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도전과 이방원의 대담
드라마 <정도전>의 인기가 매우 높다. 흔히 역사적으로 정도전과 대비되는 인물은 이방원이다. 정도전이 왕권과 신권의 조화를 꾀하는 이상적인 왕도정치를 표방하였다면, 이방원은 그와는 달리 강력한 왕권에 바탕을 둔 왕조국가를 지향했다.
우리 시대 대표적 지식인 복거일이 얼마 전 펴낸 책 『역사가 말하게 하라』(다사헌 발간)에는 정도전과 이방원의 가상 대담이 실려 있다. 권력 쟁탈에 대한 당사자들의 소회가 담담하게 서술되고 있다. 조선이 고려와 달리 과부의 재가(再嫁)를 금한 것을 이방원이 아쉽게 여기는 흥미로운 부분도 담겨 있다.
복거일은 이 책에서 한반도의 지난 역사를 돌이켜 각 시대 흥망성쇠의 고비마다 발생한 결정적 사건들을 그 사건의 주축이 되었던 대표 인물들 22쌍의 입을 통해 풀어내고 재해석한다. 계백과 김유신, 장보고와 문성왕, 소손녕과 서희, 묘청과 김부식, 최충헌과 만적, 정도전과 이방원, 세종과 최만리, 세조와 김종서, 인현왕후와 장희빈과 같은 대표적 라이벌뿐 아니라 상대적으로 소홀히 다뤄졌던 낙랑국의 왕조와 왕준, 시모노세키 조약을 맺은 이홍장과 이토 히로부미, 6·25전쟁의 미·중 양진영 군지휘관 매슈 리지웨이와 펑더화이 등 고조선부터 대한민국에 이르기까지, 쟁쟁한 맞수들이 총출동한다.
다음은 이 책에 실린 정도전과 이방원의 가상 대담이다.
정도전(鄭道傳)과 이방원(李芳遠)
정치적 상황
1388년 위화도 회군으로 권력을 장악한 이성계(李成桂)는 1392년 조선왕조를 세워 태조(太祖)로 등극했다. 태조는 여덟 왕자들 가운데 막내인 방석(芳碩)을 사랑해서 세자로 삼았다. 태조의 건국 과정에서 공이 크고 재능이 뛰어난 다섯째 아들 방원은 세자책봉에 불만이 컸다. 1398년 태조가 병이 깊어서 정사를 제대로 살피지 못하자, 방원은 정변을 일으켜 실권자인 정도전과 세자 방석을제거하고 권력을 장악했다. 권력을 잃은 태조는 둘째 아들 방과(芳果)에게 전위하여 정종(定宗)이 즉위했다. 방원이 넷째 왕자인 방간(芳幹)과의 싸움에서 이겨 권력을 온전히 하니, 1400년에 정종은 방원에게 선위했다.
정도전
고려말기부터 조선 초기에 걸쳐 활약한 학자이자 정치가(1342 – 1398). 이색(李穡)의 제자로 불교를 배척하고 유학을 숭상했으며, 우왕 치세 고려 조정의 친원(親元) 정책에 반대하고 친명(親明) 정책을 지지했다.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으로 권력을 장악하자, 조준과 함께 이성계의 참모가 되어 개혁정책을 추진했다. 이어 우왕과 창왕을 신돈(辛旽)의 자손이라고 주장하면서 폐위하고 시해하는 일을 주도했다. 1392년에는 이성계가 조선 왕조를 세우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해서 개국1등공신이 되었다.
정도전은 태조 치세에 판의흥삼군부사(判義興三軍府事) 등 요직들을 역임하면서 정무와 군무를 실질적으로 관장했다. 그는 조선 왕조의 기틀을 세우는 데 중심적 역할을 했으니, 한양(漢陽)으로 수도를 옮기는 일을 주관했고,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과 <경제문감(經濟文鑑)>을 지어 제도를 세웠고, <고려사(高麗史)>를지었으며, 병제를 개편하고 국경의 수비를 강화했다.
그러나 태조의 뜻을 따라 방석을 세자로 삼았으므로, 정도전은 필연적으로 야심이 큰 방원과 대립하게 되었다. 1398년 (태조 7년) 8월에 방원이 정변을 일으키면서, 그에게 피살되었다. 시호는 문헌(文獻)이다.
