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컨대 민주주의는 ‘다수의 지배’로 압축될 수 없습니다. ‘우리 편이 더 많으니 우리 편 뜻대로 하겠다’고 우격다짐으로 밀어붙이는 건 민주주의가 아닙니다. 승자 못지않게 패자 역시 동의할 수 있는 규칙에 의해 선거를 치르고, 승자가 정국 운영의 주도권을 갖지만 패자에게도 다음 선거에서 부활할 수 있는 공정한 기회를 제공할 때 민주주의는 정상 작동합니다. 법의 지배(rule of law)가 뒷받침돼야 민주주의도 제 기능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역사적 경험 탓에 ‘독재’라는 말을 들으면 군사독재만을 떠올리지만 세계 각국에는 문민독재의 사례가 숱하게 존재합니다. 독립운동가에서 독재자로 변신하고 죽을 때까지 군림한 짐바브웨의 로버트 무가베 정권, 대를 이어 집권하고 있는 싱가포르의 리콴유 정권, 결국 쿠데타로 쫓겨난 필리핀의 마르코스 정권이 대표적일 것입니다. 이들 모두 선거를 통해 집권했습니다. 이런 예를 보면 투표를 통한 다수 지지의 확보가 민주적 정당성의 전부는 아니라는 뜻입니다.
어떤 제도를 통해 ‘선거를 하느냐’도 민주주의의 본질과 필연적 관련이 없습니다. 참여자가 동의하는 규칙, 승자에 대한 존중, 패자에 대한 배려. 이 세 요소가 작동할 때만 선거는 민주적 정당성을 확인하는 절차로 제 기능을 할 수 있습니다. 세 요소가 살아있다면 아무리 낡고 ‘사표’가 많이 나오는 제도라고 해도 선거는 민심을 반영하고 새로운 국가적 방향을 제시하는 정치적 사건으로 올바로 작동할 수 있을 겁니다.(신동아 2020년 11월호에 실린 노정태 / 철학에세이스트 님의 견해입니다)
<문재인 전 대통령이 다음 달 상영될 자신의 다큐멘터리 영화 ‘문재인입니다’에서 “5년간 이룬 성취가 순식간에 무너지고 과거로 되돌아가는 모습을 보며 허망한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의 말대로 문재인 정권이 5년간 이룬 성취는 부동산 폭등, 국가채무 급증, 세계 최저 출산율, 소득주도성장, 노재팬(No Japan) 등 다방면에 걸쳐 매우 많다. 그중에서 정치 분야에서도 엄청난 성취가 있었는데 바로 ‘날치기 선거법’이 되겠다.
한국에서 현재 비례대표 국회의원을 어떻게 뽑는지 정확히 이해하는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될까. 21대 총선을 앞두고 2019년 12월 더불어민주당이 주도해 국회에서 날치기로 통과시킨 선거법(소선거구제+준연동형 비례대표제)은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내용이 복잡하다.
지역구 253석은 종전대로 지역구 최다 득표 1인이 당선되는 소선거구제여서 문제 될 게 없다. 문제는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라는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이다. 이 제도를 간단히 설명하자면 비례대표 47석 가운데 17석은 20대 총선 이전처럼 순수히 정당득표율에 비례해 뽑되, 나머지 30석은 지역구 당선 의석수와 50%를 연동해 뽑는 것이다.
‘지역구 당선 의석수와 50%만 연동한다’는 게 도대체 무슨 소리냐고? 죄송하지만 그 작동 구조를 상세히 설명하려면 이 칼럼의 나머지 분량을 다 써도 쉽지 않다. 관심 있는 분들은 인터넷 검색을 해주시길 바란다.
이런 기괴한 제도의 탄생은 민주당과 정의당의 정치적 거래가 배경이다. 당시 민주당은 20대 국회 임기 내에 공수처법 통과를 원했고, 정의당은 당세 확장을 위해 독일식 연동형 비례대표제가 절실했다. 이 때문에 양당이 공수처법과 선거법 개정안의 부작용은 따져보지도 않고 서둘러 일괄 날치기하는 데 의기투합한 것이다.
