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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歷史) 왜곡(歪曲), 조작(造作)을 부추기는 위정자(爲政者)들
○ 국민(國民)들은 차치(且置勿論)하고라도, 위정자(爲政者)들의 한국사(韓國史) 인식(認識)은 과연 어떨까?
「매우 심각(深刻)한 수준(水準)이다.」라고 자신(自信)있게 말할 수 있다. 보수주의자(保守主義者)니, 진보주의자(進步主義者)니 하는 편 가르기는, 지들의 명예(名譽)와 부(富)와 권력(權力)의 싸움일 뿐이다.
이들 양 진영(陣營)【보수주의자(保守主義者), 진보주의자(進步主義者)등의 양 진영(陣營)】의 역사인식(歷史認識)도, 보수(保守)와 진보(進步)에 따라 달라야 하는 것이 정상(正常)일진대, 대한민국(大韓民國)의 보수(保守), 진보(進步)는 똑같은 반도사관(半島史觀)과 식민사관(植民史觀)의 테두리를 조금도 벗어나지 않는 모범생(模範生)들이다.
「틀리다고 서로에게 삿대질한다거나 욕해대는 것이라고는, 건국(建國)이니 뭐니 하는 웃기지도 않는 일을 가지고 열에 바쳐 침을 튀긴다.」 이게 대한민국(大韓民國) 현주소(現住所)다. 이런 형편(形便)이다 보니, 이들에게 역사인식(歷史認識)을 재고(再考)하라는 등의 이야기는, 아예 통하지 않는다.
일제(日帝)의 마지막 식민지(植民地) 총독(總督)이었던 자(者)가, 눈물을 흘리면서 열도(列島)로 돌아갈 때, 〈나는 다시 돌아온다. 반도(半島) 땅은 50년 후(後)나 일백(一百)년 후(後)나, 그들은 싸움질로 날 샐 거다. 나는 분명 다시 돌아온다.〉고 말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게 무슨 뜻일까? 일제(日帝) 36년 통치(統治)기간에, 조선반도(朝鮮半島) 백성(百姓)들을 순화(醇化)시켜, 영원(永遠)한 일제(日帝)의 부역자(附逆者)들로 만들기 위해, 소위(所謂) 공교육(公敎育) 개념(槪念)을 도입(導入)하고, “불쌍한 조선(朝鮮)백성(百姓)들을 위해서…” 라는 미사려구(美辭麗句)와 함께 ‘한글’을 보급(普及)하면서, 일제(日帝)와 어용(御用)사학자(史學者)들이 새롭게 만든 「식민지(植民地) 백성(百姓) 순화용(醇化用) 조선사(朝鮮史)」를 세뇌교육(洗腦敎育)시켰다.
이때 교육(敎育)된 조작(造作)된 조선사(朝鮮史)는, 73년이 지난 지금(只今)도, 공교육(公敎育)이란 이름으로 학생(學生)들에게 가르쳐지고 있으며, 온갖 매체(媒體)들을 동원(動員)하여, 미화(美化)되어, 국민(國民)들에게 세뇌(洗腦)되고 있는 것이다.
○〈식민지(植民地)의 마지막 조선(朝鮮) 총독(總督)의 “한 마디”는, 지금도 조선반도(朝鮮半島) 하늘을 뒤덮고, 이 망언(妄言)의 한계(限界)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 이유(理由)는 뭘까?
위정자(爲政者)들과 학계(學界)의 ‘커넥션’이랄 수 있다. 상부상조(相扶相助)한 탓이다. 여기에 국민(國民)들까지 합세(合勢)하여,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게 문제(問題)다.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게 문제(問題)인 것이다.
○ 사례(事例)를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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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향신문 기사(記事) 인용(引用) -
○ 2018년 11월 07일 경향신문을 보면 : [허 왕후… …친선인가 촌극인가]하는 제목의 기사가 있다. 그 일부를 보면,
《김정숙 여사의 이번 인도 방문은, 지난 7월 문 대통령이 인도를 방문했을 때 모디 총리가 허왕후 기념공원 착공식과 힌두교의 전통 축제를 함께 개최해 양국 교류 역사를 축하하자며 고위급 대표단 파견을 요청해 성사된 것입니다. 이번 방문에는 도종환 문체부 장관도 수행단에 포함됐습니다. 두 나라가 친선을 도모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실존 여부가 불분명한 신화 속 인물의 기념공원 착공식에 국가를 대표한 외교사절단을 보낸다는 게 과연 적절한 일일까요. 중략.
