諡恭節。次曰居義。工曹典書。早歿。次曰居易。門下左政丞。今爲領司平府事西原府院君。女長適檢校門下侍中李崇。次適恭安府尹閔慶生。孫男女若干人。郞中娵尙書洪承祚之女。生男。長曰德閏。護軍。次曰富閏。殿中卿。女長適政堂文學兼司憲府大司憲李至。次適大護軍金紹。恭節娵都僉議政丞曹益淸之女。生男二人。皆幼。後娵漢山君李光雨之女。生男曰宏道。司水監丞。女長適判事朴遵誼。次適軍資注夫梁仲寬。次適工曹議郞盧敬。次適都染署丞沈聰。工曹娶護軍金仁晦之女。生男曰崑崙。司憲監察。領司平娶刑部尙書崔堧之女。生男曰佇。議政府贊成事,上黨君。尙太上王女慶愼宮主。次曰伯寬。上護軍。次曰伯信。大護軍。次曰伯剛。淸平君。尙今上女貞愼宮主。次曰儇。幼。女長適典農正辛中善。次適宗簿副令慶智。外孫男女若干人。李侍中生男曰岷。光州牧使。次曰嶙。司宰少監。次曰峙。延安府使。女長適判典農寺事崔安濬。次適判漢城府事崔有慶。次適平壤府院君趙浚。次適奉禮郞金祉。閔恭安生男曰渫。直藝文館。女長適知谷州事洪濟。次適平原君趙璞。曾孫男女若干人。平寧君大臨。尙今上女慶貞宮主。政丞趙浚之子也。餘皆幼。自古勳閥之家。不數世後便爲寒門。蓋由祖先積累雖勤。爲子孫者率多驕侈。持守未謹故耳。今公先世德厚流光。發達旣盛。司平父子咸能敬愼。益勵志節。不挾不矜。樂善無倦。是其持守愈謹。克振前光。流慶後胤。蓋未艾也。是宜爲銘。銘曰。
膴膴西原孰濬其源國公肇緖克固其根 其根旣固枝葉是繁烈烈文貞操履之淸 胸中無累秋月之明顯允刑部維德之行 身以禮持不與俗隨淸儉彌篤厚績厥基 宜卿宜相訖莫以施遺慶于後以垂其裕迺啓司平旣峻且武忠在社稷功藏盟府父子再啑同奬王業兄弟竝美王姬是室赫赫寵光雖古罕匹咸能守法愈謹秉節福未有艾增光前烈繩繩來裔引之無替刻辭于碑昭示永世
| 이정(李挺) | 자 | 1297 | 1361 | 청주(淸州) | 이계감(李季瑊) | 5명 |
양촌선생문집 제38권 / 비명류(碑銘類)
유명 조선국 추증(追贈) 추충직절 수문병의 보조공신(推忠直節守文秉義輔祚功臣) 특진보국숭록대부 문하우정승 판도평의사사사 병조사 수문전태학사 영예문춘추관사(特進輔國崇祿大夫 門下右政丞判都評議使司事兵曹事修文殿太學士領藝文春秋館事) 서원백(西原伯) 시(諡) 문간공(文簡公) 행광록대부 형부상서 집현전학사(行光祿大夫刑部尙書集賢殿學士) 이공(李公) 신도비명(神道碑銘) 병서(並序)
영락(永樂 명 성조(明成祖)의 연호) 원년(1403, 태종3) 가을 8월에, 영사평부사(領司平府事) 서원부원군(西原府院君) 이공(李公)이 선군(先君)의 묘비명(墓碑銘)을 나에게 부탁하며 말하기를,
“우리 선군께서 덕(德)을 쌓아 그 영화는 누리지 않고 우리 후인에게 끼쳤습니다. 그리하여 우리 부자(父子)는 임금의 총애와 영광을 입어 지위가 높고 봉록이 두터우며, 선세(先世)에까지 작위를 추봉하게 되어 분황(焚黃)하고 제사를 올려 나라의 은전을 밝힌 일은 자주 있었으나, 그 묘도(墓道)에 아직 비(碑)를 세우지 못하여 뒷 세상에 보일 길이 없습니다. 또 나는 불행히도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세 형 역시 먼저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선인의 덕행을 자세히 알 수 없으니, 영원히 인멸하여 전하지 못하게 될까 이것이 두렵습니다. 그대는 세계(世系)와 관작의 경력을 상고하여 명(銘)을 지어 주시오.”
