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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2.24. 대림절 넷째 주일
예배 시편 / 시편 131편 1-3절
찬송 / 116장 · 동방박사 세 사람
성서 / 미가 5:2-5, 마태복음 2:1-12
말씀 / 너는 아주 작지가 않다
그가 주님께서 주신 능력을 가지고, 그의 하나님이신 주님의 이름이 지닌 그 위엄을 의지하고 서서 그의 떼를 먹일 것이다. 그러면 그의 위대함이 땅 끝까지 이를 것이므로, 그들은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미가 5장 4절)
너 유대 땅에 있는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가운데서 아주 작지가 않다. 너에게서 통치자가 나올 것이니, 그가 내 백성 이스라엘을 다스릴 것이다. (마태복음 2장 6절)
김윤식 목사
Ⅰ
예부터 교회에는 동방박사에 대한 애정과 상상력이 더해진 “네 번째 동방박사”에 대한 전설이 전해 내려왔습니다. 1895년, 미국의 소설가이기도한 “반 다이크”라는 목사는 이 전설을 토대로 “네 번째 동방박사(The story of the other wise man)”라는 소설을 썼습니다. 그 내용은 대략 이렇습니다.
어느 날 조로아스터교의 신실한 종교 지도자들이 하늘의 별을 보며 연구하던 중 이상한 것을 발견했지요. 어떤 두 행성이 가까워지는 것을 보았는데, 그 가운데 한 별이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자리에서 유난히 빛이 나다가 사라진 것입니다. 이들은 새로운 왕이 태어날 거라는 징조라고 생각했고, 다시 그 별이 빛나게 되면 약속한 자리에 모여 함께 그 별을 따라 길을 떠나기로 약속을 했습니다. 그리고 이 전설의 주인공인 네 번째 동방박사는 재산을 팔아서 새로운 왕께 드릴 붉은 루비와 푸른 사파이어와 눈처럼 새하얀 진주를 준비했습니다. 그런데 이 전설의 주인공인 “네 번째 동방박사”에게 작은 문제가 생겼습니다. 기다리던 별이 하늘에 나타나 말을 타고 부지런히 길을 나섰는데, 길을 가는 중에 쓰러져 죽어가는 사람을 만난 것이지요. 그는 어쩔 수 없이 말에서 내려 그를 정성스럽게 치료하기 위해서 애썼지요. 추위와 굶주림에 지쳐있던 그를 돕는데 꽤 많은 시간이 걸렸지요. 결국 그는 약속시간을 지키지 못했고, 사파이어를 팔아서 스스로 다시 짐을 꾸려 사막을 지나는 먼 길을 홀로 출발해야만 했습니다.
그가 늦게 베들레헴에 도착했을 때, 이미 앞선 동방박사들은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아기 예수께 드리고 떠났지요. 그리고 그가 도착한지 얼마 후에 갑자기 작은 마을에 소동이 일어났고, 군인들이 들이닥쳤습니다. 군인들이 아기들을 살해하고 있던 것이지요. 네 번째 동방박사는 한 여인의 비명이 들리는 곳으로 들어갔습니다. 한 여인이 아기를 지키기 위해서 군인의 위협에 맞서고 있던 것이지요. 네 번째 동방박사는 자신이 지닌 두 번째 보물인 루비를 꺼내 그 군인에게 건내며 아기와 여인을 살려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 군인은 “이 집에는 아기가 없다”고 소리치며 이내 그 집을 떠났지요. 그렇게 두 번째 보물마저 사용하고 말았답니다.
네 번째 동방박사는 별을 따라 순례하는 순례자의 마음으로 정처 없이 이곳저곳을 머물며 세월을 보냈지만, 결국 그가 찾던 메시아를 만날 수 없습니다. 백발의 노인이 된 그가 예루살렘으로 오게 된 어느 날, 군중들의 소리를 들었답니다. 메시아를 골고다 “언덕에서 못 박으려 한다는” 말이었습니다. 그는 곧장 그분을 만나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지요. 그런데 길을 가는 그에게, 멀리서 노예로 팔려 가는 한 소녀가 그를 향해 살려달라고 외쳤습니다. 그는 그 외침마저 뿌리치지 못하고 찾아가 그 소녀의 값으로 진주를 건내곤 그 아이를 구해주었답니다. 결국 그는 그가 메시아께 드리려고 했던 보물을 모두 써버렸고, 그가 만나고자 했던 메시아도 만나지 못했습니다. 어느덧 황혼에 이른 그의 삶은 이제 정말 허무하고 서글픔만이 남은 것 같았지요. 그런데 그때 그는 하늘에서 한 음성을 들었습니다. “너희가 여기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는 주님의 음성입니다. 비록 그의 순례길은 끝이 났지만, 그에게 남은 보물도 없었지만, 그렇지만 그가 드리려 했던 소중한 보물들을 주님께서 모두 기쁘게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그가 찾고 따라간 별, 그가 헤매고 방황하면서도 놓치지 않은 그 길은 바로 낮은 곳을 바라보는 길, 작은이를 사랑하는 길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대림절 마지막 주일을 보내며, 어두울수록 더 밝게 빛나는 별빛을, 어둠과 불의와 거짓과 폭력과 갈등과 분열과 전쟁을 몰아내고 공의와 평화로 오시는 주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동방 박사들을 인도했던 그 별빛을 우리에게 비추셔서, 우리의 걸음을 인도하시고, 우리를 사랑과 평화의 왕이신 아기 예수께로 이끌어 주시기 바랍니다.
