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진강11/김용택
당신,
당신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곱게 지켜
곱게 바치는 땅의 순결,
그 설레는 가슴
보드라운 떨림으로
쓰러지며 껴안을,
내 몸 처음 열어
골고루 적셔 채워줄 당신.
혁명의 아침같이
산굽이 돌아오며
아침 여는 저 물굽이같이
부드러운 힘으로 굽이치며
잠든 세상을 깨우는
먼동 트는 새벽빛
그 서늘한 물빛 고운 물살로
유유히,
당신, 당신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시 읽기> 섬진강11/김용택
형님, 새벽 어둠이 방충망을 빠져나가다가 아귀 안 맞는 문짝 귀퉁이에 걸려 나방처럼 파닥입니다.
참새들이 목 이슬을 터는지 제 머리말이 소란스럽습니다.
1982년 부정기 무크지 『꺼지지 않는 횃불로』에 발표된 시편들로부터 『섬진강』, 『맑은 날』에
도달한 뒤 오늘에 이르기까지 형님의 시편들은 토박이 정서에 머물지 않고 농경 문화의 안팎을
감쌌습니다. 평생 뙤악볕에 그을려 얼굴이 더 이상 하얘질 가망이 없는 농사꾼들이 삶이 현대시의
중심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시편들은 한국시의 외연을 맘껏 확장한 자부심이었고 자존감
이었습니다.
형님, 땅이 순결을 간직한 ‘당신’ 섬진강 물길만을 뜻하지는 않을 터입니다.
저는 당신을 ‘가락’으로 읽습니다. 3·4조 내지 ·4조 연속체로 가락을 확보했던 과거의 시가詩歌에서
벗어나 불규칙한 단어 배열과 불규칙한 행갈이를 통해 확보되는 시의 유연한 가락이 시행 마디
마디에서 당신을 끌어냅니다.
산굽이 돌아오며 아침을 여는 물결처럼 “먼동 트는 새벽빛/그 서늘한 물빛” 곱디고운 물살로 당신이
다가오는 것 같습니다. 물굽이마다 햇살에 반짝일 시의 가락이 당신이 손길처럼 따뜻합니다.
아름답습니다. 예쁘다는 말의 의미는 몸에 가까운 것들을 골고루 아낄 줄 아는 당신의 마음결이라고
시의 가락은 설렙니다.
불감증을 나무라듯 “잠든 세상을 깨우는” 당신이 문득 서럽습니다. 송홧가루 묻은 눈썹을 닦으며
두릅과 취를 내미는 산천이 순력이 돈과 문명에 소외된 것은 아닐까를 살펴보게 합니다.
―이병초, 『우연히 마주친 한 편의 시』, 형설출판사, 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