하기에, 나는 사양할 수 없었다.
삼가 상고하건대, 이씨(李氏)는 청주(淸州)가 관향이니, 나라의 망족(望族)으로 가장 드러났고 또 오래 되었다. 고려 태조(高麗太祖)가 창업할 때, 능희(能希)라는 분이 있어 태조를 도운 공로가 있으므로 국공(國公)을 봉하였고 벽상(壁上)에 화상을 그리게 되었다. 그의 6대손에 이르러 공승(公升)이라는 이가 있었는데, 조행(操行)이 단정하며 인종(仁宗)과 의종(毅宗)을 도왔다. 일찍이 봉명사신으로 금(金) 나라에 갔으나 한 닢의 돈도 받지 아니하므로 그 청백한 인격이 더욱 드러났다. 의종이 추석(秋夕)에 달 구경을 하는데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게 갰다. 오랫동안 탄상하다가 말하기를,
“오늘밤의 밝은 달은 공승의 가슴속 같아서 한 점의 티끌도 없구나.”
하였다. 졸(卒)한 뒤에 시호를 문정(文貞)이라 하였는데, 상하(上下) 수백 년 동안 자손들이 모두 훌륭하여 그 세덕(世德)을 서로 계승하여 오더니 문간공(文簡公)에 이르러 더욱 스스로 경계하고 가다듬어 후손에게 경사를 끼치게 하였다. 사평공(司平公)은 그 아들 상당군(上黨君)과 협력하여 우리 조선(朝鮮)을 도와 두 번이나 정사(定社)ㆍ좌명(佐命)의 공을 세웠으므로, 함께 훈맹(勳盟)에 참여하고 정승의 높은 벼슬에 올랐으며, 상당군과 그의 아우 청평군(淸平君)은 모두 공주(公主)에게 장가들었으니, 적선(積善)이 남긴 경사가 더욱 크고 창성하다. 아, 성대하도다.
문간공의 휘는 정(挺)인데 초명은 춘길(春吉)이다. 태정(泰定 원 진종(元晉宗)의 연호) 을축년(1325, 충숙왕12)에 공이 29세였다. 처음 문음(門蔭)으로 팔관보판관(八關寶判官)이 되었고, 이듬해 겨울 과거에 병과(丙科) 제2등으로 급제하였다. 봉거직장(奉車直長)을 거쳐 전법 좌랑(典法佐郞)을 역임하였으며, 치화(致和 원 천순제(元天順帝)의 연호) 원년(1328, 충숙왕15)에는 판도정랑(版圖正郞)으로 있다가 초계 군수(草溪郡守)로 나가 어진 정사를 베풀었다. 그 뒤에 감찰(監察)ㆍ장령(掌令)ㆍ전법 총랑(典法摠郞)ㆍ경상도 찰방(慶尙道察訪)에 차례로 임명되었다. 그 후 10년 동안 한가롭게 살면서 조용히 지내다가, 지정(至正 원 순제(元順帝)의 연호) 계사년(1353, 공민왕2)에 다시 중정(中正)ㆍ성균 좨주(成均祭酒)에 임명되고, 봉순대부(奉順大夫) 판전교시사 진현관제학(判典校寺事進賢館提學)을 더하였다. 갑오년에는 정순대부 판통례문사(正順大夫判通禮門事)가 되었으며, 을미년에는 판위위시사 보문각제학(判尉衛寺事寶文閣提學)으로서 봉익대부(奉翊大夫)의 품계를 더하였다가, 얼마 뒤에 우상시(右常侍)로 전임되었다. 정유년(1357, 공민왕6)에는 영록대부 우산기상시 집현전학사(榮祿大夫右散騎常侍集賢殿學士)로 고쳐 임명되었고, 무술년에는 광록대부 형부상서(光祿大夫刑部尙書)가 되었으며 관직(館職)은 전과 같았다. 이것이 모두 공이 역임한 벼슬이다.
