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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 오륜대 순교자 성지
도로주소: 부산시 금정구 오륜대로 106-1
여름 휴가철이면 많은 사람들이 찾는 남해의 항구도시 부산에는 한국 천주교회의 초석을 이룬 순교자들의 귀중한 유물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다. 지난 1982년 개관한 오륜대 한국순교자박물관(개관 당시 한국순교자기념관)은 소장품으로 볼 때 가히 한국 최고의 순교자 박물관이라 할 만하다.
뱃고동 소리 울리는 항구, 싱싱한 해물들이 지나는 사람들을 유혹하는 자갈치 시장, 파도가 철썩이는 해운대 해수욕장을 마다하고 흐르는 땀을 씻어 내면서 순교자들의 숨결을 찾아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부산역에서 전철을 타고 30분 남짓이면 장전역, 여기서 마을버스로 10분 정도 거리에 위치한 오륜대 순교자 성지와 구내의 한국순교자박물관은 무성한 숲 사이에 자리하고 있다.
입구를 들어서면 먼저 2014년 시복식을 기념해 설치한 순교복자 이정식 요한과 양재현 마르티노의 흉상 그리고 한복을 단아하게 입은 성모자상이 순례자들을 반기며 서있고, 바위에 새겨진 “우리는 순교자의 후손”이란 글귀 너머로 박물관과 순교자 성당 그리고 그 뒤로 야트막한 산비탈에 우거진 숲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박물관 외벽의 ‘오륜대 한국순교자박물관’이라는 명패를 보며 입구에 들어서면 “순교자의 후손은 살아 있다.”라는 글이 한눈에 들어와 자랑스러운 신앙 선조에 대한 뿌듯한 느낌을 갖게 된다.
박물관 앞마당 상설 전시장에 고증을 거쳐 절반 크기로 건조한 라파엘호.박물관 옆에 있는 순교자 성당 앞에는 작은 배 하나가 눈에 띄는데, ‘라파엘호’라는 이름이 붙여진 이 배는 한국의 첫 사제인 성 김대건(金大建) 안드레아 신부가 사제품을 받고 페레올(Ferreol) 신부와 다블뤼(Daveluy) 신부를 대동하고 상해에서 제주도로 표류한 끝에 강경(江景) 부근 황산포(黃山浦)에 상륙한 배를 고증에 의거하여 절반 크기로 건조한 것이다.
그 옛날 이 땅에 복음의 빛을 건네주기 위해 거친 풍랑을 헤쳐 오던 김대건 신부가 뱃전에 선 모습이 눈에 선한데, 바로 그 옆에는 많은 천주교인들이 처형된 돌 형구가 놓여 있어 당시의 박해 상황을 한마디로 이야기해 주는 듯하다. 마치 맷돌같이 가운데 구멍이 뚫려 있는 이 돌 형구는 병인박해 당시 천주교인들의 학살로 민심이 동요되자 정치적으로 불안을 느낀 대원군이 ‘소리 없이 죽이는 기계’를 만들라고 명해 고안된 것이다. 수많은 천주교인들이 목에 밧줄이 매인 채 구멍을 통해 반대편에서 잡아당기는 우악스런 손길에 의해 목숨을 빼앗겼다.
순교자 성당을 왼쪽에 두고 돌아가면 십자가의 길과 묵주기도의 길이 이어지는데, 그 초입에 부산 순교자 8위의 무덤이 말끔하게 정돈되어 있다. 73세의 노구로 모진 고문 끝에 사형을 당한 이정식 요한(1795-1868년), 그의 아들 이월주 프란치스코와 아내 박조이 마리아, 조카 이삼근 베드로 등 일가를 포함한 8위의 순교자들은 병인박해의 서슬 아래 1868년 9월 부산 수영장대(水營將臺)에서 군문효수형(軍門梟首刑)의 극형을 받고 순교했다. 이때 순교한 이들 중에서 이정식 요한과 그의 대자인 양재현 마르티노(1827-1868년)는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되었다.
