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 문 불자들이여, 보살은 이와 같은 삼매와 지혜의 힘을 얻고는 큰 방편으로 모든 일을 나타내 보입니다.
예컨대 보살은 비록 생사를 따라 죽기도하고 태어나기도 함을 나타내 보이지마는 항상 열반의 경지에 머물러 있습니다.
보살은 또 비록 처자 권속들 속에 둘러싸여 있지마는 그들과는 항상 멀리 떠나 있기를 좋아합니다.
보살은 또 비록 원력으로써 다른 중생들과 함께 삼계에 태어지마는 세상 법에 물들지 아니합니다.
보살은 또 비록 항상 참나, 참사람, 참마음의 적멸한 해탈 열반의 경지를 누리고 있으나 중생들을 교화하고 제도하는 방편의 힘으로 열렬하게 보살행을 불타듯이 펼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열렬함에 빠져 불에 타 버리지는 않습니다.
보살은 또 비록 그 깨달은 지혜가 부처님이 깨달으신 지혜를 수순하지마는 소승 성문이나 벽지불의 지위에 들어가기도 합니다.
보살은 또 비록 부처님의 경계를 얻었으나 마군들을 교화하느라고 마군의 경계에 머물기도 합니다.
보살은 또 비록 마군의 도를 초월했지마는 마군의 법을 버젓이 행하기도 합니다.
보살은 또 비록 외도들의 행과 같이 하지마는 부처님의 법을 버리지 아니합니다.
보살은 또 비록 일부러 중생을 위해 모든 세간을 따르지마는 일체 출세간법을 항상 행합니다.
보살은 또 비록 일체 장엄하는 일이 천신이나 제석천이나 범천왕과 사천왕이 가진 것보다 훨씬 뛰어나지마는 법을 좋아하는 마음을 버리지 않습니다.
이것이 보살이 세간과 출세간에 걸리지 아니하면서 세간사와 출세간사를 마음껏 펼쳐 보이는 지혜 방편입니다.
2016년 2월 1일 신라 화엄종찰 금정산 범어사 如天 無比 |
그 동안 37권이 나올 때까지
서문들을 매번 이렇게 함께 독송합니다만,
오늘 이 서문 안의 내용이 과연
‘부처님의 가르침을 통해서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
어떻게 사는 것이 가장 불법다운 삶인가?’ 또
“중도적 삶이라.” 하는 그런 표현도 하는데요.
그런 중도적 삶을
가장 잘 표현한 내용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아! 이것 참 아주 좋은 내용이고
아주 훌륭한 내용입니다.
진정한 불자는 어디에도 치우치지 아니하고,
그러면서 다 수용하고, 그렇다고 또
수용하고 치우치지 않는다고 해서
그들 따라서 말하자면 빠져버리거나
다시 보살의 길로 되돌아오지 못하는
그런 경우가 없이
항상 보살의 사상과 정신을 늘 견지하면서,
또 세상사를 할 때는 세상사를 하고,
외도 노릇을 할 때는 외도 노릇도 하고,
그러면서 한편 또 보살의 정법행을
항상 굳게 지키고 있는 그런 삶!
‘그런 것을 아주 잘 표현한 내용이다.’ 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5온과 6근이라고 하는
이 몸뚱이를 가지고 살면서
5온과 6근의 삶속에 항상 끄달리고 사는데요.
그렇다고 또 한편 우리의 佛性!
불성진여의 위대한 삶을 망각해서는
불교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 양면을 아주 참 잘 표현하고 있는
내용이다.’ 이런 생각이 듭니다.
이것은 십지품 안에 있는 내용을
그대로 발췌한 것입니다.
오늘은 십회향품 공부 중에 지금
본 교재 209페이지, (22) 象寶布施입니다.
60여종의 보시를 하는 것을 쭉~~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보시. 한 마디만 하면 되지
금강경에도 보시이야기하고,
육바라밀에도 보시이야기하고,
사섭법에도 보시이야기하고,
그저 불교하고 관계가 조금만 있으면
무조건 ‘보시이야기를 왜 그렇게 하는가?’
그렇게 귀에 못이 박히도록 우리가 하지만,
또 정작 하기 어려운 것이 남을 배려하고,
남을 먼저 생각하고, 마음을 나누고 그런 보시를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제대로 실천하지 못하는 것이
또한 이 보살행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십회향품, 선근회향이라고 하는
글자 넉자로 끝낼 수 있는 내용인데요.
무려 열 권 반이나, 화엄경 81권 중에서
열 권 반이나 차지하면서 선근회향을
이렇게 권고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반복해서 우리
眼耳鼻舌身意속에 끊임없이 뿌리내리게 하고,
훈습되게 하는 그런 ‘훈련 과정이다.’
이렇게 봐야 됩니다. 불교의 수많은 수행법 가운데,
보시를 제일 덕목으로 삼는데요.
그것 좋은 줄 다 압니다.
다 아는데 ‘왜 자꾸 이 보시이야기를 하는가?’
반복훈련입니다. 훈습하는 겁니다.
자꾸 훈습하는 것입니다. 새가 저~ 높은데서
알에서 부화해서 거기서 끊임없이
나는 연습을 합니다. 어지간히 ‘됐다.’ 싶으면
그 높은 벼랑을 혼자 날아서 내려옵니다.
그것이 반복 훈습했기 때문에...
익힐 習자가 새 깃 羽(우)로 되어 있잖아요.
‘새 깃을 가지고 끊임없이 나는 연습을 함으로 해서
어린 새가 한 번에 허공을 날 수 있는 것과 같다.’
하는 그런 뜻에서 이야기하고,
또 유교에서도 “神也者는 不過習者之門이라”
신의 경지에 이른다고 하는 것은
반복연습 하는 사람의 문 앞을 지나가지 못한다.
그랬습니다. 김연아가 어째서 그렇게 얼음 위에서,
보통 사람은 그 위에서 제대로 서지도 못하는
거기서 그렇게 그런 묘기를 펼칠 수 있는가?
끊임없이 넘어지고 반복연습하고,
자나 깨나 그 생각하고 앉으나 서나
그 연습을 했기 때문에 이제 그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십회향품을 한참 동안 공부했는데도
아직도 멀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반복하는 것은,
우리는 이 5온 6근을 가지고 수 억겁 동안
살아오면서 이 육신만을 생각하고,
我愛 = 나를 애착하고, 나를 중심으로 생각하는
그런 삶이 너무 오랫동안 찌들려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끊임없이 ‘남을 먼저 생각하고,
利他自利ㆍ이타자리ㆍ보살행ㆍ보시ㆍ
남을 배려하고’ ←이것을 그렇게 이야기했어도
쉽게 그렇게 바꾸어지지 않습니다.
절대 그렇게 쉽게 바꾸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포기해서는 안 되는 겁니다.
끊임없이 반복하는 것입니다.
제가 근래에는 조금 뜸했는데요.
한 때는 아주 자주 언급한
이 시대에 살아있는 관세음보살님!
대만의 증엄스님 이야기를 자주 했지요?
그래서 거기서
‘왜 스님은 증엄스님 이야기를 그렇게 하냐’ 고
거기서 와서 인사도 하고 한적 있었지 않습니까?
그 스님이 아주 참, 정말 이 시대의 살아있는
관세음보살님입니다. 경전에서 표현한
관세음보살표현 이상입니다.
제가 알기로는 몇 배입니다.
관세음보살에 대해서 능엄경에서도 소상히 밝혔고,
특히 [법화경보문품]에서도 소상히 밝혀서
우리가 관세음보살에 대해서는 익히 아는 바인데요.
그때는 그렇게 설명 할 수 있는 능력이
그것뿐이었던 것 같아요.
지금 증엄스님이 하신 활동!
자비행의 활동은 몇 배입니다.
보문품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보살행의 몇 배로
더 하고 있습니다. 이 분은 유명한 말
많이 남겼습니다. 그 가운데 제일 유명한 말!
普天三無(보천삼무) = 이 천하에 세 가지가 없다.
무엇이 세 가지 없는가?
내가 이 천하에 사랑하지 못할 사람은 없다.
아~~! 근사하잖아요. 정말 관세음보살 아니면
이런 소리 못합니다.
내가 이 천하에 사랑하지 못할 사람은 없다.
내가 이 천하에 믿지 못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 오랜 생활 속에서 그 많은 일을 하고
숱한 그 건축들을 하고 별별 사람을 만나면서,
뭐 좋은 사람만 만났겠습니까?
별별 사람 다 만났겠지요.
그러나 그들을 나는 다 믿는다. 그들을 다 믿는다.
나는 이 천하에 믿지 못할 사람은 없다.
천하에 나는 용서하지 못할 사람은 없다.
용서하지 못할 사람은 없다.
나에게 어떤 해를 끼치고 어떤 손해를 주더라도
나는 그를 끝까지 믿는다.
언젠가 그 사람이 마음을 돌이켜서
귀의할 때가 있을 것이다.
끝까지 용서하고 끝까지 믿는,
그런 아주 유명한 普天三 의 말씀.
그 분이 처음에 그 때가 1966년인가요?
