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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글속에 따뜻한 마음을 나누어 주시는
우리님들 우리는 좋은친구 맞죠?
http://cafe.daum.net/sisa-1/f8lD/498
위 게시글에서.....김정민 박사의 한민족 고대사
특히, "고조선"의 의미가 무엇인가에 대해 소개한 바 있습니다.
한민족 고대사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 특히 재야사학자들 중에는
"고조선"의 영토가 매우 광활했었다고 주장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고조선"이 도대체 어떻게 그렇게 광대한 영토의
연방제 국가일 수 있었는지 충분히 납득할만한 설명을 한 사람은
아마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어쨌든...
기존의 모든 재야사학자들은 "고조선"이란 국가
또는 12개국의 연방체 국가는 현재 한반도 거주 한민족의 원류들이
세운 국가로 상정해왔던 것으로 정론직필은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김정민 박사는 그와는 달리 매우 놀라운
다른 주장을 하고 있지요.
즉, 우리가 알고 있는 "고조선"이란....
결코 현재 한반도 거주 한민족만의 나라가 아니라
몽골,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키리키즈스탄 등등의 민족들로 이루어진
연방제 성격의 국가였다는 해석입니다.
그러한 새로운 해석은 실로 놀라운 해석이라고 보는데....
만일 그러한 주장 또는 새로운 해석 및 가설이
실제 사실이라면.....우리는 이제 "고조선"이
도대체 어떻게 그와같이 광대한 영토의 연방제 국가일 수 있었는지를
쉽게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김정민 박사는 그런 주장들을
아무런 역사적 근거도 없이 무턱대고 주장한 것이 아니라
카자흐스탄 등등의 실제 역사적 자료들을 근거로
그와같이 추론하고 있지요.
그 점에서....김정민 박사님의 주장들이
더욱 설득력이 있다고 봅니다.
물론, 실제 논문이 아닌 동영상 강의에서는
치밀한 학문적 논리를 전개하지 않고
그저 연구 결과들만을 대략적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정민 박사님의 새로운 가설들이
기존의 주장들에 비하면 훨씬 더 설득력이 있다고 봅니다.
김정민 박사의 주장들에는 매우 흥미로운 부분들이
상당히 많지만.....그것들 중에 하나는
예컨데, 다음과 같은 것입니다.
즉, 고구려는 사실상 "몽골"이었다는 주장입니다.
http://youtu.be/7ZKOy9XpV8I?list=UUmSfQJTSfVdg3O2dyXK6PCQ
고구려 최초의 수도 홉스굴의 위치
http://youtu.be/d29jnO7B9Rs?list=UUmSfQJTSfVdg3O2dyXK6PC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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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도읍지 및 도성, 성곽
2. 고구려의 도읍지와 도성
1) 졸본성
고구려 첫 수도인 국내성 전에 최초의 고구려 도읍지가 존재하였는데
그 곳이 환인 지역에 있는 졸본(홀본 혹은 오녀산성 이라고도 한다)이다.
고구려 건국에 대하여 가장 믿을만하고 오래된 기록인
고구려의 광개토대왕비의 비문을 보건데 홀본은
비류곡(沸流谷)에 있음을 짐작할 수 있는데 당시에 나타난 지명을 보면
비류수나 비류곡, 홀본(忽本), 흘승골성(紇升骨城) 등
다양한 명칭이지만 비류곡은 강가에 있는 계곡이었고
비류수는 강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삼국사기』의 흘승골성은 홀본의 다른 이름으로 생각하고
산 위에 쌓은 성일까 하는 추정이 나오고 있다.
http://mahan.wonkwang.ac.kr/culture/2011-china/castle.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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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창범 교수의 연구 결과 - 하늘에 새겨진 우리 역사
고구려 위치: 바이칼 호수 동쪽, 시베리아와 몽골 사이
졸본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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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하늘에 새긴 우리역사 - 박창범
http://team.hani.co.kr/koreahistory/132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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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문학으로 본 삼국의 위치 - 송준희
고구려가 멸망한 것은 서기 660년경입니다.
