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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장 교장 정열모
(조선어학회 사건은 최송설당이 돌아가시고 난 이후에 발생했다. 편집의 편의상 배열을 조절했다.)
기말시험이 치루어지고 방학을 할때까지는 1주일여 시간이 남는다. 선생님들은 채점과 성적을 내기위해 바쁘지만 학생들은 비교적 한가한 시간을 보낸다. 이때는 어김없이 정열모 교장선생의 특별 수업이 열렸다. 정열모 교장은 대종교 신자로 단군신화에 심취해 있었다. 선생의 교육방식은 특이했다. 단군신화에 대한 교육이 끝나자 한 시간 동안 수업 내용에 대한 시험이 치러졌다. 시험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즉석에서 개인별 채점이 이루어졌다. 각자가 확실히 이해 될 때에 수업은 끝이 났다.교실을 나설 때는 둥근달이 김천의 중천 하늘에 높이 떠 있었다. 고향으로 돌아가는 젊은이들의 가슴에는 한민족의 우월성에 대한 자부심으로 가득 채워주었다.
조선 총독부 경찰국장은 간부들과 회의를 하고 있었다.
“조선어 연구 학자들에 대한 규모는 파악되었소?”
“아직은 파악 되지 않았습니다. 중점 사찰하도록 하겠습니다.”
“인도를 보시오. 영국은 인도 사람들이 영어가 상용화되도록 만들지 않았소.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하오."
“네, 명심하겠습니다.”
“학자라는 놈들은 소신을 가지고 있으니까 말로는 안 될 거요. 몽둥이 밖에는 없을 것이요.”
“조만간 조선어 학자들의 움직임을 유심히 관찰하도록 하겠습니다.”
이렇게 하여 경찰국장이 주재하는 회의는 종료되었고 일선 경찰서로 총독부의 지침이 시달되었다. 그들은 조선인의 말과 글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함으로써 완전한 식민지화를 꿈꾸고 있었다.

조선어학회 관련자들, 가운데 줄 왼쪽에서 다섯 번째가 정열모.(출처 : 독립기념관)
한편 한말에 일어났던 한글운동은 3·1운동 후 다시 일어났다. 1921년 에는 조선어연구회가 창립되었다. 이후 조선어학회로 이름을 고쳐 불렀다. 1929년 10월에는 조선의 유지 108명으로 구성된 조선어 사전편찬회가 조직되었다. 사전 편찬을 위한 선행 작업으로 ‘한글맞춤법통일안’, ‘표준어사정(査定)’, ‘외래어표기’를 제정하는 기초 작업이 필요했다. 여기에 당대의 학자 30여명이 뭉쳤다. 1940년부터는 조선어 사전편찬 작업이 본격화되었다. 이로써 문화민족의 상징이요 민족정신의 수호인 조선어사전을 만들기 위한 일이 시작되었다. 1942년 4월부터 본격적으로 인쇄 작업에 들어갔다.
조선은 1895년 '소학교령'이 공포되어 관립 소학교(小學校)가 전국적으로 설립되었다. 1906년에는 통감부에 의해 기존의 조선인을 위한 초등교육기관인 소학교는 보통학교(普通學校)로 개칭되었다. 1926년에는 심상소학교(尋常小學校)로 명칭이 바뀌었다. 1941년에는 일제칙령에 의해 국민학교(國民學校)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일본제국주의는 ‘국민학교’라는 이름으로 바꿈으로서 황국신민(皇國臣民)의 뜻을 세뇌했다. 인간 개개인이 독립된 개체이기 전에 국가의 통제와 지시를 따라야 한다는 의미를 부여하였다.
