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교회의 쇄신
3-2. 한국 가톨릭 문화의 전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성과는 한국 교회에도 반영되어 1965년 1월 1일부터 공의회 정신에 따라 우리말 미사를 집전하였다. 교회는 우리말 미사를 집전하기 위하여 「미사통상문」을 간행하는(1966년) 한편, 교리 학습을 위한 「가톨릭 교리서」를 편찬하였다(1967년). 또한 박해 시대 이래 한국 교회의 공식 기도서인 「천주성교공과」를 현대화하여 「가톨릭 기도서」로 1968년에 간행하고, 1971년에는 토요 특전 미사를 허용한다.
공의회의 성과는 본당에도 영향을 미쳐, 각 본당별로 본당 신부의 자문 기구인 ‘사목회’가 조직되어 평신도 활동이 활발해졌다. 그리고 ‘한국 평신도 사도직 협의회’가 출범하여 평신도 운동의 전국 조직과 교구별 조직을 갖춘다(1968년). 교회에서는 ‘평신도 사도직의 날’을 제정하고 신자들에게 주일 미사 때 강론할 기회를 주기 시작하였다. 한편 4·19 혁명과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거치는 과정에서 가톨릭 학생 운동은 새로운 방향으로 전환되어 일반 학생 운동과 호흡을 같이하였으며, 기존의 교회 단체들도 공의회 정신에 따라 쇄신의 방향에 관심을 가졌다.
그 과정에서 1960년대 후반기 이후 교회 활동이 본당을 중심으로 한 신자들의 활동과 전국 조직체를 중심으로 한 활동으로 이원화하였다. 이로써 오늘날의 교회는 본당 단위 활동과 전국 조직체 활동을 상호 조화시켜야 하는 과제를 안게 되었다. 이와 동시에 한국 교회의 전통적 신심인 순교자 신심도 강화되었다. 순교자 신심은 1866년 병인박해 순교자에 대한 시복 운동을 통해서 진행되었다. 그 결과 1968년에 순교 복자 24위의 시복식이 로마에서 거행되었다. 순교자 신심 운동은 한국 순교 복자 시성을 추진하면서 더욱 고조되어, 1976년에는 한국 평신도 사도직 협의회의 건의와 호소에 따라 순교 복자 시성 운동이 본격화한다. 시성 운동은 ‘한국 천주교 200주년’을 준비하는 차원에서 진행하게 된다.
1960년대 이후 한국 교회에서는 한국 문화와 교육 발전을 위해서도 상당히 노력하는데, 한국 교회는 가톨릭 대학교, 효성 여자 대학교, 서강 대학교, 성심 여자 대학교 등 고등 교육 기관을 운영하는 한편, 유아 교육, 초등 교육과 중등 교육 발전을 위해서도 이바지한다. 당시 한국 교회는 문학, 미술, 음악 등 고급 문화 분야 발전에도 이바지하면서 가톨릭 문화와 예술을 발전시켜 나간다. 한국 교회는 교육 개발 사업과 함께 의료 복지를 비롯한 각종 사회 복지 사업에도 참여하여, 1980년대 초반 한국 교회에서 운영하는 병원들이 전국 병원의 침상 수 중에 11% 이상을 차지하였다.
당시 한국 교회 신자 수가 전국 인구의 3% 내외에 지나지 않던 사실을 감안하면 이는 의료 복지에 대한 교회의 관심이 상대적으로 컸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밖에도 교회는 각종 보육원, 양로원과 여러 사회 사업 기관을 통해서 사회 개발에 참여하는데, ‘소년의 집’, ‘꽃동네’를 비롯한 대규모 복지 시설을 설립한다. 그리고 정부나 지방 자치 단체에서 설립한 사회 복지 기관들을 위탁받아 운영하기 시작하는데, 복지 기관 위탁 경영은 교회의 복지 기관 운영에 대한 신뢰가 다른 어느 단체보다 높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1969년 1월에는 신구약 성서의 공동 번역 작업을 시작한다. 이 사업은 1970년에 공동 번역 신약성서가 간행되고, 1977년에 구약성서가 간행됨으로써 완결된다. 현재 한국 천주교회에서는 이 공동 번역 성서를 공인하여 활용하고 있다. 이로써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하나의 성서를 받드는 하나의 형제임을 확인하고 서로의 오해를 청산하는 계기를 맞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