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쇤브룬 궁전과 그 정원이라는군요.
오스트리아의 빈시 남서쪽 교외에 있는 합스부르크가의 왕궁. 프랑스의 베르사유궁전에 자극되어 당시 독일 ·오스트리아에 많이 세운 바로크양식의 대표적인 대궁전으로 방이 1,441개나 되며, 그 대부분은 로코코양식의 실내장식으로 꾸며져 있다.

호프부르크 왕궁.
오스트리아의 빈시 남서쪽 교외에 있는 합스부르크가의 왕궁. 프랑스의 베르사유궁전에 자극되어 당시 독일 ·오스트리아에 많이 세운 바로크양식의 대표적인 대궁전으로 방이 1,441개나 되며, 그 대부분은 로코코양식의 실내장식으로 꾸며져 있다.
합스부르크라는 이름은 슈트라스부르크 주교인 베르너와 그의 매부인 라트보트 백작이 1020년에 아르 강이 내려다보이는 아르가우(지금의 스위스)지방에 세운 합스부르크 성 또는 하비히츠부르크 성('매의 성')에서 유래했다. 라트보트의 할아버지인 군트람은 이 가문의 조상 가운데 기록을 더듬을 수 있는 가장 오래된 시조이다. 군트람은 아마도 950년에 독일의 왕 오토 1세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킨 군트람 백작과 동일인물인 듯하다.
대공위시대 이후 실력있는 국왕의 출현을 꺼린 독일 제후에 의해 1273년 루돌프 1세가 국왕으로 선출되었다. 왕위에 오른 루돌프 1세는 교묘한 정책결혼으로 오스트리아공령(公領)을 가령(家領)으로 몰수하는 등 번영의 기초를 닦았다. 14세기 스위스독립전쟁에서는 패하였으나 동쪽으로는 가령을 더욱 넓혔고 루돌프 4세 때는 대특허장을 위조하여 대공(大公)이라 칭하였다.
1452년 프리드리히 3세가 신성로마황제가 된 뒤 합스부르크가는 사실상 황제 지위를 독점하였다. 막시밀리안 1세는 혼인정책으로 에스파냐·부르군트를 합병하였고 손자 카를 5세 치하에서는 합스부르크제국을 이룩하였다. 1522년 카를 5세는 상속에 관한 브뤼셀협약에 의하여 동생 페르디난트 1세에게 독일의 가령과 황제위 계승권을 양도하고 26년 보헤미아·헝가리를 합병하였으나 독일의 종교개혁 및 분쟁으로 55년 아우크스부르크화의를 맺고 56년 스스로 퇴위하였다.
카를 5세의 장자 펠리페 2세가 반(反)종교개혁을 추진하여 에스파냐왕국은 전성기를 맞았으나 프랑스·영국에 이어 네덜란드와의 대적으로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독일에서는 종교분쟁과 상속다툼으로 페르디난트 2세 때는 30년전쟁으로 발전하여 국토가 황폐하여 졌으나, 가령에서는 레오폴트 1세가 전(全)헝가리를 확보하여 빈은 다뉴브제국의 중심이 되어 바로크문화를 꽃피웠다.
한편 에스파냐계는 카를로스 2세에서 단절되고 에스파냐계승전쟁 후 1713년 위트레흐트조약에 따라 왕위는 부르봉가로 넘어갔다.
오스트리아계의 카를 6세는 1713년 국사조서(國事詔書)를 발표하여 전가령 비(非)분할과 일괄상속 실현을 위해 노력하였으나 장녀 마리아 테레지아는 오스트리아계승전쟁·7년전쟁으로 슐레지엔을 잃었다.
한편 바이에른에서는 황제 카를 7세를 선출하였으나 그의 죽음을 계기로 45년 드레스덴화약이 성립되어 제위를 되찾고 남편 프란츠 1세와 장자 요제프 2세의 공동치하에서 계몽적인 국내개혁을 추진하였다. 요제프 2세는 관용령(寬容令)·농노해방령 등으로 급진적 개혁을 단행하였으나 프랑스혁명이 일어난 뒤의 국제적 반동화 속에서 계몽군주 레오폴트 2세는 국내의 반동화 움직임을 저지하지 못하였다.
나폴레옹전쟁에서 패배, 라인동맹이 채결되어 16영방이 신성로마제국으로부터 탈퇴를 선언하게 되자, 최후의 황제 프란츠 2세는 제관(帝冠)을 사퇴함으로써 신성로마제국은 사라졌다.
합스부르크왕가의 황제는 루돌프 1세(1273-91 재위)에서 필립 1세까지 이어졌다가 에스파냐 합스부르크왕가와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왕가로 나뉘어져진다. 에스파냐는 카를 5세 (1519-56 재위) 부터 오스트리아는 페르디난트 1세 (1556-64재위)부터 시작되었다. 따라서 합스부르크왕가 전체의 역사가 신성로마제국의 단일역사가 아니라 유럽의 역사라고 할 수 있으며, 오스트리아의 역사에 근접하고 합스부르크왕가의 역사가 매우 길어 끝을 맺는다.
역시 동양사람이 알고 있는 유럽 최대의 왕가 다운 모습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