이들 8명 중 순교복자 이정식의 일가 4명의 시신은 친척들에 의해 수습되어 부산 동래구 명장동 산96번지 부산 가르멜 수녀원 뒷산에 모셔졌다가 1977년 9월 19일 현재의 오륜대 한국순교자박물관 뒷동산으로 이장되었다. 다만 나머지 4명의 무덤은 찾을 수 없어 기념비만을 세워 두었다. [8위 순교자 중에서 이삼근과 이관복은 가족관계와 이름과 세례명 연결이 주교회의 편찬 약전과 수영장대 및 오륜대 순교자 성지의 안내문이 다르다. 여기서는 약전의 설명을 따른다.]
한국순교복자수녀회는 1946년 성 김대건 신부 순교 100주년이 되는 해에 방유룡 안드레아 신부에 의해 ‘복음 선포와 순교자 현양’을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한국순교복자수녀회는 설립 취지대로 순교자들의 정신을 기리고 순교 신앙을 후손 대대로 물려주기 위해 순교자 관련 유물과 교회사 관련 자료 등을 수집하거나 기증받아 이를 전시할 기념관 설립을 계획하였다. 마침 서울대교구에서 병인박해(1866년) 100주년 기념행사의 일환으로 1967년에 절두산 순교기념관(현 절두산 순교성지박물관)과 성당을 건립하자 한국순교복자수녀회는 서울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부산 지역에 한국순교자기념관을 건립하기로 결정하고 현 오륜대 부지에 분원을 설치하였다.
부산 수영장대에서 죽음으로써 신앙을 증거한 8위의 순교 100주년(1968년)을 기념해 오륜대에 한국순교복자수녀회 분원을 설치하고 곧이어 순교자기념관 및 순교자 성당 건립이 추진되었다. 1977년 7월 20일 제대 뒷벽에 한국 순교성인 유해 26위를 안치한 순교자 성당 축복식에 이어 1981년 10월 5일 한국순교자기념관 축복식과 척화비 복제, 라파엘호 모형 제작, 십자가의 길, 묵주기도 길, 성모동굴 조성 등을 마쳤다.
1982년 9월 25일 개관한 현 오륜대 한국순교자박물관에는 한국순교복자수녀회 창설 초창기부터 윤병현 안드레아 · 홍은순 라우렌시오 수녀 등 많은 수녀들이 전국에서 수집 · 연구하고 간직해 온 순교자들의 유물과 서책(書冊) 및 형구(刑具) 등이 풍부하게 전시되어 있어 양이나 질적인 면에서 매우 우수한 박물관으로 정평이 나 있다.
모두 3층으로 이루어진 박물관의 1층 한국 천주교회사 전시관에는 순교자들과 관련된 유물과 유품, 각종 자료와 형구 등이 전시되어 있고, 2층에는 한국교회사 · 궁중유물 · 오륜당(민족자료) · 성모성년 · 기념자료 전시관이 설치되어 있다. 3층에는 김인순 루갈다 기증품(민속품)과 도예작품 전시관과 특별 전시실이 마련되어 있고, 특별 전시실에서는 수시로 가톨릭 관련 전시 및 성화전 등을 기획하여 전시하고 있다.
1층 전시관 가운데에는 한꺼번에 많은 사람들을 죽이기 위해 고안된 대들보 사형틀이 있어 당시의 참혹한 광경을 연상케 한다. 또 죄인을 참수할 때 사용한 칼인 행형도자(行刑刀子), 태형이나 장형을 행할 때 쓴 태형대, 수십 종의 곤장, 목에 쓰는 칼 등이 철저한 고증에 의해 그 형태가 복원되어 전시되고 있다.
성 김대건 신부의 유물 중에는 유해를 관에 넣고 그 위를 덮었던 횡대(橫帶)와 친필 서간 등이 있고, 다산 정약용 세례자 요한, 성 베르뇌(Berneux) 주교와 권일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십자가 등도 눈에 띈다. 그리고 한 면에는 소학(小學), 다른 면에는 교리를 적어 둔 순교복자 윤봉문 요셉의 위장 교리서 등 희귀한 자료들이 풍부하게 소장되어 있다.