허왕후는, 정말 인도에서 왔나 【이광수 부산외국어대 교수(인도학부)의 <인도에서 온 허왕후, 그 만들어진 신화>(2017, 푸른역사)를 중심으로 이모저모로 살펴봤습니다.】
삼국유사에는 또 허왕후가 가야로 올 때 파사석탑을 가지고 왔다는 이야기도 실려 있습니다. <삼국유사>에 허 왕후의 고향이라고 나오는 ‘아유타’는 ‘아요디아’를 한자식으로 표기한 것입니다. 지금 인도 “우타르 프라데시 주”에도 같은 이름의 도시가 있습니다. 이번에 김정숙 여사가 방문한 바로 그 도시입니다. 그러나 <삼국유사>의 아유타가 바로 지금의 아요디아라는 증거는 없습니다. 이광수 교수에 따르면 아요디야라는 도시는 기원 후 5세기 이전에는 존재한 적이 없습니다. 허왕후가 한반도로 왔다는 시기와는 최소 400년 이상 차이가 납니다.
아요디아는 힌두교의 신화적 서사시인 <라마야나>에만 등장하는 도시 이름이었습니다. 그러다가 기원 후 5~6세기 무렵에 실제 도시 사케타를 ‘아요디아’로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허 왕후가 설령 인도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지금의 아요디야에서 기념행사를 하는 건 엉뚱해 보입니다. 허 왕후는 인도 사람일까요. 허 왕후가 인도에서 왔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김해 납릉(김수로왕릉)의 정문 단청에 그려진 쌍어문과 주변 비석의 머리에 새겨진 문양, 김해시 구산동의 허왕후릉 옆 파사석탑 등을 제시하지만, 이광수 교수는 모두 근거가 없다고 단언합니다.
정문 단청의 쌍어문(물고기 두 마리가 서로 마주보는 문양)은 조선 정조 때 그려 넣은 것이어서 시기가 맞지 않습니다.
파사석탑은 김해시 구산동 허 왕후 릉 옆에 실제로 있습니다. 하지만 이 또한 증거능력이 취약하다는 게 이 교수의 견해입니다. <삼국유사>를 보면 가락국을 향해 출발한 허왕후가 풍랑을 만나 고향으로 되돌아가는데, 왕으로부터 이 탑을 받아 배에 싣고 나서야 안전하게 가락국에 도착했다고 나옵니다. 그러나 이 교수는 (1) 당시 인도에는 불탑이라고 부를 돌탑이 없었다는 점 (2) 당시 인도의 항해술을 고려할 때 돌무더기를 가지고 풍랑을 이겨내며 그 먼거리를 항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점 (3) 주술용이라 볼 수도 있지만 당시 인도에서는 탑을 주술용으로 쓴 적이 없다는 점 등을 들어 후대에 조작된 것이라고 말합니다. 고려 시대에는 특이한 모양의 돌로 쌓은 탑을 숭배하는 풍습이 있었는데 이 같은 풍습이 불교와 만나 만들어진 설화일 뿐이라는 겁니다.
■ 허왕후, 어떻게 ‘신화’에서 ‘역사’가 되었나
이 교수에 따르면 허 왕후는 15세기 이후 실존 인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15세기면 조선시대죠. 거기에는 이런 사정이 있었다고 합니다.
“허왕후의 역사적 실체화는 조선조 양반 가문정치의 산물이다 (중략) 당연히 격이 높은 성씨이 구성원들은 본관을 명예롭게 생각하게 되고 그 격을 더 높이기 위해 온갖 방법을 다했다. 이러한 현상이 조선 중기 이후 본격적으로 심화되었다. 허왕후가 역사적 실존인물이 된 것은 바로 이 시기였다. 조선에서 상당히 지체 높은 가문으로 자리 잡은 양천 허씨가 허왕후를 적극적으로 역사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1970년대에는 아동문학가 이종기씨(1929~1995)가 <가락국탐사>라는 책을 써서 허왕후가 실제 인도에서 온 사람이라고 주장했습니다.
허 왕후를 역사로 만든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고 이광수 교수가 지목하는 인물은 <김수로왕비 허황옥, 허왕후 루트> 등의 책을 쓴 고고학자 김병모 한양대 명예교수입니다.
“그는 20세기에 들어와 만들어진 이야기가 마치 ‘가락국기’ 기술 당시의 원형인 것처럼 말했고, 그것으로 수로왕 시대의 역사를 논했다. 그리고 그 결과물을 주로 검증이 필요하지 않은 언론에 무차별적으로 실었다.”