공은 일찍이 청검(淸儉)함으로 자신을 다스리며, 예법을 따라 실천하고 세속을 따라 행동하지 아니하므로 세속 사람들은 곧 그의 정직함에 탄복하였다. 진주(鎭州)의 상산(常山)에 물러가 살면서 벼슬과 영달을 구하지 않았는데, 공민왕(恭愍王)이 잠저(潛邸)에 있을 때 오래 그의 어짊을 들은 터이라, 즉위하자 공을 서울로 불러올렸다. 공민왕은 그의 청신(淸愼)함을 가상히 여기어 내불당(內佛堂)의 일을 주관하게 하고, 문정공(文貞公)의 빛나는 조행 및 의종(毅宗)이 달을 보면서 감탄한 말에 이어, 공의 뜻이 선조를 사모하여 세상의 일에 대한 자신의 욕망을 담박하게 하는 일 등, 수백 가지의 말을 친필로 써서 하사하여 장차 크게 등용하려 하였는데, 갑자기 전에 은거하던 곳으로 돌아가 신축년(1361, 공민왕10) 6월 19일 병으로 졸하니 춘추가 63세였다. 상산 남쪽 산기슭에 장사하였다.
아버지의 휘는 계감(季瑊)이니 중대광 낭성군(重大匡琅城君)으로 시호는 정헌(正憲)이며, 조부의 휘는 창우(昌祐)이니 판도 총랑(版圖摠郞) 증밀직사사(贈密直司使)이며, 증조의 휘는 장(粧)이니 전중감(殿中監) 증지문하성사(贈知門下省事)로서 곧 문정공의 아들 참지정사(參知政事) 휘 춘로(椿老)의 아들이다. 외조는 김변(金賆)이니 시호는 문신공(文愼公)이며 모주(某州)의 사람이다. 부인(夫人)은 명주 김씨(溟州金氏)로서 모관(某官) 계초(繼貂)의 딸인데, 향년이 70세로서 공보다 15년 뒤인 홍무(洪武) 을묘년(1375, 우왕1) 4월 21일에 졸하여 공의 무덤 곁에 장사하였다. 또 20여 년 뒤에 사평(司平)의 공로로 공에게는 문하우정승(門下右政丞) 서원백(西原伯)을 추증하고, 부인에게는 변한국부인(卞韓國夫人)을 추봉하였으니, 공신의 조상에게 미루어 주는 은전(恩典)이다.
아들 넷과 딸 둘을 두었다. 장남 유신(由信)은 임오년 과거에 급제하여 형부 낭중(刑部郞中)을 거쳐 경상도 안찰사(慶尙道按察使)로 나갔는데 공보다 먼저 죽었고, 차남 거인(居仁)은 검교좌정승(檢校左政丞)으로 죽었으니 시호는 공절(恭節)이며, 3남 거의(居義)는 공조 전서(工曹典書)로서 조사하였고, 4남 거이(居易)는 문하좌정승(門下左政丞)으로 지금 영사평부사(領司平府事) 서원부원군(西原府院君)이 되었다. 맏딸은 검교문하시중(檢校門下侍中) 이숭(李崇)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공안 부윤(恭安府尹) 민경생(閔慶生)에게 시집갔다.