이방원
조선조 제3대 왕인 태종(1367-1422). 태조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인 방원은 왕조 창건 과정에 참여하여 공을 세웠다. 태조가 막내 방석을 세자로 삼자, 불만을 품고 1398년에 정변을 일으켜 방석과 당시 실권을 쥔 정도전일파를 제거하고 권력을 장악했다. 1400년에는 형인 방간과의 권력 투쟁에서 이겨 권력을 완전히 장악했고 그 해에 정종의 선위를 받아 즉위했다.
그는 자질이 뛰어나서, 내치와 외교에서 훌륭한 업적을 남겼다. 불교를 배척하고 유학을 이념으로 삼았고, 관제를 개편했고, 화폐의 중요성을 인식해서 지폐인 저화(楮貨)를 유통시켰으며, 호패법(號牌法)을 세워 주민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면서도 신문고(申聞鼓)를 통해서 민심을 들으려 애썼고, 서책들을 간행했다. 당시 조선에 대해 위협적 태도를 보인 명과의 어려운 교섭을 잘 수행해서 조공에 바탕을 둔 우호적 관계를 맺었다. 조선조는 그의 치세에 튼튼한 기반이 마련되었다고 할 수 있다.
대담
사회: 두 분 사이의 관계가 그러한지라, 감회도 깊으시겠습니다.
이방원: 문헌공(文憲公)을 이렇게 뵈오니, 참으로 감회가 깊습니다.
정도전: 대군을 뵈오니, 소인도 감회가 깊습니다.
사회: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그래도 문헌공께선 마음이 아프실 터입니다.
정도전: 마음이 아프지 않을 수야 없소만, 정안대군(靖安大君)과의 관계는 개인적 원한을 넘어서는 일입니다. 원래 권력은 비정하지요. 나 자신이 손에 피를 묻혔으니, 그것도 내가 모셨던 임금님들의 피를 묻혔으니, 내가 권력 투쟁에서 패해 죽었다고 어떻게 개인적인 감정을 품겠습니까? 나는 고려조 최후의 세 분 임금님들께 지은 죄를 생각하면서 하늘이 내리는 벌을 받는다는 생각으로 죽음을 맞았습니다.
사회: 두 분께선 조선 왕조 창건 과정에서 함께 일하셨지요?
이방원: 문헌공께서 일을 도모하실 때, 나도 참여해서 함께 일했습니다.
정도전: 여러 왕자들 가운데 대군의 공이 가장 컸습니다.
사회: 조선 왕조의 기틀은 두 분께서 만드셨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 상황은 어떠했나요?
이방원: 실제로 우리 왕조의 기틀은, 한양 천도에서부터 제도의 제정에 이르기까지, 문헌공 주도 아래 만들어졌습니다. 문충공(文忠公)[조준]과 문헌공 두 분의 공이 으뜸이었죠.
정도전: 대군께서 즉위하신 뒤 개혁 정책들을 꿋꿋이 밀고 나가신 덕분에, 조선 왕조의 기반이 튼튼해졌습니다. 덕분에 대군의 아드님 세종(世宗) 치세에 우리나라가 융성할 수 있었죠.
이방원: 문충공과 문헌공 두 분께서 만들어 놓으신 제도들이 워낙 훌륭해서 그대로 이어받아 상황에 맞게 조정해서 실행하면 일이 잘 되었습니다. 덕분에 부패하고 혼란스럽고 무능했던 고려에서 바로 힘찬 조선 사회가 나올 수 있었습니다.
사회: 전하의 묘호(廟號)인 태종은 원래 당(唐)의 이세민(李世民)에게 바쳐진 것입니다. 그 뒤로 태종이란 묘호는 대개 왕조의 창건에서 시조에 버금가는 공헌을 한 임금에게 올려졌습니다. 요(遼)의 야율덕광(耶律德光), 송(宋)의 조광의(趙匡義), 금(金)의 완안오걸매(完顔吳乞買), 몽골의 오고타이(窩活台), 명(明)의 주태(朱棣), 그리고 청(淸)의 황태극(皇太極)처럼 태종의 묘호를 받은 임금들은 왕조의 창건에서 아버지나 형을 돕고 재위시엔 강역을 크게 넓혀 왕조의 기틀을 다진 사람들입니다. 우리 역사에선 전하께서 바로 그런 인물이셨습니다. 문헌공께선 그런 뜻으로 말씀하신 것같습니다.