1942년 여름
함흥의 영생고등여학교 여름방학 날이었다. 기숙사 생활에 묶여 있었던 학생들이 해방감을 느끼며 교문 앞으로 밀려나왔다. 그리고는 각자의 고향으로 향하고 있었다. 책과 옷 보따리를 들고 세 여학생은 함흥 역에서 회령으로 향해 북쪽으로 가는 기차에 올랐다. 부모님과 동생들을 만난다는 기쁨에 깔깔대고 웃기에 바빴다. 기차는 여섯 정거장을 지났을 때 야트막한 역사 지붕 정면에‘전진역’이라는 간판이 보이고 역사 뒤편으로 주황빛 노을이 드리워졌다. 다음은 홍원이었다. 이때 홍원경찰서 형사부장 야스다가 학생들의 앞을 가로막고 빈정거리는 말투로 나왔다.
“어이, 국어(일본어)를 상용하지 않고 조선말을 쓰는가?”
“당신은 누구에요. 조선 사람이 조선말을 썼기로 뭐가 나빠요”
학생들의 대꾸에 화가 난 야스다는 홍원 역에 도착하자마자 역장실로 학생들을 끌고 갔다. 교복을 벗기고, 담뱃불로 학생들의 가슴을 지지는 행패를 부렸다. 그러고서도 분이 안 풀렸는지 박영옥 학생은 집에까지 데리고 가 집안 구석구석을 수색했다. 일기장을 이리저리 살펴보더니 무슨 냄새라도 맡은 사냥개 마냥 코를 너불거리며 읽어 내려갔다. 그러나가
‘오늘 국어(=일본어) 한마디 썼다가 선생님한테 꾸지람을 들었다.’는 대목에서는 천천히 또박또박 읽어 내려갔다.
“학생, 국어를 썼으면 칭찬을 받아야지 꾸지람을 들었나? 선생님이 누구야?”
박영옥는 아차 하는 마음을 금할 수 없었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사냥감을 낚아챈 독수리 마냥 야스다는 박영옥를 경찰서로 데리고 갔다.
박영옥의 교복을 강제로 벗기고 협박을 했다.
“옷을 다 벗고 말할래? 지금 말할래?
“제발 살려 주세요.”
“살려주고 말고는 네가 바른대로 말하느냐에 달려있다.”
결국 야스다는 문제의 선생님을 밝힐 때까지 갖은 고문과 수치심을 유발시켰다.
“조선말을 쓰라고 가르친 사람이 누구냐?”
“정태진 영어 선생님입니다.”
“뭐라고 가르쳤냐?”
“너희들끼리는 조선말을 써야 한다. 너희들이 조선말을 쓰지 않으면 조선말과 민족은 이 지구상에서 영원히 사라진다고 가르쳤습니다.”
“정태진 선생은 지금 어디 있느냐?”
“지난 연말에 사표를 내고 서울로 가셨습니다.”
정태진은 경기도 파주 사람으로 경성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연희전문학교에서 국어학자 정인승을 만났다. 정인승 교수로부터 조선의 얼에 대해 교육을 받았다. 졸업 후에는 함흥 영생고등여학교에서 교사로 있었다. 이후 미국 우스터 대학으로 유학을 가서 철학을 전공했다. 귀국 후에는 다시 영생고보에 복직한 상태였다. 1941년에는 <조선말 큰 사전> 편찬을 위해 사표를 내고 경성에 와 있었다.

조선말 큰 사전 원고(출처 : 문화재청)
당시 조선의 상황은 “국어(=일본어)를 상용화 하자.”라는 구호를 건물마다 붙였다. 심지어 공중변소에까지 붙일 정도였다. 일본말을 안 쓰면 기차표도 살 수가 없었다. 조선말을 쓰면 반제국주의자요 독립운동가로 보는 시절이었다. 정태진으로 인해 상황은 새로운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사건이 확대된 것이다. 홍원경찰서에서는 1942년 9월 5일 순사를 서울로 파송하여 정태진을 홍원으로 압송해왔다. 고문과 실신이 여러 차례 계속되었다. 매에는 장사가 없다고 했다. 지칠 대로 지친 정태진은 입을 열기 시작했다.
“네가 하는 일이 무엇이냐?”
“조선말 사전을 출판하는 일이다.”
“어디서 인쇄하고 있나?”
