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 생활 고사성어 중에는 교육은 백년대계(百年大計)이다.
권불십년(權不十年)이다. 두 고사성어를 비교 해보면 우선 숫자적으로는 교육이 권력보다 10배나 길은 것 같다.
교육은 백년대계의 어원은 중국 전국시대 사상가인 관중이 쓴 '관자(管子)'란 책에서 유래한 고사성어로 십년수목 백년수인(十年樹木 百年樹人) 인재양성의 중요성을 강조한 말로 '십년을 내다보고 나무를 심고, 백년을 내다보고 인재를 양성 한다'는 뜻이다. 교육은 백년대계라는 말을 쓰는 것도 이 때문이다. 최근 우리나라 국가 원수가 중국 칭화대(淸華大) 연설 중에, ‘곡식을 심으면 일 년 후에 수확을 하고, 나무를 심으면 십년 후에 결실을 맺지만, 사람을 기르면 백년 후가 든든하다’는 중국고전 관자(管子)의 한 구절을 인용했었다.
이처럼 교육은 국가의 초석(礎石)이요 동량지재(棟梁之材)를 기르는 일과 같다고 본다.
대한민국 헌법 31조
①모든 국민(國民)은 능력(能力)에 따라 균등하게 교육(敎育)을 받을 권리(權利)를 가진다.
②모든 국민(國民)은 그 보호하는 자녀(子女)에게 적어도 초등교육(初等敎育)과 법률(法律)이 정하는 교육(敎育)을 받게 할 의무(義務)를 진다.
③의무교육(義務敎育)은 무상(無償)으로 한다.
④교육(敎育)의 자주성·전문성·정치적 중립성(自主性, 專門性. 政治的 中立性) 및 대학(大學)의 자율성(自律性)은 법률(法律)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보장된다.
⑤국가(國家)는 평생교육(平生敎育)을 진흥(振興)하여야 한다.
⑥학교교육(學校敎育) 및 평생교육(平生敎育)을 포함한 교육제도(敎育制度)와 그 운영, 교육재정 (敎育財政) 및 교원(敎員)의 지위(地位)에 관한 기본적인(基本的) 사항은 법률(法律)로 정한다.
우리 헌법 31조에 나타난 교육의 주요 내용은 교육은 우리 국민의 권리요 의무이고 교육은 정치로부터 중립성을 보장한다고 우리 대한민국의 최고 법인 헌법에 명시함은 교육이야 말로 국가 백년대계(百年大計)로 보기 때문이다. 어느 나라이든 교육의 백년대계를 중요시 하고 있다. 여기서 잠깐 정치와 관계 되는 권력에 관해서 알아보기로 하면 서두에서 언급 했듯이 권불십년(權不十年)이라는 어원을 살펴보면 중국 온 천하를 최초로 통일시킨 진시황(秦始皇)은 '덕은 삼황(三皇)보다 낫고 공적은 오제(五帝)보다 높다'라고 하여, 자신의 칭호를 왕에서 황제(皇帝)로 바꾸었다. 자신은 첫 번째 황제이므로 처음 시(始)를 써서 시황제(始皇帝)라 하였고 아들을 이세황제, 그 다음을 삼세황제라 하여 자자손손 만년토록 이어지기를 바랬다. 그리하여 황제의 명(命)은 제(制), 령(令)은 조(詔)라 하고, 짐(朕)과 옥새(玉璽)란 말도 황제에 한해서만 사용하게 하였다.
그리고 이사(李斯)에게 명하여 천하의 명옥(名玉) 화씨지벽(和氏之璧)에 ‘수명우천(受命于天-하늘에서 명을 받아 기수영창(旣壽永昌-영원히 번창한다)'이라고 새겨진 옥새를 만들었다. 하지만 이처럼 기세등등하던 진시황의 왕조는 이세황제인 호해(胡亥)에 이르러 2대 15년 만에 막을 내리고 말았다. 권불십년(權不十年)이란 아무리 막강한 권력이라도 오래도록 누릴 수 없다는 말로, 권세는 10년을 넘지 못한다. 즉 권력은 오래가지 못하고 늘 변한다는 뜻으로 본다.
정치(政治)의 사전적 의미를 보면 나라를 다스리는 일. 국가의 권력을 획득하고 유지하며 행사하는 활동으로, 국민들이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게 하고 상호 간의 이해를 조정하며, 사회 질서를 바로잡는 따위의 역할을 한다. 즉 정당의 목적이 정권 획득에 있고 정권 유지는 정치의 실현에서 만 가능하기 때문에 그래서 교육을 정치가 간섭 할 때는 교육의 본래 목적인 '개개인의 바른 인격의 형성과 잠재력의 극대화'를 실현 시키는데 있지 않고 정치의 목적을 실현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삼기 때문에 교육은 정치에 절대 예속 되어서는 안 된다.