그러니까 벌써 지금 50년이 넘은 세월을 그렇게
봉사활동을 하고 보살행을 했는데요.
거기에 그 스님 말씀 가운데
또 유명한 말씀이 있어서 제가, -우리 십회향품,
‘반복되는 내용을 끊임없이 왜 해야 되는가?’하는
이야기와 연관된 이야기가 있어서 하는 말인데요.
처음에 그 사람들이 1960년도에
“죽통세월” 이라고 하는 때가 있었습니다.
처음에 봉사활동을 시작할 때 30명을 앉혀놓고
죽통을 하나씩 나눠주면서
“여기에 하루에 10원씩 넣어라.”
그 때 돈, 우리 돈으로 계산해 보니까
140원 정도 되더라고요. 그런데
“하루에 100원씩만 넣어라.
100원씩 넣어서 한 달 되거든 가져오너라.”
가져와서 바로 그 자리에서
그것을 깨어서 바로 내러 갑니다.
하룻밤도 재우지 않고 바로 내러가서
아주 어려운 사람들, 의료혜택을 못 받고,
또 의식주문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는 사람들
해결해주고 그랬거든요. 그럴 때 예를 들어서
“하루에 꼭 100원씩 넣어라.”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신도가 있다가 “아이 스님,
하루에 100원씩 성가시게 그럴 것 없이
한 달이면 3000원 되지 않습니까?
그러면 3000원을 한 번 내면 될 텐데,
뭘 그렇게 성가시게 하루에 100원씩
꼭 넣으라고 말씀하십니까?”하니까,
이 스님의 말이 그래요.
“물론 한 달에 3000원도 좋고, 5000원도 좋고,
만원도 할 수가 있다. 그렇지만 그것은 한 달에
한 번 생각하는 것이다. 중생을 위하는 자비의 마음을
한 번 일으키는 것이고, 내가 매일 100원씩 죽통에다
넣으라고 하는 것은 매일 자비심을
한 번씩 일으키라는 뜻이다. 불행한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 의식주문제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하루에 한 번씩 그래도 그 사람들을
하루에 한 번씩 생각하는
자비심을 일으키는 훈련을 하자는 것이다.”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것이 반복입니다. 반복훈련입니다.
얼마나 근사한 말입니까?
한 달이면 3000원 낼 수 있지요.
만원도 낼 수 있지요.
그렇지만 하루에 매일 100원씩 잊지 않고
자비심을 일으키는 것.
“이것은 ‘내가 이렇게 가난한 사람에게
보시하는 것이다.’ 라고 하는 마음을 내면서
100원을 저금통에다 넣는 것하고는 천지차이다.
한 달에 30번 마음을 일으키는 것과,
한 번 일으키는 것하고
돈의 액수는 같을 수도 있지만,
그것은 절대 같은 것이 아니다.” 라고 하는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날 이 지구상에서 제일 큰
봉사 단체를 그렇게 이끌고, 천만 명이 넘는
봉사 단체를 이끌고, 제일 많은 구호활동을 한
그런 분으로 이 세상에 계십니다.
지금 연세가 80인가 그렇거든요.
근래에 BTN에 보면 그 스님 법문을,
설화를 통한 부처님말씀을 내놓고 있는데요.
참 그 반복한다고 하는 것. 정말 어렵습니다.
제가 그 전에 BTN이나 BBS나
ARS운동을 일으킬 때,
제가 늘 여기서 몇 번 이야기했는데요.
“아침에 일어나서 두 곳에 전화 돌려봐야
돈 만원이다. 오천원짜리 ARS 두 번 돌려봐야
만원이다. 그런데 내가 아무리 독한 마음먹고
한다 하더라도, 한 달에 열다섯 번 하기가
어렵더라.” 그런데 15번하는 것도 장한 겁니다.
열다섯 번에서 열 번으로 일곱 번으로
←이렇게 줄어서, 지금은 한 달에 한 번도
못할 때가 있습니다. 야~~ 몇 달 안갑니다.
몇 달 안가요. 계속한다고 하는 것이 그렇게
어렵습니다. 계속 하는 것은 그만치 우리에게
훈습이 되고 익혀지고요. 내 삶이 되고 그야말로
내 살이 되고 피가 되는
그런 일이 되는 원동력이지요.
그래서 증엄스님이 “한 달에 한 번씩
그렇게 자비심을 일으킬 것이 아니라,
하루에 한 번씩 자비심을 일으키는 훈련을 쌓자.”
처음에 30명에게 그렇게 가르쳐서,
그것이 오늘 날 자재공덕회 라고 하는
저렇게 큰 봉사단체가 만들어진 것입니다.
아주 참, 이 시대에 많은 지구촌 사람들에게
자비행을 한 사람으로써는 제일 갈꺼라 싶습니다.
그 외에 달리 다른 방법으로 훌륭한 스님들이
물론 많습니다만, 자비행을 실천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혜택을 주는 사람으로써는
제가 알기로는 증엄스님이 제일입니다.
여기에 우리가 요즘 공부하고 있는 선근회향도
결국 반복해서 선근회향 하는 그런 훈련을
우리 저~~ 잠재의식 속에 깊이 뿌리내리도록
하기 위해서 그렇게 똑 같은 내용들을
자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대방광불화엄경 강설 37권이 나왔다. 서문을 한번 읽는 것으로
점안 의식을 대신하겠다. 서문을 펼쳐주시기 바란다.
서문
불자들이여,
보살은 이와 같은 삼매와 지혜의 힘을 얻고는
큰 방편으로 모든 일을 나타내 보입니다.
예컨대 보살은
비록 생사를 따라 죽기도 하고 태어나기도 함을 나타내 보이지마는
항상 열반의 경지에 머물러 있습니다.
보살은 또 비록 처자 권속들 속에 둘러싸여 있지마는
그들과는 항상 멀리 떠나 있기를 좋아합니다.
보살은 또 비록 원력으로써 다른 중생들과 함께 삼계에 태어나지마는
세상 법에 물들지 아니합니다.
보살은 또 비록
항상 참나, 참사람, 참마음의 적멸한 해탈 열반의 경지를 누리고 있으나
중생들을 교화하고 제도하는 방편의 힘으로
열렬하게 보살행을 불타듯이 펼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열렬함에 빠져 불에 타 버리지는 않습니다.
보살은 또 비록 그 깨달은 지혜가
부처님이 깨달으신 지혜를 수순하지마는
소승 성문이나 벽지불의 지위에 들어가기도 합니다.
보살은 또 비록 부처님의 경계를 얻었으나
마군들을 교화하느라고 마군의 경계에 머물기도 합니다.
보살은 또 비록 마군의 도를 초월했지마는
마군의 법을 버젓이 행하기도 합니다.
보살은 또 비록 외도들의 행과 같이 하지마는
부처님의 법을 버리지 아니합니다.
보살은 또 비록 일부러 중생을 위해 모든 세간을 따르지마는
일체 출세간법을 항상 행합니다.
보살은 또 비록 일체 장엄하는 일이
천신이나 제석천이나 범천왕과 사천왕이 가진 것보다 훨씬 뛰어나지마는 법을 좋아하는 마음을 버리지 않습니다.
이것이 보살이 세간과 출세간에 걸리지 아니하면서
세간사와 출세간사를 마음껏 펼쳐 보이는 지혜 방편입니다.
2016년 2월 1일
신라 화엄종찰 금정산 범어사
如天 無比
그동안 대방광불화엄경 강설 37권이 나올 때까지
서문들을 매번 함께 독송하였다.
오늘 이 서문 안의 내용은
‘과연 부처님의 가르침을 통해서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
‘어떻게 사는 것이 가장 불법다운 삶인가’ 하는 내용들이다.
흔히 불교에서 ‘중도적 삶’이고 표현하는 것이
이 서문 안에 잘 표현되었다. 좋은 내용이고 훌륭한 내용이다.
진정한 불자는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고 다 수용한다.
수용하고 치우치지 않는다고 해서 한쪽으로 빠져 버리거나
다시 보살의 길로 되돌아오지 못하는 경우가 없다.
항상 보살의 사상과 정신을 견지하면서도
세상사를 할 때는 세상사를 하고, 외도 노릇을 할 때는 외도 노릇을 한다.
보살의 정법행은 항상 굳게 지킨다. 그런 삶을 아주 잘 표현하였다.
우리는 오온과 육근이라고 하는 이 몸뚱이를 가지고 살면서
오온과 육근의 삶속에 끄달리며 산다.
그렇다고 우리의 불성, 불성진여의 위대한 삶을 망각해서는
불교라고 할 수가 없다. 그 양면성을 잘 표현한 이 서문은
십지품 안에 있는 내용을 그대로 발췌한 것이다.
오늘은 象寶布施.
