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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 분강촌(부내ㆍ분천동) 물레방간 언덕에 존재했던 그리운 "물레방앗간 정미소" 전경이다. 족친 이택(79ㆍ장학관 및 화랑교육원 원장 역임) 화가가 낙강 속에 안치된 전설의 물레방간 풍경을 처연하게도 살려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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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우날에 분강촌에 안개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신작로너머 새벽 분강에 뽀얀 물안개가 피어나더니 이내 어슬렁어슬렁 동네로 슬그머니 들어왔다. 점심나절에 봄비가 걷히자 청명한 봄날이 온 마실에 찬란했다.
물레방간 강변에 펼쳐진 파란 잔디밭이 유난히 푸르게 보였다. 앉은뱅이 민들레 할미꽃 개질경이 쇠비름들이 강변 잔디밭에서 한창 꽃단장을 하고 있었다. 개질경이와 쇠비름은 떼로 군락을 지어서 한껏 세 과시를 했다. 할미꽃만 우물가 둔덕바지에서 고개를 숙이고 처량하게 홀로 있었다. 그런 양태가 안쓰러웠던지 노란 앉은뱅이 민들레가 밝은 얼굴로 동무처럼 근처에 머물러 주었다.
영지산과 송곳배알과 넘티와 독짓골 언덕배기에는 참꽃과 개나리가 만발했다. 앞들(전평前坪)로 나가는 동구 밖 과수원 길에는 아카시아꽃과 능금꽃과 탱자나무꽃이 요란스레 앞다퉈 피었다. 구당나무와 새당나무에는 양수장 아래 솔밭과 밀양대 미류나무에서 마구 몰려온 종달새 가족들이 목청껏 봄노래를 불러 댔다. 아랫마와 윗마에는 골목마다 담벼락마다 살구꽃과 복사꽃 배꽃 오얏꽃 앵두꽃들이 만개하여 꽃동네를 만들었다. 분강서원 아래 밤나무가 우거진 밭두렁에는 작고도 앙증맞은 선홍색 빛을 띠는 명자나무꽃을 앞세운 채 달맞이꽃 붓꽃 문배나무 써구새꽃 나리꽃 애기범부채 아카시아꽃 조팝나무 이팝나무 찔레꽃들이 뒤따라 피어나서 다채로운 무지개빛 색깔로 꽃동산을 이루었다.
분강에 물안개가 자욱하게 피어나는 것은 입하가 가까이 왔다는 기별이었다. 애일당 밑에서부터 통소까지 강섶 주변에 빼곡히 줄지어 서 있는 버들나무 가지에도 한껏 봄물이 올랐다. 하얀 물새들의 노래소리가 이곳저곳에서 들려왔다. 물레방간 빨래터 바로 위에 우뚝 솟아 있는 큰 왕버들나무도 가지껏 기지개를 편 채 봄햇살을 쬐고 있었다. 무성한 가지들이 분강에 늘어져서 연신 강물을 들이키고 있었다.
물레방간 우물 위쪽에 있는 선노 할배네 청보리 밭에도 보리꽃이 가득히 피었다. 분강에서 불어오는 봄바람이 보리밭을 스쳐 지나가자 밭고랑에서 크고 작은 파란 물결이 넘실거렸다. 청보리들이 간지러워서 이리저리 몸태를 흔들었다. 양수장 둔덕에는 누렁소들이 연신 하품을 하며 염소들과 어울려 풀을 뜯고 있었다. 아이들이 누렁소 등따리에 올라타서 버들피리를 불며 놀았다. 소나무가 줄지어 서 있는 솔밭에는 어제 밤 뒷동산에서 밤을 새워 울어 제낀 부엉이들이 아직까지도 늦잠을 자고 있었다. 봄기운이 가득한 아름다운 분강촌의 목가적인 풍경이다.
물레방간 빨래터에는 동네 아낙네들이 둥그렇게 모여 앉아 빨래방망이를 마구 두드리고 있었다. 널따란 멍석 같은 빨래 바위 아래로 낙강의 고기들이 몰려와서 온갖 재미나는 분강촌 이야기들을 들으며 헤엄을 치며 돌아다녔다. 빨래터에는 이상하게도 겨울에는 따뜻한 물이 여름에는 시원한 물이 감돌아서 빨래를 하기에는 아주 그만이었다. 순박한 아낙네들은 이게 다 큰 왕버들나무가 가져다준 은덕이라 믿었다.