Ⅱ
오늘 우리는 마태복음에서 아기 예수를 찾아 경배하는 동방 박사들에 대한 말씀을 함께 받아 읽었습니다. 이 말씀은 마태복음에만 나오는 말씀입니다. 마태복음을 읽을 때에는 마태복음의 위치를 잘 기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마태복음은 신약성서의 가장 첫 자리에 자리하고 있지요. 마태복음은 신약성서의 첫 자리에서 구약성서와 다리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예부터 전해온 약속이 신약에 이르러서 성취되는 것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은 예수님에 대한 말씀을 족보로 시작하면서, 예수님을 아브라함의 자손이며 다윗의 자손이라고 강조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렇게 오래전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이 시간을 지나 마침내 이루어지는 것을 보여주는 마태복음의 의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 마태복음은 의도적으로 예루살렘과 베들레헴을 대조해서 보여줍니다. 먼저, 예루살렘은 어떤 도시입니까? 평화의 도시라는 뜻을 지닌 예루살렘은 언제나 이스라엘 사람들의 종교적 중심도시였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의 거룩한 산인 시온을 택하셨고, 백성의 구원이 그곳에서 이루어진다고 생각했지요. 예언자들은 예루살렘이 온 세상을 비추는 빛이요, 온 세상은 그 빛을 보고 그곳을 향해 나아올 거란 꿈을 꾸었습니다. 그러나 마태복음서를 읽어보면 예루살렘은 세상에 정의와 구원을 가져다주는 빛의 도시가 아닙니다. 오히려 마태복음은 예루살렘을 보고 한탄하시는 예수님에 대해서 묘사하지요. 마태복음은 예루살렘이 예언자들과 하나님의 사람들을 살해한 도시이며, 불순종과 반역의 도시이고, 하나님의 뜻을 경멸하는 도시라고 고발합니다(마 23:37-39).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가시는 것은 다만 그분께서 죽음을 맞이하는 것뿐이었습니다.
마태복음 2장 1절은 “예수께서 유대의 베들레헴에서 나셨다”고 보도하며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예수께서 태어나신 것은 사람들이 기대하는 왕궁과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이 아니라, 작은 마을 베들레헴입니다. 그런데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베들레헴이 아닌 예루살렘에 먼저 도착했습니다. 그곳에 왕궁이 있었기 때문일 겁니다. 동방으로부터 온 박사들은 헤롯의 면전에서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이가 어디에 계시냐고” 물었습니다. 그의 별을 보고 이곳을 찾아왔다는 것이었지요. 그런데, 문제는 헤롯이라는 사람이 버젓이 왕으로 있는데, 그 앞에서 새로 태어난 유대인의 왕이 어디에 있냐고 물었으니 헤롯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이방인으로 왕이 되어서 공포와 독재 정치로 로마인들이 허락해 준 왕이란 칭호를 가까스로 유지하던 헤롯을 제법 당황하게 했던 것입니다. 게다가 당황한 것은 헤롯만이 아닙니다. 마태는 의도적으로 예루살렘의 사람들 모두가 당황했다고 표현합니다(마 2:3). 예루살렘의 모든 사람은 왜 당황했을까요? 헤롯이 대제사장들과 율법 교사들과 지도자들을 모아서 그리스도가 어디에서 태어나실지를 물었을 때, 당연히 그들이 생각하던 예루살렘이 아니라, 유대 베들레헴을 대답했기 때문이었겠지요. 하나님의 거룩하고 위대한 약속이 실현된 곳이 예루살렘이 아니라 베들레헴이었기 때문입니다.
