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13:12~20)
Now that I, and your Lord and Tecaher, have washed your feet,
you also should wash one another's feet.
I have set you an exmaple that you should do as I have done for you.
(14~15절)
너의 주인이며 선생인 내가 너희 발을 씻기는 것처럼
너희도 서로의 발을 씻어주어야 한다.
내가 한 거서럼 너희들이 해야 할 것의 모범을 보이는 것이다.
본문은 예수님이 제자에게 행하는 세족식에 대한 이야기이다.
작고 섬세한 것부터 엄청나고 규모 있는 일까지
사랑과 은혜의 양상은 다양하지만
오늘 세족식을 통해서, 상징을 담아 타자에게 행해야 할
헌신과 사랑을 몸소 보여주신다.
예수님의 우리를 향한 간곡한 부탁일 것이다.
단순한 세레모니가 아니라 우리에게 분별력이 있다면
그 일의 의미와 뜻을 깊고 넓게 헤아려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아침에 영화배우 20대 약관의 김새롬씨가 사망했다는 소식이
너무 충격적이었다.
그의 인상적인 영화,
그후 그가 연루된 사건들,
지친 모습으로 낚시 연예프로그램에 출연하던 장면,
너무 무분별하고 폭력적인 대중의 질타 등이
내 마음 속에 있었다.
그리고는 비극적인 소식이 알려진 것이다.
'분별력', '분별의 의무'가 핵심어로 다가왔다.
그가 연루된 과실과
그가 감당해야 할 징계에 대해서 분별력 없이
쏟아내는 인간 군상의 (형벌 받지 않는) 중죄가 너무 원망스럽다.
그가 과실을 했지만, 그렇게까지 할 일은 아니었다.
차라리 항상 그렇게 하는 대중이라면
'일관성'이라고 있다고 평가하겠지만
반대로,
자신과 사회적인 관점이 다르다는 이유가 발단이 되어
국가를 위기에 빠뜨리고 다수의 생명을 앗아갈 수 있는
계엄을 '계몽령'이라고 얼토당토하지 않게 낮춰 포용하는 관점은 또 무엇인가?
사회적인 관점의 차이와 계엄 사이에는
우주와 같은 괴리가 있다.
김새롬씨가 범했던 과실과 그가 감당해야 했던 형벌 사이의 괴리처럼 말이다.
사람이 참 악하다.
도대체 왜 이렇게 악할까?
그래서 하나님이 '죄'를 유일한 대적으로 삼으시는 것이겠지만.
욕구와 경향성.
어떤 비틀어진 욕망을 충족하려는 가치와 이념의 변질로부터
비극이 시작된다고 추측한다.
또는 선량한 편이지만
그렇게 욕구(욕망)으로 왜곡되어진 사람들의 기막힌 기술에 걸려
경향성(관성)을 쫓는 분별력을 상실한 대중들의 연합으로 그릇된 '힘'이 되어 버린다.
오늘 뉴스는 충격적이고 너무 슬프다.
타자의 몸 중에서 가장 더러운 것이 많이 달라 붙는 발을
높은 자의 위치를 고집하지 않고 정성스럽게 닦아 주는
은혜와 사랑을 선택하지 않으면,
얼토당토하지 않은 일로 사람의 생명을 결과적으로 빼앗는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그런 잔인한 범죄의 구렁텅이에 빠지는 인간 군상이라는 점을
명심하고 넘어가야 겠다.
<오늘의 명언>
우리의 질긴 교만은 오직 그리스도의 겸손과 희생으로만
끊어질 수 있다. -레이먼드 브라운-
<묵상에세이>
그늘을 운명처럼 견디며 사는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그 그늘을 없애 주려는 이들이 아니라,
말없이 그들 곁에 머물러 주는 사람이다.
-김기석, 당신의 친구는 안녕한가-
"하나님! 김새롬, 어떻합니까? 우리가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너른 품에서
그 영혼이 위로 받기를 소원할 수밖에 없습니다.
실망도 낙관도 하지 않겠습니다. 주님, 도와 주소서.
미세먼지도 말끔히 지워진 밝은 하루가 오히려 야속하기만 합니다.
오늘 하루, 주님의 뜻과 은혜, 사랑 안에서 살기를 힘쓰게 하소서.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
자신이 받은 상처 때문에 타자에게 치료자가 되려는 이들에게
주님께서 용기와 사랑을 베풀어 주십시오.
감사드리며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