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방서예[3297]이성(李晟)시 귀전영(歸田詠)-28
귀전영(歸田詠) - 고향으로 돌아가리
이성(李晟) 晟=밝을 성. 동자(同字)晠
藥砌淸風欺我老 (약체청풍기아로)
竹溪明月誘吾情 (죽계명월유오정)
昨宵已決歸田計 (작소이결귀전계)
雪盡江南匹馬行 (설진강남필마행)
약초 심은 섬돌과 맑은 바람이 늙은 줄 모르게 하고
대숲 시냇물과 밝은 달이 내 마음을 유혹하네.
어젯밤에 고향으로 돌아갈 결정하고
눈 녹으면 강남으로 말 한 필로 가리라.
약체(藥砌) = 옆에 약초를 심어놓은 섬돌.
축담을 돌아 뒤안으로 가는 오붓한 곳에
지황이며 박하 따위를
관상용겸 비상용으로 약초를 심어두곤 했었다.
기아로(欺我老) = 나의 늙음을 속이다. 늙음을 가려주다.
작소(昨宵) = 간밤.
藥= 약 약, 더운 모양 삭, 간맞출 략.
약자(略字)薬
砌= 섬돌 체.
欺= 속일 기.
誘= 꾈 유 . ② 꾐 ③ 아름다운 모양 ④ 유인.
昨= 어제 작 . ② 앞서 ③ 옛날
宵= 밤 소. ② 작다 ③ 닮다 ④ 깁
고자(古字)
已= 그칠 이. ② 이미 ③ 물리치다 ④ 매우
匹馬필마= 한 필의 말. 匹= 필 필, 집오리 목. 짝 필, 비유할 비.
이성(李晟 1251~1325)은 고려 고종 38년에 태어나
충숙왕 12년에 졸(卒)하였다.
본관은 담양(潭陽)이다. 약관(스무살)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온수감무(溫水監務)를 거쳐 수원사록(水原司錄)이 되었으나
벼슬을 그만두고 죽계촌사(竹溪村舍)로 낙향하여 벼슬을 하지 않고
경서(經書)를 연구하는 데 전념하였다.
뒤에 천거되어 국자박사(國子博士)와 합문지후(閤門祗候)가 되었다.
1309년(충선왕 1) 좌사보(左思補)가 되었는데,
죽계촌사를 그리워하여 벼슬을 그만 두고 다시 낙향하였다.
충선왕이 연경(燕京)에 있으면서 그의 이름을 듣고
내서사인(內書舍人)으로 특진시켰으며, 뒤이어 전의부령(典儀副令)
・예문응교를 거쳐 선부의랑(選部議郎)이 되었다.
1314년(충숙왕 1) 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므로
민부전서(民部典書)로 올려 치사(致仕)하게 하였으며,
뒤에 화평부사(化平府使)가 되었으나
얼마 안 되어 사직하고 죽었다.어릴 때부터 학문에 힘써
오경사(五經笥 : 五經에 능통한 사람)라 하였다고 한다.
[시평]
'귀전영은 고향으로 돌아가리'라는 뜻이다.
고향의 죽계촌사로 돌아가고픈 작자의 마음이 함축되어 있다.
원문출처=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卷三十九
全羅道- 潭陽都護府
人物 -李晟。
登第,調水原司錄。秩滿,挈家歸竹溪村舍,不求祿仕。
年五十九,拜左司補,入直西省,作詩曰:
“藥砌淸風欺我老,
竹溪明月誘吾情。
昨宵已決歸田計,
雪盡江南匹馬行。”
翌日棄官歸田,一時名儒設尊俎餞之。
後累官民部典書。爲人力學不倦,從學者甚衆。
時人謂之五經笥。
【인물】 고려 이성(李晟)
과거에 급제하여 수원 사록(水原司錄)이 되었다.
임기가 찬 뒤에는 일가가 죽계(竹溪)의 촌사(村舍)에 돌아갔고
벼슬을 구하지 않았다.
59세에 좌사보(左司補)를 배수하고 서성(西省)에 입직하면서
시를 짓기를,
“약체(藥砌)의 청풍은 이 늙은이를 조롱하고
죽계의 명월은 나의 정을 유인하네.
어제 저녁 이미 전원에 돌아갈 생각을 결정하였으니,
강남에 눈이 다 녹을 제 필마로 돌아가리라.”
하였다.
다음날로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가니
일시의 명유(名儒)들이 술상을 차려 전별하였다.
뒤에 여러 번 벼슬을 옮겨 민부 전서(民部典書)가 되었다.
사람됨이 학문에 힘써 게으르지 않으매
따라서 배우는 사람이 매우 많았다.
당시 사람들이 오경사(五經笥)라 일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