“대동출판사에서 하고 있다.”
“참여한 주동자는?”
“조선어학회 회원들이다.”
“무슨 목적으로 사전을 만들고 있나?”
“일본에는 일본어 사전이 있듯이 조선에는 조선어 사전이 필요해서 만들고 있다.”
다시 고문은 시작되었다. 결국 정태진의 입에서 허위자백을 받아냈다.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사전을 편찬하고 있다.”
조선어학회가 중심이 되어 독립운동을 목적으로 사전을 편찬하고 있다고 결론을 유도해 냈다. 홍원 경찰서는 이를 조선총독부에 보고하였다.
1941년 12월 일본은 하와이의 진주만을 습격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에 뛰어든 일제는 조선 내부의 반항을 염려하던 중이었다. 이번이 조선의 지식인들을 일망타진할 수 있는 기회로 판단하였다. 즉시 수사를 확대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총독부의 지시가 떨어지자 홍원경찰서 순사들이 종로구 혜화동 소재 조선어학회 회관을 덮쳤다. 밤새워 작업을 하던 이극로 간사장, 정인승, 권승욱, 이중화, 장지영, 최현배 등 11명은 체포영장도 없이 수갑이 채워졌다. 그리고 현장에 있었던 원고지, 경리장부, 후원자 명부는 홍원경찰서로 압송되었다. 잇따라 사전 출판에 참여한 학자들과 인쇄를 위해 자금을 지원한 사람들에 대한 조사가 진행되었다. 증인으로 불리어 혹독한 취조를 받은 사람도 48명이나 되었다.

제2대 김천고등보통학교 정열모 교장
정열모 교장은 김천고등보통학교 개교당시 교무주임(교감)으로 부임했다. 1년 후에는 교장으로 승진하여 12년째 재직하고 있었다. 김천고등보통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실질적인 영향을 미친 사람은 정열모였다. 그의 사상과 이념이 고스란히 학생들에게 베어 들어간 것이다. 푸름을 자랑하던 교정의 플라타너스도 가을이 오고 있음을 알리고 있었다. 정열모 교장은 학생들에게 특별수업을 하고 있었다.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아는 사람?”
명절도 아닌 날을 무슨 날이냐고 물으니 손을 드는 학생은 한명도 없었다.
“오늘은 ‘가갸날’이다. 가갸날은 1926년에 주시경 선생이 훈민정음 반포 480주년을 맞아 제1회 가갸날로 정했다. 여러분은 우리말과 글이 살아있는 한 이날을 기억해야 한다.”
학생들은 ‘가가냘’ ‘가갸날’ 하며 중얼거리자 혀끝에서 물결이 일고 향기가 났다.
그 순간 교실 문이 열리며 홍원경찰서 순사가 교실 안으로 들어섰다.
“당신이 정열모 교장이오?”
“그렇소만, 수업 중인데 이런 무례가 어디 있소?”
호되게 꾸짖자 학생들도 동시에 주먹을 쥐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순사는 자신이 성급했음을 깨닫고 멈칫했다.
“교장실에서 기다릴 테니 수업 끝나는 대로 곧장 오시오.”
하며 교실 문을 닫고 나갔다. 교장선생은 수업종료 종일 칠 때까지 태연히 수업을 진행했다. 조선어학회 사건이 발생하고 20일 만이었다. 홍원경찰서 순사는 정열모 김천중학교1) 교장을 포박함은 물론 교장실 내에 있는 각종 문서들을 압수하여 홍원경찰서로 압송하였다.
1) 당시는 고등보통학교가 중학교로 명칭이 바뀌었다.
이틀 후에는 정열모 교장으로부터 수업을 들은 졸업반 학생 최재식과 김명수 학생 2명도 압송해갔다.

