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윤리실천운동에 대해서 목사 한 분이 “신앙 운동이면 충분하지, 왜 윤리 운동을 따로 해야 하나?”라고 비판했다. 옳은 지적이다. 윤리는 온전한 신앙의 한 부분이기 때문에 신앙 운동 외에 윤리 운동을 또 따로 해야 할 이유가 없다. 그런데, 일반 사회뿐 아니라 교계 지도자들 모두가 인정하는 사실은 지금 한국 교회의 가장 심각한 문제가 바로 충분히 윤리적이지 못하다는 것이며, 이는 교인 수 급감, 청소년들의 교회 이탈, 기독교의 사회적 위상과 영향력 하락의 중요한 원인이 되고 있다. 윤리는 신앙에 첨부되면 더 좋을 별개의 요소가 아니라 신앙의 핵심적 요소이기 때문에, 윤리 운동은 곧 현대 한국 교회 신앙의 약한 부분을 보충하기 위한 신앙 운동이다.
기독교 세계관 운동도 기독교윤리 운동과 비슷한 위치를 차지한다. 다만 그리스도인들 대부분은 기독교 세계관 운동이 윤리 운동만큼 중요하고 필요하다는 사실을 충분히 인식하지 못하고 있고, 바로 그런 인식의 부족이 기독교 세계관 운동을 어렵게 하고 생소하게 느끼게 한다. 윤리는 인간 공동체의 시작부터 필요했던 것이고, 십계명을 비롯해 율법과 여러 곳에서 성경은 매우 분명하게 이를 명령하고 있다. 그러나 세계관의 존재와 중요성은 20세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소수의 철학자들과 그리스도인들이 인식하기 시작했다. 그때까지는 비록 정확성에 있어서 차이는 있지만 모든 사람이 비슷하게 세상을 보고 평가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교통과 통신기술이 발달하여 다른 문화들과의 접촉이 활발해지자 사람들이 문화에 따라 서로 다른 세계관에 따라 평가하고 행동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이제까지 당연하게 생각하고 따랐던 세계관이 성경이 가르치는 세계관과 다르다는 것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신자들은 물론 심지어 신학자들조차 대부분 이 사실과 그 심각함을 충분히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므로 기독교 세계관 운동은 윤리 운동 못지않게 중요하고 필요하지만 그보다는 훨씬 더 어려운 사역이 될 수밖에 없다.
우선 기독교 세계관 운동도 윤리 운동과 마찬가지로 신앙 운동과 별개의 것이 아니라 우리 신앙의 약한 고리를 강화하는 신앙 운동의 일환이란 사실을 인식시키는 것이 전략적이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기독교 세계관 운동은 십자가의 구속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무시되었던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창조의 중요성을 재강조하는 것이다. 사실 그것은 이미 종교개혁자 칼뱅이 강조한 것이고 카이퍼가 다시 일깨운 것으로 개혁주의 신학의 핵심적 교리다. 창조, 구속, 성령의 역사 등 기독교 세계관의 모든 핵심 요소들의 기본 전제가 바로 하나님의 절대주권이다.
그동안 그리스도인들은 자연과학과 과학기술의 엄청난 발전과 성취에 압도되어 있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스스로도 잘 의식하지 못한 채 정치, 경제, 문화, 기술 등 세상의 모든 것과 온 우주를 만드시고 지배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 대신, 필립스(J. B. Phillips) 목사의 “당신의 하나님은 너무 작아!”(Your God is too Small)란 책 제목처럼, 하나님을 겨우 세상의 한쪽 구석으로 밀려난 교회와 소수의 신자들만 돌보시는 분으로 인식하고 그런 인식에 따라 행동하게 되었다. 거기다가 악의 세력은 너무 크고 자신과 세상의 죄는 너무 심각해서 선과 악, 교회와 세상, 하늘나라와 지옥, 주일과 평일, 기도와 노력 등을 대비시키는 이원론적 사고를 갖게 되었다. 따라서 교회와 교인이 감당해야 할 주된 임무는 열심히 전도해서 한 사람이라도 더 회개하도록 해서 어둠의 세상에서 빛의 세상으로 옮겨오도록 하는 것이고, 그 외의 것에 관심 쓰는 것은 시간 낭비요 세속적이란 생각이 굳어진 것이다. 근본주의적 이원론은 바로 이렇게 해서 형성된 것이 아닌가 한다. 이런 신앙은 창조보다는 십자가, 성부 하나님보다는 예수님에게 집중하는 경향을 가진다. 이런 신앙에서는 기독교 세계관이 설 자리도 없고 중요하지도 않다.
그리고 속죄와 은혜에 초점을 두다 보면 신앙의 초점이 자신의 구원에 집중되고, 우리 삶의 궁극적 목적인 하나님의 영광은 기껏해야 성도들의 감사와 찬양에 국한되어 버린다. 개인의 구원과 전능자의 강복은 모든 종교에 공통되므로 ‘기독교’도 그런 ‘종교’ 가운데 하나가 되고 만다. 특히 무속적 세계관과 무관하지 않은 한국 교회의 기복신앙은 하나님의 영광보다는 사람의 복에 초점을 두므로 건전한 성경적 신앙이라 할 수 없다. 그런 자기중심적 신앙으로는 하나님의 영광을 세상에 드러내기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랑을 실천하기도 힘이 든다. 세상의 빛은커녕 소금의 역할도 제대로 감당할 수 없다.
그런데 잘 알려진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의 제1문에는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이 구원받고 복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영원히 즐거워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한두 신학자가 성경의 몇몇 구절을 풀이하고 내린 결론이 아니라 수백 년의 교회 역사에서 수많은 신학자들과 교회 지도자들이 성경 전체를 조직적으로 연구하고 토론하고 논의한 것을 정리하여 내린 신앙고백이다. 하나님 중심의 ‘기독교’는 인간구원과 복 중심의 ‘종교’와 근본적으로 다르다.
물론 타락과 죄의 심각성,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 성령의 함께 하심은 이제까지 교회가 중요시해 왔고 앞으로 계속해서 강조해야 한다. 그러나 그동안 상대적으로 무관심했던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창조의 중요성을 같이 회복하면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기뻐하는 삶을 살려고 노력하는 것은 중요한 신앙 운동인 동시에 기독교 세계관 운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