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동네 친구들
정동식
그날, 우리 가족은 하늘과 가까운 곳으로 이사를 했다. 새집은 학교로부터 멀어졌고, 자동차는 당연히 접근이 안 되는 곳이었다. 작은 차 두 대가 겨우 비켜갈 수 있는 비포장 산복도로에서 10여분 정도 골목길을 올라가야 우리 집이 보였다. 시골에서 시내로 나온 후, 이번이 3번째 이사였다. 장래 알피니스트를 꿈꾸는 자녀들은 아무도 없는데, 우리는 매일 등반과 하산을 반복하고 있었다. 아버지께서 특별한 사업을 하신 것도 아니고, 누구에게 돈을
빌려주고 못 받았다는 애기를 들어본 적도 없었다. 뿐더러 아버지께서는 공무원이셨으니 가난했지만 빚질 정도는 아니었다. 아마 시내로 처음 이사 나올 땐 2남 1녀였는데 여동생 둘이 태어나면서 살림살이가 더 팍팍해졌기 때문이리라 짐작이 된다. 물론 우리 집이 아니라 전세였는데 큰 방 하나와 코딱지 만한 방 하나였다. 이곳은 6.25 전쟁이 한창이던 시절에 넘쳐난 피난민들이 시내에서 산비탈로 몰려들면서 무허가 판잣집촌이 들어섰다고 한다. 우리가 이사 온 집도 바로 판잣집을 조금 개량한 집이었다. 살아보니 좋은 점도 있었다. 집에서 불과 1분 정도의 거리에 산으로 이어지는 길이 있어, 메뚜기, 여치 등을 잡으러 다니기도 했고, 정상 부근 공터에서 축구도 할 수 있었다. 산이라고 해야 해발 162m에 불과하지만 우리 집이 7부 능선에 자리 잡고 있어 초등학생 눈으로는 상당히 높아 보였다. 부민산 꼭대기에서 정면, 그러니까 동쪽으로 용두산공원과 오륙도가 선명하게 보이고, 산기슭에는 어머니께서 2017년까지 50년 이상 사셨던 추억의 달동네가 전개된다. 내가 살았던 동네 중에서 해발이 가장 높았던 지역, 공동변소를 이용했고, 공동수도에 줄을 서서 물을 받던 곳이었다. 자주는 아니지만 한 두 달에 한 번씩 변소 퍼는 날이면 위생사업소에서 나온 아저씨들이 똥장군을 지고 언덕을 오르내려야 했다. 그러면서도 숙달된 솜씨로 똥을 바닥에 흘리지 않고 작업하는 모습이 신기하기만 했다. 온 동네에 인분 냄새가 진동하고 오토바이조차 다닐 수 없는 좁은 골목길 등 불편한 생활이 이루 말할 수 없지만, 그래도 눈앞에 동태평양이 펼쳐지는
블루 조망권인 이곳에서, 평생을 함께 여행할 달동네 친구들을 만났다. 시골에 살 때도 몇 명의 친구가 있었지만 기억이 가물가물해서, 달동네 친구들이 나의 고향 친구나 다름없다.
고등학교 1학년 여름방학, 달빛이 무수히 쏟아지는 보름밤에 우리 달동네 친구 8명은 모임을 만들었다. 넓은
바다를 바라보며 꿈을 키우던 시절이라 누구랄 것 없이 혈기왕성하고 열정에 불타고 있었다. 모임 이름은 피닉스(Phoenix)라고 지었다. ‘불사조’! 영원히 변치 말자는 우정과 영원불멸의 의미를 담아 내가 작명을 하고 친구들의 추인을 받았다. 이름을 잘 지어서인지는 모르겠으나 우리 모임은 지금까지 49년을 이어 오며 우정을 돈독히 하고 있다. 우리 동네 한 복판으로 폭포 같은 실도랑이 흘렀다. 유유히 흐르는 시냇물이 아니라 고저 차이가 크다 보니 장마철에는 큰 울음을 내며 쏟아졌다. 혹여 건너다가 실수로 동전이나 소지품을 빠뜨리면 순식간에 떠내려가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다만 비가 올 때부터 며칠간만 흐르고 나서 이내 건천으로 변하기 때문에 우리 꼬맹이들은 비가 그치면 너나 할 것 없이 도랑으로 모여들었다.