손자와 손녀 몇 명이 있다. 낭중(郞中)은 상서(尙書) 홍승조(洪承祚)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을 낳았으니, 장남 덕윤(德閏)은 호군(護軍)이고, 차남 부윤(富閏)은 전중경(殿中卿)이다. 맏딸은 정당문학 겸 사헌부대사헌(政堂文學兼司憲府大司憲) 이지(李至)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대호군(大護軍) 김소(金紹)에게 시집갔다. 공절(恭節)은 도첨의 정승(都僉議政丞) 조익청(曺益淸)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 둘을 낳았으나 다 어리고, 한산군(漢山君) 이광우(李光雨)의 딸을 후취(後娶)하여 낳은 아들 굉도(宏道)가 사수감 승(司水監丞)이며, 맏딸은 판사(判事) 박준의(朴遵誼)에게 시집갔고, 둘째는 군자 주부(軍資注夫) 양중관(梁仲寬)에게 시집갔고, 셋째는 공조 의랑(工曹議郞) 노경(盧敬)에게 시집갔고, 넷째는 도염서 승(都染署丞) 심총(沈聰)에게 시집갔다. 공조 전서(工曹典書)는 호군 김인회(金仁晦)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을 낳았으니, 이름은 곤륜(崑崙)으로 사헌 감찰(司憲監察)이다.
영사평(領司平)은 형부 상서(刑部尙書) 최연(崔堧)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을 낳았으니, 장남 저(佇)는 의정부 찬성사(議政府贊成事) 상당군(上黨君)으로 태상왕(太上王)의 딸 경신궁주(慶愼宮主)에게 장가들었다. 차남 백관(伯寬)은 상호군(上護軍)이며, 3남 백신(伯信)은 대호군(大護軍)이며, 4남 백강(伯剛)은 청평군(淸平君)으로 금상(今上)의 딸 정신궁주(貞愼宮主)에게 장가들었으며, 5남 현(儇)은 어리다. 맏딸은 전농 정(典農正) 신중선(辛中善)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종부 부령(宗簿副令) 경지(慶智)에게 시집갔다.
외손자와 외손녀 몇 명이 있다. 이 시중(李侍中 시중은 관명. 이름은 숭(崇))의 장남 민(岷)은 광주 목사(光州牧使)이며, 차남 인(嶙)은 사재 소감(司宰少監)이며, 3남 치(峙)는 연안 부사(延安府使)이다. 맏딸은 판전농시사(判典農寺事) 최안준(崔安濬)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 최유경(崔有慶)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평양부원군(平壤府院君) 조준(趙浚)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봉례랑(奉禮郞) 김지(金祉)에게 시집갔다. 민 공안(閔恭安 공안은 봉호(封號). 이름은 경생(慶生))의 아들 설(渫)은 예문관 직제학(藝文館直提學)이며, 맏딸은 지곡주사(知谷州事) 홍제(洪濟)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평원군(平原君) 조박(趙璞)에게 시집갔다. 증손자와 증손녀 몇 명이 있다. 평녕군(平寧君) 대림(大臨)은 금상의 딸 경정궁주(慶貞宮主)에게 장가들었으니, 정승 조준의 아들이다. 나머지는 다 어리다. 예부터 훈벌(勳閥)의 가문이 몇 대를 못 가서 한문(寒門)이 되는 것은, 대개 그 조상들은 덕을 쌓음이 비록 부지런하였으나 자손된 자가 대개는 교만하고 사치하여 삼가 지키지 못하기 때문이다. 지금 공은 선대에서 쌓은 덕이 두텁고 그 광채의 흐름이 발달(發達)하여 이미 성대한데, 사평(司平)의 부자도 능히 공경하고 근신하여 지조를 더욱 가다듬고, 귀한 체하거나 뽐내지 않으며 선(善)을 즐겨 게을리함이 없으니, 이는 그 지킴을 더욱 삼가서 능히 선대의 빛을 드날리는 것이다. 후손에게 경사가 흘러감이 그치지 않으리라. 이는 명(銘)할 만하기에 다음과 같이 명을 쓴다.
