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16’때의 미스터리’ 장도영 장군의 별세에 부쳐 |
[김피터]5.16 역사에서의 가정 (假定)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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끊임없이 돌아가는 역사의 수레바퀴는, 어느 때 격동기를 만나면, 요란한 굉음(轟音)을 내며 정신 없이 빠르게 돌아가기도 한다. 1961년 5월의 달, 그 역사의 수레바퀴를 숨가쁘게 돌게 했던 주인공 중 하나인 장도영 전 육군참모총장이 최근 (8월 3일) 플로리다의 자택에서 그의 파란만장한 일생에 종지부를 찍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리더쉽과 친화력, 명석한 두뇌의 소유자이며, 6 25 전쟁때 많은 전공을 세우고, 특히 5 16때의 그의 역할 등으로 인해, 우리 세대들에게는 오래 기억되어질 고인의 영전에 삼가 명복을 비는 바이다.
장도영은 한마디로, 불운한 시대를 살았지만, 역사의 소용돌이를 헤쳐나간 불세출의 인물이었다. 그는 일제 강점기에, 2차대전이 발발하자 학도병으로 징집되어 일본군 졸병으로 중국대륙에서 복무하다가 장교가 되었다. 해방 후, 군사영어학교를 거쳐 건군에 참가, 국군 장교가 되었고, 고속 승진하여 만 27세의 젊은 나이로 별을 달았다. 그리고 그의 운명을 가르게 되는 1961년, 2월, 육군 참모총장의 자리에 앉으므로, 3개월 뒤에 일어난 박정희 소장의 ‘5,16군사혁명’ 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되었다.
‘군사혁명 위원회 의장’,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국방장관’, ‘내각 수반’ 등의 어마어마한 감투들을 쓰게 되지만, 그것들은 불과 47일만에 날라가 버리고 만다. 곧이어 ‘반혁명 사건’으로 체포되어, 군사재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 받았으나. 형 면제로 출감된다. 그런데 그는 거기서 주저앉지 않았다. 그때 만 39세의 나이로, 미국 유학의 길에 올라서, 박사학위(정치학, 미시간대학교)를 취득하고, 미국 대학교의 교수로 활동하는 등, 그야말로 ‘7전8기’적 일생을 살았다.
그런데 ‘5 16’때의 장도영 장군의 행적을 살펴보면 몇 가지 이해되지 않는 ‘미스터리’가 있다. 역사에는 ‘만일…’이라는 가정이 성립될 수 없지만, 장도영 장군이 1961년, ‘5 16 군사혁명’때, 그 ‘미스터리’같은 행동을 취하지 않고, 그 ‘만일’의 ‘가정’을 실행에 옮겼었더라면, ‘5,16 혁명’은 실패되었거나, 또는 역사의 방향이 다른 길로 달음질치게 되었을 것이다.
첫째로, ‘5 16’ 발생 전에, 당시 장면정부나 장도영 참모총장에게 박정희 장군의 ‘쿠데타’ 정보가 여러 경로를 통해 들어 왔었다. 장도영 자신은 그것을 부인하고 있으나, 장면 총리가 그를 불러 박정희 일당의 쿠데타 정보에 대해 물어본 적이 있다고 그의 회고록에서도 말하고 있다. 또한 미 CIA 한국 책임자도 쿠데타 정보에 대해 장 총장과 의견을 나누었다고 한다. (심지여 박정희 측에서는 ‘혁명 계획서’를 사전에 장총장에게 서면 보고했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장도영 총장은 그런 중요한 ‘정보’가 들어왔는데도, 그것을 적극적으로 조사하지 않았다. 그런 제보를 하는 부하들에게 ‘확실한 증거’를 가져 오라고만 했다는 것이다. 일단 혐의자에 대한 조사를 하면 증거가 나올 수 있을 텐데, 대단히 이상하지 않은가 ‘만일’ 장 총장이 그때 그 정보를 심각하게 받아드리고, 그래서 사전에 박정희와 장군과 그 동조세력을 체포 조사했었더라면, 5 16은 일어나지도 못했을 것이다.