■ 인도는 왜 허왕후를 좋아하나
허 왕후가 인도에 알려진 것은 1980년대 이후 한국과 인도의 교류가 본격화하면서부터입니다. 인도에 부임한 외교관들이 허왕후 이야기를 꺼내며 친분을 쌓았고 반대로 한국에 부임하는 인도 외교관들도 그랬습니다.
김해시는 아요디아시와 지난 2000년 자매결연을 맺고 2001년에 인도 우프라 프라데시 주정부로부터 아요디아 지역 사라유 강변 인접 약 2,430㎡의 부지를 제공받아 허왕후 기념비와 공원을 조성했습니다. 2015년 방한 당시 모디 총리는 한국-인도 정상간 양국이 공동으로 허왕후 기념공원 리모델링 사업을 추진하기로 합의해, 인도 정부가 사업부지와 공사비를 제공하고, 한국 정부는 설계공모를 통해 설계안을 선정하는 한편 디자인 감리를 맡기로 했습니다.
주목할 점은 기념공원이 있는 아요디아가 현재 인도 집권당이자 힌두 근본주의 정당인 인도국민당의 거점과도 같은 곳이라는 사실입니다. 아요디아는 힌두교에서 라마신이 힌두교 군주의 이상 정치를 구현하는 곳으로 인식되기 때문입니다. 힌두 근본주의자들은 1992년 12월 라마 사원을 복원하다는 이유로 기존 이슬람 사원을 파괴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232명이 숨졌습니다. 김정숙 여사를 초청한 모디 총리는 2001년 구자라트에서 힌두교도들이 이슬람 교도를 습격해 집단 학살이 일어났을 당시 구자라트주 총리로 학살을 방조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는 인물입니다. 최근에는 서울평화상문화재단이 모디 총리를 서울평화상 수상자로 선정해 인권단체들이 ‘전두환에게 상을 준 꼴’이라며 반발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힌두 근본주의 성향의 모디 총리와 인도국민당은 역사 교과서 개편을 추진해왔는데, 그 방향은 정치적 라이벌인 인도국민회의와 연관된 역사적 인물들을 깎아내리고 힌두교 우월주의를 강화하는 것입니다. 이에 따라 인도 서부 라자스탄 주에서는 2016년 공립학교 교과서에서 초대 총리 자오할랄 네루와 간디에 대한 내용이 삭제됐습니다. 모디 총리는 2016년 고대사재검토위원회를 설치해 인도 지식인들로부터 신화와 역사를 혼동한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습니다.
▶관련기사: 모디 총리 집권 4년, 인도 교과서 '역사왜곡' 논란
그렇다면 인도 총리가 허 왕후 이야기를 보는 시각은 어떤 것일까요. 이광수 교수는 “아요디아에서 힌두 여인이 아시아 맨 끝 한국의 기원 초기에 그곳으로 건너가 왕비가 되었다는 사실은 힌두 문명의 위대함을 역설하는 데 최고의 소재가 되는 것”이라고 지적합니다.
이런 맥락을 감안하면 김정숙 여사의 아요디아 허 왕후 기념공원 착공식 참석은, 양국 친선이라는 좋은 명분을 갖고 있기는 하지만, 찜찜함이 남는 게 사실입니다. “일개 설화에 등장하는 인물을 주제로 벌어지는 수수께끼 같은 일에 일국의 대통령 부인과 장관이 국가를 대표한 사절로 참가하는 촌극”(이형구 동양고고학연구소장)이라는 비판이 나오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 경향신문 기사(記事) 인용(引用) 끝 -
※ 위에서 인용(引用)한 경향신문(京鄕新聞) 기사(記事)는, 오로지 “인용(引用)”만을 목적(目的)으로 한 것이다. 이 기사(記事)를 가지고 경향신문(京鄕新聞)의 기사(記事)에 대한 시시비비(是是非非)를 가린다거나, 비난(非難)하는 것임이 아님을 첨언(添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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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許) 왕후(王后)는, 진실(眞實)로 인도(印度)의 아유타국(阿踰陀國)에서 왔을까?
역사통설(歷史通說)【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에서 말하기를 :
➊ 수로왕(首露王) : 가락국(駕洛國)의 시조(始祖). 성은 김(金). 신라(新羅) 3대 유리왕(儒理王) 19(42)년에 김해(金海)의 귀지봉(歸旨峯)에서 하늘로부터 떨어진 6개의 금란(金卵)이 모두 사람으로 변(變)하여 육가야국(六伽倻國)의 임금이 되었다고 하는데, 이는 그 여섯 형제(兄弟) 중(中)의 맏이로 김해(金海) 김씨(金氏)의 시조(始祖)이기도 함.