기름진 서원(西原) 땅 누가 그 근원을 열었는가. 국공(國公)이 터를 잡아 뿌리를 내렸는데, 그 뿌리 굳건하니 지엽(枝葉)도 무성하다. 열렬한 문정공(文貞公) 그 지조 맑아서, 티끌 없는 가슴속이 가을 달처럼 밝았네. 진실한 형부 상서(刑部尙書) 덕행이 있어, 예절로 처신하며 세속에 영합하지 않았네. 청검(淸儉)에 독실하여 그 터전을 두텁게 하였으니, 경상(卿相)에도 알맞으나 마침내 쓰이지 않고, 경사를 뒤로 물려 넉넉함을 끼쳤도다. 사평(司平)을 계도하니 준엄하고 씩씩하여, 충성은 사직(社稷)에, 공로는 맹부(盟府)에 간직했네. 부자(父子)가 두 번이나 맹세하며 왕업을 도왔고, 형제(兄弟) 모두 훌륭하여 공주를 맞았으니, 혁혁한 은총의 영광 옛날에도 짝할 이 없었네. 법도를 잘들 지키고 더욱 삼가 지조를 지켰으니, 복록은 한이 없고 선열(先烈)에게 광채를 더함이라, 면면한 그 후손 길이길이 이어가리. 사연을 비석에 새겨 영원한 후세에 밝게 보이노라.
ⓒ 한국고전번역원 | 장순범 (역) | 1979
| 이정(李挺)@고려 | 고려 충숙왕(忠肅王)~공민왕(恭愍王) 때의 문신. 본관은 청주(淸州). 중대광(重大匡) 이계함(李季瑊)의 아들로, 성균관 좨주(成均館祭酒)ㆍ형부 상서(刑部尙書) 등을 지냈고, 공민왕의 총애를 받아 내불당(內佛堂)을 감역함.1297~1361 한국/고려후기 , 충청도/진천 , 인명/관인/문신 |
............................
최해(崔瀣)생년1287년(고려 충렬왕 13)몰년1340년(충혜왕 복위 1)자언명(彥明), 수옹(壽翁)호졸옹(拙翁), 예산농은(猊山農隱)본관경주(慶州)특기사항김태현(金台鉉)의 문인. 이제현(李齊賢)ㆍ민사평(閔思平) 등과 교유. 나려(羅麗) 명현의 시문을 뽑아 「동인지문(東人之文)」 25권을 편찬
拙藁千百卷之一 雞林後學崔氏彥明父 / [文] / 大元故征東都鎭撫。高麗匡請大夫。檢校僉議評理元公墓誌銘。
| 元善之 | 1281 | 1330 | 原州 |
至順元年閏七月丙戌。征東都鎭撫元昭信年五十。以病卒。將以九月甲申葬。葬不可無誌。子壻等以夫人之命。索文於雞林崔某。嗚呼。東方故事。位登二府者。葬皆得銘。矧公行實端方。雅爲衆允。某敢以諛墓爲辭而不諾耶。元氏故爲北原右族。有諱克猷者。佐神聖王定三韓。號功臣。官至正議大夫。厥後益大。代有令聞。正議生左僕射諱徵演。僕射生兵部尙書諱穎。尙書生閤門祗候諱禹卿。閤門生檢校少保諱德。少保生監察御史諱深夫。御史生尙衣奉御諱禮。奉御生左司諫諱承胤。司諫生贈左僕射諱瑨。僕射生僉議中贊諱傅。中贊生同知密直司事諱卿。始受 宣命。帶金符爲武略將軍,征東行中書省都鎭撫。武略公娶知僉議府洪公祿遵之女。封開寧郡夫人。是爲公考妣也。公諱善之。生七歲。以父任爲西面都監判官。十七。換武職爲散員。廿七。拜郞將。廿八。攝左右衛護軍。帶奉善大夫。明年。德陵召至大都。大見眷遇。䠫拜中顯大夫,密直司右副代言,司僕正,知三司事。又襲父職。宣授昭信校尉,征東都鎭撫。是時。 德陵入侍聖朝久。殊無東歸意。國人遑遑。罔知所出。皇慶癸丑。公與今政丞化平君告朝廷。欲奉德陵就國。忤德陵旨。化平有臨洮之行。而公罷敀。延祐甲寅。貶官。以通直郞出知沔州。未幾還。至治辛酉。起判繕工寺。拜通憲大夫。尋改大司憲。移判典儀寺。是年。德陵西往吐蕃。而上王入朝見留。東人分曹。流言多有詭隨。而公守正不撓。士論是之。及泰定甲子。入密直爲副使。遷同知司事。纔一年。罷爲匡靖大夫,檢校僉議評理,上護軍。家居六年而𣧩。公通多能。處事徐詳。無不辦者。琴與棊妙絶一時。甞以醫可利人。廣市良材。依法修合。丐藥者日踵門。待之無墯容。人多賴以活者。媲彦陽郡夫人金氏。故國相文愼公諱賆之女。生子男龜壽。爲幞頭店錄事。松壽尙幼。女適神虎衛郞將柳寶鉢。次適濟危寶判官安靖。系曰。
[주-D001] 請 : 靖
..........................