정도전: 그렇습니다. 대군께 올려진 태종이란 묘호는 참으로 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사회: 전하께선 당 태종과 여러 면들에서 비슷하십니다. 인물이 뛰어났고, 왕조의 창건에서부친을 도와 크게 공헌했고, 정변을 일으켜 형제들을 죽이고 권력을 쥐었고, 즉위 뒤엔 뛰어난 치적을 남기셨습니다. 전하께선 혹시 의식적으로 당 태종을 본받으려 하시진 않으셨는지요?
이방원: 동양 제일의 명군으로 꼽히는 당 태종과 비교되는 것은 지나친 칭찬입니다. 그러나 그 분의 행적을 살피고 좋은 점들을 본받으려 애쓴 것은 사실입니다. 솔직히 말씀 드리면, 내가 형제들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일을 당 태종의 행적에 비겨 정당화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이왕 손에 형제들의 피를 묻혔으니, 나라를 잘 다스려서 그 죄를 씻자고 다짐도 많이 했습니다.
사회: 전하께서 무인년에 일으키신 정변은 본질적으로 태조대왕으로부터 권력을 빼앗는 일이었습니다. 그런 일은 아주 어렵습니다만 단숨에 성공했습니다. 문헌공께선 어떻게 보시는지요?
정도전: 궁극적 책임은 내게 있습니다. 내가 부족해서 세자와 무안대군(撫安大君)[태조의 일곱째 아들 방번(芳蕃)]이 살해되고 무고한 목숨들이 도륙당하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허무하게 기습을 당한 사정을 얘기하자면, 역시 장자가 아닌 의안대군(宜安大君)[방석]을 세자로 삼은 일을 먼저 꼽아야 하겠죠. 태조대왕께서 무안대군과 의안대군을 사랑하셔서 두 분 가운데 한 분을 세자로 세우고 싶어 하셨습니다. 그래서 내가 주동해서 의안대군을 세자로 세웠습니다. 모든 일이 거기서 비롯했죠. 장자 대신 지차가 왕위를 이으면,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지만, 이 경우엔 의안대군이 계비 신덕왕후(神德王后) 소생이었다는 사실 때문에 문제가 커졌습니다. 신의왕후(神懿王后) 소생 여섯 분 대군들께선 당연히 반발하셨죠.
사회: 그런 반발이 예견되었으니, 대책을 세우셨을 터인데...
정도전: 세우긴 했습니다. 그때 나라가 선 지 얼마 되지 않았으므로, 왕자들이 사병(私兵)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사병들을 보유하는 것을 금했습니다. 그리고 세자가 왕위를 물려받는 과정을 순탄하게 하려고, 나머지 왕자들은 모두 지방으로 옮기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대책들이 제대로 시행되지 않았습니다. 태조대왕께서 다른 왕자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품으셨고 혹시 왕자들이 해를 입지 않을까 염려도 하셨고. 그래서 왕자들을 느슨하게 감시한 것이 화근이 되었습니다.
사회: 전하께선 그런 조치를 어떻게 보셨습니까?
이방원: 우리 여섯 형제들이 모두 벼랑 끝으로 몰렸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들은 사병들을 빼앗겨 힘을 잃었고 도성 한양을 떠나 지방으로 쫓겨났습니다. 다음에 우리에게 닥쳐올 일은 뻔했습니다. 그래도 부왕께서 살아계실 때는 목숨은 부지하겠지만, 부왕께서 돌아가시면, 우리 형제들은 다 죽을 터였지요. 고려 왕조가 망할 때, 우리 손에 고려 왕실의 피를 흥건히 묻힌 터에, 무슨 요행을 바라겠습니까? 더구나 문헌공은 우왕(禑王), 창왕 (昌王), 공양왕(恭讓王) 세 임금을 망설임 없이 시해한 터였으니, 우리 왕자들의 목숨을 무겁게 여기겠습니까?