그런데....몽골이라는 나라 명칭이 등장한 것은
고구려 이전이 아니라....고구려 멸망 후 한참이나
더 지난 후의 일임이 매우 흥미롭습니다.
몽골의 역사 이야기
초기 몽골족 가운데는 몽골계 외에도 투르크나 탕구드계(西夏)등 여러 언어 집단들이 포함되어
있었으나, 13 C 초 테무진이 칭기스 칸에 추대되고 몽골제국을 창건하면서 세계무대에 인식된 [칭기스칸]과[몽골]이 갖는 두단어의 카리스마(Charisma)로 인해 그들 소수부족 각자의 언어와 의식 모두는 철저히 몽골에 동화되고 만다. 이렇다보니 오늘날 몽골족 대부분이 칭기스칸을 자신들의 시조로서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일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현상 일 것이다.
이렇게 주류를 이룬 몽골과 소수부족들이 어우러져 형성된 몽골은 칭기스 칸의 손자 쿠빌라이 칸이 원(元)왕조를 세우면서 드디어 국가형태를 갖게되는데, 원(元)왕조 [1271 ~ 1368 ]는 원(元)의 마지막 황제 -토곤 테무르(재위 1330-1370:元 순제)-를 끝으로1368년 주원장(홍무제)의 명(明)에 의해 멸망당하고, 그 후 몽골은 지금의 고비사막지역으로 쫓겨나 13세기의 화려한 모습을 숨긴채 북원(北元)이라는 고립 국가로 남게 된다.
http://www.mongolschool.com/mongol/02ms-gol-his.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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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
위키백과
고대로부터 몽골 초원에는 흉노, 돌궐 등 여러 유력한 유목 민족들이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1206년 칭기즈 칸의 몽골 부족이 초원을 통일하고 역사상 대영제국 다음으로 영토가 넓었던 대제국 몽골 제국을 건설했다. 14세기 말에 몽골 제국이 몰락하자 몽골 초원에는 다시 여러 부족이 나타났다. 몽골과 중국 명나라를 차례로 정복한 청나라의 강희제(재위 1661년 ~ 1722년)는 몽골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몽골을 내몽골과 외몽골로 분리시켰다. 만주족의 발흥 과정에서 내몽골은 부족들이 일찍 후금과 연합을 이룬 지역, 외몽골은 후에 복속된 지역이다.
1911년 중국에서 신해혁명이 일어나 청나라가 위기에 빠지자, 외몽골은 기회를 잡고 그 해 12월에 혁명(제1차 혁명)을 일으켜 자치를 인정받았다. 1913년 티베트와 우르가에서 몽장 조약을 체결하였고 러시아에서 10월 혁명이 일어나자 1920년에 국민당이 외몽골의 자치를 철폐시켰으나, 그 해에 반(反)중국·민족해방을 목표로 몽골 인민혁명당이 결성되었다. 1921년에 담딘 수흐바타르가 혁명군을 조직하여 제2차 혁명을 일으켜 독립하였다.
1924년에는 정부 형태를 군주제에서 인민 공화제로 고쳐 국호를 몽골 인민 공화국으로 정하고, 세계에서 2번째로 공산주의 국가가 되었다. 그 후 소련의 영향력이 강화되었으며, 몽골은 중소 국경 분쟁 발생시 소련을 지원하였다.[2] 소련이 해체된 후 1992년에 복수 정당제를 원칙으로 하는 민주주의를 채택하여 계획 경제 체제를 폐기함과 동시에 시장 경제정책을 도입했다.
몽골이라는 이름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고구려 이전이 아니라...한참이나 더 지난 1200년대 이후였음이
매우 흥미롭다는 생각이 듭니다.
즉, 그 의미는.....고구려가 몽골족의 후예가 아니라
사실은 몽골 이전에 이미 "고구려"(=케레이)족이
존재했었던 것으로 이해됩니다.
