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근대역사관에서는 "1923년 대구(大邱), 100년전 대구이야기"를
2023년 11월 17일부터 2024년 1월 14일까지 기획전시 하고있다.
"100년전" 만 아쉬워 1930년대 대구의 모습들도 같이 살펴보고자 한다.
대구 근대역사관 (중앙공원 옆)
대구 근대역사관 건물은 1932년 조선식산은행 대구지점으로 건립되어,
1954년부터는 한국산업은행 대구지점으로 이용된 근대문화유산이다.
르네상스 양식으로 조형미가 뛰어난 역사관 건물은 원형이 잘 보존되어
2003년 대구시유형문화재 제49호로 지정되었다.
2008년 이후 대구근대역사관으로 새롭게 단장돼 2011년 1월 문을 열었다.
대구.근대역사관 입구
이번 "100년전 대구이야기"는 여러 분야별로 기획전시를 하고 있는데,
1920~30년대의 건축물 위주로 외양상 변화된 모습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따라서 전시된 1920년대 사진외에도 편의상 자료들을 추가 보완하였다.
1906년의 대구시가지의 모습
대구역은 1905년 1월 1일 경부선 개통과 함께 보통역으로 영업을 개시했다.
역사는 1913년에 준공하였으며, 서울,대전,부산역과 같은 르네쌍스 양식이었다.
당시 지방의 철도역으로는 부산역과 신의주역 다음으로 규모가 컸다.
그러나 1969년 동대구역 건설로 이용객과 그 위상이 크게 줄어들었다.
(왼쪽)1913년 건설된 대구역은 65년만인 1978년 새역사가 들어서면서 역사속으로
(오른쪽)1978년 준공한 새역사는 2000년 롯데백화점의 민자역사 건설로 또 사라졌다.
경상감영 출입문인 영남포정사(嶺南布政司,관풍루)
1601년(선조 34) 대구에 경상감영이 설치되면서 선화당(宣和堂)의 남서쪽에
포정문(布政門)을 세우고 그 위에 문루(門樓)를 만들어 관풍루라고 불렀다.
현재 달성공원 북쪽에 옮겨 세워져 있는데 1906년 당시
경상도관찰사 박중양(朴重陽)이 대구읍성을 철거할 때 건물만 옮겼다.
원래 위치인 전 병무청 청사 건물을 헐고 현재 복원사업을 진행중이다.
경상감영의 중삼문(내삼문, 현재는 없음)
경북도청(경상감영 ) 입구
경상감영 선화당(宣化堂)
영남제일관
대구읍성은 1590년(선조 23년)에 축성된 토성으로 임진왜란 때 파괴되고
그 후 140년간 성이 없었다가, 영조 12년(1736)에 여첩(女堞)을 완공하게 되었다.
동서남북 4개의 정문이 있었는데, 그 중 남문을 영남제일관이라 칭하였다.
1870년 중수하여 누각 4개를 세웠으나 1906년 읍성과 함께 헐어버렸으며,
1980년 지금의 망우당공원 언덕에 영남제일관을 중건하였다.
1920년대 대구 중심시가지 모습(1)
1920년대 대구 시가지 모습(2)
대구공회당
대구공회당은 1913년 대구의 중심지인 대구역 서편에 건립 개관하였다.
당시 대구경북권역에 마땅한 공연시설이 없었던 관계로
회합,모임,공연시설 등으로 애용되었으며, 특히 전국에 몇대 없던
그랜드피아노를 보유하여 클래식공연이 자주 열리기도 했다.
1940년에는 경성방송국 대구방송분소로, 1950년 한국전쟁 중에는
임시로 이전해온 국립중앙극장과 함께 문화예술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1962년 한국방송 대구방송국으로 이용되다가, 대구방송국의 신축 이전으로
1975년부터 다목적홀인 대구시민회관으로 신축 개관하였으며,
2013년부터는 대수선 후, 고품격 클래식 전문 공연장으로 재 개관했다.
조선은행 대구지점
조선은행 대구지점은 1920년대 개점하여, 해방후인 1950년 6월 12일에는
한국은행 대구본부로 개장하여 1971년 이전할 때까지 사용하였다.
이 후 이 건물은 하나은행이 입점하여 이용하다 철거되었다.
조선은행 대구지점은 1927년 10월 18일 장진홍 의사에 의한
대구 폭탄투척 의거 사건이 있었는데, 이 사건은 사건 발생 후
보도를 통제하다 2년 2개월이 지난 후 장의사를 비롯한 관련 인물들을
검거한 뒤인 1929년 12월 28일에야 보도(서울신문) 되었다.