(22) 象寶布施
佛子야
菩薩摩訶薩이 布施象寶호대
其性調順하고 七支具足하며
年齒盛壯하고 六牙淸淨하며
口色紅赤이 猶如蓮華하고
形體鮮白이 譬如雪山하며
金幢爲飾하고 寶網羅覆하며
種種妙寶로 莊嚴其鼻하니
見者欣翫하야 無有厭足하고
超步萬里에 曾不疲倦하며
或復施與調良馬寶호대
諸相具足이 猶如天馬하야
妙寶月輪으로 以爲光飾하고
眞金鈴網으로 羅覆其上이어든
行步平正하야 乘者安隱하며
隨意所往에 迅疾如風하며
遊歷四洲에 自在無碍하니
菩薩이 以此象寶馬寶로
或奉養父母와 及善知識하며
或給施貧乏苦惱衆生호대 其心曠然하야
不生悔悋하고 但倍增欣慶하며
益加悲愍하야 修菩薩德하며
淨菩薩心하야 以此善根으로 如是廻向하나니
所謂願一切衆生이 住調順乘하야
增長一切菩薩功德하며
願一切衆生이 得善巧乘하야
能隨出生一切佛法하며
願一切衆生이 得信解乘하야
普照如來無碍智力하며
願一切衆生이 得發趣乘하야
能普發興一切大願하며
願一切衆生이 具足平等波羅蜜乘하야
成滿一切平等善根하며
願一切衆生이 成就寶乘하야
生諸佛法無上智寶하며
願一切衆生이 成就菩薩行莊嚴乘하야
開敷菩薩諸三昧華하며
願一切衆生이 得無邊速疾乘하야
於無數劫에 淨菩薩心하야
精勤思惟하야 了達諸法하며
願一切衆生이 成就最勝調順大乘하야
以善方便으로 具菩薩地하며
願一切衆生이 乘最高廣堅固大乘하고
普能運載一切衆生하야
皆得至於一切智位니라
是爲菩薩摩訶薩이 施象馬時에 善根廻向이니
爲令衆生으로 皆得乘於無碍智乘하고
圓滿究竟하야 至佛乘故니라
"불자들이여,
보살마하살이 코끼리[象寶]를 보시하나니,
성품이 유순하고 일곱 가닥이 구족하고 나이가 한창이며,
여섯 이빨이 깨끗하고 입술이 붉은 것이 연꽃과 같고,
몸빛이 희어 마치 설산(雪山)과 같으며,
황금 깃대로 꾸미고 보배 그물을 덮었으며,
갖가지 묘한 보배로 코를 장식하여
보는 이가 즐거워 싫은 줄을 모르며,
만리(萬里)를 뛰어다녀도 고달프지 아니하느니라.
혹은 길 잘든 말[馬寶]을 보시하나니,
여러 모습이 구족하여 마치 하늘의 말과 같으며,
아름다운 보배로 만든 둥근 바퀴로 빛나게 장식하고,
순금방울과 그물을 위에 덮었으며,
행보가 평정하여 탄 이가 편안하고,
마음대로 가는데 바람같이 빠르며,
사주(四洲)로 다니되 자재하여 장애되지 아니하였느니라.
보살이 이와 같은 코끼리와 말(馬)로써
부모와 선지식에게 봉양도 하고,
가난하고 고생하는 중생에게 보시도 하는데,
마음이 너그러워 아끼는 생각이 없고,
더욱 기뻐하고 더욱 어여삐 여기면서
보살의 덕을 닦고 보살의 마음을 청정하게 하느니라.
이런 선근으로 이렇게 회향하느니라.
이른바 ‘원컨대 일체중생이 유순하고 뜻에 맞는 법에 머물러
모든 보살의 공덕을 증장하여지이다.’라고 하느니라.
‘원컨대 일체중생이 공교한 것을 얻고
일체 불법을 따라서 내어지이다.’라고 하느니라.
‘원컨대 일체중생이 믿고 이해하는 법을 얻고
여래의 걸림없는 지혜와 힘을 널리 비추어지이다.’라고 하느니라.
‘원컨대 일체중생이 더 나아가는 법을 얻고
일체 큰 소원을 널리 내어지이다.’라고 하느니라.
‘원컨대 일체중생이 평등한 바라밀다법을 구족하고
모두 평등한 선근을 이루어지이다.’라고 하느니라.
‘원컨대 일체중생이 보배수레를 성취하고
부처님 법의 위없는 지혜를 내어지이다.’라고 하느니라.
‘원컨대 일체중생이 보살행으로 장엄한 법을 성취하여
보살들의 삼매(三昧)의 꽃을 피워지이다.’라고 하느니라.
‘원컨대 일체중생이 그지없이 빠른 법을 얻고
무수한 겁에 보살의 마음을 깨끗이 하여 부지런히 생각하여
모든 법을 분명히 통달하여지이다.’라고 하느니라.
‘원컨대 일체중생이 가장 수승하고
조순한 대승(大乘)을 성취하여
선한 방편으로 보살의 지위를 갖추어지이다.’라고 하느니라.
‘원컨대 일체중생이 가장 높고 크고 견고하고
큰 수레를 타고 일체중생을 두루 실어 운반하여
일체 지혜의 자리에 이르게 하여지이다.’라고 하느니라.
이것이 보살마하살이 코끼리나 말을 보시할 적에
선근으로 회향하는 것이니라.
중생들로 하여금 모두 걸림없는 지혜의 법에 올라
끝까지 원만하여 부처님의 법에 이르게 하려는 연고이니라."
象寶布施(상보보시)
코끼리 象자ㆍ보배 寶자 그랬습니다. 코끼리보배,
코끼리를 보시하는 경우를 두고 이야기합니다.
佛子야 菩薩摩訶薩이
布施象寶호대, 코끼리를 보시하되,
其性이 調順하고, 아주 사나운 코끼리가 많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성질이 아주 온순하고...
‘훈련이 잘된 그런 코끼리를 보시한다.’
그런 말입니다. 七支具足하며, 칠지는,
다리가 네 개지요? 귀가 두 개지요? 코가 하나지요?
그래서 七支라고합니다. 七支가 具足하며,
年齒가 盛壯(연치성장)하고, 나이가 아주 젊어요.
그래서 힘도 좋고 일도 잘 하고 씩씩하고요.
六牙가 淸淨(육아청정)하며,
우리는 코끼리의 코가 보통 두 개인 줄 아는데
여기는 여섯 개의 코가 아주 훌륭하고,
이런 뜻입니다. 여섯 개의 코가 훌륭하고,
口色紅赤(구색홍적)이, 입 속은 아주 붉은 것이
猶如蓮華(유여연화)하고, 마치 붉은 연꽃과 같고,
코끼리에 대해서 표현을 참 잘했지요?
形體는 鮮白(형체선백)이,(흰 코끼리니까요.)
몸은 아주 깨끗하게 흰색깔인 것이
譬如雪山(비여설산)하며, 마치 설산과 같으며,
金幢爲飾(금당위식)하고,
금으로 된 깃대로 장식을 하고,
寶網羅覆(보망라부)하며,
보배그물을 펼쳐서 덮었고,
이런 것들도 스리랑카에 캔디사원인가요?
거기에 부처님치아사리 행사할 때는
코끼리를 장식할 수 있는데 까지 장식을 하는데요.
다 이런 데서 기인한 것이 아닌가 싶어요.
種種妙寶로, 가지가지 묘한 보배로
莊嚴其鼻(장엄기비)하니, 그 코를 장식한다.
그래서 見者欣翫(견자흔완)하야,
見者가, 보는 사람이 다 아주 기뻐하고,
아주 볼만한 꺼리로 여겨서
無有厭足(무유염족)하고, 싫어함이 없고,
超步萬里(초보만리)에, 만 리를 걸어감에,
曾不疲倦(증불피권)하며,
일찍이 피곤해하거나 싫증냄이 없다.
코끼리이야기고요. 그 다음에 말도 코끼리하고
같은 부류로 넣어서 이야기합니다.
或復施與調良馬寶(혹부시여조량마보)호대,
혹 다시 아주 잘 길들여진 馬寶를, 말을 보시하되,
諸相具足이, 여러 가지 상이 구족해서,
猶如天馬하야, 마치 天馬와 같으며,
우리 역사에 유명한 말
“赤兎馬(적토마)” 라고 있지요?
妙寶月輪(묘보월륜)으로,
아주 아름다운보배 月輪으로써
以爲光飾하고, 아주 빛나게 장식하고,
眞金鈴網(진금영망)으로, 진금으로 방울을 짜서,
그물처럼 짜서 달리면 그냥 방울소리가 나고,
羅覆其上이어든, 그 위에 덮고,
行步가 平正하야, 걸어가는 것이 아주 평정하고,
乘者가 安隱(승자안은)하며,
말 탄 사람이 아주 편안하도록 그런 말.