성모성년 특별 전시관에는 수십 수백의 성모상이 눈길을 끄는데 이중에는 필리핀의 수백 년 된 성모상에서부터 강화도 무명 순교자 무덤에서 발굴된 성모상과 일본의 ‘마리아 관음상’ 등 독특한 성모상들이 다수 있어 이채롭다. 또 2층과 3층에는 순종비(純宗妃) 순명효황후(純明孝皇后)와 의친왕비(義親王妃) 김수덕(金修德) 마리아가 기증한 궁중 유물, 대원군의 친필 등 왕실 유물과 김인순 루갈다가 기증한 조선시대 생활상을 알 수 있는 많은 민속품 등이 전시되어 있어 조선 말기와 개화기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2009년 3월 2일 오륜대 한국순교자기념관은 부산광역시에 1종 전문 박물관인 ‘오륜대 한국순교자박물관’으로 등록되어 가톨릭 신자뿐 아니라 일반 대중에게도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는 교육 · 문화 공간으로 거듭났다. 박물관 관람시간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고, 매주 월요일과 명절에는 휴관한다. 2013년 10월 4일부로 반세기 동안 성지를 지켜온 한국순교복자수녀회에서 부산교구로 성지의 관리 권한이 변경되었다. 부산교구는 이곳을 '오륜대 순교자 성지'로 명명하고 전담사제를 파견하여 미사와 각종 강의 등을 시행하여 순교자 정신의 계승에 힘쓰며, 노후화된 건물 개보수 등 본격적인 성지 정비 작업에 힘쓰고 있다. 2014년 9월에는 124위 시복을 기념해 입구에 이정식 요한과 양재현 마르티노 복자의 흉상을 제작해 설치했고, 8위 부산 순교자 묘역을 튼튼하게 보수하며 비석도 새로 세웠다.
[출처 : 주평국, 하늘에서 땅 끝까지 - 향내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가톨릭출판사, 1996, 내용 일부 수정 및 추가(최종수정 2016년 1월 27일)]
수영장대 순교자들
1868년 수영장대에서 순교한 이들은 동래 전교회장 이정식 요한과 그의 아들 이월주(프란치스코)와 아내 박조이(마리아) 그리고 조카 이삼근(베드로) 등 일가족 4명과 이관복(야고보), 차장득(프란치스코), 옥조이(바르바라), 이정식의 대자 양재현(梁在鉉, 마르티노, 1827-1868년) 등 8명이다. 이 중에서 이정식과 양재현은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되었다. [이들 중에서 이삼근과 이관복은 가족관계와 이름과 세례명 연결이 주교회의 편찬 약전과 수영장대 및 오륜대 순교자 성지의 안내문이 다르다. 여기서는 약전의 설명을 따른다.]
이들이 순교한 후 이정식 회장의 가족 4명의 시신은 친척들에 의해 거두어져 부산 가르멜 수녀원 뒷산(동래구 명장동 산 96)에 묻혔다가 1977년 9월 19일 오륜대 순교복자기념관(현 오륜대 순교자 성지) 뒷동산으로 옮겨 안장되었다. 이때 나머지 4명의 순교자들은 그 시신을 찾을 수 없어 기념비만 건립하였다.
복자 이정식 요한(1795-1868년)
이정식(李廷植) 요한은 경상도 동래 북문 밖에 살던 사람이었다. 그는 젊었을 때 무과에 급제한 뒤 동래의 장교가 되었으며, 많은 사람들에게 활 쏘는 법을 가르친 적도 있었다. 그러다가 나이 59세 때에 교리를 배워 천주교에 입교한 뒤로는 첩을 내보내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이 요한은 이후 가족을 열심히 권면하여 입교시켰으며, 누구보다 계명을 지키는 일에 열심이었다. 화려한 의복을 피하고, 항상 검소한 생활을 하였으며, 애긍에 힘쓰면서 비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데 노력하였다. 또한 작은 방을 만들어 십자고상과 상본을 걸어 놓고 묵상과 교리 공부에 열중하였다.
이러한 열심 때문에 이 요한은 입교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회장으로 임명되었고, 그는 언제나 자신의 본분을 다하였다. 그러던 가운데 1866년에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가족과 함께 기장과 경주로 피신하였다가, 다시 울산 수박골로 피신하여 교우들과 함께 생활하였다.
1868년 동래 교우들의 문초 과정에서 이 요한 회장의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자 동래 포졸들은 그가 사는 곳을 수소문하기 시작하였고, 마침내는 그의 거주지를 찾아내 그곳에 있던 교우들을 모두 체포하였다. 그때 이 요한의 아들 이월주 프란치스코와 조카인 이삼근 베드로는 이 요한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스스로 포졸들 앞으로 나와 자수하였다.