마치 서부의 사나이들이 금맥을 캐러 나서듯, 잃어버린 무언가를 찾으려고 실도랑을 수색했다. 머리가 비상한
아이들은 작은 폭포 아래 움푹 파인 웅덩이 부근에 모여들었다.. 친구들은 그곳에 잠겨 있던 동전을 건져낸 경험이 여러 차례 있기 때문이다. 낚시하듯 건져 올린 1원짜리, 10원짜리 동전은 아버지가 주는 세뱃돈보다 나을 때도 있었다. 그때는 횡재를 한 냥, 쾌재를 부르며 좋아했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니 사실은 이 동전들이 철부지 우리가 놀면서 흘린 돈들이 대부분이었다. 이 일을 시작한 초기에는 개인이 수확한 만큼 가져가는 게 관습이었다. 나름 짭짤하게나마 수익이 있을 때는 그랬다. 하지만 전체 수확량이 줄고, 소득의 불균형이 생기자 나누어 갖자는 얘기가 나왔다. 누가 제안했는지 기억에는 없지 만 참 잘한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후에는 같이 애쓴 친구들과
똥과자(달고나)를 사서 뽑기도 많이 했다. 누구는 허탕 치고 누구는 횡재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니 공평한 배분이었다. 1970년대에 들어서자 새마을 운동이 한참 일어났다. 우리 동네도 산사태 방지사업이 먼저 있었고, 달동네 길 정비가 진행되면서 한동안 짭짤했던 ‘도랑 치고 가재잡기 알바’도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우리 꼬맹이들의 놀이터이자 생활터전인 실도랑을 복개하였기 때문이다.
우리 동네는 도랑을 중심으로 왼쪽은 9통, 오른쪽은 10통으로 행정구역이 나뉘었다. 도랑과 가장 인접한 9통에 나와 태열이, 동화, 재환이가 살았고, 조금 떨어진 곳에 종현이 집이 있었다. 10통에는 승문, 윤호, 성록친구 3명이 살았는데 나는 성록이 집에 2년 셋방살이를 하다가 9통으로 이사 왔으니, 편을 꼭 갈라야 할 땐 10통 팀 소속으로 게임을 하기도 했다.
승문이 집은 남쪽 담벼락이 도랑과 붙어 있었는데 우리 동네에서 가장 평수가 넓고 예쁜 정원도 있는 기와집이었다. 반면 우리 집은 기껏해야 12평 남짓한데 처음 이곳으로 이사 올 당시에는 방 한 칸에 8 식구가 함께 지냈다. 약 1년간 그렇게 생활하다 우리는 방 3칸 전체를 사용할 수 있었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 좁은 방에 어떻게 살았
는지 도저히 상상이 가질 않는다. 나중에 경산에서 작은 고모부가 오셨을 때 바로 밑의 남동생이 남산면에서 1년 정도 지내다 돌아온 것도 한입 덜려고 맡겼나, 하는 생각이 든다.
친구 승문이 집은 아마 우리 집의 10배쯤은 충분히 되지 않았을까 싶다. 그 친구 집 위쪽으로 성록이, 조금 떨어진 곳에 윤호가 살았으니 따지고 보면 달동네 친구들은 반경 50M 이내에 모두 옹기종기 모여 살았던 셈이다.
해마다 입춘과 우수가 지나면서 산동네 봄은 승문이 집 담장으로부터 왔다. 이르면 2월 말, 늦더라도 3월 초가 되면 봄의 전령사 개나리꽃은 겨우내 움츠렸던 우리 마음을 노랗게 녹인다. 도시생활에 바쁜 주민들에게 봄이 왔음을 알리고 달동네 곳곳에 온기를 불어넣는다. 개나리 꽃잎은 재주가 예사롭지 않다. 꽃잎이 종모양처럼 생겨서 그런지 산바람에 날릴 때도 뱅글뱅글 곡예비행을 하듯 실도랑에 살포시 내려앉는다. 그중에 뜻있는 몇 개의 꽃잎은 돛단배가 되어 기대와 깊은 정을 품은 채 희망의 바다로 흘러간다. 바다로 떠나간 꽃잎처럼 세월은 그리그리 흐르고 흘러 동무들은 어느새 할아버지가 되었다.
아쉽게도 달동네 친구들 중 조금 빠르게 하늘로 간 친구가 셋이나 있다. 아직은 좀 더 건강한 모습으로 만날 수 있으면 좋으련만 8명 중 3명이면 적은 숫자는 아니다. 최근의 연령별 생존확률 통계에 의하면 70세는 86%라고 하니, 가신 친구들은 천수를 다하지 못하고 질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75세는 54%, 80세는 30%, 85세는 15%, 90세 생존확률은 5%밖에 안된다고 한다. 즉 90세가 되면 100명 중, 95명은 저 세상으로 가고, 5명만 생존한다는
말이니 100세 시대라고 해도 가까운 지인 중에 의외로 먼저 떠나신 분들이 많다.
부잣집의 막내였던 승문 친구는 나에게 특별한 친구이다. 우리 집과 가장 가까이 살기도 했거니와 나의 풋사랑과 결혼하여 2년 전에 폐렴으로 세상을 떠났다. 또 한 친구인 재환이는 쌀가게를 하는 부모님 밑에서 넉넉하게 자란 친구인데 붓글씨를 유난히 잘 쓰는 친구였다. 다만 고등학교 다닐 때부터 결핵을 앓더니 40대 중반에 일찍 떠났다. 또 종현 친구는 우리보다 한 해 후배인데 유난히 팝송과 축구를 좋아하고 통이 큰 친구였는데 어느 날 믿을 수 없는 부음 소식이 들려왔다. 혹시 문자가 잘못 왔나 해서 몇 번이나 다시 읽어보다가 결국 회장에게 전화를 하고서야 우리 친구 소식임을 알게 되었다.