아이들이 큰 왕버들나무 위로 소복이 올라갔다. 그리고 가지가지마다 걸터 앉아서 목말을 타기도 했다. 강물 위로 뻗어나간 나뭇가지에 호젓이 앉아서 버들피리를 불기도 하고 늘어진 버들나무 줄기를 잡고 그네를 한참 타다가 타잔처럼 강물 속으로 풍덩 풍덩 뛰어내리기도 했다. 그럴 때면 푹신한 모래 위로 흐르는 강물이 아이들을 반갑게 안아주곤 했다. 물섶에서 놀고 있던 흑조개들이 놀라서 물풀 속으로 재바르게 피신을 하는 모습도 보였다.
너그럽고 관대한 큰 왕버들나무는 물레방간을 지키는 수호신이었다. 낙강에서 일어나는 음기운을 막아주기도 했다. 마실을 보호하고 아이들의 놀이터가 되어주기도 하며 윗마에 안녕을 기원하는 기복의 대상이기도 했다. 아랫마에 구당나무와 새당나무가 있다면 윗마는 종가집 배꼽마당에서 반천 년 간 동네를 지켜 온 터줏대감 구인수와 물레방간의 큰 왕버들나무가 있었다.
왕버들나무의 큰 등줄기는 손자 같은 아이들이 타고 놀 수 있는 등어리가 되어 주었고 길다란 가지 손은 튼튼한 그네가 되어 주었다. 호빗 같은 아이들은 물레방간의 큰 어른 나무인 이 왕버들나무를 경외하면서도 마치 인자한 할아버지처럼 따랐다. 자애로운 늙은 왕버들나무는 분강촌과 애환을 함께 나눈 전설의 터줏대감이자 윗마에 무탈을 있게 하는 정령이 깃든 지신대감이었다♧.
♤사진 종합 설명(caption) : 수몰 전 물레방간 전경
1965년 분강촌 물레방간 빨래터 바로 위에서 촬영한 애수 가득한 그리운 풍경 사진이다. 왼편에 이제는 전설이 된 그 큰 왕버들나무가 선연히 보인다. 큰 두 갈래 기둥 가지가 벌어져서 하늘을 향해 솟구쳐 올라가다가 다시 크고 작은 가지들이 뒤엉켜서 전체로 보았을 때는 거대한 원모양을 만들었다. 왕버들나무의 몸집 반은 분강 강물 위로 뻗어나가 있었다. 아이들은 관대하고도 자애로운 이 왕버들나무에 올라가서 버들피리를 만들어 불거나 목말을 타거나 나무가지를 그네처럼 붙잡고 타잔놀이를 하다가 분강 위로 퐁당퐁당 떨어지기도 했다. 사진 오른편 작은 아이들 뒤로 넓고도 깊은 분강이 유유히 흘러가는 전경이 선하게 한눈에 들어온다.
사람들 뒤에 가려져서 널따란 빨래터의 멍석 바위는 보이지 않고 있지만 바위 주변으로 찰랑거리던 작은 물결과 시꺼무리했던 넓은 바위의 모양새는 여전히 기억 속에 또렷이 남아 있다. 사진 뒷편 오른쪽 작은 아이들 속에 서 있는 눈에 익은 작은 버들나무의 모습도 가슴 속을 적셔 온다. 사진 속에 그리운 옛사람들의 모습이 보인다. 뒷편 제일 오른쪽이 농암선생 17대 현 종손인 이성원 박사(72ㆍ아명은 창신)이고 두번째는 우릉골할배(함자는 이희옥 선생)의 자제인 유록이 할배(75)이다. 세번째는 종손의 백씨 되는 작고하신 창윤이 형님(사진 속 19세ㆍ아명은 이준ㆍ1971년 24세 작고)의 청소년 시절의 모습이다. 창윤이 형님은 청년기 때 병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필자는 유년시절 휴양차 목실골 부모님댁에 와서 지낸 창윤이 형님과 1여 년을 함께 했던 추억이 있다. 성정이 선하고 언행이 아이처럼 순수했던 사람으로 기억된다. 형님을 생각하면 애석하기 그지없다.
