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아트힐 원문보기 글쓴이: 필하모니
산유화
산에는 꽃이 피네 꽃이 피네 피네 Tenor. 박인수, 1938년 5월 13일 ~ 서울에서 태어나 경동고등학교와 서울대 음대 성악과 졸업. 천부적인 재능을 바탕으로 오늘날 성악의 발판을 다져온 박교수는, 1967년, 오페라 <마탄의 사수>에서 '막스'역을 시작으로 음악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해 <사랑의 묘약>에서 '네몰리노'역을, <라보엠>에서 '로돌포'역을 성공적으로 소화해내 그 능력을 크게인정 받았다. 더욱 폭넓은 음악공부를 위해 뉴욕으로 유학을 떠난 그는 쥴리어드 음악대학에서 세계적인 소프라노 '마이아칼라스'의 지도를 받으며 American Opera Center를 수료하였고, 뉴욕주립대학 대학원 음악과와 뉴욕맨하탄의 음악대학원을 수료하였다. 이후 세계적인 거장 '조르지오토찌'의 제자로서 지도를 받으며,<리골레토>의 '공작'역, <피델리오>의 '플로레스탄'역에 출연하여 평론가들의 극찬을 받았다. 특히 그의 <피델리오>를 보고 영웅적이라는 찬사를 아까지 않은 뉴욕타임스의 극찬을 통해 국제적인 오페라 가수로도 인정받았다. 이처럼 화려한 이력과 세계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는 명성을 가진 "테너 박인수" 교수가 올 7월 샌디에이고를 찾는다. 샌디에이고 중앙일보가 한인 커뮤니티를 위한 문화 행사 일환으로 한빛교회와 함께 마련한 여름 음악회에 초대된 때문이다. "아름답다 소문난 샌디에이고에서는 처음으로 갖는 공연입니다. 중앙일보 샌디에이고 지사의 도움으로 이번 음악회가 기획되었다는 소식에 기쁜마음으로 흔쾌히 공연 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의 명성에 비추어 본다면 험블하기 그지없는 작디작은 음악회에 아무런 사심없이 공연을 허락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장소는 중요한게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음악은 본질이 가장 중요합니다. 옛날 유럽의 공연장이 거의 소극장이였는데요. 개인적으로는 관객과의 호흡을 쉽게 느낄수 있는 소규모 공연이 더 좋습니다. 사진을 보니 한빛교회 정도라면 훌륭하지요." 40년 이상 노래를 하고 있지만 여태껏 노래를 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가 본인의 노래를 좋아해 주고 일부러 찾아와 들어주는 관객이 있기 때문이라 한다. 지금껏 분에 넘치게 많은 사랑을 받아왔다고 고백하는 박인수 교수. 사랑을 받는 것도 기쁜일이지만 받은 사랑을 나누는 것에 보람을 더 많이 느끼게 된다며 기회만 주어진다면 어디든 사양없이 달려가 기쁘게 공연하겠다는 그의 말투에서 진실로 겸손함이 묻어난다. 우리 대중들에게도 잘 알려진 前 서울대 교수이신 테너 박인수교수님의 공연이 (사)박인수와 음악여행 창립연주회가 청향회의 주최로 있다는 것을 알고 갔었다. 테너 박인수하면 1989년 가수 이동원과 함께 부른 “향수”를 떠올리게 된다. 저 개인적으로 그는 맑고 깨끗한 음색과 혼이 깃든 노래를 부르며 순수대중음악을 넘나드는 자유인이라고 평하고 싶다. 먼저 그를 알기 위해서는 음악계에서 일어난 몇가지 혁신적인 사건(?)을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다. 김성태 金聖泰, 1910. 11. 9 ~ 기독교 가정에서 자라 어릴 때에 서양음악을 교회에서 접했다. 그는 18세(1927, 경신중학교 2년)의 비교적 늦은 나이에 바이올린을 배우기 시작하였는데 일본으로 편입학하여 일본 교토 양양중학교를 졸업했다(1930~1931). 한국으로 돌아와 잠깐 연희전문학교 상과에 축구 특기자로 다니면서 현제명과 채동선에게 작곡을 배웠는데 현제명과의 만남은 두 사람이 거의 인생의 동반관계가 되는 계기가 되었다. 