정치인들은 그들의 정권 유지를 위해서 교육을 장기적 백년대계로 계획하고 실천하는 것이 아니고 선거 때에 득표를 위한 허울 좋고 눈 가리는 아웅식의 선거 전략과 정권 유지의 단기성 정책의 희생양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한 국가의 교육 목표와 교육 정책은 정치꾼이 아닌 교육전문가의 참여와 교육 담당자들의 소리를 담아 듣고 그리고 심사숙고 또 심사숙고해서 백년을 내다보는 그런 계획과 정책이 입안되고 실현하는데 국가의 최우선 과제의 숙원 사업으로 교육정책을 수립하고 실행해야한다. 오늘날 가정 사회 국가에서 일어나는 각종 일탈행동(逸脫行動)의 진원지는 바로 교육의 현장에서 비롯되었다고 본다.
우리는 독일 라인 강의 기적과 우리나라 한강의 기적을 비교하기도 한다.
독일은 세계 대전에서 패하여 잿더미위에서 흔히들 라인 강의 기적을 이루어 냈다고들 한다. 독일 국민들의 민족성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이 요약 할 수 있다.
첫째, 질서 지향적이다.
둘째, 검소하면서도 합리주의적이다.
셋째, 부지런 하지만 노동과 휴식이 시간적으로 명확히 구분되어 있다.
넷째, 꼼꼼하고 이치를 밝히는 기질이 있으며 깔끔한 것을 좋아 한다.
다섯째, 철저하게 규정을 준수 한다.
여섯째, 독일인은 음악을 사랑하는 민족이기도 하다.
일곱째, 독일의 모든 시스템은 체계적이며 완벽하다는 것을 자랑으로 생각 한다.
여덟째, 독일인들은 민족을 사랑하는 보수적이다.
이상을 라인 강의 기적에 기여 했다고 보는 독일 국민들의 핵심적 요소는 자기가 한 일은 언제 어디서나 완벽함을 보이는 철두철미한 장인정신의 직업의식과 그리고 전체와 연계시켜 나보다는 전체를 위한 공동체의식의 발로(發露)로 인식하고 싶다.
우리나라의 한강의 기적을 낳게 했던 우리민족은 위에서 소개한 독일 민족성과는 조금은 다른 개념이 있었다고 본다.
서구가 근대화의 시기에 우리는 조선왕조와 일제 강점기 그리고 6.25동란기를 거치면서 근대화의 시기도 잃어버렸고 그나마 있는 자원들도 침탈당하거나 파괴되었다.
그래서 우리나라 한강의 기적은 교육이 원동력 이였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하며 외국의 전문가들도 그렇게 분석하고 있다.
우리의 기나긴 봉건적 전통사회에서 많은 하층계급 서민들은 경제적 풍요와 사회적 지위를 향상시켜 주는 신분의 수직상승은 외직 교육뿐이라고 서민들은 철칙으로 알고 자기의 사회적 지위를 대물림하지 않고 상류계층에 소속되도록 자기의 모든 것을 받쳤다. 그래서 나의 생각으로는 우리나라의 교육열은 위정자들의 부추김 보다는 서민들의 한 맺힘을 풀어 보려는 결과에서 어느 나라 보다 아래로부터 남다른 교육열이 앞 서 갔다고 생각된다.
야생동물들이 죽을 때는 인간의 접근이 어려운 곳에서 죽음을 택하는 경우도 있단다.
어느 야생동물 연구가의 말에 의하면 특히 코끼리는 죽을 때가 되면 폭포수 뒤의 동굴 안에서 생을 마치는 경우도 있어 평생 인간의 학대와 힘의 착취 속에 살다가 자기 신체속의 최고의 보배인 상아(象牙)는 절대 자기를 평생 학대 했던 인간에게는 줄 수 없다는 데에서 나온 이야기란다. 그래서 한때는 상아수집가들이 폭포수 뒤 동굴을 뒤져 상아를 횡재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우리가 흔히 대학을 상아탑(象牙塔)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상아탑의 어원 의미는 정확하지는 않지만 아마도 서구의 “tower of ivory”에서 들어온 말인 것 같다. 그 고귀한 상아 하나하나를 쌓아 건물을 만들고 그 건물 안에서 속세를 떠나 조용히 들어앉아 오로지 학문이나 예술에만 잠기는 경지나 그러한 생활. 또는 학자들의 현실 도피적이고 관념적인 연구 생활이나 그 연구실. 즉 오늘날 상징적 의미인 진리의 전당인 대학 건물들로 본다. 이렇게 서구에서는 대학을 상아탑(象牙塔-tower of ivory)l이라고 한다. 50년대 말 세계의 석학들이 모인 유럽의 어느 대학교에서 우리나라 모 대학교 총장님이신 김××님은 서구의 대학에서 진리의 전당인 대학을 tower of ivory(象牙塔)이라고 하는데 우리 대한민국에서는 진리의 전당인 대학을 우골탑(牛骨塔)이라고 한다는 말에 장내는 웃음바다가 되었단다. 코끼리 상아와 소 뼈다귀를 비교했으니 웃을 이유가 짐작이 간다.