隨意所往에, 가고 싶은 대로 가는데,
迅疾如風(신질여풍)하며,
빠르기가 마치 바람과 같으며,
遊歷四洲(유력사주)에, 四洲로 돌아다님에
自在無碍하니 菩薩이
以此象寶와 馬寶(이차상보마보)로,
코끼리와 말로써,
或奉養父母(혹봉양부모)와, 부모에게도 봉양하고,
及善知識하며, 그리고 선지식에게도 봉양하며,
或給施貧乏苦惱衆生(혹급시빈핍고뇌중생)호대,
혹은 아주 가난하고
고통 받는 중생에게도 보시를 하되,
其心曠然(기심광연)하야,
그 마음이 확 트여서, 曠然해서,
不生悔悋(불생회린)하고,
조금도 후회하거나 뉘우침이 없고,
但倍增欣慶(단배증흔경)하며,
다만 더욱 더 기쁘고 경사스럽게,
보시하는 것을 아주 기쁘게 생각하고
경사스럽게 생각하며,
益加悲愍(익가비민)하야,
가난한 사람ㆍ고뇌 받는 사람ㆍ그런 이들을
더욱 더 어여삐 여기고 불쌍히 여겨서,
修菩薩德하며, 보살 덕을 닦으며,
淨菩薩心하야, 보살 심을 청정하게 해서,
以此善根으로, 이 선근으로
如是廻向하나니, 이와 같이 회향하나니,
이것이 중요하지요.
보시는 그렇게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보시하되 그 보시한 것이
어떻게 회향 되어야 하느냐 하는
마음을 쓰는 것이 중요한 겁니다. 그래서
“선용기심이다.” 제가 늘 그러지요.
회향은 그 마음을, 보시까지는 누구나 할 수 있다
하더라도, 그 보시 뒤에, 우리가 그 보시에 대한
‘마음을 어떻게 쓰는가?’
그것이 여기 십회향에는 일일이 붙어있습니다.
한 가지를 보시하면서
열 가지 이상씩 그런 선용기심!
그 마음을 잘 쓰는 방법을 이야기했습니다.
所謂願一切衆生이
住調順乘(주조순승)하야,
調順 = 아주 조화롭고 순한 그런 법에 머물러서
增長一切菩薩功德하며,
일체보살공덕을 증장하기를 원하며,
일체중생들이 제발 좀 그렇게 했으면 좋겠다.
일체보살의 공덕이 증장하기를
그렇게 발원하는 것이지요.
願一切衆生이 得善巧乘(득선교승)하야,
일체중생이 善巧 = 아주 훌륭한 방편.
훌륭한 방편의 법을 얻어서
能隨出生一切佛法하며,
능히 따라서 일체불법 出生하기를 원하며,
‘중생이 전부 좀 그렇게 했으면...’
보시하면서 그 마음까지 같이 하는 겁니다.
우리는, -아까도 잠깐 이야기했는데요.
우리 불교계에서도 급식활동 많이 하지요?
또 우물 파주기도 많이 하고요.
저~ 기 동남아로 네팔 같은데 지진난데
그런 데에 가서 학교도 많이 지어주고,
며칠 전 신문에도 났는데
학교를 여섯 개를 지어줬는가요?
우리 불교계에서도 하고, 불자들도 가서 하고,
그렇게 하는데 대개 보면 여기에 회향이 없어요.
가서 일회적입니다. 그렇게 우물을 파주면
딱 우물 파주는 것으로 끝나고요.
제가 그 이야기 자주 하지요?
그 이야기를 자꾸 했더니 현대불교신문 기자가
급식활동하면서, -“조그마한 명함판만한 크기에
간단하게 부처님 말씀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난다.
선한 행을 하면 선한과보를 거두고,
악한 행을 하면 악한과보를 거둔다.
그런 말 한 마디라도 명함 같은데다 딱 쓰고,
하나씩 나눠주고 돌려보내라.” 고
제가 그렇게 이야기했더니,
거기서 한수 더 떠서, 조그마한 비닐봉지를
만들어서 거기다 그러한 부처님 말씀을 새긴
그런 명함 한 장 넣고, 1회용 믹스커피 하나 넣고,
쵸코렛 하나 넣고, ←이렇게 해서 돌렸다는 겁니다.
금방 물리가 나버린 겁니다.
‘아 이것, 밥만 먹여 돌려보낼 것이 아니다.
부처님 말씀 한 마디 전하는 것이 좋겠다.’
제가 여기서 자꾸 이야기한 것이 헛소리가 아닙니다.
어느 구석에서 그것이 실행이 되는 데가 있더라고요.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요.
밥만 먹이고 돌려보내는 것은 다른 단체에서도
많이 합니다. 다른 단체에서도 많이 한다고요.
부처님은 방편의 말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전부 부처님말씀을 전하기 위한,
진리를 전하기 위한 방편으로 하는 것이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고요.
그 자체도 물론 훌륭한 일이고 좋은 일입니다.
우물 파주는 것,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정말 보살행이거든요. 정말 그것만 찬탄해도
우리가 한없이ㆍ한없이 찬탄할 꺼리는 되지만,
그러나 여기에서 늘 보면 회향이 따르잖아요.
불법으로써 회향하도록 하는 것.
그것을 잊지 않는 것이 참 좋습니다.
그래서 밥을 한 그릇 주더라도 그렇고,
우물을 파주더라도 그렇고,
학교를 지어주더라도 그렇고,
늘 부처님법과 연관이 되도록
그런 다리를 놔주는 것, 그것이 아주 좋습니다.
그래서 아주... 현대불교기자가 그것을 들고 와서
“스님, 제가 이렇게 했습니다.” 하고
봉투를 하나 내미는 겁니다.
보니까 그 안에 커피 들어 있고, 식사하고 나서
그 명함보고 부처님 말씀 한 마디 읽고,
커피 그것 들고 가서 타먹고, 쵸코렛 하나 먹고,
그러면서 그것한 마디 읽고, 그 광경을
제가 그림으로 그려보니까 아주 근사해요.
여러분 참고하십시오. 그것은 아주 좋은 일입니다.
그러면 밥 공양 올린 것보다 정작 복은
그 명함한 장에 들어있는 부처님 말씀전하는 것이
훨씬 몇 백배ㆍ몇 천배의 복이 따라올 겁니다.
제가 늘 그러지요. “부처님은 누구에게
밥 한 그릇 대접한 바가 없는데 왜 그렇게 부자냐?
저~ 기 불국사ㆍ통도사 그 좋은 사찰이
전부 부처님 앞으로 등기 됐는데,
어째서 부처님은 그렇게 부자냐?
밥 한 그릇 누구에게 보시한적 없다.
다만 진리의 말씀! 그것을 보시했기 때문이다.”
제가 늘 그런 이야기하잖아요.
그것 꼭 기억해야 됩니다.
그냥 흘려버릴 이야기가 아닌 겁니다.
금강경에서는 사구게 하나만으로
공덕이 얼마라고요? 입이 쩍 벌어져서
표현을 못할 정도로 이야기해놨지요.
사구게 한 마디의 공덕이 그렇게 크다고 했잖아요.
그 말 속에 깜짝 놀라야 될 것 아닙니까?
그 사구게 그것이 뭐라고 그까짓 것,
그 한 마디에 어째서 공덕이 그렇게 많으냐?
그것을 가지고 몇날 며칠 밥도 안 먹고
잠도 못자면서 씨름해야 될 구절입니다 그것이...
거짓말 했을리는 없잖아요.
어째서 그 사구게 한 마디가...
凡所有相 皆是虛妄. 그것 몰라서...
그 한 마디의 공덕이 그렇게 큰 이유가
뭐냐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그 공덕은 틀림없고요.
여기에서 회향이 늘 따르는 것이
바로 ‘그러한 원리에 의한 것이다.’그런 말씀입니다
일체중생이 善巧乘을 얻어서,
선교방편의 가르침을 얻어서
일체불법을 따라서 出生하기를 願하며,
이 願자가 중요한 것이지요?
제가 천수경 강의할 때,
願! 願이 들어간 것을 보니까 3분의 1이 돼요.
發四弘誓願(발사홍서원)
發願已歸命禮三寶(발원이귀명례삼보)
뭐하고 중간에 무슨 원ㆍ무슨 원...
그 짧은 천수경 속에 願이
한 3분의 1이 되더라고요.
願이 그렇게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또 가끔 불공이야기 하면서도
그 이야기하지요. 옛날에 우리 어릴 때는
전부 독불공이었지요. 지금은 독불공 하나도 없이
다 사라져버렸고, 전부 합동으로 그렇게
축원하고 마는데 우리 어릴 때는
합동불공이라는 것이 없었습니다. 100명이 오든
200명이오든 전부 독불공 다 해줘야 됩니다.
예를 들어서 정초에 하루에 100명씩
막 오는 겁니다. 100명이상 올 때도 있고요.
그것 이상 오는 사람도 다 독불공 다 해줘야 됩니다.
그 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천수경 그것 길어서 못합니다.
由致(유치)ㆍ請詞(청사)!
그 좋은 법문도 한 마디도 해 줄 수가 없습니다.
그저 “오라”고 해놓고 축원문만
근사하게 하는 겁니다.
축원만 근사하게 하고 특히 그 집 가족이름 부를 때
큰 소리로, 그 불공 齋者(재자) 귀에 쏙 들어가도록
再告祝(재고축)ㆍ3고축까지 해야 됩니다.
그래도 그것 다해도 5분 안 걸립니다.
앞ㆍ뒤 축원할 것 없거든요.