그런데 그런 고구려족("케레이"족)들 중에 일부가
아마도 "무구리" 족이었고, 그들이 나중에
"몽골"이라는 나라 이름을 만들어 낸 것이 아닐까 추측됩니다.
“몽골은 한국과 4촌 … 고구려 첫 도읍도 몽골에 있었다”
[중앙일보] 입력 2012.10.20 00:02 / 수정 2012.10.20 11:17
최기호 울란바타르대학 총장
최 총장이 몽골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한국어와 만주어·몽골어·일본어 등 주변 언어 간 관계를 연구하면서다. 30년 전 도쿄외국어대 대학원 몽골학과를 수료했다. 하지만 냉전의 벽은 적성국가 몽골을 가볼 수 없는 땅으로 만들었다. 길이 뚫린 것은 한·몽 수교가 이뤄진 90년이다. 지금은 직항로가 열리고 4만여 명의 몽골인이 한국에 살고 있다. 한국에 거주한 경험이 있는 몽골인만 25만 명이 넘는 것으로 추산된다. 전체 인구(약 300만 명)의 10% 가까운 몽골인이 한국 생활을 체험했다는 말이 된다.
최기호 울란바타르대학 총장은 “한국과 몽골은 언어·인류학적으로 가장 가까운 나라”라고 말했다.
최 총장은 학문적으로 몽골과 고려의 관계를 집중적으로 탐구해 왔다. 고려시대 ‘청산별곡’에서 그는 몽골의 흔적을 읽는다. 몽골이 일본을 정벌하기 위해 동원한 고려 백성들이 도탄에 빠진 상태를 고려인 원감국사(圓監國師)가 표현한 작품이란 주장이다. 특히 후렴구 ‘얄리얄리 얄라셩 얄라리 얄라’를 몽골어로 해석해 보여줬다. 그 뜻은 ‘이기자 이기자 이긴다 이기리라 이겨’다.
우리말에는 많은 몽골어 잔재가 남아 있다. 그중 하나가 부산의 자갈치 시장. 과거 이 곳이 자갈밭이어서 그렇게 불린다는 설도 있지만 최 총장의 해석은 다르다. 물고기를 뜻하는 몽골어 ‘자가스’에 직업을 뜻하는 몽골어 ‘치’가 합성된 단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갈치 시장은 ‘물고기를 파는(잡는) 사람이 모여 있는 곳’쯤 된다. 최 총장은 ‘한참을 가다’는 말의 어원도 몽골의 역참제도에서 유래했다고 설명한다. 몽골제국이 정비한 역참제도에서 역참과 역참 사이의 거리(약 40㎞)가 ‘한 참’이다. 이게 먼 거리여서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뜻으로 변했다.
몽골이 말을 키웠던 제주도의 지명에서 몽골어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제주도는 1273년 삼별초가 평정된 뒤 몽골 관부가 설치된 곳이다. 1276년 8월 몽골 말 160마리를 제주도로 가져와 수산평(현 서귀포시 성산읍 수산리)에 방목했다. 제주도의 ‘조랑말’ 명칭은 상하의 진동 없이 매끄럽게 달리는 ‘조로모로’ 주법이란 몽골어에서 유래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한국몽골학회 박원길 회장에 의하면 몽골인들은 말에게 가장 치명적인 설사병 치료제로 몽골 초원에서 지천으로 자라는 약용식물도 가져왔다. 수산평 근처에서 자라는 피뿌리풀이다.
최 총장은 “제주도 지명에 많은 ‘오름’은 몽골어로 ‘산’이라는 뜻”이라고 주장한다. ‘산굼부리’ 역시 ‘가운데가 아름답게 깊이 파인 비탈산’이라는 몽골어에 유래했다고 본다. ‘비바리’는 ‘작다(비)’와 ‘며느리(바리)’가 결합한 몽골어다. 제주도에서는 이 말이 처녀를 뜻한다. 한라산도 몽골어로는 ‘큰 호수가 있는 산’쯤으로 풀이된다.