둘째로, 5월 15일 저녁에, 구체적인 ‘반란군’(장총장의 표현) 출동에 대한 보고를 받고, 장총장은 그 중요한 서울의 남쪽 관문에 불과 50여명의 경무장한 헌병들을 배치시켰다. 이것도 하나의 미스터리이다. 물론 장총장은 그때 자기가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은 그것뿐이었다고 말했지만, 그러나 대 육군의 수장인 참모총장이 극단의 비상조치를 취했다면 얼마던지 더 강력한 병력이나 화력을 그곳에 배치시킬 수도 있었을 것이다. 만일 그때 장총장이 그 한강교 지역에 적어도 1개 대대 이상의 병력이라도, 또 동원할 수 있는 중화기 등을 배치해 방어선을 구축했다면, ‘516’은 성공되지 못했을 것이다.
장도영 총장이 구체적인 ‘반란군 부대’의 출동 정보를 보고받은 것은, 15일 저녁, ‘은성’이라는 요정에서 식사를 하던 도중이었다고 한다. 방첩부대로부터였다. 그는 즉시 ‘506 서울지구 방첩대’로 가서, 30사단, 공수부대 등, 모든 출동 예정 부대에 직접 전화를 하여, 출동을 저지시켰다. 그러나 김포반도 서부전선의 해병대의 출동은 그때는 정보가 없었다. 나중에 해병대 출동정보가 들어왔지만, 육군 총장으로서 해병부대에 직접 지시를 내릴 수도 없었다.
16일, 새벽 3시경, 김포반도에서 떠난 해병 혁명부대가 한강다리에 도착했다. 바리케이트 등으로 저지선을 구축하고 있던 ‘헌병’들과 교전 끝에, 일부 부상자를 내고, 저지선을 돌파한 후 해병부대는 서울 시내로 진입하였다. 그런데 그때 해병 출동부대의 병력은 불과 약 1천여명에 불과 했다. 만일 장총장이 어떻게 해서라도 한강다리 방어선을 강화해서 사전에 해병부대의 서울 진입을 차단시켰다면, 그 뒤를 따라오던 공수부대도 저지당했을 것이고, 결국 ‘5 16 거사’는 아마도 실패되었을 것이다. 장총장 자신도, 5 16은 오직 ‘해병대’ 때문에 저지되지 못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물론 6군단 포병부대가 거의 같은 시각, 육본에 도착했었지만, 한강 쪽이 저지되었다면 장총장의 명에 의해 포병부대는 원대복귀 되었을 것이다.
세번 째의 미스터리는, 장총장은 역전의 용사이고, 대 육군의 수장인데, 여러 경로를 통해서 ‘쿠데타’ 정보를 입수했음에도, 전혀 이에 대한 대비책이 없었다는 것이다. 군 작전은 공격도 있지만 사전대비, 방어체계가 있지 않은가? ‘유비무환’이라는 말도 있다. 대구의 모 중국집에서 박정희 소장 등이 쿠데타 모의를 했고, 거사자금을 모으고 있다는 구체적인 정보까지 들어왔는데도, 장총장은 이에 대한 ‘대비책’을 전혀 세우지 않았었다.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여, 사전에 쿠데타 저지 작전계획 내지 ‘저지 방어군’ 부대 준비라도 해놓아야 하지 않았을까?
15일 저녁, ‘쿠데타 군’ 부대 출동 정보를 받고, 장총장이 취한 행동도 그렇다. 그가 만일 즉시, 총장의 권한으로, 또 국방장관과 협력하여, 전군 ‘비상령’을 선포하고, 그의 지휘하에서, 가능한 전 지휘체계, 정보, 방첩, 헌병부대 등을 총 동원하여, 박정희소장과 그의 동조자들에 대한 체포 작전에 나섰더라면, 이미 탄로가 난 ‘5 16’거사는 실패로 돌아갔을 것이다. 그러나 장총장은 다만 혼자서 출동부대에 전화하여 ‘출동하지말라’는 명령만 내리고 있었다. 좀 이해가 안 되는 ‘육군 최고 지휘관’의 태도였다.
넷째로, 16일 아침, 당시 한국군의 작전 지휘권을 갖고 있는 맥그루더 유엔군 사령관은 쿠데타 출동군을 ‘반란군’으로 규정하고, 강제진압을 계획하고 있었으며, 또 가장 병력이 많은 1군 사령관 이한림 장군도, 일선 부대 병력을 동원해서라도 쿠데타 군을 진압하려는 계획을 세웠었다. 만일 이때 장총장이 맥그루더 사령관의 지휘아래 미군 및 이한림의 1군 병력 중 1부를 서울에 신속히 투입하여, 즉각적인 쿠데타 진압작전이나 혹은 쿠데타군을 포위 압박하는 작전을 펼쳤다면, 5 16은 실패로 돌아갔을 것이다.