그렇게 하면 100명 아니라 200명도 한 법당에서
다 불공해 마칩니다. 그런데 만족합니다.
불자는 그것으로 만족한 겁니다.
천수경안 읽어주고 반야심경도 안 읽어주고
由致ㆍ請詞 하나도 안 해도 만족합니다.
왜 그러냐? 그들이 바라는바,
그것이 뭡니까? 願입니다.
꿈이고 희망이고 기대감입니다.
거기에 그냥 불을 지펴주는 겁니다.
큰 소리로 부처님한테 축원 딱~ 해서
그 가족들 이름 분명하게 들리게 해주고,
분명하게 들리게 못해주면
아~ 우리 축원 안 나갔다고,
다시 해달라고 나중에 또 따집니다.
여러분 당해봤잖아요.
우리 축원 안 나갔으니까 다시 해달라고
분명히 따집니다. 그래 꼭 새로 해줘야 됩니다.
사람심리가 그런 겁니다.
그것이 나빠서가 아니고, 사람심리가 그래요.
그래 그 기대감을 충족시켜주는 것.
그 겁니다. 願이라는 것이 다른 것 아닙니다.
그래서 하루에 100명ㆍ200명 독불공을
한 법당에서 다 해치운다니까요.
그러면서 그분들 다 만족하게 합니다.
충분히 만족하게 합니다. 왜냐?
기대감을 충족시켜주니까요.
탁~~ 그것만 기다리고 있는 겁니다.
우리자녀들 이름 딱 불러내고
“부처님가피력으로 금년 내내 만
사형통하기를 바랍니다.” 라고,
“축원합니다.” 라고 하는 그 말이
귀에 쏙 들어오도록 그렇게 하면,
그 소리 들으려고 딱~~ 기대하고 있다가
그 소리 딱 들으면 그만 만족한 겁니다.
色不異空空不異色 色卽是空空卽是色
그것 할 것 없습니다. 네가 아나? 내가 아나?
色卽是空空卽是色아는 사람 누가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 전에
천수경 강의할 때는 늘 그 이야기를 했었습니다.
요즘은 천수경 강의를 안 하지만...
제 천수경 강의 속에 아마 그것이 있을 겁니다.
願一切衆生이 得信解乘하야,
일체중생이 信解乘 = 믿고 이해하는 가르침.
이해하는 법을 얻어서,
普照如來無碍智力하며,
여래의 걸림 없는 지혜의 힘이
환하게 비추기를 원하며, 그렇지요.
믿고 이해하는 것. 信解行證아닙니까?
信解行證!
일체중생이 신해행증을 가지고서 如來의 無碍!
걸림 없는 지혜의 힘을 알게 되는 것이지요.
그것을 마음속에 원하라. 이 말이지요.
願一切衆生이 得發趣乘(득발취승)하야,
일체중생이 더 나아가고ㆍ더 나아가고.
앞으로ㆍ앞으로 더 나아가는 그런 법을 얻어서
能普發興一切大願하며,
일체 그 외의 모든 원들을
크게 일으키기를 또 원하며,
大願을 원한다. 그랬습니다. 오직 원입니다. 願!
지금 한창 봄이 돼서 새싹이 막 파릇파릇 돋고,
또 꽃이 피고 천지는 야단이잖아요.
그것이 뭡니까? 전부 원자입니다. 願!
원이 발현된 일입니다. 그저 식물은 부디 봄이 와서
기후가 맞고 습도가 맞으면
‘내가 몸부림치고 꿈틀거려서
내가 가지고 있던 꿈과 희망을 꽃 피우리라.’
그 생각만 하고 있는 겁니다.
모든 생명은 전부 그 생각만 하고 있는 겁니다.
‘때만 맞으면 내가 언젠가 내 꿈을 꽃 피우리라.’
그러니 지금 온 천지가 꽃 피우느라고
그냥 야단법석이잖아요. 생명이 있는 것은
사람뿐만이 아니고 다 그렇습니다.
願一切衆生이 具足平等波羅蜜乘하야,
일체중생이 평등바라밀승을 구족해서
成滿一切平等善根하며,
일체 평등선근을 成滿하기를,
원만히 이루기를 원하며,
願一切衆生이 成就寶乘(성취보승)하야,
일체중생이 보배의 가르침을 성취해서,
生諸佛法無上智寶하며,
모든 부처님의 법.
그리고 가장 높은 지혜의 보배 법 내기를 원하며,
願一切衆生이 成就菩薩行莊嚴乘하야,
일체중생이 菩薩行莊嚴乘. 그렇지요.
보살행같이 장엄스러운 것이 없습니다.
莊嚴. 뭘 로 꾸민단 말입니까?
사람이 꽃일 때는 아름다운 말과,
아름다운 행동과, 아름다운 마음가짐,
그것이 꽃이지요. 그것이 꽃입니다.
그런 身ㆍ口ㆍ意 3업으로 보살행을 표현할 때가
그것이 장엄입니다. 그것이 莊嚴입니다.
꽃으로 장엄하는 것.
무슨 매화꽃, 벚꽃, 목련꽃 잔뜩 심어놓고 하는
소리가 결코 아니잖아요. 그런 이야기하려고
화엄경을 설했을 리가 없지 않습니까?
보살행이라고 하는 꽃으로써 세상을 장엄한다.
開敷(개부)菩薩諸三昧華하며,
보살의 모든 삼매의 꽃을 피우기를 원하며,
願一切衆生이 得無邊速疾乘(득무변속질승)하야,
일체중생이 가없는 빠른 가르침을 얻어서,
於無數劫에
淨菩薩心하야, 보살 심을 깨끗이 해서,
精勤思惟하야, 부지런히ㆍ부지런히 사유해서,
了達諸法하며, 모든 법 요달하기를 원하며,
願一切衆生이 成就最勝調順大乘하야,
일체중생이 가장 수승하고 아주 조화롭고 순한
그런 대승 법을 성취해서,
以善方便으로, 훌륭한 방편으로써,
具菩薩地하며, 보살의 지위를 갖추기를 원하며,
願一切衆生이 乘最高廣堅固大乘하고,
일체중생이 가장 높고 넓고 견고한
그런 대승에 올라서,
普能運載(보능운재)一切衆生하야,
일체중생을 널리 실어 날라서
皆得至於一切智位니라.
모두 일체지혜의 지위에 이르기를 원할지니라.
일체지혜의 지위가 뭡니까? 부처의 경지지요.
是爲菩薩摩訶薩이, 이것이 보살마하살이
施象馬時에, 象과 馬를 보시할 때에
善根廻向이니, 선근 회향하는 것이니,
爲令衆生으로, 이유입니다. 까닭을 말하는 겁니다.
중생을 왜 그렇게 하느냐? 중생으로 하여금
皆得乘於無碍智乘하고,
無碍, 걸림 없는 지혜의 乘에 올라서,
圓滿究竟(원만구경)하야
至佛乘故(지불승고)니라.
부처의 경지=佛乘에 이르게 하기 위한 까닭이니라.
모든 중생들을 부처의 경지에 이르게 하려고
이렇게 하는 것이다.
그 이유로 이렇게 보시하는 것이다. 그렇습니다.
무슨 보시를 하든지 간에 그렇게 하라는 겁니다.
*
상보보시(象寶布施) : 코끼리와 말(馬)을 보시하다
*
오늘은 본교재 209페이지(화엄경 제2권 민족사 刊) 상단,
십회향품 중에 22번 상보보시를 공부할 차례다.
지금까지 60여종의 보시를 하는 것을 이야기 하고 있다.
‘보시’ 한마디만 하면 될 것을 이렇게 화엄경 81권 중에서
열권 반이나 차지하면서 까지 선근회향을 권고하고 있다.
금강경에도 보시 이야기를 하고,
육바라밀에도 사섭법에도 보시이야기를 한다.
불교와 아주 조금만이라도 관계가 있으면 다 보시 이야기를 한다.
그렇게 귀에 못이 박히도록 보시 이야기를 하지만
정작 하기 어려운 것이 보시다.
남을 배려하고 남을 먼저 생각하고 마음을 나누기가 어렵다.
일상생활에서 우리가 제대로 실천하지 못하는 것이 또한 보살행이다.
십회향품에서 ‘선근회향’이라고 넉 글자로 끝낼 수 있는 내용이
이렇게 반복해서 나온다. 그것은 우리의 안이비설신의 속에 끊임없이
이것을 뿌리내리게 하고 훈습되게 하려는 훈련 과정이라고 봐야 한다.
보시는 불교의 수많은 수행법 가운데 제일 덕목이다.
보시가 좋은 줄은 누구나 다 아는데
왜 자꾸 이 보시 이야기를 하는가? 반복 훈련이고 훈습이다.
높은 데에 새가 알을 낳으면 부화한
아기새는 끊임없이 나는 연습을 한다.
어지간히 연습이 됐다 싶으면 그 높은 벼랑을 혼자 날아 내려온다.
반복하고 훈습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익힐 습(習)자가 새깃 우(羽)로 되어 있다.