정도전: 대군 말씀이 그른 말씀은 아닙니다. 내가 제대로 대비하지 못한 데는 내 자신의 안위가 걸린 일에 마음이 쓰여서 왕자들의 동향을 파악하는 데 소홀했던 사정도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그때 명이 우리가 올린 표전(表箋)에 명을 모욕하는 글귀가 있다고 트집을 잡으면서 표전을 지은 나를 잡아 보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내가 그 문제에 대처하는 데 마음이 쏠려서, 왕자들의 움직임을 제대로 감지하지 못했습니다.
사회: 당 태종과 전하는 무력으로 정변을 일으켜 집권하신 과정이 아주 비슷합니다. 불리한 상황에서 정변을 일으켜 권력을 장악하셨는데, 성공의 결정적 요인은 금군(禁軍)을 우군으로 끌어들인 것이었습니다. 당의 수도 장안(長安)의 궁정을 지킨 금군의 사령부는 궁성의 북문인 현무문(玄武門)에 있었습니다. 당의 건국 과정에서 군사를 이끌었던 이세민은 현무문의 장군들을 포섭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리고 수하들과 함께 현무문 안에 매복했다가 형인 태자 건성(建成)을 기습해서 죽이고 현무문의 군사들로 건성의 군사들을 막아냈습니다.
세민이 궁성을 장악하자, 아버지 고조(高祖)는 자신이 실권을 잃었음을 인정하고 세민에게 전위했습니다. 전하도 비슷한 과정을 통해서 즉위하셨습니다. 전하께서 금군을 장악하고 동궁의 세자를 죽였어도, 태조께선 저항 없이 권력을 내놓으셨습니다. 물론 사서엔 그런 사정이 나오지 않습니다. 오히려 문헌공께서 변란을 도모했고 그래서 문헌공의 제거가 중요한 고비였다는 취지로 정변의 과정을 설명했습니다. 실은 ‘현무문의 변’도 사서엔 크게 뒤틀리게 기록되었고, 근년의 연구에 의해 비로소 그 실체가 드러났습니다. 전하의 의견은 어떠하신지요?
이방원: 사회자 말씀이 틀린 것은 아닙니다. 다만 당시 우리 형제들이 벼랑 끝으로 몰려서 극단적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정은 고려되어야 할 것입니다.
사회: 조선 왕조가 들어서면서, 우리 사회에 근본적 변화들이 나왔습니다. 아마도 가장 큰 변화는 불교가 배척되고 유학이 숭상된 것이었습니다. 그런 변화는 문헌공께서 주도하셨고 전하께서 강력하게 추진하셨는데, 당시 상황을 말씀해주셨으면 합니다.
정도전: 유학은 나라의 운영에 실질적 도움이 되는 학문입니다. 그래서 동양에선 예로부터 유학이 기본 이념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정치와 행정에 참여한 사대부계층은 자연스럽게 유학을 따르게 되었죠. 특히, 고려 말기에 성리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고 사대부들이 성리학을 연구하고 받아들였습니다. 반면에, 불교는 고려 왕조의 공식적 종교였지만, 너무 영향력이 커져서, 나라에 짐이 된 상태였습니다. 조선 왕조가 새로 서면서, 불교를 버리고 유학을 통치의 기본으로 삼은 것은 자연스러운 선택이었습니다.
이방원: 문헌공 말씀이 맞습니다. 유학을 나라의 기본 이념으로 삼은 터라, 불교를 억제하는 일은 당연했습니다. 불사들과 불승들이 수도 너무 많고 재산도 너무 많아서, 나라를 제대로 다스리려면, 불교를 억제하는 정책을 펼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회자: 두 분 말씀은 이내 이해됩니다. 문제는 조선 왕조의 기본 이념으로 채택된 성리학에 내재한 부정적 특질들이 세월이 지나면서 점점 큰 영향을 미쳤는데 그것을 바로잡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성리학의 문제적 특질들을 지적하면, 바로 이단으로 몰려 패가망신하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정도전: 그런 폐단이 실제로 나오긴 했습니다. 유학은 공자와 맹자 같은 성현들의 말씀에 바탕을 두었지만, 따지고 보면 그분들은 중국 사람들이고 중국적 상황에 바탕을 두고 이론을 세웠지요. 우리는 그 점을 간과하고 절대적 진리로 떠받들었습니다.