네번째는 이 사진의 소유자이자 "분강도(1992)"의 저자인 이택 화가(79ㆍ장학관 및 화랑교육원 원장 역임ㆍ선대인의 함자는 이학구)이다. 종손의 사촌 형님이 된다. 참고로 현 종손의 선대인이자 농암선생 16대 종손의 함자는 이용구이다. 우리 족친들은 작고하신 16대 종손을 큰 종손이라 호칭하고 있다.
다섯번째는 풍산할배(분강촌 옛날 물레방간 소유주였으며 함자는 이희원) 자제인 "서래섬에 달이 뜨다"의 저자인 유걸이 할배(78)의 청년시절 모습이다. 여섯번째는 이택 화가의 사촌동생이고 해군대령으로 퇴역한 이한 형님(77ㆍ선대인의 함자는 이붕구)이다. 한편 앞줄 오른쪽 첫번째는 이택 화가의 여동생인 이미장 여사(77)의 청년시절 모습이다. 두번째는 이택 화가의 사촌 여동생인 이윤규 여사(78)이다. 이윤규 여사의 선대인 함자는 이봉구이며 큰 종손의 바로 아래 동생이다. 세번째 사진은 이택 화가의 막내 여동생인 이혜장 여사(71)의 유년시절 모습이다.
사진에 나와 있는 사람들 가운데 유걸이 할배와 유록이 할배를 제외하면 모두 큰 종손의 자제 및 조카들이다. 부내(분강촌) 큰 아버지댁에 놀러와서 함께 한 사진이다. 옛날 분강촌 동네는 현재 도산서원 입구, 다시말해 온혜로 넘어가기 전에 오른쪽 길로 접어들면 농암가비聾巖歌碑가 위치한 곳너머 수몰된 지역이다. 분강촌은 농암 이현보 선생의 후손들이 살았던 영천이씨 집성촌 마을이었다. 1976년 안동댐 준공으로 인해 완전히 수몰된 지역이다. 필자 또한 분강촌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위 사진은 이택 화가가 20세 되던 1965년 서울마포고등학교 2학년 때 큰아버지가 되는 큰 종손댁인 분강촌에 와서 물레방간 빨래터 위에서 동네 친구 및 사촌들과 찍은 모습이다. 이택 화가가 필자에게 직접 보내준 사진이다.
사진의 나이도 올해로 61년이 되었다. 사진을 자세히 보면 강물너머 섬마 강변에 여러 그루의 포플러 나무가 줄지어 서 있는 모습이 한눈에 익숙하게 들어온다. 그리고 사진 오른편 아래에는 당시 분강촌에 살았던 아이들이 신기한 눈으로 사진을 찍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이 아이들도 지금은 고희에 접어드는 어른이 되었으리라. 필자가 보유한 부내(분강촌) 사진 가운데 가장 오래된 희귀한 사진이다. 필자가 그토록 찾아 헤맸던 수몰 전 옛날 물레방간 주변의 풍경을 담은 애수 가득한 사진이다. 세월은 분강에 떨어져 흘러가버린 아카시아 꽃잎처럼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사진 속의 사람들도 청춘을 지나 이제 석양의 나이를 맞고 있다. 유년시절 물레방간 강섶에 서 있던 저 큰 왕버들나무를 오르내리며 그리고 빨래터 아래 깊은 분강에서 유영하며 아무 걱정없이 노닐었던 지나가 버린 그 세월이 몹시 그리워진다.
♤사진 설명(caption)
아이들이 큰 왕버들나무 위로 소복이 올라갔다. 그리고 가지가지마다 걸터 앉아서 목말을 타기도 했다. 강물 위로 뻗어나간 나뭇가지에 호젓이 앉아서 버들피리를 불기도 하고 늘어진 버들나무 줄기를 잡고 그네를 한참 타다가 타잔처럼 강물 속으로 풍덩 풍덩 뛰어내리기도 했다. 자애로운 왕버들나무는 마치 인자한 할아버지가 손자를 품고 있는 것처럼 한없이 도탑고도 인후했다.