세상을 살아보니 벗의 죽음만큼이나 슬픈 소식이 없다. 부모 다음으로 애간장이 찢어지는 아픔이 따른다. 이 친구들이 먼저 가버리니 그의 가족들과도 소원해져서 안타까운 마음뿐이다. 달동네에 아직 뿌리를 두고 있다면
모르지만 대부분의 가족들이 이사를 가고 현재는 살지 않는다. 우리도 집만 덩그러니 남아있고, 동화라는 친구는 90 된 어머니가 홀로 자리를 지키고 있다. 동화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고향을 떠나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하며
경남북, 부산, 대구, 울산 등을 관할하는 금융계의 본부장으로 퇴직하였다. 나는 어릴 때 그 친구의 방에서 둘이 많이 자곤 했으니 동화도 나에겐 특별한 친구이다. 성록이는 우리가 이 동네로 이사 올 때 전세로 2년간 살았던 주인댁 둘째 아들이다. 사실 초등학교 한해 선배였지만 나와는 친구로 줄곧 지냈다. 내가 대학을 다니던 80년대 초에 그가 근무하는 대학병원에 하루가 멀다 하고 드나들었다. 학생이던 나는 풍류가 있는 그에게 늘 얹혀 다녔다. 외상값을 갚으러 갔다가 외상값보다 더 많은 외상을 지고 오기도 했다. 예전에 그 친구는 아버지의 사업부도로 중학교 졸업 후 학업을 포기하고 사회생활에 뛰어들었다.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늘 학업에 대한 갈망은 남아 있었다. 어느 날 친구가 ‘방송통신학교에 다니면 어떤가’에 대해서 물었다. 나는 정말 잘 생각했다면서 하트를
뿅뿅 날렸다. 50이 다 되어가는 나이에 늦지 않겠느냐, 괜찮겠느냐? 며 의욕은 있는데, 쉽게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있었다. 일단 전화로 용기를 북돋워주었다. 그리고 만나서 소주 한잔을 기울이며 ‘배고픈 설움보다 못 배운
설움이 더 크다’는 아버지의 말씀을 들려주었다. 성록이는 얼굴도 잘 생기고, 노래도 잘하고 인간성도 좋은 친구이다. 이후 3년 공부를 마치고 대학에 진학하여 어엿한 학사가 되었고, 의료계에서 퇴직한 지 몇 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어르신 송영 업무를 하며 열심히 살고 있으니 대단한 친구가 맞다. 태열이는 우리 뒷집에 사셨던 통장님 둘째 아들이다. 계산에 탁월하여 우리 초등학교 주산 1등이었다. 두열이 형이 권유하여 같이 배웠는데 나는 3급까지 딴 후 그만두고, 친구는 상고에 진학하여 동성화학에 취직했고 지금은 자영업을 하고 있다. 나하고는 생일이 비슷해서 그 친구의 생일을 아직도 기억한다. 나는 4월 30일 그는 4월 3일이라 늘 자신이 형이라고 우긴다.
윤호의 아버지는 도청 공무원이셨는데 본인도 19살에 세무공무원 시험에 합격하여 40여 년을 근무하고 퇴직
하였다. 친구들은 세금 문제에 대해서 늘 그에게 문의하면 절세 방법을 잘 찾아주니 항상 고마운 존재이다.
그러고 보니 달동네 친구들과는 모두 한결같이 특별한 사연이 있다. 칠순을 바라보는 나이에 이제 추억의 달동네에 친구들은 아무도 살지 않는다. 서울, 부산, 대구, 창원, 양산에 흩어져 살고 있다. 술과 친구는 오래될수록 좋다고 한다. 순수했던 어린 시절부터 친구 부모가 나의 부모였던 우리들은, 비록 몸은 멀리 있어도 마음만은 늘 함께한다. 어려운 일이 있거나 내 몸이 불편할 때면 고향 친구, 달동네 친구들이 보고 싶어 진다.. 일전에 개인 일정을 맞추어 보았지만 올해는 가능한 날이 없단다. 만남을 내년으로 미루다 보니 고향열차가 더욱 그리워진다.
아무래도 임진년 나머지 날들은 그리움만 가득 품고 옛 생각에 잠길 듯하다.
(22.12.14)
첫댓글 달 동네 친구들이 더 생각나지요." 빈천지교 불가망"이란 말이 있습니다. 어렵고 힘들 때 사귄 친구를 버리지 말라는 고어입니다. 늘 즐겁게 사세요. 글도 열심히 쓰세요.
'빈천지교불가망 ' 가슴에 새기겠습니다.
교수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