최 총장은 역사를 더 거슬러 올라가 “고구려의 첫 도읍이 동(東)몽골 땅에 있었다”고 주장한다. 실마리는 올해로 서거한 지 1600년이 된 광개토대왕의 비. 중국 지린성 지안현 퉁거우의 광개토대왕비는 아들 장수왕이 대왕 서거 2년 뒤인 414년에 세웠다. 비문의 첫 머리는 고구려의 건국신화와 시조 추모왕(동명성왕)의 행적으로 시작한다.
연구 초점은 바로 추모왕이다. 12세기 중엽 편찬된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주몽(朱蒙)’과 같은 인물이다. 13세기 말의 삼국유사에서도 추모왕은 주몽으로 기록돼 있다. 중국의 역사책에는 주몽·추몽·중모·도모 등으로 다양하게 나온다.
왜 이런 차이가 나타날까. 최 총장은 고구려인이 직접 기록한 ‘추모’가 당연히 가장 정확하고, 나머지는 이를 다른 한자로 옮긴 것뿐이라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추모’는 무슨 뜻인가. 최 총장은 추모왕의 시호가 동명성왕인 데 착안해 ‘샛별(동명성·금성)’이란 뜻의 몽골계 단어인 ‘촐몽’에서 기원했을 것으로 본다.
최 총장이 다음으로 주목하는 것은 추모왕이 남하하는 길에 부여의 ‘엄리대수(奄利大水)’를 지나게 됐다는 비문 대목이다. 추모왕은 자신을 죽이려 하는 부여의 대소로부터 도망쳐 후일을 도모하라는 어머니 유화 부인의 명을 따른다. 엄리대수는 삼국사기에서 ‘엄사수’, 삼국유사에선 ‘엄수(淹水)’다. 최 총장은 ‘엄리’가 강 이름을 나타내는 고유명사의 어근이고, ‘대수’가 ‘큰 강물’이란 뜻이므로 엄니는 ‘아무르(아무+르)’라는 강 이름이라고 풀이한다.
광개토대왕비는 추모왕이 엄리대수를 건넌 뒤 비류곡 홀본(忽本)에 도읍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기원전 37년의 일이다. 중국사서인 위서는 홀본이 아니라 ‘홀승골성(紇升骨城)’이라고 기록했다. 사서들은 비류곡을 ‘모둔곡(毛屯谷)’이라는 특이한 형태의 지형으로 묘사했다. 몽골어나 여진어로 ‘모드’가 ‘나무’이므로 모둔곡은 바로 ‘나무가 많은 골짜기’를 의미한다는 것이 최 총장의 주장이다.
동몽골 부이르노르 할힌골에는 끝없는 초원이 끝나는 지점에 높은 산이 있다. 최 총장은 이 할힌골이 홀승골이라고 본다. 그는 92년부터 수차례 할힌골 부이르노르와 다리강가 일대를 답사했다. 한국의 시골 주거지역에서 자라는 비름나물을 비롯해 초원에서 보기 어려운 풀들이 자라고 있는 지역이었다. 조개묻이 세 곳도 골짜기에서 발견됐다. 유목민이 먹지 않는 조개를 잡아먹는 사람들의 흔적이다. 성터나 석인상도 확인됐다. 또 몽골 여인과 고구려 여인이 초원에서 만나 손을 흔들며 반갑게 인사했다는 전승설화가 채취됐다.
최 총장이 펴는 주장에 이론이 없을 수 없다. 초기 고구려의 위치를 놓고 설이 분분하다. 하지만 그는 고구려가 동몽골 땅에서 나라를 열었고, 지금도 언어·인류학적으로 몽골이 한국과 가장 가까운 나라라고 확신한다. 그는 “일본이 한국과 8촌쯤 된다면 몽골은 4촌뻘”이라고 말했다.