베들레헴이란 집을 뜻하는 히브리어 ‘베이트’와 빵을 뜻하는 ‘레헴’이 합쳐진 단어입니다. 말 그대로 빵집이란 뜻을 지니고 있지요. 마태는 예수께서 미가의 예언을 인용하면서 예루살렘이 아니라 빵집이라고 불리는 작은 시골 마을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신 분께서 하나님의 백성을 다스릴 것이라고 전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다스리다”라고 번역한 단어가 그리스어 “포이마이노”입니다. 양 떼들을 돌보는데 사용되는 단어이지요. 양 떼를 보살피고 먹인다는 뜻을 지닌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예수께서는 사람들 위에 군림하고 지배하는 왕이 아니라, 사람들을 돌보며 먹이는 목자처럼 “빵집”이라고 불리는 작은 시골 마을에서 태어나셨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베들레헴은 이제 아주 작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베들레헴으로 찾아오신 아기 예수를 통해, 아기 예수를 모시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돌보시고 먹여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Ⅲ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우리가 주목해서 보아야 할 표현이 있습니다. 바로 마태복음 2장 6절에서 인용한, 미가서 5장 2절 가운데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가운데서 아주 작지가 않다”라는 말씀입니다. 조금 세심하게 살펴보면, 이 작은 문구에 미가서와 마태복음의 큰 차이가 있습니다. 미가서에는 분명히 베들레헴이 보잘 것 없다고 쓰여 있는데, 마태는 “베들레헴아 너는 아주 작지가 않다.”라고 변형해서 인용을 했습니다. 마태의 실수일까요?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마태복음이 베들레헴을 “아주 작지 않다”고 잘못 적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의도적으로 변형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 보았습니다. 물론, 베들레헴이란 예루살렘에 비하면, 정말 작은 마을이지요. 세상적인 기준으로는 절망적으로 작은 마을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어쩌면 아기 예수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믿음은 작지 않았을 겁니다. 로마의 황제나 헤롯과 같은 통치자가 아니라 아기로 오시는 예수를 믿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순전한 믿음은 예루살렘이 아니라, 작지만 예수를 모신 저 베들레헴과 같지 않았을까요? 그렇기 때문에 “너는 아주 작지가 않다”라는 이 말씀은 비록, 처음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가 자신들의 모습이 베들레헴과 같을 지라도 아기 예수를 기다리며 모신 곳에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통해 일하신다는 믿음과 기대, 곧 적은 양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누룩처럼, 적은 양으로 맛을 내는 소금처럼, 거대한 어둠을 비추는 작은 불빛처럼 어두운 세상을 두루 비출 것이라 믿음과 기대를 담고 있는 말씀이 아닐까요?
결국 우리가 친숙하게 잘 아는 이 이야기의 결론대로 헤롯은 동방 박사들을 베들레헴으로 보냈습니다. 진심인지 알기는 어렵지만 자기도 그 아기를 경배하겠다며, 그 아기를 꼭 찾거든 자기에게도 알려달라는 당부도 전했지요. 왕의 말을 듣고 길을 나선 동방 박사들은 하늘의 별의 인도를 따라 길을 걸었습니다. 마침내 베들레헴에서 아기와 그의 어머니 마리아를 만났고, 그 앞에 엎드려 경배드렸지요. 동방에서 온 박사들은 예루살렘이 아니라, 베들레헴에서 보물상자를 열어 아기 예수께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드렸습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에게 친숙한 마태복음의 동방박사 이야기를 함께 나누었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오래된 약속과 그 성취의 이야기이지요. 그런데 이 말씀에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약속을 어떻게 이루어 가는지”라고 생각합니다. 아기 예수께서는 거룩한 큰 도시 예루살렘이 아니라 작고 보잘 것 없는 시골 마을, 빵집이라고 불리는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지요. 그러나 마태는 그 베들레헴이 아주 작지가 않다고 의도적으로 고백했습니다. 아주 작지가 않다, 왜냐하면 아기 예수님께서 나셨기 때문입니다. 베들레헴에서 아기 예수님을 기쁘게 모셨기 때문입니다. 아기 예수를 기뻐하며 경배하고 맞이한 것은 예루살렘의 종교 지도자들과 서기관 같은 사람들이 아니라 먼 이방의 종교 지도자들이었지요, 무엇보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와 구원의 역사를 로마의 황제도 예루살렘의 왕좌를 야합과 폭력으로 차지하고 있는 헤롯도 아니라, 평화의 왕으로 작은 마을 베들레헴에 오신 아기 예수를 통해 이루어 가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폭력과 위선이 가득한 곳이 아니라, 서로를 돌보며 먹이는 곳에 평화의 임금이신 아기 예수를 보내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작은 것을 통해서 큰일을 이루시고, 약한 것을 통해서 강한 것을 부끄럽게 하시는 분입니다. 폭력과 거짓을 미워하시고, 마침내 작고 낮은 곳으로부터 사랑으로 평화를 이루시는 분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이제 우리도 별을 보고 먼 길을 찾아와 아기 예수님께 경배하고,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던 저 동방박사들의 베들레헴으로 향하는 순례길을 따라갑시다. 자신이 지닌 보물을 내어놓은 네 번째 동방박사와 같이, 우리의 베들레헴에서 지극히 작은 사람들을 돌아봅시다. 우리도 그렇게 아기로 오시는 주님께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경배 드릴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그리하여 모든 어둠과 불의와 거짓과 폭력과 갈등과 분열과 전쟁을 몰아내고, 빛과 공의와 평화로 오시는 주님을 기쁜 마음으로 맞이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주님께서 동방 박사들을 베들레헴으로 인도했던 그 별빛을 우리에게 비추셔서, 오늘 우리를 아기 예수님께로 이끌어 주시기 바랍니다. 비록 세상은 어둡고, 우리는 작게 느껴지지만, 우리를 밝은 사랑의 빛으로 비추어 주시고, 우리의 작음에도 우리의 가정과 교회를 통해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기대하며 기다리는 우리가 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