♤사진 설명(caption)
그림은 1992년 족친 화가 이택 선생이 수몰 전 1970년대의 분강촌 전경을 그린 "분강도"이다. 이택 선생은 농암 17대 현 종손인 이성원 박사의 사촌 형님이 된다. 농암종택과 긍구당肯構堂 분강서원 애일당 농암바위 일대를 그렸다. 왼쪽 강가 솔밭 아래 지역이 물레방간이다. 그림에서는 물레방간과 큰 왕버들나무가 보이지 않는다.
♤사진 종합 설명(caption)
저멀리 솔밭 끄트머리 오른쪽 강가에 버들나무들이 무성한 곳이 물레방간 지대이다. 사진은 분강 언덕에 있던 양수장 아래 솔밭[일명 "쑤棷(수풀 수)"라고 불렀는데 소나무 숲이라는 뜻이다] 밑이다. 쑤는 옛 선조들이 마을에 강바람을 막기 위해 심어놓은 일종의 방풍림이었다. 수몰 전 옛날에 솔밭은 윗마 양수장 아래 강가 언덕에서부터 실거랑을 넘어 천방둑 안까지 이어졌다. 우리는 한여름 달빛이 좋으면 이 솔밭 속 소나무 가지에 여러 개의 남포등을 주렁주렁 걸어놓고 4H 활동을 하는 형님들과 누님들이 가르쳐주는 율동에 맞춰 동요와 무용을 배우고 글도 배우며 문명의 창으로 조금씩 다가갔다. 마치 "상록수" 정신을 전개하는 듯한 4H 클럽은 그 시절 어느 동네에서나 흔히 볼 수 있었던 향촌민들을 일깨우는 계몽 교육 활동이었다.
푸른 소나무 숲 속에서 흘러가는 낙강을 바라보는 전경은 최고의 미학이자 풍경화였다. 아이들이 소담스레 부르는 노래소리 옆으로 고요히 분강이 흐르는 가운데 황금빛 달님이 강물에 비쳐 일렁거리면 그 전경이 너무나도 고와서 농암바위도 애일당도 물레방간도 통소도 구여울도 감퇴방구도 밀양대도 청고개도 구당나무도 새당나무도 실거랑도 그리고 강섶에 놀고 있던 하얀 물새와 황새들도 예주륵 이 광경을 구경하려고 아름다운 이곳 솔밭으로 마구 몰려들었다.
사진 오른쪽에 있는 강물이 분강이고 바로 그 아래에 통소와 구여울이 있었다. 사진 속에 아이들은 재술이 아재(왼쪽 첫번째)와 동생들이다. 1970년 8윌 통소 바로 옆 강변 잔디밭에 앉아서 "가위 바위 보"를 하며 놀고 있는 모습이다. 솔밭 오른쪽으로 넓고 깊은 분강이 고적히 흘러가는 모습이 희미하게 보이고 있다. 사진에서 세 명의 아이들이 앉아 있는 위치는 분강촌 사람들이 이름하여 "통소"라고 불렀던 그곳 바로 위에 있던 강변 지대이다. 강물이 항아리 통 같이 깊고 우묵하게 생긴 곳에 "소"를 만들어서 통소라는 지형 이름이 붙여졌다.
♤아내과 함께 한 고향의 봄...
봄이 오면 그대와 함께 "고향의 봄"을 부르리라. 동구 밖 과수원 길 아카시아꽃과 윗마 원촌할매네 복상꽃과 효잠할매 녹동할매 구레실할매네 담벼락과 마당과 뒤안에 흐드러지게 피고지던 그 살구꽃을 떠올리며 과수원 길 노래도 함께 부르리라. 아~ 옛사람은 간 데 없고 내 놀던 물레방간 늙은 왕버들나무도 낙강 속에 묻혀 전설이 되었네. 일월이 강물처럼 쉬이 흘러 객향에서 부초 같은 나그네 인생을 산 지 어엿 반백 년. 꿈 속인들 분강촌을 어이 잊으리~
첫댓글
세월이 정말 빠르네 담주 2월4일이 벌써 立春 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