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적 강릉 대도호부 관아(江陵大都護府官衙)
< 강원특별자치도 강릉시 용강동 임영로 131번길 6>
2026.5.13(수) 아내의 강릉 서울성형외과 진료,수술시간을 기다리는 시간을 이용하여
인근 강릉 대호도부관아를 방문, 탐방하는 시간을 갖는다(14:50~15:16)
강릉지역은 원래는 동예(東濊) 지역이여 고구려 때는 하서랑(河西良) 혹은 아슬라(阿瑟羅)라고 불렀으며 통일 신라시대에는 명주(溟洲)였다.
고려 공민왕 때 강원 영동지방의 행정적 군사적 중요성 때문에 강원 영동의 거진(巨鎭)의 의미로 강릉대도호부(江陵大都護府)로 읍격을 정하였다.
이는 조선 시대에도 이어졌으며 여말 선초의 전환기에 공신의 반열에 올랐던 김광을(金光乙), 함전림(咸傳霖) 등의 출사와
고려 초에 왕씨 성을 사성 받았던 세력이 김씨 성으로 복귀할 수 있었던 데서 알 수 있듯이
당시 강릉지방과 조선을 개창한 중앙 세력이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던 것도 강릉이 대도호부의 읍격을 유지할 수 있었던 하나의 배경이 되었다.
강릉 대도호부관아 정문(아문)
이 안에 객사인 임영관이 있어 중앙의 관리들이 강릉에 내려오면 머물렀다.
강릉 대도호부 관아(江陵 大都護府 官衙)는 고려, 조선시대 강릉의 행정을 담당하는 지방행정관청으로 조선 시대에는 정3품의 부사가 파견된 곳이다.
1994년 대한민국의 사적으로 지정되었으며 국보로 지정된 삼문(강릉 객사문)과 보물로 지정된 칠사당이 있다.
고려 태조 19년(936년)에 세워져 중수를 거쳐서 동헌과 객사를 비롯하여 총 83칸 건물이 들어서 있었다.
일제강점기인 1929년에 임영관을 헐고 강릉보통학교를 세웠다.
1975년 9월에 강릉보통학교 자리에 강릉경찰서 들어섰다가 강릉경찰서가 포남동 신청사로 이전함에 따라 공터로 남아 있었다.
이 공터에 강릉시청사를 신축하기 위해 땅을 파던 중에 관아 유구가 발굴되면서 공사가 중단되고 발굴조사가 행해졌다.
1993년 발굴조사 이후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강릉 대도호부는 고려말 1389년(공양왕 1년) 대도호부로 승격된 이후 조선말까지 유지돼 오다가
1894년 갑오개혁으로 지방제도가 개편되면서 폐지됐다.
조선 영조 때인 1750년대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는 임영지에 따르면
강릉대도호부 관아의 규모는 전대청 9칸, 중대청 12칸, 동대청 13칸 등 모두 83칸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에 객사 정문인 임영관 삼문과 칠사당을 제외하고 대부분 훼손됐다.
강릉 대도호부관아 안내도
아문의 문루 -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문의 좌우로 부속 건물이 있다.
보호수 은행나무 수령 600년
관아 외부와 통하는 칠사당문
칠사당(七事堂)
1971년 12월 15일 강원도 유형 문화재 제7호로 지정된 칠사당은 대도호 부윤(大都護府尹)이 주재하던 조선 시대 관공서로
칠사당(七事堂)이라는 명칭은 수령이 행해야 할 주요업무인
七事 호적(戶籍), 농사(農事), 병무(兵務), 교육(敎育), 세금(稅金), 재판(裁判), 풍속(風俗)에 관한 일곱 가지 정사(政社)를 시행하던 곳이다.
따라서 칠사당이란 현판의 뜻은 관아의 7가지 업무를 보는 관청이라는 뜻이다.
이 건물의 최초 건립 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인조 10년(1632년)에 중건하고, 영조 2년(1726년)에 중수했으며,
고종 3년(1866년)에는 진위병(鎭衛兵)의 군영으로 쓰이다가 이듬해 화재로 타 버린 것을 강릉 부사 조명하(趙命夏)가 중건했다고 한다.