새 깃을 쳐서 끊임없이 나는 연습을 해서
어린 새가 한 번에 그 허공을 날 수가 있다.
유교에서도 ‘신야자(神也者)는 불과습자지문(不過習者之門)’이라고 하였다.
‘신의 경지에 이른다는 것도
반복 연습하는 사람의 문 앞을 지나가지 못한다’는 이야기다.
피겨스케이팅의 김연아 선수가 어째서 그렇게 보통 사람은
제대로 서지도 못하는 얼음판에서 묘기를 펼칠 수가 있었는가?
자나깨나 앉으나 서나 끊임없이 넘어지면서 반복연습을 했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가 십회향품을 공부하고 있다.
한참을 공부했는데도 아직 멀었다.
우리는 오온 육근을 가지고 수억 겁을 살아왔다.
오로지 이 육신만을 생각하고 아(我)에 집착하고
나를 중심으로 생각하는 삶에 그토록 오랫동안 찌들어 살아왔다.
그렇기 때문에 화엄경을 공부하며 끊임없이 남을 먼저 생각하고
이타자리(利他自利) 보살행 보시 남을 배려하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어도
절대로 나를 먼저 내세우는 그 습관이 쉽게 바뀌어지지 않는다.
그렇다고 포기해서는 안된다. 끊임없이 반복하는 것이다.
근래에는 뜸했지만 내가 한때 자주 언급한 분이 있다.
이 시대의 살아있는 관세음보살님인 대만의 증엄스님이다.
‘무비스님은 왜 증엄스님 이야기를 자꾸 하느냐’고 하면서
자제공덕회에서 여기까지 사람이 와서 인사를 하고 간 일도 있다.
증엄스님은 이 시대의 살아있는 관세음보살님이다.
관세음보살에 대해서는 능엄경에서도 소상히 밝혔고
법화경 보문품에서 아주 소상히 밝혔다.
우리는 관세음보살에 대해서 익히 아는 바다. 경전에는 경을 결집할 때
상상할 수 있었던 능력만큼만 관세음보살에 대해 설명했다.
그런데 증엄스님이 하신 자비행 활동은
경전에서 표현하는 관세음보살 활동 이상이다.
지금 증엄스님은 보문품에서 이야기 하고 있는
보살행의 몇 배를 더 하고 있다.
이분이 하신 유명한 말 가운데 ‘보천삼무(普天三無)’라는 말이 있다.
‘천하에 세 가지가 없다’라는 말이다.
어떤 세 가지가 없는가?
‘내가 이 세상에 사랑하지 못할 사람은 없다.’
‘내가 이 천하에 믿지 못할 사람은 없다.’
‘천하에 내가 용서하지 못할 사람은 없다.’는 말씀이다.
관세음보살이 아니라면 하실 수 없는 말씀이다.
증엄스님이 오랜 세월동안 그 많은 일을 하고, 숱한 건축들을 하고
별별 사람을 만나면서 좋은 사람만 만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을 다 믿는다고 하였다. 나에게 어떤 해를 끼치고
어떤 손해를 끼치더라도 그를 끝까지 믿는다는 이야기다.
그렇게 끝까지 사랑하고 믿어주고 용서해준다면
언젠가 그 사람이 마음을 돌이켜서 귀의할 때가 있을 것이다.
10회향품이 끊임없이 ‘왜 회향을 하는가’ 하고 반복하고 있는데
그런 내용과도 연관이 되는 증엄스님 이야기도 있다.
증엄스님이 설립한 자제공덕회가 1966년 시작해서
벌써 5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봉사활동을 하고 보살행을 하고 있는데
초창기인 1960년대에 ‘죽통세월’이라고 부르는 때가 있었다.
처음 봉사활동을 시작하면서 증엄스님은 신도 30명을 앉혀놓고
죽통을 하나씩 나눠주면서 하루에 10원씩 넣으라고 하였다.
그 때 우리나라 돈으로 계산해 보면 140원인가가 되는 돈이지만
편의상 100원이라고 한다면, 증엄스님은 사람들에게 매일 100원씩만
죽통에 넣어서 한달되거든 가져오라고 한 것이다.
사람들이 백원씩 넣은 돈을 한달 모아서 가져오면
바로 그 자리에서 죽통을 깨서 하루 밤도 재우지 않고
마을로 내려가 어려운 사람들을 도왔다. 의료혜택을 못받고
의식주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었다.
어떤 신도가 “아이 스님 성가시게 하루 100원씩 모을 것 뭐 있습니까?
한달에3천원 씩 내면 될텐데요?” 하고 물었다. 그러자 증엄스님은
“3천원도 5천원도 만원도 보시를 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중생을 위하는 자비의 마음을 한달에 한 번만 일으키는 것입니다.
매일 100원씩 죽통에 넣으면 매일 한 번씩 불행한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 의식주 문제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자비의 마음을 일으키게 됩니다. 자비심의 반복이고 훈련입니다.” 라고
말씀하셨다. 얼마나 근사한 말인가. 한달에 3천원을 낼 수 있다.
만원도 낼 수가 있다. 그렇지만 하루에 매일 100원씩 잊지 않고
자비심을 일으키는 것이 중요하다.
‘나는 지금 가난한 사람들에게 보시를 한다’고 하는 마음을 내면서
매일 백원씩 저금통에 돈을 넣어 한달에 30번 마음을 일으키는 것과
한달에 한 번 그 만큼의 돈을 내면서 마음을 일으키는 것은
액수는 같아도 절대 같은 일이 아니다. 그 내용이 천지차이다.
오늘날 지구상에서 제일 큰 봉사단체를 이끌고 천만 명을 넘는
봉사단체를 이끌고 제일 많은 구호활동을 하는 분인 증엄스님은
지금 연세가 80을 넘는다. 근래에 BTN에 보면 설화를 통한
부처님 말씀을 법문하기도 한다.
내가 전에 BTN이나 BBS에 ARS운동을 일으킬 때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두 방송국에 5천원씩 ARS를 눌러서 보시를 했다.
그래봐야 하루에 돈 만원을 보시하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아무리 독한 마음을 먹고 한다고 하더라도
한달에 15번 하기가 어려웠다.
열 다섯 번 하는 것도 잘하는 것이고 점점 열 번으로 일곱 번으로
횟수가 줄어서 지금은 한달에 한 번도 못할 때가 있다.
계속한다고 하는게 그렇게 어렵다.
계속하는 것은 그만치 훈습이 되는 것이다.
몸에 익혀지고 내 삶이 되고 피가 되고 살이 된다.
증엄스님이 그렇게 한달에 한 번씩이 아닌 하루에 한번씩
자비심을 일으키는 훈련을 쌓자고 해서, 처음 30명에게 가르쳤다.
그것이 오늘 날 자제공덕회 라고 하는
저렇게 큰 봉사단체가 만들어진 원동력이다.
이 시대에 지구촌 사람들에게 자비행을 하는 사람으로서
증엄스님이 제일이지 싶다. 다른 방법으로 훌륭한 스님들은 물론 많지만
자비행을 실천해서 많은 사람에게 혜택을 주는 사람으로서는
내가 알기로는 증엄스님이 제일이다.
여기 우리가 요즘 공부하고 있는 선근회향도 결국 반복이다.
선근회향 하는 훈련을 우리 잠재의식 속에 깊이 뿌리내리도록
하기 위해서 반복을 한다. 똑같은 내용들을 자꾸 이야기 한다.
*
불자(佛子)야
보살마하살(菩薩摩訶薩)이 : 보살마하살이
보시상보(布施象寶)호대 : 코끼리를 보시하되
기성조순(其性調順)하고 : 아주 사나운 코끼리가 많다.
그런데 여기서는 아주 성질이 온순하고 훈련이 잘된
코끼리를 보시한다는 말이다.
칠지구족(七支具足)하며 :
칠지가 구족하며, 코끼리는 다리가 네 개, 귀가 두 개, 코가 하나라서
그 가지가 일곱 개, 칠지라고 한다. 칠지가 구족하며
연치성장(年齒盛壯)하고 :
나이가 젊어서 힘도 좋고 일도 잘하고 씩씩하고
육아청정(六牙淸淨)하며 : 보통 상아가 두 개인 줄 아는데
여기는 여섯 개의 이가 아주 훌륭하다고 하였다.
구색홍적(口色紅赤)이 : 입 속은 아주 붉고 붉은 것이
유여연화(猶如蓮華)하고 :
마치 붉은 연꽃과 같다. 코끼리에 대해서 표현을 잘 했다.
형체선백(形體鮮白)이 :
형체는 선백이라. 흰 코끼리니까 몸은 깨끗하게 흰 색깔인 것이
비여설산(譬如雪山)하며 : 마치 설산과 같으며
금당위식(金幢爲飾)하고 : 금으로 된 깃대로 꾸미며 장식을 하고
보망나부(寶網羅覆)하며 : 보배 그물로써 펼쳐서 덮었다.
현재 스리랑카 캔디사원인가에서 부처님 치아사리 행사를 할 때는
코끼리를 장식할 수 있는 데까지 장식을 하는 것도
이런 데서 기인한 것이 아닌가 싶다.