사회자: 성리학은 중국에서 노장(老莊) 사상의 유행과 불교의 흥성이라는 상황에 유학이 적응하는 과정에서 나왔습니다. 원래 유학은 실천적인 이념이어서 철학적 체계가 빈약했었는데, 성리학에선 그런 부족함이 많이 보완되었습니다. 성리학의 진화는 당 말기에서 시작되어 송에서 완성되었습니다. 송이 요, 서하, 금 같은 북방 이족 왕조들의 핍박을 받았고 끝내 원에게 패망했다는 사실은 당연히 성리학에 깊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송의 유학자들은 중국의 문화적 정체성에 대한 관심이 컸고 외래 종교이며 북방 왕조들이 열렬히 따르는 불교를 배척했습니다. 그래서 불교의 보편성까지 거부되었고 성리학엔 중국중심주의와 폐쇄성이 짙게 배었습니다. 문헌공께선 이 점을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정도전: 이제 돌아보면, 그런 면이 있었습니다. 어떤 종교나 이념도 부정적 특질들을 지니는데, 처음엔 그것들을 알아보기 어렵습니다. 세월이 지나야, 그것들이 드러나죠. 성리학이 조선 사회를 정체적 사회로 만든 면은 아쉽습니다.
이방원: 나로서 특히 아쉬운 부분은 과부의 재가(再嫁)를 금한 조치입니다. 고려 시절엔 과부가 다시 결혼하는 것은 당연하게 여겨졌는데, 유학을 나라의 근본이념으로 삼은 뒤, 과부의 개가를 억제하는 정책을 펴게 되었습니다. <경제육전(經濟六典)>을 편찬할 때, 과부의 개가를 금하자는 얘기가 처음 나왔는데, 그 뒤로 개가한 여인의 자손들의 벼슬길이 막혔고 끝내는 법으로 개가를 막았습니다. 개항한 뒤 갑오경장으로 비로소 과부의 개가를 막는 법이 폐지되었지요.
사회자: 송 시대엔 일반적으로 여성에 대한 차별이 심해지고 여성의 권리가 줄어들었습니다. 당에선 측천무후(則天武后)가 나왔지만, 송에선 전족(纏足)한 여인들만 나왔습니다. 송의 학자들과 관리들은 여성을 차별해서 여성의 권리가 줄어드는 경향을 옳다고 보았습니다. 이런 편견은 성리학자들이 유난히 심하게 품어서, 성리학의 창안자들 가운데 하나인 정이(程頤)는 과부가 개가하는 것보다는 굶어 죽는 것이 낫다고까지 했습니다. 자연히, 고려 사회보다 조선사회가 여성 차별이 훨씬 심했습니다. 외국의 사조와 문물을 받아들일 때, 그것들이 나온 상황에서 스며든 편향들을 살펴서 보편적 특질들만을 받아들이려는 노력이 중요함을 일깨워줍니다.
정도전: 맞는 말씀입니다.
사회자: 한 나라의 기틀을 마련하는 일은 더할 나위 없이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 과업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신 두 분께서 지금 살고 있는 저희에게 좋은 말씀을 해주기 바랍니다.
정도전: 힘이 약하면, 이웃에게 핍박당하는 것은 개인이나 나라나 똑같습니다. 부디 국력을 키우는 일에 모두 나서야합니다.
이방원: 좋은 말씀입니다. 우리가원에 복속했을 때, 늘 핍박과 수탈을 당했는데, 가장 괴로운 것이 미녀들을 바치는 일이었습니다. 주기적으로 원의 관리들이 와서 고운 처녀들을 뽑아서 데려가니, 당사자들의 고통은 말할 것도 없고 나라가 점점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불행하게도, 명이 대신 들어선 뒤에도, 그런 공녀(貢女)의 관행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거의 해마다 명의 사신이 와서 미녀들을 바치라고 요구했습니다. 그 일처럼 작은 나라의 설움을 깊이 느낀 일은 없었습니다. 지금도 그 일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픕니다. 역사를 살피면, 중국에 강대한 왕조가 들어서면, 우리는 늘 공녀들을 중국에 바쳤습니다. 신라는 당에 스스로 미녀들을 바치기까지 했습니다. 국력을 키우는 데 힘쓰기 바랍니다. 힘이 약하면, 힘 센 이웃에게 어떤 형태로든지 핍박을 받게 마련입니다.
등록일 : 2014-03-14 10:09 | 수정일 : 2014-03-14 13: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