그가 2년 전부터 총장을 맡고 있는 울란바타르대학에는 몽골인 3500여 명이 공부하고 있다. 지난 8월 종합대학으로 승격했다. 한국어과도 설치돼 있다. 학생들은 몽골어와 어순이 같은 한국어를 비교적 쉽게 익힌다고 한다. 최 총장은 “한·몽 교류와 협력, 몽골의 발전에 이바지할 몽골 청년들을 키운다는 보람으로 즐겁게 살고 있다”고 말했다.
◆몽고 vs 몽골=몽고(蒙古)와 몽골(Mongol)은 한국인에게는 그게 그거 같다. 하지만 몽골인에게 몽고는 치욕의 단어다. 중국인이 몽골을 비하해 붙인 나라 이름이기 때문이다. 글자대로 풀면 ‘몽매하고 고루하다’는 뜻이다. 지금도 이런 의미 차이를 모르는 많은 한국인이 몽골과 몽골인을 몽고와 몽고인으로 부르고 있다. 중국에서는 ‘네이멍구(내몽고)’처럼 여전히 몽골을 몽고로 부른다. 고려는 몽골 치하에서 독자적인 왕국의 지위를 인정받았다. 제국의 간섭은 많았으되 외형상 독립국의 지위는 잃지 않았다.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조선과 이를 잇는 대한제국의 말로와는 대조를 이룬다.
http://article.joins.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9645810
그리고.....또다른 흥미로운 주장은
고려, 고구려라는 말은.....높고 아름다운 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그것들 모두 "겨레"(=케레이)라는 의미라고
주장하는 것 같습니다.
즉, 고구려니 고려니 하는 말의 본래적 의미는
"겨레"족이라는 의미라고 하는 것 같습니다.
즉, 오늘날 "한민족"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고구려 민족을 중심으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겨레"족이라는 의미로 해석됩니다.
물론, 오늘날의 한민족은 사실
북방 유목민족인 "겨레"족만 있는 것은 아니고
남방계 민족들도 현재의 한민족에 많이 포함되어 있지요.
(뱀발) 벽화에 나타난 고구려인 얼굴들
백제인의 얼굴은 어떻게 생겼을까? -①
고구려 벽화 속의 인물
http://www.heritagechannel.tv/hp/hpContents/story/view.do?contentsSeq=2881&categoryType=1
백제인 얼굴 모습
http://www.k-heritage.tv/hp/hpContents/story/view.do?contentsSeq=2937&categoryType=1
고구려 백제 신라 사신 얼굴 모습
사신모습, 백제(左), 고구려(中), 신라(右), 염립본(閻立本,?~673)의 『왕회도(王會圖)』
(臺灣서 사진 입수 7세기 당(唐) 태종 때 중국에 간 고구려, 백제, 신라 3국 사신모습)
신라인은 백제,고구려 사람보다 다리가 더 길고, 얼굴을 여성스럽게 표현하였고, 어깨가 좁다.
반면 백제,고구려인은 팔이 유난히 길고, 다리가 짧고, 상체가 듬직한 몽골인처럼 보인다.
[펌]☞http://blog.daum.net/robustus/9910474
고구려 백제 신라가 말이 같았을까?
6세기 초, 백제가 중국의 남조(南祖) 양(梁)나라에 사신을 보내면서,
백제는 신라사신을 양나라에 데리고 간다.
그러나 신라에는 그때 까지도 중국어 통역이 없었던 것 같다.
이에 백제가 신라말을 통역해 양나라에 전하는 장면이 기록에 있다.
이때 백제는 신라를 자기네에 신종(臣從)하는 부용국(附庸國) 으로 양나라에 소개한다.
사진 : 양직공도에 나오는 백제사신
양직공도(梁職貢圖) : 서기 520-530년 경 만든 두루마리 그림
삼국사기에는 백제와 신라가 왜(倭)-일본과 교섭한 기록이 많이 나온다.
또한 일본서기에는 같은 내용을 뒤집어서-일본 시각에서 본 기록이 있다.