현대조선문예독본(1926년) 정열모 편집
(출처: www.book445.com)
정열모 교장은 조선어연구회와 1927년 창간된 동인지 <한글>의 동인으로도 활동했다. 조선어학회에서 개최한 강연회와 강습회에도 적극 참여했었다. 조선어사전 편찬위원, 한글맞춤법통일안 제정위원, 표준어 사정위원 등으로도 활동하였다. 당시 정열모는 김두봉·신명균·권덕규·장지영·최현배 등 한글을 연구하던 학자들과 가깝게 지냈다. 특히 신명균을 선배로 깍듯이 모셨다.
홍원은 일찍부터 명태가 많이 올라오는 곳이다. 그해도 차가운 날씨 탓에 풍어를 이루고 있어 어민들은 가격폭락을 걱정하고 있었다. 차가운 바닷바람이 몰아치는 홍원경찰서에서는 조선어학회 회원들을 비롯한 정열모에 대한 고문으로 매일 피가 낭자했다.
“이극로가 이끄는 조선어학회는 독립운동 단체가 맞지?”
“아니다. 조선어학회는 조선어를 연구하는 단체이다.”
“이놈이 아직도 교장인줄 아는 모양이구나. 여기가 어딘지 제대로 알려주마.”
순사는 정열모 교장을 알몸으로 뉘어놓고 검도용 대나무로 몽둥이질을 했다. 처음에는 고통을 호소했지만 나중에는 고통을 호소할 힘마저 없었다. 살점이 튀어나가고 선혈이 낭자했다.
“조선어학회는 상해에 있는 독립운동본부를 지원하는 단체가 맞지?”
“나는 모르는 일이다.”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구나. 이제는 매운 맛 좀 봐라.”
이번에는 정열모의 몸을 뒤로 묵고 얼굴을 젖혀 코에다 고춧가루를 뿌렸다. 매운 냄새가 콧구멍을 타고 내려갈 때 눈물이 나고 재채기가 나왔다. 고문은 끝이 없었다. 그것도 부족했는지 발목을 묵고 천정에 거꾸로 매달고 매질을 했다. 실신을 하면 얼굴에 물을 부어 의식이 살아나도록 했다.

일제시대 고문 기구(출처 :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자 이제는 바른대로 말할 수 있겠는가?”
“네놈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제야 바른말 하는군.”
“조선어학회가 독립운동단체라고 시인만 하면 된다.”
“네놈들이 원하는 대로 적어면 되는 것 아닌가.”
“스스로 자백을 할 때 끝이 나는 것이다.”
마지막에는 팔을 뒤로 젖혀 허리에 묶고 목총으로 두 팔과 허리 사이에 가로지른 다음 줄을 천정에 매달았다.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악행은 다했다. 결국은 순사가 원하는 허위 자백을 받을 때까지 고문은 계속되었다.
“잘했어. 여기에 서명만 하면 된다.”
결국 ‘조선어학회는 상해 임시정부에 자금을 보내기위해 출판 사업을 한 독립운동단체다.’ 라는 진술을 받아 냈다.
영문도 모르고 홍원경찰서에 끌려온 정열모 교장의 두 제자 최재식, 김명수도 도착한 날부터 고문이 시작되었다.
“정열모가 개인적으로 무슨 심부름을 시켰느냐?”
“교장 선생님이 원고 초안을 작성하시면 정서하는 일을 했습니다.”
“어떤 내용이었는가?”
“조선어사전을 만드는 일로 알고 있습니다.”
학생들은 교장 선생님이 시키는 단순 작업을 했으므로 특별히 조사할 것이 없었다. 그러나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조선어 말고 무엇을 배웠나?”
“조선어 말고는 다른 과목은 배운 것이 없습니다.”
“이놈들아, 바른 말을 할 때까지 몽둥이 맛 좀 봐라.”
그러자 한국인 순사 보조가 사정없이 몽둥이를 휘둘렀다. 이틀 동안 매를 맞고 나니 두 학생은 파죽음이 된 상태였다.
“정열모 교장한테서 무엇을 배웠느냐?”
“조선 역사를 배웠습니다.”
“이제야 바른 말을 하는군, 구체적으로 무엇을 배웠는가?”