종종묘보(種種妙寶)로 : 가지가지 묘한 보배로
장엄기비(莊嚴其鼻)하니 : 그 코를 장엄한다. 그래서
견자흔완(見者欣翫)하야 :
보는 사람이 다 아주 기뻐하고 볼만한 거리로 여겨서
무유염족(無有厭足)하고 : 싫어함이 없고
초보만리(超步萬里)에 : 만리를 걸어감에
증불피권(曾不疲倦)하며 : 일찍이 피곤해 하거나 싫증냄이 없다.
여기까지 코끼리의 이야기다.
다음으로 말도 코끼리와 같은 부류로 넣어서 이야기한다.
*
혹부시여조량마보(或復施與調良馬寶)호대 :
혹 다시 아주 잘 길들여진 말을 보시하되
제상구족(諸相具足)이 : 여러가지 상이 구족해서
유여천마(猶如天馬)하야 : 마치 천마와 같으며,
역사에 유명한 말로는 적토마(赤兎馬)가 있다. 천마와 같으며
묘보월륜(妙寶月輪)으로 : 아름다운 보배 월륜으로써
이위광식(以爲光飾)하고 : 아주 빛나게 장식하고
진금영망(眞金鈴網)으로 : 진금으로 방울을 짜서,
그물처럼 짜서 달리면 방울소리가 나고
나부기상(羅覆其上)이어든 : 그 위에 덮고
행보평정(行步平正)하야 : 걸어가는 것이 평정하고
승자안은(乘者安隱)하며 : 말 탄 사람이 편안하도록 한 말이
수의소왕(隨意所往)에 : 가고 싶은 대로 가는데
신질여풍(迅疾如風)하며 : 빠르기가 마치 바람과 같으며
유력사주(遊歷四洲)에 : 사주로 돌아다님에
자재무애(自在無碍)하니 : 자재무애하니
*
보살(菩薩)이 : 보살이
이차상보마보(以此象寶馬寶)로 : 이 코끼리와 말로써
혹봉양부모(或奉養父母)와 : 혹 부모에게도 봉양하고
급선지식(及善知識)하며 : 그리고 선지식에게도 봉양하며
혹급시빈핍고뇌중생(或給施貧乏苦惱衆生)호대 :
혹은 아주 가난하고 고통 받는 중생에게도 보시를 하되
기심광연(其心曠然)하야 : 그 마음이 확 트여서 광연해서
불생회린(不生悔悋)하고 : 조금도 후회하거나 뉘우침이 없고
단배증흔경(但倍增欣慶)하며 :
다만 더욱 더 기쁘고 경사스럽게 생각한다.
보시하는 것을 아주 기쁘게 생각하고 경사스럽게 생각하며
익가비민(益加悲愍)하야 :
더욱더 가난한 사람, 고뇌 받는 사람 그런 이들을
어여삐 여기고 불쌍히 여겨서
수보살덕(修菩薩德)하며 : 보살덕을 닦으며
정보살심(淨菩薩心)하야 : 보살심을 청정하게 해서
이차선근(以此善根)으로 : 이 선근으로
여시회향(如是廻向)하나니 : 이와 같이 선근회향한다.
보시는 그렇게 할 수가 있는데,
그 보시한 것이 어떻게 회향되어야 하느냐? 하고
마음을 쓰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런 것이 선용기심(善用其心)이다.
보시까지는 누구나 할 수 있어도
보시 뒤에 그 보시에 대한 마음을 어떻게 써야하는가는 잘 모른다.
그것이 여기 십회향에는 일일이 붙어 있다.
한 가지를 보시하면서 열 가지 이상씩 그 마음을 잘 쓰는 방법이 나온다.
선용기심이다.
*
소위원일체중생(所謂願一切衆生)이 : 소위 일체중생이
주조순승(住調順乘)하야 : 조순 아주 조화롭고 순한 법에 머물러서
증장일체보살공덕(增長一切菩薩功德)하며 :
일체 보살 공덕을 증장하기를 원하며
‘일체 중생들이 제발 좀 그렇게 했으면 좋겠다’하고
일체 보살의 공덕을 증장하기를 발원하는 것이다.
*
원일체중생(願一切衆生)이 : 일체중생이
득선교승(得善巧乘)하야 : 아주 훌륭한 방편의 법을 얻어서
능수출생일체불법(能隨出生一切佛法)하며 :
능히 따라서 일체 불법 출생하기를 원하며,
‘중생이 전부 그렇게 했으면’하고 보시를 하면서
그런 마음까지 갖는 것이다.
우리 불교계에서도 급식 활동이나 우물 파주기도 많이 한다.
동남아나 네팔 지진난 곳 같은 데에 가서 학교도 많이 지어준다.
며칠 전 신문에도 학교를 여섯 개를 지어줬다고 나왔다.
불교계에서도 하고 불자들도 동참하였다고 하는데
대개 그런 일들이 일회적이고 회향이 없다.
우물을 파주면 딱 우물을 파주는 것으로만 끝이 난다.
그래서 내가 급식활동 같은 것을 하면서 조그마한 명함에다가
부처님 말씀을 간단히 적어서 줘라. ‘콩심은 데 콩나고
팥 심은 데 팥난다. 선한 행을 하면 선한 과보를 거두고
악한 행을 하면 악한 과보를 받는다’라는 말 한마디라도 써서
하나씩 나눠주어 돌려보내라는 말을 많이 했었다.
어제 현대불교신문 기자가 조그마한 비닐봉지를 가져왔다.
비닐 봉지마다 부처님 말씀을 새긴 명함 한 장과 믹스커피 한 개와
초콜렛 한 개씩을 넣어서 돌렸다고 했다.
내가 ‘밥만 먹여 돌려보낼 게 아니다.
부처님 말씀 한마디 전하는 게 좋겠다’고 했더니
금방 문리(文理)가 나서 그렇게 만들어 온 것이다.
받는 사람들이 식사를 하고 나서 그 봉투를 들고가서 커피는 타먹고
초콜렛도 하나 먹으면서 명함 속의 부처님 말씀을 읽어보는 광경이
그림으로 그려졌다. 근사하다. 여러분도 참고 하시기 바란다. 좋은 일이다.
내가 여기서 이런 이야기들을 자꾸 이야기 하는 것이
헛된 소리가 아니고 어느 작은 구석에서
그 말들이 실행으로 옮겨지고 있다니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밥만 먹여서 돌려보내는 것은 다른 단체에서도 많이 한다.
부처님에게는 방편의 말이 얼마나 많은가?
불교에서 하는 일들은 전부 부처님 말씀,
진리를 전하기 위한 방편이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물론 우물을 파주는 일은 그것만으로도 훌륭한 일이고 좋은 일이다.
보살행이다. 그 일만 찬탄해도 한없이 찬탄할 거리다.
그러나 여기 십회향품에 보면 보시 뒤에는 늘 선교회향이 따른다.
불법으로써 회향하도록 하는 것을 잊지 않는 것이다.
밥을 한그릇 주더도, 우물을 파주더라도, 학교를 지어 주더라도
늘 부처님 법과 연관되도록 다리를 놓아주는 것이 아주 좋다.
현대 불교 기자가 그 작은 비닐 봉지를 들고 와서
‘스님 내가 이렇게 했습니다’하고 준 것이 참 잘한 일이다.
밥을 공양 올린 것보다 정작 복은 그 명함 한 장에
부처님 말씀을 전해 준 것에 몇백 배, 몇 천 배 더 따라올 것이다.
부처님은 누구에게 밥 한 그릇 대접한 바가 없는데 왜 그렇게 부자냐?
불국사 통도사 그 좋은 사찰이 전부 부처님 앞으로 등기되어 있는데
어째서냐? 밥 한 그릇 누구에게 보시한 적이 없는 부처님은
다만 진리의 말씀을 보시했다. 내가 늘 이야기를 하는 바다.
흘려버릴 것이 아니라 꼭 기억해야 할 일이다.
금강경에서는 사구게(四句偈) 하나 전해주는 공덕에 대해
입이 벌어질 정도로 이야기를 해 놓았다.
사구게가 뭐라고 어째서 그 한마디 전하는 공덕이 그렇게 큰 것이냐?
그 말에 우리가 깜짝 놀라야 된다. 몇날 며칠 밥도 안먹고 잠도 못자면서
그 이유를 씨름해야 된다. 경전에서 거짓말을 했을 리가 없잖은가?
‘범소유상 개시허망(凡所有相 皆是虛妄)’
그 한마디를 사람들이 모르기 때문에 그것을 전하면
그 공덕이 큰 것인가? 도대체 왜 그렇게 사구게 전하는 공덕이 큰가?
회향의 원리 때문이다.
여기 나오듯이 일체중생이 선교방편(善巧方便)의 가르침을 얻어서
어떻게 어떻게 하기를 원한다고 하는 이 원(願)자가 아주 중요하다.