여기서도 통역을 세운다던가 뜻이 통하지 않아 생기는 사건이 없다.
이는 그때 까지만 해도 우리와 일본이 서로 통역 없이도 이야기 할 정도
였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닐까?
그러다가 8세기 경 일본 배가 풍랑으로 남해안에 표류해 들어 오는 데
일본 말을 알아 듣지 못하여 애 먹는 기사가 있다.
http://blog.daum.net/moxxoom/10911523
당염립본 왕회도(唐閻立本王會圖)를 통해 본 6세기경 각국 사신들의 모습
당태종
http://blog.daum.net/tongpa/13419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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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직공도의 백제국사(百濟國使) 기록 재해석
백제국사(百濟國使)기록 부분
百濟國使
百濟舊來夷馬韓之屬晉末駒旣畧有遼東樂浪亦有遼西晉
平縣自晉巳來常修蕃貢義熙中其王餘腆宋元嘉中其王餘毗齊永明
中其王餘太皆受中國官爵梁初以太爲征東將軍尋爲高句驪所破普
通二年其王餘隆遣使奉表云累破高麗所治城曰固麻謂邑曰檐魯於
中國郡縣有二十二檐魯分子弟宗族爲之旁小國有叛波卓多羅前羅
斯羅止迷麻連上巳文下枕羅等附之言語衣服畧同高麗行不張
拱拜不申足以帽爲冠襦曰複袗袴曰褌其言參諸夏亦秦韓之遺俗.
백제는 옛 이(夷:東夷)에서 나왔으며 마한의 무리이다. 진나라 말기에
고구려가 요동 낙랑을 취하여 다스리니,
백제 역시 요서 진평현(晉平郡 晉平縣)을 취하였다.
진나라 이래 이웃국가로서 공물의 예를 갖추어 왔는데 진(晉)의 의희(義熙) 연간(405-418)에 그 왕
여전(餘腆:전지왕), 송나라 원희(元嘉) 연간(424-453)에는 여비(餘毗:비유왕), 제나라 영명(永明) 연간(483-493)에 여태(餘太:동성왕)이 모두 중국으로 부터 관작을 받았다. 양나라 초에는 여태(餘太:동성왕)을 정동장군에 제수하였는데 얼마 안 있어 고구려에게 격파당하였다.
양나라 보통(普通) 2년(521년)에 백제왕 여융(餘隆:무녕왕)이 보낸 사신이 와서 표를 올리며, 수차례 고구려를 무찔렀다고 고하였다. 백제는 궁성을 고마(固麻) 라고 하고, 읍을 담로(檐魯) 라 하는데, 이는 중국의 군현과 같은 것이며, 22곳의 담로가 있는데 왕의 자제등 존속들에게 나누어 다스리게 하였다.
나라 주변의 소국으로는 반파, 탁, 다라, 전나, 사라, 지미, 마연, 상사문, 하침라 등이 있어,
백제에 부용(附庸)하고 있다.
언어와 의복은 고구려와 유사하나 걸을 때 두 손을 맞잡으며, 절을 할 때에는 다리를 펴지 않는다.
모자는 관이라 부르고, 저고리를 복삼, 바지를 곤이라고 한다.
백제의 말에는 중국의 말이 섞여 있는데 이는 진한(秦韓)의 습속에서 유래된 것이다.
http://blog.daum.net/sabul358/18321823
http://blog.daum.net/kelim/15715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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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 고궁박물원 소장 ‘남당고덕겸모양원제번객입조도’ 중
고구려·백제·신라·왜국 사신도(왼쪽부터)
시간이 흘러가는 발견으로
인생은 '도'가 채워지게 자연입니다.
우리는 하루하루를 보내는 것이 아니라
하루 그 무엇인에 계속 실수하며 흘려져서
채워지려는 지움으로 없앰으로 지각하고
만들어 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곳 마음이라는 의식입니다.
안주하는 마음 에고의 시간을 쓰게 살면
그것으로 인생은 다 거짓이며 종교입니다.