及菴先生詩集卷之二 / 律詩 / 送閔按部 璿
春軒之壻默軒孫。重意難忘歿與存。曉出都門望行色。陛辭猶自在宣溫。
春軒崔文 度,默軒閔漬
............................
설곡집(雪谷集) 정포(鄭誧)생년1309년(고려 충선왕 1)몰년1345년(충목왕 1)자중부(仲孚)호설곡(雪谷)본관청주(淸州)특기사항최해(崔瀣)의 문인
雪谷先生集上 / 詩
壬申春。予所蓄馬暴死。外舅春軒聞之。有書云。袖詩來。馬可得也。因以是詩獻。春軒先生。完山崔氏。諱文度。字義民。門下侍郞平章事。贈諡文定公甫淳之後。文定娶祗侯秦仲基之女。生尙舍奉御允稱。奉御娶左司諫黃驪閔元■之女。生戶部尙書輸林學士致仕佋。學士娶左僕射呂水朴倫之女。生贊成事致仕毗一。贊成事娶司宰卿靈山辛洪成之女。生都僉議贊成事光陽君贈諡文簡公誠之。文簡娶政堂文學義城金晅之女。生先生。至正五年乙酉。先生年五十四。以匡靖大夫僉議參理卒于官。贈諡良敬公。
塊處依依類楚囚。賸將心事更添愁。傍花行樂雖堪廢。束帶趨朝詎可休。得馬愧居張籍後。作詩先被晉公求。聖門也有乘肥者。款段還嗤馬少游。
| 崔文度 女+ 鄭誧 | 1292 | 1345 | 全州 | 羲民 | 春軒 | 良敬 |
.................................
가정집(稼亭集) 이곡(李穀)생년1298년(고려 충렬왕 24)몰년1351년(충정왕 3)자중보(中父)호가정(稼亭)본관한산(韓山)초명운백(芸白)시호문효(文孝)특기사항이제현(李齊賢)의 문인
稼亭先生文集卷之二 / 記 / 春軒記
客造春軒。有問名軒意者。主人不答。客復進曰。氣播洪鈞。陽升交泰。物意得以發生。人心隨而舒暢。群卉花妍。百鳥聲樂。其光煕煕。其景融融。故取其如登春臺。如立春風者歟。曰否。元者天地生物之始。春者天地生物之時。仁者天地生物之心。其名雖殊而理則一。故取其疲癃殘疾得其養。昆虫草木遂其生。皆由此理者歟。曰否。無已則其溫乎。夏暑雨冬祈寒而秋慄冽。宜於人者非春之溫乎。客之所云。吾豈敢當哉。客笑而退。余方在座曰。有其德而不自居。惟君子爲然。余知主人胷次悠然。凡持己接物積中發外者。無非和氣也。盖浴沂風詠之流乎。其所取豈止於溫而已耶。客之問何晚也。遂索筆而書其語於壁。主人。完山崔氏文定公之後而文簡公之子也。博學強記。尤深於性理之書。東方文士之質其疑者皆歸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