김성태는 동경고등음악학교(현 구니다치음악대학)에 입학하여 작곡을 공부하였고, 1935년에 졸업했다. 귀국한 그는 경성보육학교 합창단 상임지휘자(1939~1945)와 보성전문학교 음악강사로 활동하였다. 1943년에는 만주신경교향악단에 입단하여 당시 영화 <사랑과 원수>의 영화음악을 작곡하기도 했다. 해방 후에 채동선이 설립한 고려교향악단의 객원지휘자(1945~1946)로 지내면서 현제명이 설립한 경성음악학교에서 가르쳤다. 경성음악학교가 서울대학으로 편입된 1946년부터 정년이 된 1976년까지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교수로 지냈다. 이 학교에서 그는 장기간 학장직을 맡았다. 1955년부터 1956년의 일 년간 미국 인디애나주립대학교 대학원에서 작곡을 공부, 1969년 연세대학교에서 명예문학박사 학위를 받기도 했다. 은퇴 후에는 한국방송윤리위원회 위원(1971), 예술원장(1993), 주식회사 예음 대표이사(1984)를 지냈다. 김성태는 화려하고 기나긴 경력에 비해 작품 수가 매우 적다. 또한 뛰어나거나 대단한 크기의 작품도 없다. 그의 음악은 기본적으로 조성을 바탕으로 한다. 대중적인 <이별의 노래>와 같은 것이 바로 그러한 것이다. 또한 한국 민요를 바탕으로 한 기악곡 역시 기본적 장단조 화성에 바탕을 둔 것이다. 실험적인 가곡에서는 약간의 조심스러운 모험을 펴기도 했다. 하지만 그 실험이 일정한 작곡 시스템에 이르지 못했다. 김성태는 당대 세대의 작곡가들이 보여준 서양음악의 수용, 한국 전통음악과의 융합, 약간의 현대성을 보여준다. 김소월 金素月, 1902. 8. 6 ~ 1934. 12. 24 한국의 시인이다. 본명은 김정식(金廷湜)이지만, 호인 소월로 더 널리 알려져 있다. 본관은 공주이다. 서구 문학이 범람하던 시대에 민족 고유의 정서에 기반을 둔 시를 쓴 민족 시인으로 잘 알려져 있다. 1902년 8월 6일에 평안북도 구성군에서 태어났다. 1904년 처가로 가던 부친 김성도는 정주와 곽산을 잇는 철도 공사장의 일본인 목도꾼들에게 폭행당한 후 정신 이상자가 되었다. 이후 김소월은 광산을 경영하는 조부의 손에서 컸다. 김소월에게 이야기의 재미를 가르쳐 주어 영향을 끼친 숙모 계희영을 만난 것도 이 무렵이다. 남산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15년 오산학교에서 조만식과 평생 문학의 스승이 될 김억을 만났다. 김억의 격려를 받아 1920년 동인지 《창조》5호에 처음으로 시를 발표했다. 오산학교를 다니는 동안 김소월은 왕성한 작품 활동을 했으며, 1925년에는 생전에 낸 유일한 시집인 《진달래꽃》을 발간했다. 1916년 오산학교 재학 시절 고향 구성군 평지면의 홍단실과 결혼했다. 3·1 운동 이후 오산학교가 문을 닫자 배재고보 5학년에 편입해서 졸업했다. 1923년에는 도쿄상업대학교에 입학하였으나, 같은 해 9월에 관동대지진이 발생하자 중퇴하고 귀국했다. 이 무렵 서울 청담동에서 나도향과 만나 친구가 되었고 《영대》동인으로 활동했다. 김소월은 고향으로 돌아간 후 조부가 경영하는 광산일을 도왔으나 일이 실패하자 처가인 구성군으로 이사하였다. 구성군 남시에서 개설한 동아일보 지국마저 실패하는 바람에 극도의 빈곤에 시달렸다. 본래 예민했던 그는 정신적으로 큰 타격을 받고 술로 세월을 보냈으며, 친척들로부터도 천시를 당했다. 1934년 12월 24일 곽산에서 아편을 먹고 음독자살한 시체로 발견되었다. 사후 43년 만인 1977년 그의 시작 노트가 발견되었는데, 여기에 실린 시들 중에 스승 김억의 시로 이미 발표된 것들이 있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김억이 제자의 시를 자신의 시로 둔갑시켜 발표했던 것이다. 1981년 금관 문화훈장이 추서되었으며 서울 남산에 그를 기리는 시비가 있다. 음원출처:http://gagok.co.kr 이미지출처:http://upload.wikimedia.or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