우주는 미시세계와 거시세계 몸과 마음
그 파동과 진동 전자의 힘으로 광자대합니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가장 큰 감옥은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두려움입니다.
감옥은 사회의 규범을 가르치는 것이 전부입니다.
옮고 그름, 도덕과 비도덕,좋은 것과 니쁜 것,
건전과 불건전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을 가르칩니다....
그리고 혼돈이 없는 영역이란 것을 만듭니다.
그렇게 인식한 믿음의 영역안에서 삶을 살아가고..
그 안에서 말하고 생각하면,
사람들은 당신이 평범하다고 판단하고
그대로 놔듭니다.
하지만 일단 그 영역에서 한 발짝 나오면
그 땐 당신은 특이한 사람이 되기 시작합니다.
철인이 한일은
전 인류를 교도소 장으로 만든 것입니다.
누구라도 평범한 영역을 벗어나
튀어나오는 사람이 있으면
바로 밝아 버립니다.
그리고 흥미로운 것은
그 혼란이 없는 영역에서 조금 벗어나려고 활 때
당신은 생각을 합니다.
내가 만약 이렇게하면 사람들이 워라할까?
안돼..! 우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엄마가 어떻게 생각하실까?
혹은 친척이나 직장에 있는 사람이 뭐라고 말 할까?
그 철인들이 만들어 한 일은
서로에게 규범을 부과하는
절대적인 군인들을 만든 것입니다.
우리는 그 절망스러운 환경의 세상을
창조와 사랑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우리는 절대 고요상태 제로 지점에서
각각 나선형 물체계에 중앙에 노여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 저 모든 사람이
토로스 에너지 장이라고 생각합니다.
절대 고요함을 중심에두고
우리모두가 서로 살아있는 우주
무한한 의식속으로 영결되어야 합니다.
세상이란!
그 경험들로
진리를 맛보도록 내몸에 신성으로 와 있습니다.
몸은 죽임 뒤에도
영 "핵 원자"는 한결같이 살아 있습니다
태양에 의한 에너지로 만물이 빛의 수호자입니다.
지극히 한정된 생을 반복으로 격도록
그렇게 인성은 인격으로 지성체 입니다.
따라서 몸속 자기 부정적 경험을 통해
몸에 신성이 미리 나타나 있는 진화의 과정 입니다.
태양이 움직이는 이유도 그렇습니다.
지구생명도 힘든 움직임을
좋와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전자의 파동에 숨쉬고 격는 성장이며
퇴화됨으로 유지하는 발견은
미리있는 과정에 진화하고 있는 것입니다.
계속 움직임을 여임으로서
경조억겹의 통로에 자연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실재와 실체가 성장하여 어버이를 만듭니다.
인간이 천체 그 지성이 유지됨에 따라
인성에 채워지는 과정에 파동하는 몸이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생은 채우기 위해 베푸는 스승입니다.
신의 현원으로 몸이 격는
움직임에 긴장하도록 숨도 있는 것입니다.
실체 생명은 나선형 움직임으로 나타납니다.
실체 핵원자는 영 존재로 순간이동 합니다.
태양이 반복하는 시간에
일백만년을 이천오백번 지나면서
움직임을 먹음는 빛의 찰나에 반복 했습니다.
자연이 펼처지는 일상에 움직이도록 도구로
실체는 지성체에 이르도록 영이 있습니다.
복사로 돌고있게 진동이
빈 공간 전자파동은 있습니다.
죽음 뒤에도 계속 윤회가 나타나는 핵원자
현미경으로도 잘 나타낼 수없는
00000000000000000000.1 핵에너지,
실재는 실체로 찰나에 반복합니다.
따라서 죽음은 없습니다
백만년이 2500번을 지나며
항성과 행성이 없어지고 나타나는 이유의 관계
빛 까지도 다스리는 암흑 물질이 있고
번복하는 평창 에너지라는 것,
불랙홀이 또다른 우주를 복사히는 것 처럼이다.