결국 민주당은 정치철학을 바탕으로 연동형 비례대표제(그나마 실제 통과 때는 준연동형으로 변질)를 도입한 게 아니었다. 그래서 날치기를 당한 자유한국당이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무력화시킬 위성정당 카드를 들고 나오자, 민주당이 처음엔 자유한국당을 욕하다가 나중에 부랴부랴 위성정당을 따라 만들어 정의당의 뒤통수를 때린 건 예고된 막장 드라마였다고 할 수 있다.
민주당 입장에선 천만다행으로 21대 총선에서 압승을 거뒀기 때문에 선거법 날치기 부작용에 따른 책임추궁을 피해갈 수 있었다. 한국에서 선거는 결과만 좋으면 도의적인 문제는 잘 안 따지는 풍토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필자는 당시에 이런 황당한 제도로는 도저히 다음 총선을 치르지 못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선거 때마다 비례대표만을 노리는 위성정당을 만들었다가 선거 이후 모(母)정당과 합치는 게 민주주의 국가에서 말이나 되나. 고작 30석을 뽑자고 도입한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는 작동 구조가 난해한 데 비해 실익은 별로 없다.
역시 22대 총선이 1년 뒤로 다가오자 선거법을 그냥 놔뒀다간 큰일 나겠다 싶었는지 최근 여야 의원들이 국회 전원위원회를 열어 선거제 개선을 논의했다.
이 자리에서 민주당 이원욱 의원은 준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에 대해 “당시 원내수석부대표로서 큰 책임을 져야 할 사람”이라며 “국민 여러분께 진심으로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뒤늦게라도 반성하는 사람이 나오니 다행이다. 애초에 게임의 룰인 선거법을 제1 야당의 동의 없이 날치기로 밀어붙인 것 자체가 터무니없는 폭거였다. 그런 성취는 빨리 무너지는 게 바람직하다.
문제는 망가진 선거제도를 어떻게 수습하느냐다. 전원위원회에서 여야 의원들은 중대선거구제, 권역별 연동형비례대표제 등 다양한 대안을 제시했다. 의원들이 각자의 기득권을 조금씩 포기하면 타협이 안 될 건 없다.
끝내 타결이 힘들면 20대 총선 이전 방식으로 돌아가도 된다. 과거 제도가 문제는 있어도 현행보단 낫다. 어찌 되건 내년에 위성정당 창당 쇼를 또 볼 순 없는 것 아닌가.>중앙일보. 김정하 정치디렉터
출처 : 중앙일보. 오피니언 김정하의 시시각각, 4년 만에 무너지는 날치기 선거법
심상정 정의당 당시 대표는 비례대표 의석이 늘면 정의당이 이득을 볼 수 있다는 계산 하에 ‘민심 그대로 비례대표제’라며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추진했지만, 정치부 기자들도 혼란스럽게 하는 복잡한 수식으로 가득한 선거법이 될 줄은 몰랐을 것입니다. 거대 양당은 선거용 위성정당을 만들었고 심상정은 결국 선거가 끝난 후 눈물을 쏟고 말았습니다.
20대 국회의 문희상 의장은 선거법을 ‘패스트 트랙’에 올렸습니다. 선거법은 게임의 룰이니 모든 참여자의 동의하에 바꿔야 마땅할 것입니다. 그것을 집권 여당과 여당의 편을 들어 이득을 보려는 군소 야당의 동의만으로 개정해버린 것이 현행 선거법입니다.
우리 헌정사에서 ‘사사오입 개헌’에 버금갈 만큼 황당한 일인데도 비례대표를 늘려 민심을 반영한다는 대의명분을 내걸고 선거의 법적·민주적 정당성을 내팽개쳤던 것입니다.
이 엉터리 선거법으로 22대 총선을 또 치르겠다는 것인지, 아니면 어떤 식으로 어떻게 개정할 것인지, 더 두고 봐야할 것 같습니다. 거대여당이 된 더민당은 제1야당에 법제사법위원장을 양보한다는 관례도 내다버렸습니다.
멋대로 만든 선거법으로 선거를 치르고, 소수자를 보호하며 의견의 다양성을 확보하기 위한 관례마저 무시하는 것은 민주주의가 아닙니다. 선거를 통한 다수의 독재에 더욱 가까울 뿐입니다.(신동아 2020년 11월호에 실린 노정태 / 철학에세이스트 님의 견해입니다)
時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