내가 천수경을 강의하면서 천수경에 원자가 들어간 것을 보니까
‘발사홍서원(發四弘誓願), 벌원이귀명례삼보(發願已歸命禮三寶)’
중간에 또 무슨 원 무슨 원해서
그 원이 짧은 천수경의 삼분의 일이나 되었다. 원이 그렇게 중요하다.
내가 가끔 불공 이야기를 하는데
옛날에 우리 어릴 때는 전부 독(獨)불공이었다.
지금은 독불공이 하나도 없이 전부 합동으로 축원하고 마는데
옛날에는 합동 불공이라는 것이 없었다. 백 명이 오든 이백명이 오든
전부 독불공을 해줘야 하는 그 옛날에 정초에는 하루에 100명씩이 오고
어느 때는 100명 이상이 오기도 하는데
무슨 수로 다 독불공을 해주는가? 그런데 방법이 있다.
천수경은 길어서 못하고 유치(由致) 청사(請詞)
그 좋은 법문도 한마디도 해줄 수가 없지만,
그저 축원문만 근사하게 해주는 것이다.
축원을 근사하게 하고 특히 그 집 가족 이름을 부를 때
불공제자 귀에 쏙 들어가도록 큰소리로 재고축 삼고축까지 해주면
다 해도 5분이 채 안걸린다. 100명 아니라 200명이라도 한 법당에서
불공을 다 해마친다. 그리고 불공 제자를 아주 만족하게 한다.
천수경 안외워주고 반야심경 안외워주고 유치 청사 하나도 안해줘도
축원을 잘 해주면 불공드리는 사람들이 만족한다.
왜냐하면 큰소리로 부처님한테 축원을 해서
가족들 이름 분명하게 들리게 해주는 것으로써 그들이 바라는 바,
그 원과 꿈과 희망에 불을 지펴주었기 때문이다.
이름이 분명하게 들리지 않게 해주면
나중에 ‘우리 축원 안나갔다’고 다시 해 달라고 한다.
그런 일들을 여러분도 여러 번 당해 봤을 것이다.
아무리 불공 잘 들여줘도 ‘축원 안나갔으니까 다시 해달라’고
반드시 따지게 된다. 그럴 때는 꼭 새로 해줘야 된다.
사람의 심리가 다 그런 것이다. 그 기대감을 충족시켜 주는 것이 원이다.
원이 다른 것이 아니다. 불공드리는 사람들에게는
자녀들 이름을 불러서 ‘부처님 가피력으로 금년 내내 만사형통 하게
하길 바랍니다’라고 축원하는 그 말이 원(願)이다.
그 원이 귀에 쏙 들어오도록 하면,
그 소리 들으려고 탁 기대하고 있다가 대만족을 하는 것이다.
‘색불이공 공불이색(色不異空空不異色)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空卽是色)’은 누가 알아듣는가?
색즉시공 공즉시색 아는 사람이 누가 있는가?
내가 천수경 강의할 때 늘 그 이야기를 했었다.
요즘은 천수경 강의를 안하지만
내 천수강의 책속에 이런 내용들이 있을 것이다.
*
원일체중생(願一切衆生)이 : 일체 중생이
득신해승(得信解乘)하야 : 믿고 이해하는 가르침. 이해하는 법을 얻어서
보조여래무애지력(普照如來無碍智力)하며 :
여래의 걸림없는 지혜의 힘 환하게 비추기를 원하며.
믿고 이해하는 것. 신해행증(信解行證)이다.
일체 중생이 신해행증을 해서
여래의 걸림없는 지혜의 힘을 알게 되기를 마음속에 원하라는 것이다.
*
원일체중생(願一切衆生)이 : 또 일체중생이
득발취승(得發趣乘)하야 :
더 나아가고 앞으로 앞으로 더 나아가는 그런 법을 얻어서
능보발흥일체대원(能普發興一切大願)하며 :
일체 그 외 모든 원들을 크게 일으키기를 또 원한다.
대원을 원한다. 오직 원이다.
천지는 지금 한창 봄이 되어서
새싹이 파릇파릇 돋고 꽃이 피고 야단이다.
그런 것이 전부 원이 발현되는 일이다. 식물은 부디 봄이 와서
기후가 맞고 습도가 맞으면 몸부림 치고 꿈틀거려서
‘내가 가지고 있던 꿈과 희망을 꽃피우리라’ 오직 그 생각만 하고 있다.
‘때만 맞으면 내가 언젠가 내 꿈을 꽃피우리라’
모든 생명은 전부 그 생각만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지금 온천지가 꽃피우느라 야단 법석이다.
사람 뿐만 아니라 생명 있는 것은 다 그렇다.
*
원일체중생(願一切衆生)이 : 일체중생이
구족평등바라밀승(具足平等波羅蜜乘)하야 : 평등바라밀승을 구족해서
성만일체평등선근(成滿一切平等善根)하며 :
일체 평등선근을 성만하기를 원만히 이루기를 원하며
원일체중생(願一切衆生)이 : 일체중생이
성취보승(成就寶乘)하야 : 보배의 가르침을 성취해서
생제불법무상지보(生諸佛法無上智寶)하며 :
모든 부처님의 법, 그리고 가장 높은 지혜의 보배
성취하기를 내기를 원하며
*
원일체중생(願一切衆生)이 : 일체중생이
성취보살행장엄승(成就菩薩行莊嚴乘)하야 :
보살행 장엄승을 성취해서, 보살행 같이 장엄스러운 것이 없다.
그런데 뭘로 꾸민단 말인가? 화엄이라고 해서 사람이 꽃일 때는
아름다운 말과 마음다운 행동과 아름다운 마음가짐이 바로 꽃이다.
그런 사람이 신구의 삼업으로 보살행을 표현할 때가 장엄이다.
화엄이라고 꽃으로 장엄한다는 것이
무슨 매화꽃 벚꽃 목련꽃 잔뜩 심어놓고 꾸미는 소리가 결코 아니다.
그런 이야기를 하려고 화엄경을 설했을 리가 없다.
보살행이라고 하는 꽃으로써 세상을 장엄한다.
개부보살제삼매화(開敷菩薩諸三昧華)하며 :
개부보살제삼매화 하며 보살의 모든 삼매의 꽃을 피우기를 원하며
*
원일체중생(願一切衆生)이 : 일체중생이
득무변속질승(得無邊速疾乘)하야 : 가없는 빠른 가르침을 얻어서
어무수겁(於無數劫)에 : 무수겁에
정보살심(淨菩薩心)하야 : 보살심을 깨끗이 해서
정근사유(精勤思惟)하야 : 부지런히 사유해서
요달제법(了達諸法)하며 : 모든 법 요달하기를 원하며
*
원일체중생(願一切衆生)이 : 일체중생이
성취최승조순대승(成就最勝調順大乘)하야 :
가장 수승하고 조화롭고 순한 대승법을 성취해서
이선방편(以善方便)으로 : 훌륭한 방편으로써
구보살지(具菩薩地)하며 : 보살의 지위를 갖추기를 원하며
*
원일체중생(願一切衆生)이 : 일체중생이
승최고광견고대승(乘最高廣堅固大乘)하고 :
가장 높고 넓고 견고한 대승에 올라서
보능운재일체중생(普能運載一切衆生)하야 :
일체 중생을 널리 실어 날라서
개득지어일체지위(皆得至於一切智位)니라 :
모두 일체 지혜의 지위에 이르기를 원할지니라.
일체 지혜의 지위는 부처의 경지다.
*
시위보살마하살(是爲菩薩摩訶薩)이 : 이것이 보살마하살의
시상마시(施象馬時)에 : 코끼리와 말을 보시할 때의
선근회향(善根廻向)이니 : 선근회향 하는 것이니
위령중생(爲令衆生)으로 : 위령중생으로 그 까닭을 말하는 것이다.
왜 그렇게 하느냐? 중생으로 하여금
개득승어무애지승(皆得乘於無碍智乘)하고 :
걸림없는 지혜의승에 올라서
원만구경(圓滿究竟)하야 : 원만구경해서
지불승고(至佛乘故)니라 :
부처의 경지, 불승에 이르게하기 위한 까닭이니라.
모든 중생들을 부처의 경지에 이르도록 하려는 이유로
이렇게 보시하는 것이다.
무슨 보시를 하든지 간에 그렇게 하라는 것이다.
첫댓글 상보보시(象寶布施) : 코끼리와 말(馬)을 보시하다
지금까지 60여종의 보시를 하는 것을 이야기 하고 있다.
‘보시’ 한마디만 하면 될 것을 이렇게 화엄경 81권 중에서
열권 반이나 차지하면서 까지 선근회향을 권고하고 있다.
귀에 못이 박히도록 보시 이야기를 하지만
정작 하기 어려운 것이 보시다.
남을 배려하고 남을 먼저 생각하고 마음을 나누기가 어렵다.
일상생활에서 우리가 제대로 실천하지 못하는 것이 또한 보살행이다.
십회향품에서 ‘선근회향’ 넉 글자로 끝낼 수 있는 내용이 반복해서 나온다.
그것은 우리의 안이비설신의 속에 끊임없이
이것을 뿌리내리게 하고 훈습되게 하려는 훈련 과정이라고 봐야 한다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