조양회관
조양회관은 독립운동가 서상일선생등이 민족과 청소년들에게
독립정신을 고취하고자 자금을 마련하여 1922년 10월 30일 건립하였다
원래 대구 달성공원앞 구 원화여고 자리에 있었는데 원화여고가
학교를 옮겨 가면서 그자리에 아파트를 건립하게되자
대구시에서 건물을 매입한후 현재위치인 망우공원(동촌유원지)자리에
이전 복원(84~87)하였고, 1987년 2월 28일 광복회대구지회로 문을 열었다.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2013.10.30)되어있고 대구근대문화유산 제3호이다.
반월당(半月堂)
반월당 건물은 1936년, 약전골목에서 돈을 번 차병곤이란 사람이
목조 건물로 된 2층 가게를 연 것이 시초이며, 당시 위치는 대략 지금의
반월당 전철역 22번 출구 근처로. 주로 화장품, 양산, 스카프, 장갑 등
여성 고객들을 위한 패션 잡화용품을 많이 팔았다고 한다.
당시 대구에선 동성로의 "이비시야", 북성로의 "미나카이", 서문로의 "무영당",
그리고 반월당의 "반월당"이라 불릴 정도로 잘 나가던 백화점이었다.
그러나 경영난으로 인해 1943년 소유권이 타인에게 넘어가서 공신백화점으로
변경되었다가, 1980년대에 도로를 확장하면서 건물까지 철거되었다.
현재 대구의 최중심인 반월당이란 지명도 이 건물 이름에서 유래되었다.
대구 부립 무덕전(府立 武德展, 일명 무덕관)
이 건물은 1923년 경북무덕회가 성금 4,500원으로 건립하였다.
1945년 조선무술회, 1950년 대한무술회, 이 후 경북검도회로 개칭되었고,
1960년 경찰기동대 무술장, 다시 대구시청 회의실로 사용해 오다가
1987년 시청 민원실과 주차장 건립을 하면서 철거되었다.
대구 계산동 성당
대구 계산동성당은 1902년에 건립된 고딕식 건축물로
서울의 명동성당, 전주 전동성당과 쌍벽을 이루는 유서깊은 건물이다.
위 왼쪽은 1900년대 초 건립당시 주변 모습, 오른쪽은 현재의 모습이다.
이 건물은 6.25 전쟁 중이던 1950년 12월 12일 고 박정희대통령과
육영수여사가 결혼식을 올린 유서깊은 장소이기도 하다.
대구 제일교회
대구 제일교회는 아담스 선교사가 1907년 단층 140평의
예배당을 건축하였다가 1933년 2층 448평의 예배당을 건축하였다.
대구·경북 지방 최초의 서양의료기관인 제중원(濟衆院)을 설립하였으며,
1899년 동산동으로 옮기면서 동산병원(東山病院)으로 개칭하였다.
또한 희도·신명·계성 등 학교를 설립하여 많은 인재를 양성하였다.
1994년 동산동 선교사 주택앞 언덕으로 신축(오른쪽 아래) 이전하고
기존의 제일교회(예배당)는 대구 기독교역사관으로 운영하고있다.
대구 지방법원과 복심법원(覆審法院)
1908년 8월 1일 현재의 대구고등법원인 대구공소원과
대구지방법원인 대구지방재판소가 지금의 2.28공원과 공평주차장인
이곳에서 문을 열었다. 당시 공소원은 경성(서울), 대구, 평양 3곳에만
설치되었으며, 대구공소원은 경상도,전라도,제주 전 지역을 관할했다.
1912년 "조선총독부재판소령"의 전면 개정으로 4급 3심제를 실시하면서
경성(서울)에 고등법원을, 서울,대구,평양에 복심법원을 설치하였다.
대구 세무감독국(현 국채보상기념공원 동편)
위 : 1934년경 세무감독국 건물과 옆의 운동장,
아래 : 1952년 10월 육군본부로 쓰이던 때와 이후 2군사령부 시절
대구세무감독국은 조선총독부의 제2차 세제정리에 따라
1934년에 설치된 기관으로, 중앙의 총독부 재무국 산하에 지방에 5개의
세무감독국(경성,평양,함흥,대구,광주)과 산하에 99개의 세무서가 설치되었다.
