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후(비오)와 을해박해 순교자
김해 김씨 안경공파인 김대건 가문의 신앙에 대해선 맏아들 김종현이 이존창에게서 교리를 전해 듣고 형제들에게 전하면서 비롯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덕산의 김종연('현'의 오자) 형제가 명례동에 거주하는 김 주부에게 배웠다"는 기록으로 미뤄 김종현이 1785년 이전에 김범우에게 천주교를 배웠음을 알 수 있다. 1785년이면 김대건 신부의 증조부인 김진후(비오, 1739~1814)의 나이 47세인데, 김진후는 세상의 영예, 곧 권세와 쾌락만을 갈망했기에 천주교 신앙에 대해서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고 한다. 특히 지방 군수 밑에서 작은 관직을 하나 얻자 자식의 권유를 강하게 물리쳤다. 그러다가 50세쯤 신앙을 갖게 되면서 모든 세상 영예에 대한 생각을 버리고 열심히 신자의 본분을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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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탁희성 작 제111도 '김진후 비오의 옥중신공'.
김대건 신부의 증조부인 그는 10년간이나 옥고를 치르면서도 기쁨 속에서 기도로 옥중생활을
하다가 순교했다고 전해진다.
김진후가 처음으로 체포된 것은 1791년으로 체포되자마자 신앙을 고백했으나 풀려났다. 이후에도 너덧 차례 체포돼 홍주(현 홍성)와 청주, 공주로 끌려가 신문과 형벌을 받았는데도 역시 풀려났다. 어떤 이유에서였는지는 모른다. 1801년 신유박해 때는 체포돼 배교하고 유배됐으나 얼마 후 해배됐다. 이어 1805년 체포돼 해미로 압송돼 고문을 당하면서도 신앙을 고백했으나 오랫동안 사형선고가 내려지지 않은 채 옥에 갇혀 있었다. 하지만 옥중에서도 점잖고 품위 있는 처신으로 해미 관리나 옥리들에게서 존경을 받았으며 이로 인해 드러내놓고 신자로서 본분을 지킬 수 있었다. 무려 10년이나 옥에 갇혀 있던 그는 마침내 1814년 12월 1일 76세의 나이로 옥사한다. 사망 이유는 알려져 있지 않다.김진후의 순교에 이어 1815년 박해가 일어난다. 이에 앞서 1814년 전국에 심각한 기근이 든 데다 경상도의 경우 수재까지 겹쳐 어려움이 가중되자 교우들의 재산을 노린 배교자 전지수(혹은 전지순)의 탐욕이 박해의 빌미가 돼 경상도 북부와 강원도 남부 일대에서 박해가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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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탁희성 작 제136도 '옥중에서 서한을 쓰는 김종한 안드레아'. 옥
고를 치르면서도 그는 형과 친지들에게
편지를 보내 신앙을 권면하고 순교의지를 다졌다.
이것이 '을해박해'다. 박해는 1815년 부활 대축일에 청송 노래산에서 고성운(요셉, ?~1816)ㆍ성대(베드로, ?~1816) 형제 등 35명이 체포돼 경주진영으로 압송되면서 비롯됐다. 이 중 19명은 배교했고, 2명은 옥사했으며, 14명은 다시 대구감영으로 이송됐다. 같은 시기 진보 머루산에서 김시우(알렉시오, 1782~1815)를 비롯한 33명이 체포돼 안동진영으로 압송된다. 영양 우련밭과 곧은장에서도 김종한(안드레아, ?~1816), 김희성(프란치스코, 1765~1816) 등 6명이 체포돼 안동으로 갔다가 대구감영으로 이송된다. 그 결과 총 33명이 대구감영에서 사형선고를 받았고 1년 5개월 뒤에야 처형이 결정된다. 그 사이에 33명이 옥사하거나 병사했다.
1816년에 사형이 집행된 사람은 고성운ㆍ성대 형제와 김종한, 김희성, 김화춘, 최성열, 이시임 등 7명이었다. 이로써 경상도와 전라도에 새로 생긴 많은 교우촌들이 파괴됐다.충청도 면천 솔뫼 출신으로 김진후의 아들이자 김제준 성인의 삼촌, 김대건 신부의 종조부인 김종한은 맏형 김종현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한 뒤 고향에서 신앙생활이 자유롭지 못하자 영양 우련밭(경북 봉화군 재산면 갈산리)으로 이주, 17년간 숨어 지내다가 체포돼 1816년 12월 19일에 참수됐다. 같은 충청도 서산 출생인 김강이(시몬, ?~1815)는 전라도 고산으로 이주했다가 진보 머루산(경북 영양군 석포면 포산동)으로 갔으나 을해박해 당시 체포돼 1815년 12월 5일 원주에서 옥사했다. 김희성은 1801년 신유박해 당시 예산에서 순교한 김광옥(안드레아)의 아들로, 을해박해 때 영양 곧은장에서 체포돼 1816년 12월 19일 대구에서 참수됐다. 또한 충청도 청양 출신 김시우는 1815년 5~6월께 굶주림과 형벌에 이질까지 겹쳐 옥사했고, 충청도 덕산 출신 이시임(안나, 1782~1816)은 4살짜리 아들이 품 안에서 옥사하는 고통을 겪으면서도 신앙을 지키다가 1816년 12월 19일 대구에서 참수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