➋ 수로왕릉(首露王陵) : 경상남도(慶尙南道) 김해읍(金海邑) 서상동(西上洞)에 있는 가락국(駕洛國)의 시조(始祖) 수로왕(首露王)의 능(陵)
➌ 허(許)왕후(王后) : 수로왕(首露王)의 왕후(王后)는 아유타국(阿踰陀國)의 공주(公主) 허 황옥(許黃玉)이라 한다.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에 의하면 / 駕洛國 許皇后 : 허황옥【許黃玉, 32년 ~ 189년 : 필자(筆者) 주(注) : 157년을 살았다는 이야기다. 이건 소설(小說)이다.】은 가락국의 초대 왕인 수로왕의 부인으로, 허황후 또는 보주태후라고도 한다. 야유타국(월지국)의 공주로, 48년에 오빠 장유화상 및 수행원들과 배를 타고 가락국에 와서 왕후가 되었다. 거등왕을 비롯해 아들 10명을 낳았다.
허황후(許皇后)라고도 하며, 김해 김씨(金海金氏)와 김해 허씨(金海 許氏)의 시조모이다. 삼국유사의 가락국기(駕洛國記)에 따르면, ‘허황옥’은 본래 아유타국(阿踰陁國:월지국)의 공주인데 부왕(父王)과 왕후가 꿈에 상제(上帝)의 명을 받아 공주를 가락국 수로왕의 배필이 되게 하였다. 공주는 많은 종자(從者)를 거느리고 김해 남쪽 해안에 이르렀다. 이에 수로왕은 유천간(留天干), 신귀간(神鬼干) 등 많은 신하들을 보내어 맞으며, 황후로 삼았다고 전한다. 황후는 태자 거등공(居登公)을 낳았으며, 188년에 죽으니 나이 157세였다고 한다. 구지봉(龜旨峰) 동북쪽 언덕에 장사지냈다고 하는데, 현재 경상남도 김해시 구산동(龜山洞)의 고분이 허황후의 능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허황옥이 먼 바다를 건너 남방(南方)에서 왔다는 것에 대해서는 이설(異說)이 별로 없으나, 인도 아유타국에서 왔다는 것에 대해서는 불교가 들어온 이후에 이야기가 덧붙여졌다고 보아 본래의 시조설화가 윤색되었다는 견해가 많다. 이러한 설화는 동남아시아에서도 많이 발견되고 있다. 시호는 보주태후(普州太后)이다.
➍ 아유타국(阿踰陁國) : 고대 가락국(駕洛國)의 수로왕(首露王)의 비(妃) 허황옥(許黃玉)의 모국(母國). 고대(古代) 인도(印度)의 아요디아(Ayodhya) 왕국으로 추정된다. (인용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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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렇게 설명(說明)하고 있는 것이 백(百)이면 백(百)이다. 모든 것들이 추정(推定)이다. 곧 추측(推測)해서 판정(判定)해보니 그렇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증거(證據)나 근거(根據), 고증(考證)등이 없고, 유물유적(遺物遺蹟) 또한 확정적(確定的)인 것이 없다보니 “소설(小說)”처럼 만들고 있는 것이다.
과연(果然) 이런 설명(說明)이 옳은 것일까? 인도(印度)에서 한반도(韓半島)까지는 : 직선거리(直線距離) 해로(海路)로, 약(約) 8,000km 【약 2 만리(萬里)】 가량이나 되며, 돌고 돌아오는 길은 수천(數千)리를 더 보태야 할 것 같다. 이게 21세기(世紀) 오늘날이라면 충분(充分)히 있을 수 있는 일이겠지만, 기원전(紀元前)과 기원후(紀元後)의 몇 십년(十年) 사이라면, 또 2 천년(千年) 전(前)의 일이라면 : 이건 100% 부정적(否定的)이다.
(1) 〈시호는 보주태후(普州太后)이다.〉에서, 왜 보주(普州)태후(太后)라고 했는가? 이게 또 중요(重要)한 거다. “보주(普州)”는 지명(地名)으로 대륙(大陸) 사천성(泗川省)에 있다.
반도(半島) 경상도(慶尙道) 남(南)쪽의 “김해(金海)”지방에 있었다는 가락국(駕洛國)에서, 보주(普州)라는 지명은 없다. 또 이곳이 왜 ‘금해(金海)’가 아닌 ‘김해(金海)’라고 해야 할까?