이 후 1943년 각 도에 재무국을 설치하여 세무행정을 관장케 하면서 폐지되었다.
이 후 6.25전쟁시에는 육군본부로, 그 후 2군사령부로 사용하다가 이전 후
건물을 헐고 신축하여 현재는 한국은행 대구경북본부가 들어서 있다.
대구부(시청)에서는 부민들의 체육향상과 운동정신 함양을 위해 이곳의 국유지
7천평을 임차하여 야구,정구 코트 등을 만들어 사용하다가, 세무감독국 신설로
반환명령을 받아 부득이 반쪽정도만 임시 운동장으로 사용하였다 한다.
대구공립상업학교(대봉동)
대구공립상업학교는 1923년 4월 16일 5년제로 설립되었으며,
8·15해방 후인 1946년 9월 대구공립상업중학교(6년제)로 개편되었고,
1951년 9월 대구상업고등학교로 교명을 바꾸었다.
1984년 상인동으로 이전하고 교명도 대구상원고등학교로 바뀌었다.
대구사범학교
대구사범학교는 1923년 4월 1일 경상북도 공립사범학교로 대구에 설치하였다.
1929년 제도개편으로 관립 대구사범학교가 신설되었으며,
개교 당시 5년제의 심상과, 2년제의 연습과, 특과 등의 과정을 두었다.
1944년 4월 사범학교제도의 개편에 따라 3년제의 본과를 개설하여
전문학교 수준의 사범학교로, 1946년에는 대구사범대학으로 승격 개편되었다.
같은 해 부속중학교가, 1951년에 고등학교가, 1959년에는 부속국민학교가 설치되었다.
대구사범학교는 1962년 2월에 경북대학교 병설 교육대학으로 개편되면서 폐교되었다.
서문시장 이전
왼쪽 위 : 서문시장 이전 전의 천왕당지(저수지) 주변 모습
왼쪽 중.하 : 이전 후 인파들로 북적이는 대구 서문시장 풍경
오른쪽 : 1923년 3월 30일자 매일신보의 "대구 서문시장 이전" 기사
조선시대의 서문시장은 현재의 동산파출소와 오토바이 골목 일대에
있었으며, 이름은 대구읍내장이었는데, 당시엔 강경시장, 평양시장과 함께
조선 3대 시장으로 불리는 방대한 규모의 전국적으로 자랑하는 시장이다.
1920년대 초 대구 시가지가 개발되고 확장되면서 서남쪽에 있는
천황당지라는 큰 못을 매립해서 시장을 옮긴 것이 현재 서문시장이다.
순종황제 대구방문
오른쪽 : 순종황제 어진
왼쪽 위 : 순종황제 어차, 아래 : 순종황제 대구 달성공원 가는길의 환영 인파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순종(1874∼1926)은 "비운의 황제"라고도 한다.
1905년 11월 일본은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을 식민지 보호국화 한 후,
1907년 7월 헤이그 특사 파견을 구실로 고종 황제(高宗,재위 1863~1907)에게
양위를 강제하였으며, 강압으로 제3차 한일 협약(정미 7조약)을 체결하여
대한제국의 행정 및 사법권을 빼앗는 한편 "부속각서" 제3조를 통해
군대해산을 명시하고 "군대해산조칙"을 재가하도록하여 해산하게 했다.
1910년 8월 29일 한·일 합병조약(경술국치)으로 결국 일본의 식민지가 된 후,
황제는 창덕궁에서 비통한 세월을 살다 생을 마감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순종 황제의 남순행(남쪽으로 순찰가다)은
1909년 1월 7일부터 7일간 진행되었는데, 대구에서 출발하여 부산을 거쳐
마산 그리고 다시 대구를 통해 대전으로 돌아가는 일정이었다.
다만 순종의 전국 최초 순행이며, 첫 대구 방문이라는 역사적 의미가 있다.
1910년대에 지은 선교사주택 3채
위 : 선교사 챔니스주택과 선교사 스윗즈주택,
아래 : 선교사 불레어주택과 의료선교 박물관
위 : 선화당과 관풍루, 아래 : 영남제일관과 아양루
(위 오른쪽) 동촌역사 : 1938년 신설 후 2008년 까지 여객업무 취급
(아래 왼쪽) 고모역 : 1925년 신설 하여 2004년 까지 여객업무 취급
2018년 8월부터 복합문화공간으로 새단장을 하여 개방
(아래 오른쪽) 빈야월역 : 1932~2008 폐역, 반야월 공원부지로 이전 복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