현재 강릉에 남아 있는 유일한 조선 시대 관청 건물인 칠사당은 한쪽이 다락 형식으로 된 ‘ㄱ’자 형태의 건물로
규모는 전면 7칸 측면 3칸이다. 전면 왼쪽에 누마루를 설치하고 뒷면에는 1칸을 내달아 ㅡ형태의 특이한 평면을 보인다.
중앙 대청마루를 중심으로 왼쪽에는 온돌방과 마루방, 누마루를 배치하였고
툇마루 앞에 대청 천장은 우물과 연등 모양이며 벽체는 회벽으로 마감하였다.
대청마루, 누마루 등 마루의 높이를 달리하여 공간의 변화와 위계를 주었으며
해안지역의 특성을 반영한 물고기 모양의 화반, 삼익공의 공포 형식 등 품격 높은 조형미를 지녀 역사.예술적 가치가 높은 건축물이다.
중문은
아문을 들어서면서 동헌으로 출입하는 중간에 위치한 문이다.
동헌은 관아의 정청으로 수령이 행정 업무와 재판 등 정무를 보던 중심 공간이다.
규모는 정면6칸, 옆면 2칸의 팔작지붕 구조이다.
동헌, 문화관광 해설사의 집, 별당(좌)
동헌과 별당 건물 사이에 끼여 있는 작은 집은 문화관광해설사의 집이다.
중문과 아문
의운루(倚雲樓)는 수령이 공무중 잠시 휴식하거나 손님을 맞이하는 공간이다.
규모는 정면 3칸, 옆면 2칸이며 팔작지붕의 단층 구조이다.
이곳은 임영관 서남쪽의 나지막한 언덕에 있어 그 아래에 만든 연당을 바라볼수 있었다고 한다.
임영관 삼문
임영관 삼문 뒤로 중대청과 그뒤로 객사가 자리한다.
임영관 삼문(臨瀛館 三門, 일명 객사문, 국보)
임영관 삼문은 고려 때 지은 강릉 객사 임영관의 정문이다. 문이 세 개 달려 있어 삼문이라고 한다.
칠사당 뒤편에 있는 국보 51호인 임영관 삼문(객사문)은 고려 말에 지어진 것으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문으로 강원도 내 건축물 중 유일하게 국보로 지정된 문화재이다.
간결하고 소박한 주심포(柱心包)계 양식과 맞배지붕의 삼문(三門)으로, 배흘림기둥은 현존하는 목조 문화재 중
가장 크고 기둥과 지붕이 만나는 곳의 세련된 조각 솜씨는 고려 말과 조선 초기 건축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임영지》에 의하면, 고려 태조가 재위 19년(936년)에 창건했다는 강릉객사 임영관의 규모는
전대청(殿大廳) 9칸, 중대청 12칸, 동대청 13칸, 낭청방(廊廳房) 6칸, 서헌(西軒) 6칸, 월랑(月廊) 31칸, 삼문(三門) 6칸 등 모두 83칸이었다고 한다.
임영관 삼문(객사문)은 노후와 변형으로 인해 완전해체한 후 보수하였으며
전대청(殿大廳), 중대청(中大廳), 동대청(東大廳), 서헌(西軒) 등은 2006년 10월 복원되었다.
임영관 삼문 바로 뒤에는 중대청이 있다.
중대청(中大廳)은 고려시대 건축양식으로 앞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의 주심포 양식이다.
조선시대 관찰사가 순찰하려고 방문하였을 때 머물던 공간이다.
중대청은 고려시대 건축 양식으로 앞면 3칸, 옆면 4칸의 맞배지붕의 주심포양식이다.
임영관 삼문(臨瀛館 三門) 일명 객사문, 국보
고려 태조 19년(938)때 창건되었다고 하는 강릉 객사 임영관의 외문이다. 현재의 건물은 고려 말-조선 초에 건립되었다고 추정된다.
목조 건물로 국보인 봉정사 극락전, 부석사 무량수전, 수덕사 대웅전 등과 시대를 같이 한다.