그러나 잠시 후 김×× 총장은 한국에서 특히 농촌에서는 생활의 마지막 밑천은 소(牛)가 전부이고 소야말로 그 당시로서는 삶 해결의 구세주였다 그러나 부모는 자식의 학업을 위해서는 논 팔고. 밭팔고 마지막 소까지 팔아 자녀들의 대학 등록금을 마련하는 한국 학부모님들의 교육열을 설명하자 장내는 금세 숙연해졌다 한다. 이것이야 말로 한강의 기적을 뒷받침 했던 노동력의 양과 질을 높혔 던 우골탑 적 교육열로 치부하고 싶다.
물론 지나친 교육열을 생각해볼 때 시대와 장소에 따라 상반된 관점도 있다.
우선 교육은 문화적 수준이 깊게 하는 것도 크게 유리한 부분이지만 아직도 아프리카의 아이들은 출세한다고 이 악물고 공을 차고 한국의 애들을 대학에 간다. 그리고 가정 가족문화를 도외시한 기러기 아빠식의 유년기부터의 유학의 붐도 생각해 볼 교육열이다.
지금 한국이 배출하는 대학 인력은 인구가 6배인 미국과 비슷한 수준이란다. 다만, 그 질적 수준은 장담 이 안 된다. 설령 대학에 가지 않는 다해도 기본적인 셈과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정도면 노동인력의 기본적 조건이다. 여기에 높은 교육열은 넓은 중산층과 높은 민주의식, 감시 의식을 가지게 되어 민주주의 뿐 만이 아니라 제도의 정착과 경제의 성장에 있어서도 꼭 필요한 조건이다. 이러한 교육열이 하필 본격적으로 자산을 축적하기 시작한 1990년대 후반 찾아온 외환위기 때문에 고용이 극히 불안정해지고 빈곤이 심화된 것과 겹쳐져 오늘날 저 출산의 주원인이 되어 국가 막장 테크를 부를 만큼 상당한 부작용을 낳은 것도 사실인지라 교육열에 대한 평가는 양날의 칼이다.
어째든 대한민국의 국운을 바꾸어 놓은 것이 정치가의 정치권력이 아니라 교육의 힘 이였는데 백년대계의 교육을 권불십년의 정치에 맡기겠는가. 농사는 농부가, 환자는 의사가, 정치가는 정치만, 그리고 교육은 교육자가 참여하고 계획하고 실행 할 때에만 교육의 새싹이 돋고 건강하게 자라며 꽃 피워 열매 맺는다고 본다. 국가는 백년대계의 계획은 교육 전문가에게 맞기고 정부(정치)는 백 년 동안 수시로 괘도 수정을 하는데 도움만 주면 된다고 본다. 아무리 완벽한 트랙터 운전자라 할지언정 쟁기 끄는 소는 부릴 수 없다 송아지 때부터 기르고 길들였던 쟁기 전문가는 농부 일 뿐 이다. 교육은 십년 살고 버릴 움막집이 아니고 백년이상 자손만대 살고 이어갈 대한민국의 종가(宗家)집을 짓는 것이기에 교육정책을 쉽게 만들고 쉽게 고치고 또 버리고 만드는 그런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
제국(帝國)을 지배 했던 어떤 제왕(帝王)도 교육을 통치의 수단 속에 예속 시켜 계획하고 실행한 제국은 멸망했거나 그 왕조는 잿불처럼 사그라졌다.
조령모개(朝令暮改)식의 교육 정책을 보며...........
첫댓글 옳으신 말씀입니다..
교육감이 바뀔때마다 정책이 바뀌니 예산은 예산데로 퍼 들이고 제대로 실행하는 것이 없어요.....ㅠㅠㅠ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