보주(普州) : 지명대사전(地名大辭典)에서는,〈사천성(泗川省)의 안악군(安岳郡)이다. 안악현(安岳縣)이다.〉라고 하였다. 성도(成都)의 동남(東南)쪽에 있다.
(2) 가장 중요(重要)한 것은 “가락국(駕洛國)”이 반도(半島) 남부(南部)에 있었느냐? 하는 원초적(原初的)인 문제(問題)제기(提起)이다.
있었는지, 없었는지 조차 알지 못하는, 주제(主題)파악도 못하는 자(者)들이, 무슨 경상도(慶尙道) 남(南)쪽에 “가락국(駕洛國)”이 있었다고 할까?
(3) 하늘에서 금란(金卵) 6개가 떨어져 사람이 되었다는 식(式)의 이야기는 이 행성(行星)에서 수없이 많은 이야기들이 있다. 〈188년에 죽으니 나이 157세였다고 한다.〉고 하였는데, 이 역시(亦是) 전해져 오는 이야기일 뿐이다.
또 ‘157’세라는 말은, 가야(伽耶)에 대한 기록(記錄)이 없다보니, 공백(空白)을 메우기 위한 꼼수일 확률이 99.99%다.
(4) 이러한 여러 가지 의문(疑問)을 해결(解決)하기 위해서, 소위(所謂) “릉(陵)”이라는 묘지(墓地)를 발굴(發掘)해보면 알 수 있는 일일 것이다. 〈수로왕릉(首露王陵)이나 구산동(龜山洞)의 고분(古墳)이 허(許)황후(皇后)의 능(陵)이라고 전(傳)해지고 있으니, 발굴(發掘)해보라는 것이다.〉간단(簡單)한 방법(方法)이 아니겠는가!
○ 오늘날 반도(半島) 땅에 있는 선조(先祖)들의 유적(遺跡)이라고 팻말을 설치(設置)하고, 새롭게 단장(丹粧)하고, 홍보(弘報)하면서, 관광객(觀光客)을 끌어들이기 위해 무진(無盡) 애를 쓴다. 그러나 확실(確實)하게 말할 수 있는 증거(證據)나 근거(根據), 또는 고증(考證)되는 것들이 무엇이 있느냐 하는 거다.
대부분(大部分)의 것들이 소위(所謂) 해설(解說)이라는 명목(名目)하에, 원전(原典)과 다르고, 지형(地形)지세(地勢), 자연환경(自然環境)인 것들을 설명(說明)할 수가 없다. 언제까지 이런 한글 해설(解說書)만을 갖고 국민(國民)들에게 들이댈 거냐는 거다.
세뇌교육(洗腦敎育)이란 밀실(密室)에서, 협박(脅迫)과 고문(拷問)속에 이루어지는 것이 다가 아니다. 미사려구(美辭麗句)를 앞세워 공교육(公敎育)이란 미명하(美名下)에 벌어지는 의무교육(義務敎育)속에서도 얼마든지 가능(可能)하고, 실제(實際) 현장(現場)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이 현실(現實)이다. “반도(半島)조선왕조(朝鮮王朝)”를 머릿속에 각인(刻印)시키고 있는 것이 아니냐?
2018년 11월 18일 〈글쓴이 : 문무(文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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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본 필자는 지금도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바로 '한글보급'이다.
일제(日帝)가 소위 소학교를 개설하면서 가르친 것이 바로 가나나다라....로 시작되는 한글교육이었다. 이는 식민통치를 원할하게 하려는 '문맹퇴치'에서 시작된 것이리라. 그렇다면 당시 일제 식민지속에서 "한글 보급을 앞장 섰던 자"들이 바로 일제의 조선총독부였다. 물론 말기에는 한글을 억압하고 일본어를 강제 주입했지만, 그 이전엔 '일제가 한글 보급에 앞선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런데 힌글보급에 앞장 선 인물들은 무엇이라 평가해야 되겠는가? 하는 의문이다.
일제강점기 초기와 중기 및 말기를 별도로 이해해야 될까?
새로운 현대사 해석이 요구되는 때다.
일단 일본이란 나라 자체가 여러 세력들의 집합체라 그 안에서 암투와 혈투가 계속 일어났으며 일제 강점기36년중에 1912년 가쓰라 내각사퇴로 다이쇼시대가 26년까지 있었고 그 후로 쇼와시대들어와서 쿠테타와 만주사변전에 확 바뀌는 시기가 있었던걸로 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