“단군신화는 황화문명, 메소포타미아문명, 인도문명, 이집트문명과 같이 세계 5대문명이라고 배웠습니다. 백제가 일본에 문화를 전해 주었다는 것도 배웠습니다.”
“그래 바로 그거야.”
순사는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종이와 펜을 가지고 들어왔다.
“지금부터는 정열모한테 배운 내용을 글로 써라”
이렇게 하여 학생들은 정열모 교장으로부터 그들이 배운 한국의 역사에 대해 하루 종일 진술서를 썼다. 끝이 아니었다.
“이제는 조선의 독립에 대해 배운 것을 말하라.”
“그런 것을 배운 적이 없습니다.”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구나.”
두 학생은 바늘로 손톱 밑을 찌르는 고문, 잠을 재우지 않는 고문, 물고문 등 갖은 고문을 당했다. 그래도 성과가 없자 마지막에는 두 학생을 정열모 교장의 등에다 그들이 불러주는 대로 먹물로 쓰게 했다.
‘너는 거짓말쟁이다. 너를 극도로 미워한다.’
‘너는 황국신민이 아니다. 그래서 나쁜 사람이다.’
학생들이 머뭇거리자 몽둥이가 사정없이 날라 왔다. 학생은 교장선생님을 면박 주는 일은 차마 할 수가 없었다. 제자들이 머뭇거릴 때마다 교장선생님은 “괜찮다. 괜찮다.”는 말만 연발했다. 이번에는 교장선생님의 오른쪽 어깨 위로 채찍이 날아왔다. 채찍이 지나간 자리에는 선혈이 등줄기를 타고 내려왔다. 다시 한 번 채찍을 들려는 순간 최재식은 순사의 손목을 잡으며 울부짖었다.
“말씀드리겠습니다. 제발 교장선생님을 살려주십시오.”
“그래 말해봐라!”
“교장 선생님은 머지않아 조선은 독립을 할 것이고 조선어는 민족정신을 들어낼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때를 대비하여 힘을 길러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문초하던 형사는 두 학생의 포박을 풀고 진술서를 쓰도록 했다. 두 학생은 눈물을 흘리며 진술서를 썼다.
그로부터 이틀 후 학생들을 데리고 가라는 기별이 집으로 왔다. 최재식의 큰 형 최재소는 홍원으로 가서 동생을 대리고 김천으로 왔다. 그러나 아우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교장선생님을 배신했다는 죄책감에 사로잡혔다. 심한 고문에 의한 후유증으로 헛소리를 했다. 결국 최재식은 고문의 후유증으로 젊은 나이에 죽고 말았다.

조선어학회 사건 판결문(출처 : 민족문제 연구소)
조선어학회 사건의 종말은 취조자는 48명이었고 관련자는 33명이었다. 이극로와 정열모 등 16명은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예심에 회부되었다. 이윤재와 한증은 옥사했다. 정열모와 장지영은 1944년 9월 30일 공소시효 소멸로 석방되었다. 나머지 11명은 2-6년까지 실형을 받았다. 이 사건을 계기로 정열모 교장은 1943년 3월 7일 자로 홍원경찰서에 유치된 상태에서 교장 직책을 사임하였다. 정열모에게 주어진 죄목은
첫째, 조선독립을 목적으로 이극로가 만든 조선어 편찬회에 협력한 점,
둘째. 조선어학회 조직에 찬성한 점,
셋째, 1931년부터 김천중학교 교장으로 재직하면서 수업시간이나 훈화할 적에 한글의 우수성을 강조하고, 조선의 역사적 사실을 인용하여 민족의식을 주입하였고, 조선독립운동의 투사가 되도록 선동한 죄였다.
눈길을 끄는 것은 세 번째이다. 당시 일본의 입장에서 보면 엄청난 죄목이다. 반면 조선의 시각에서는 달라진다. 지난 12년 동안 정열모가 열정을 바쳐왔던 김천중학교가 민족운동의 산실이었다는 것을 여실히 증명해 주는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