규모는 전면 삼칸 측면 2칸이다. 맞배지붕이며 주심포의 기둥을 하고 있다. 중앙 각 기둥 3칸에는 널문을 달았다.
삼문으로 진입하는 전면은 비교적 높은 돌계단을 쌓았고, 측면과 후면에는 둥근 자연석 초석을 배열하였는데 각기 다른 모양이다.
전 후면 기둥은 배흘림이 뚜렷한 원주를 사용하였고, 중간 줄에는 네모난 기둥을 사용하여 문을 달았다.
간결하고 소박하지만 세부 건축 재료에서 보이는 세련된 조각솜씨는 고려시대 건축양식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낮은 구릉에 위치하여 주변 환경과 어우러진 자연친화적이면서도 장중한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집경전(集慶殿)터
집경전은 임진왜란 이후 원래 경주에 있던 태조 이성계 어진을 모시는 전각이었다.
임진왜란 때 경주가 위험하자 태조 어진을 점차 북으로, 북으로 옮겨 강릉 객사에 모셨던 것이다.
건물 이름도 집경전 그대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왜란 후 인조 9년(1631)에 화재로 소실되었다.
이때 인조는 3일 동안 흰옷을 입고 호곡을 했으며 강릉 부사 민응형은 곤장 100대에 유배에 처해졌다.
그후 경주와 강릉에서 여러 번 태조 어진을 그려 보내줄 것을 요청했으나 실행되지 않은 대신
정조는 경주에 集慶殿舊基(집경전 구기)라는 어필을 내려 읍성 안에 비각을 세워 비석을 보관했다.
이후 1939년 비각이 불타 없어지고 비석만 구 경주여중 교정(현 경주평생가족교육원)에 비바람을 맞으며 서 있다.
중대청 뒤에 임영관(전대청 동대청 서헌)이 있다.
관아에는 객사라는 숙박시설도 따로 있었는데 기본적으로 중앙에서 파견된 사신들이 이용하던 곳이다.
객사 중앙 전대청은 객사의 정청이자 중심 공간이다.
왕의 전패를 모셔 두고 음력 초하루와 보름에 수령이 대궐을 향해 절을 하는 의식인 망궐례를 행했던 곳이다.
동헌과 오른쪽 서헌은 중앙 관료들이 숙식하던 곳이다.
임영지에 의하면 강릉객사의 규모는
전대청 9칸, 중대청 12칸, 동대청 13칸, 낭청방 6칸, 서헌 6칸, 월랑 31칸, 삼문 6칸 등 모두 83칸이었다고 한다.
동대청(東大廳)
왼쪽의 서헌과 더불어 중앙관료들이 숙식, 연회, 재판과 국가의 상사(喪事)를 당했을 때 망곡(望哭)을 하던 곳이다.
수교집록에 문무관 구별없이 2품이상이 동대청을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서헌보다 격이 높은 건물임을 알 수 있다.
전대청(殿大廳)
객사의 정청이자 중심공간이다.
왕의 전패를 모셔두고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수령이 대궐을 향해 절을 하는 의식인 망궐례를 행했던 곳이다.
이곳은 좌우의 동대청과 서헌보다 지붕을 한 단계 높게 지었다.
망궐행례 의식(望關行禮 儀式)
망궐행례는 주로 외직에 근무하는 지방관리가 왕의 상징인 전패를 모신 객사에서 왕이 있는 궁궐을 향해 예를 올리는 의식이다.
지방관은 객사 중앙의 정청에서 매월 초하루와 보름, 설, 임금이나 왕비의 생일, 단오, 추석 등에
궁궐을 향해 망궐례를 올렸으며 대한제국 이후 폐지되었다
서헌(西軒)
오른쪽의 동대청과 더불어 사신 및 중앙관료들이 숙식하던 곳이다.
온돌방과 마루로 구성되었으며 동대청보다 규모가 작다.
1698년 왕의 명령을 모아 엮은 법전인 수교집록(受敎輯錄)에는 사신 일행 중 정 삼품관료들이 서헌을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다.
동대청, 전대청 그리고 서현
동문으로 나와 강릉 대도호부관아 탐방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