그때 박정희소장 및 혁명군 측은 계속 장총장을 자기네 편에 서도록 설득 및 압박을 가했다. 혁명군 최고 지휘관으로 모시겠다고 설득하였다. 이런 중요한 기로점에서, 처음 장도영 총장은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좀 우왕좌왕 했었다. 그는 왜 그랬을까? 만일 장총장이 이때 막강한 군 작전 파워를 갖고 있는 맥그루더 사령관이나 또 이한림 1군 사령관과 손을 잡았다면, 아마도, 어느 정도 유혈 충돌은 불가피했을지 모르지만, 한국의 역사는 달라젔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의 자서전에 의하면), ‘같은 국군끼리의 유혈 충돌을 막기 위해서, 그리고 그 자신의 주도하에, 이 ‘사태를 빠른 시일 내에 수습’하고, 군의 엄격한 감시하에 선거를 통한 참신한 정부를 세운다는 명분을 가지고, 고민 끝에, ‘군사혁명위원회’ 의장에 취임하는 결단을 함으로, ‘5 16 군사혁명’을 성공시키도록 하였다. 일부 5 16 연구가들은, 5 16때 보였던 장총장의 처신을 ‘양다리 걸치기였다’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그런데 그 후, 장도영씨는 미국에서 쓴 그의 회고록에서, 그가 그때 박정희의 손을 들어준데 대하여, ‘나는 정변 주체들의 범행을 용납한 죄를 범했다. … 대한민국과 국민에게 죄를 범했다.’라고 진술할 정도로, 박정희와 ‘5 16 군사 쿠데타’를 맹공격하며, 자기의 5 16때의 처신을 깊이 후회하는 태도를 보였다.
지금 한국에서, 야당 대통령 후보들, 심지어 일부 여당 후보들조차 ‘5 16’을 단순히 ‘군사 쿠데타’라고 폄하하고 있고, 여당의 유력 대선 후보인 박근혜 의원은 ‘구국의 혁명’ 혹은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말함으로, ‘역사 인식’시비가 다시 벌어지고 있다.
물론, ‘5 16’을 단순히 헌정질서를 유린한 ‘군사 쿠데타’라고 인식한다면, 장도영씨는 역사의 한 죄인이 되지만, ‘5 16’이 ‘구국의 혁명’으로 규정된다면 그는 그 ‘혁명’을 성공시키게 한 1등 공신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박근혜 의원이 말한대로, 지금 한국 국민의 ‘반 이상’이 박근혜의 ‘5,16’에 대한 발언에 대하여 찬성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장도영 장군이 (그는 이미 고인이되었지만) ‘5 16 군사혁명’에 협조한 일에 대하여 그렇게 깊은 ‘회한’을 가질 필요는 없었다고 생각한다.
‘5 16’은 누가 뭐래도 ‘구국 혁명’이다. 오늘날의 2010년대의 관점으로, 1960년대의 상황을 재단하지 말라. 미국에서는 ‘총을 쏴 사람을 죽여도 그 상황이 ‘정당방위’등 ‘불가피한 상황인 경우는 ‘살인죄’를 적용 안 한다. 마찬가지로 5 16은, 쿠데타적 방법으로 시작했지만 그것은 그 시대 상황에서, 불가피하게, 필요한 ‘구국의 혁명’이었음으로, 단순히 ‘쿠데타’라고 폄하해서는 안된다.
저 5 16혁명으로 시작된 ‘한강의 기적’을 통해서 국민소득 백 딸러 미만의 한국이 오늘의 세계 경제 10위권의 ‘잘사는 나라’로 발전했고, 또 민주화도 이룩된 것을 부인하는자들은 누구인가? 지도자들은 바른 역사관을 갖기를 바란다. 잘못된 역사인식을 바로 세우고, 그래서 5월 16일이 ‘국경일’이 되고, 세종로에 박 대통령의 동상이 세워지고, 온 국민이 박 대통령을 존경하는, 그런 시대가 도래하기를 학수고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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