나도 태양도 지구도 홀로그램 입니다.
그렇게 평창하기위해 복사되는 실체 우리는
지금 이곳에 있지만
또 다른 우주 어느 곳에나 또 다르게
미리 있는 순간이동에 실재라는 것입니다.
없어야 있는 능력 보도록 실재라는 것입니다.
진동과 파장에 맞춰진 그 광자대 우리에게는
힘든 날은 없습니다...고로 죽음도 없습니다.
다 그런 날이 있도록 반복하는
일이 있을 뿐 입니다.
"노동이 없는 돈이 정신을 궁핍하게한다"
끄러당김의 힘으로 부드러워지는 이유입니다.
우리의 엄청난 기회는 그렇습니다.
다 마련으로 차려진 것입니다.
000000000000000000000000.1
수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우리의 생각은
각기 다른 주장으로 여러 문재를 겪 습니다.
거듭하는 빈 공간의 개념.
사라짐을 반복하며 나타나는 힘
우리 몸 속에도 있고
지구에도 태양에도 우리 일상에도 있습니다.
빛이 우연히 있는 것이 아니라는 느낌!
따라서
신을 위해 선량해 지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지성체인 나 자신을 위해 선량해지면
신들이 내 속에 있기 때문에
나는 저절로 선량해 집니다.
한번 배우고 지워야 또 다시
재 지각을 반복 격도록 되는 지식입니다.
숨쉬는 것으로 살아왔고
계속 그렇게만 살도록 반복하는 생명입니다.
몸은 배풀기가 있어 채워지는 영의 도구입니다.
- 홀로그램 인생-
몸이 컴퓨터 본체라면
영은 기억장치 해드디스크 입니다.
덕은 인위적인 덕이 아닙니다.
최상의 덕은
덕을 의심하지 않음으로 덕이 있는 것이고
정도가 낮은 덕은 덕에 매여있기에 덕이 없는 것이다.
최상의 덕은 무위여서 자연스럽고
정도가 낮은 덕은 유위로서 부자연 스럽다.
인은 유위로 자연스럽고
의는 무위며 부자연 스럽습니다.
사회의 예는 유위이고 그 예는 반응이 없으면
팔을 걷어 붙이라고도 예을 든다.
무위자연의 도가 사라지면 무위자연의 덕이 나타나고
무위자연의 덕이 사라지면
인위적인 의의 도덕이 나타나게 되는데...
인위적인 의의 도덕이 사라지면
인위적인 예의 도덕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예의 도덕이라고 하는 것은 참다운 마음이 엷어진 것이며
세상이 어지럽게 되는 시초가 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일을 미리 내어보려는
예와 지, 그 지식은
도의 알맹 없는 겉치레와 같은 것,
나 존재를 어지럽고 못나게 만들개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다운 사람은
예와 지를 버리고 도을 택하는 것입니다.
"도'의 길
도의 길은 하루하루를 게으르지않게 일하며
움직임으로 오는 복 그 돈을
나를 없애는 데 씁니다.
나눔의 경험이 채워질 때 "도"가옵니다.
없애가는 것
없애고 또 없애 수치심도 이기고
또 이기면
함이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는 것 입니다.
함이 없는 지경에 이르면
되지 않는 일이 없습니다.
결핍 덩어리였던 나
나를 사랑했던 사람들...
어머니, 아버지, 가족 친지, 여러공동체,
그리고 또 다른 많은 여자,여자,여자,
결핍자아 바보의 성장 나에게
수치심을 견디고 참을 수 있도록 있었던 것은
모두다 공부가 되라는 과정이였습니다.
그토록 그렇게 고맙게
나를 아프도록 했던 것이 있었기에
삶을 소중하게 살아가는 여러분에게
이런 말도 전하게 됩니다.
이제 그동안의 인연 모든 분에게
진정한 인격의 가치를 세워 가겠습니다.
노동이 없는 돈 때문에
정신은 파멸되어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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