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과 성어
한신(韓信) 2-1
한신(韓信)은 유방(劉邦)을 도와 한(漢)나라를 세운 최고 공신으로 장량(張良= 張子房)과 소하(蕭何)와 함께 한초삼걸(漢初三杰)이며, 병선(兵仙)이라고도 칭하는 인물이지만 반란을 도모했다는 죄로 그 자신과 삼족이 몰살당하는 비운의 장군이다. 그 이야기를 시작한다.
가랑이 사이로 기어 나가다; 과하지욕(跨下之辱)
회음후(淮陰侯) 한신(韓信)은 회음(淮陰- 지금의 강소성)으로, 출생연도는 알 수 없고 기원전 196년에 죽었다.
평민으로 가난한데다가 선행이 없었으므로 추천을 받아 관리도 될 수 없었고, 또 장사하여 생계를 꾸릴 능력도 없어 늘 남을 따라 다니며 먹고 살아 사람들이 대부분 그를 싫어했다.
일찍이 회음의 속현(屬縣)인 하향(下鄕)의 남창(南昌)에 정장(亭長)의 집에서 몇 달을 밥을 얻어먹은 적이 있었는데, 그 아내가 한신을 귀찮게 여겨 새벽에 밥을 지어 이불 속에서 먹어치우고는 한신이 가도 밥을 주지 않았다. 한신도 그 뜻을 알고는 화가 나서 끝내 절교하고 발길을 끊었다.
淮陰侯韓信者,淮陰人也。始為布衣時,貧無行,不得推擇為吏,又不能治生商賈,常從人寄食飲,人多厭之者,常數從其下鄉南昌亭長寄食,數月,亭長妻患之,乃晨炊蓐食。食時信往,不為具食。信亦知其意,怒,竟絕去。
한신이 회음성 아래에서 낚시를 하고 있었는데, 빨래 일을 하던 아낙 가운데 한 아낙이 한신이 굶주린 것을 알고 밥을 주었는데 그(빨래) 일이 끝날 때까지 수십일 동안 밥을 주었다.
한신이 기뻐하며 아낙에게 말했다.
“내 언젠가 이 은혜를 반드시 보답하겠소.”
그랬더니 아낙이 화를 내면서 말했다.
“사내대장부가 제 힘으로 살아가지도 못하기에 내가 젊은이(王孫= 남을 존칭하는 말.= 貴公子)를 가엾게 여겨 밥을 주었을 뿐인데 어찌 보답을 바라겠소!”
信喜,謂漂母曰:「吾必有以重報母。」母怒曰:「大丈夫不能自食,吾哀王孫而進食,豈望報乎!」
회음의 백정촌(屠) 젊은이들도 그를 업신여겨 는 그 중 한 사람이 말했다.
“네가 비록 키는 크고 칼을 좋아해 차고 다니지만 마음속은 겁쟁이다.”
그러면서 한신을 모욕하면서 말했다.
“네놈이 죽기를 두려워하지 않으면 그 칼로 나를 찌르고, 죽음을 두려워하면 내 가랑이 사이로 기어 나가라.”
이때 한신은 그를 한참 동안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몸을 구부려 가랑이 밑으로 기어나갔다. 이일로 해서 시장 사람들이 한신을 겁쟁이라고 비웃었다.
(眾辱之曰:「信能死,刺我;不能死,出我袴下。於是信孰視之,俛出袴下,蒲伏。一市人皆笑信,以為怯。)
한신 / 위키피디아
*여기서 과하지욕(胯下之辱)이라는 성어가 나왔다.
(跨: 넘을 과. 사타구니. 下: 아래 하. 之: 갈지. 辱: 욕되게할 욕)
그 후 한신은 항량(項梁= 항우의 숙부)이 회수(淮水)를 건널 무렵에 그를 따르다가 항량이 죽자 항우(項羽) 밑으로 들어가 낭중(郎中)이 되어 여러 차례 계책을 올렸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이름이 알려지지도 않았다.
진(秦)나라를 멸하고 권력 쥔 항우(項羽)가 유방을 한왕(漢王)으로 봉하여 남쪽의 촉(蜀)땅으로 보낼 때 초왕 항우에게서 도망하여 한(漢)으로 귀속했다(信亡楚歸漢.) 그러나 한신은 이름이 알려지지 않아 연오(連敖= 곡식창고 관리)라는 보잘 것 없는 벼슬을 받았다. 그러다가 법을 어겨 목을 베이는 형에 처하게 되었는데, 한신의 차례가 되었을 때 유방의 측근 하후영(夏侯嬰= 滕公)과 눈이 마주쳤다. 한신이 큰 소리로 말했다.
“주상께서는 천하를 차지하려고 하시지 않습니까? 어찌 장사를 죽이려 하십니까?” 하후영이 그 말을 기특하고 장하다고 생각하여 한신을 살려주고 한왕(유방)에게 이야기해 한왕이 치속도위(治粟都尉= 식량과 말 먹이를 관리하는 군관)로 삼았지만 비범한 인물로는 보지 않았다.
適見滕公,曰:「上不欲就天下乎?何為斬壯士!」滕公奇其言,壯其貌,釋而不斬。與語,大說之。言於上,上拜以為治粟都尉,上未之奇也。
이글은 김원중교수 번역의 사기를 기본으로 백과사전과 기타의 글을 참고로 작성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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