이내 동래로 압송된 이 요한 회장은 그곳에서 대자 양재현 마르티노를 만나 서로 위로하며 신앙을 굳게 지키자고 다짐하였다. 그리고 천주교의 우두머리로 지목되어 문초를 받게 되자, 이 요한은 천주교 신자임을 분명히 하고는 많은 교우들을 가르쳤다는 것도 시인하였다. 그러나 교우들이 사는 곳만은 절대로 입 밖에 내지 않았다. 또한 형벌을 받으며 배교를 강요당하였지만 끝까지 굴복하지 않았다.
이 요한과 동료들은 문초와 형벌을 받으며 47일 동안 옥에 갇혀 있으면서 고통을 당해야만 하였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신앙을 버림으로써 석방된 사람은 없었다.
동래 관장은 마침내 사형을 결정하였다. 그런 다음 옥에 있는 신자들을 끌어내어 군대 지휘소가 있는 장대(將臺)로 압송하였다. 이때 사형을 맡은 군사들이 부자(父子)를 한날에 죽이는 것을 꺼려했지만, 동래 관장은 동시에 사형을 집행하라고 명령하였다. 이 요한은 1868년 9월 참수형을 당하기에 앞서 삼종 기도를 바치고 십자 성호를 그은 다음에 칼을 받았다.
당시 이정식 요한의 나이는 73세였다. 그의 시신은 가족에 의해 거두어져 사형장 인근에 안장되었다. [출처 :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 편,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하느님의 종' 증거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서울(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4년]
이정식 요한은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복자 양재현 마르티노(1827-1868년)
1827년에 태어난 양재현(梁在鉉) 마르티노는 언제부터인가 경상도 동래의 북문 밖에서 살았다. 그는 동래에서 좌수(坐首)라는 직책을 갖고 있었는데, 어느 날 이정식 요한 회장을 만나면서 천주교 신앙에 대해 알게 되었고, 이후 그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1868년의 박해 때에 양 마르티노는 천주교 신자라는 사실이 알려져 동래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 당시 그는 포졸들이 집으로 들이닥치자 태연하게 그들을 맞이하며 관아로 끌려갔다.
이윽고 관장 앞으로 나가 문초와 형벌을 받게 되자, 양 마르티노는 천주교 신자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고는 형벌을 달게 받았다. 또한 관장이 배교를 강요하자, “절대로 천주교 신앙을 버릴 수 없다.”고 하면서 조금도 굴복하지 않았다. 그는 오랫동안 옥에 갇혀 있다가 다시 문초를 받고 수군의 병영으로 이송되었다.
양 마르티노는 수군의 병영에서 다시 문초와 형벌을 받았지만, 배교를 거부하였기에 옥에 수감되었다. 그러나 옥에 들어가서는 옥졸의 꾀임에 빠져 ‘돈을 주겠다.’고 약속한 뒤 몰래 그곳을 빠져 나와 집으로 되돌아갔다.
양 마르티노가 집으로 돌아가자 옥졸은 관장에게 가서 ‘죄수가 몰래 도망쳤다.’며 거짓으로 보고하였다. 이내 포졸들이 다시 양 마르티노의 집으로 몰려왔고, 그는 곧장 다시 체포되어 동래 관아로 압송되었다. 양 마르티노의 신앙심은 이때부터 다시 굳건해지게 되었다. 그는 혹독한 형벌에도 굴하지 아니하고 “천지의 큰 부모이신 천주를 배반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면서 신앙을 증언하였다.
이후에도, 양 마르티노는 통영에 있는 수군의 병영으로 이송되어 여러 차례 형벌을 받았다. 그러고 나서 다시 동래 관아로 끌려와 옥중에서 이정식 요한 회장과 동료 교우들을 만나, 서로를 위로하면서 신앙을 굳게 지키기로 약속하였다.
동래 관장은 마침내 사형을 결정하였다. 그리고 옥에 있는 신자들을 끌어내 군대 지휘소가 있는 장대(將臺)로 압송하였다. 이때 양재현 마르티노는 끝까지 배교를 거부하고 십자 성호를 그은 다음에 칼을 받았다. 그의 나이는 41세로 1868년 9월이었다. 당시 그의 시신은 가족에 의해 거두어져 사형장 인근에 안장되었다. [출처 :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 편,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하느님의 종' 증거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서울(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4년]
양재현 마르티노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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