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13-23 야곱이
본문은 야곱이 에서에게 예물을 가지고 가는 자들에게 부탁하는 말과 두 아내와 두 아내의 여종들, 그리고 자녀들을 인도하여 얍복나루를 건너게 하는 내용입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보호를 받기 위하여 벌써 기도한 바(9-12)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자는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거저 잘 되기만 바라는 자가 아닙니다. 야곱은 자기 “형 에서”에게 580이나 되는 많은짐승을 “예물”로 “각각 떼로 나눠”보냈습니다. 그리고 각 떼의 선두에 선 자에게 “내 형 에서가 너를 만나 묻기를 네가 뉘 사람이며 어디로 가느냐 네 앞엣 것은 뉘 것이냐 하거든 대답하기를 주의 종 야곱의 것이요 자기 주 에서에게로 보내는 예물이오며 야곱도 우리 뒤에 있나이다 하라”고 하였습니다(17-18).
“주의 종 야곱” 이란 말로 야곱은 자기 겸손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면서 야곱은 자기 형으로부터 호의(好意)를 얻고자 하였습니다. 그리고 따라가는 자들에게 꼭 같은 부탁을 거듭하였습니다. 그렇게 한 목적은 그 형 에서를 여러 차례 기쁘게 하려는 의도(意圖)였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서 만이 되는 계속되는 겸손과 희생은 상대의 마음을 풀어주는 계기가 되고 상대에게 기쁨을 주는 것입니다. 이 같은 마음의 지향성은 본래는 살아 계신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자기 의지이십니다. 또 계속되는 희생과 겸손은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마음의 지향성이 그의 안목으로 그의 말로 그의 행동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이렇게 기도하는 자는 기적을 바라고 돌진하는 자가 아니요,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분을 의지하면서 나아가는 것이요, 그분에게서만 모든 것을 바라면서 동시에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가장 보편 타당한 방식을 고려하면서 나아가는 자입니다.
1. 본문 13절은
“야곱이 거기서 경야하고 그 소유 중에서 형 에서를 위하여 예물을 택하니” 입니다.
1) 야곱은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신 선물로 자기형을 달래기 위한 노력에 게으르지 않습니다.
또 야곱은 하나님의 보호 아래서 안전할지를 의심하는 듯이 행동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해 놓고도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면서 헛된 궤변을 늘어 놓는 일이 있습니다. 이런 일들은 사람들 사이에서 아주 흔한 과오 중에 하나입니다. 이에 반해서 기도에 대한 주요한 이점(利點)은 침묵과 정숙 중에 주를 기다리는데 있습니다.
야곱이 지금 의도하는 바는 하나님의 유일하신 구원 방식에 만족하지 못하는 자처럼 분주히 쏘다니며 안절부절 하는 데 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자기에게 은총을 베푸신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하다는 사실을 확실히 믿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성공을 하나님의 손에 온전히 맡기면서도 자기 능력의 한계 안에 있는 수단들을 빠뜨리지 않고 다 활용해 봅니다.
2) 우리는 평화롭고 조용한 마음을 갖기 위해 우리 걱정을 기도로써 하나님께 맡깁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데서 오는 안전감 때문에 나태해져서는 안됩니다. 여호와께서는 우리에게 원조를 제공하시면서 그 모든 원조가 활용되기를 원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경건한 자에게서 나오는 부지런함은 세상 사람들의 불안정한 활동과 크게 다릅니다. 세상 사람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과는 무관하게 자기 근면에만 의존하는 게 보통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사용하는 방식들이 정당하거나 합법적인 것은 전혀 생각하지 않습니다. 더욱이 이 세상에 속한 사람은 항상 전율 가운데 있습니다. 그리고 부산을 떨면서 자기 불안을 더욱 더 증가시킵니다.
그러나 경건한 자들은 힘을 다하여 수고하고 그 성과를 하나님의 자비로부터만 기대합니다. 경건한 자들은 오로지 그 이유만을 위해서 열심을 내는 것입니다. 경건한 자들은 마치 짐승이나 버러지가 동면 상태에 들어가듯이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은사를 사장시키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런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한 수단을 찾기 위해서 전념합니다. 경건한 자들은 자기 의무를 이행하고 나서도 여전히 살아 계신 하나님 바로 그분께서 주시는 은혜를 의지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들이 시도할 수 있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남지 않은 때에라도 경건한 자들은 마음이 여전히 편안합니다.
2. 본문 14-21절은
“(14) 암염소가 이백이요 숫염소가 이십이요 암양이 이백이요 숫양이 이십이요
(15) 젖 나는 약대 삼십과 그 새끼요 암소가 사십이요 황소가 열이요 암나귀가 이십이요 그 새끼나귀가 열이라
(16) 그것을 각각 떼로나눠 종들의 손에 맡기고 그 종들에게 이르되 나보다 앞서 건너가서 각 떼로 상거가 뜨게 하라 하고
(17) 그가 또 앞선 자에게 부탁하여 가로되 내 형에서가 너를 만나 묻기를 네가 뉘 사람이며 어디로 가느냐 네 앞엣 것은 뉘것이냐 하거든
(18) 대답하기를 주의 종 야곱의 것이요 자기 주 에서에게로 보내는 예물이오며 야곱도 우리 뒤에 있나이다 하라 하고
(19) 그 둘째와 셋째와 각 떼를 따라가는 자에게 부탁하여 가로되 너희도 에서를 만나거든 곧 이같이 그에게 고하고
(20) 또 너희는 말하기를 주의 종 야곱이 우리 뒤에 있다 하라 하니 이는 야곱의 생각에 내가 내 앞에 보내는 예물로 형의 감정을 푼 후에 대면하면 형이 혹시 나를 받으리라 함이었더라
(21) 그 예물은 그의 앞서 행하고 그는 무리 가운데서 경야하다가” 입니다.
1) 이제 야곱은 그토록 많은 재산을 거리낌없이 희생시킵니다.
이것은 가치 없는 재물이 아니라 고난 중에 얻은 것으로써 곧 자기 분신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야곱에게서 자기 재산을 축내는 것은 자기 희생의 결과물 입니다. 이것을 보면 우리는 그가 하나님의 약속을 얼마나 소중히 여기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갖은 애를 써가며 고생 끝에 모은 재산을 무척 귀중하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각고하여 부자가 된 자들은 자기가 수고한 만큼 자기가 모은 재산을 아끼며 자신이 한 고생을 결코 잊지 않습니다. 비록 큰 재산을 모았다고 하더라도 암소 사십 마리, 젖 나는 약대 삼십과 그 새끼 황소 열 마리, 암나귀 이십과 그 새끼 열 암 염소 이백, 암 양 이백 수, 양 이십, 그리고 수 염소 이십을 준다면 적지 않은 손실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자기 고향으로 안전히 돌아가기 위해 무리한 세금을 아낌없이 내놓습니다. 그는 자기 재산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살 수 있는 은신처를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다른 곳에서 널찍한 거주지를 찾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약속하신 분이 허락하신 그 은혜의 혜택을 놓치지 않기 위해 그토록 큰 대가를 자기 형에게 지불하고 가나안 땅에서 평화로운 거주지를 구입합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개혁 신앙에서 말하는바 진리 보존 차원이요, 은혜 보존 차원이요, 교회 보존 차원의 희생입니다.
2) 우리는 여기서 우리 자신의 우유부단한 현실적인 사실들을 부끄러워해야 합니다.
우리는 손해를 입을 것 같으면 즉시 소명 수행 의무에서 돌이켜 곁길로 가기 때문입니다. 주께서는 분명하고도 큰 목소리로 자기가 좋아하시는 것을 행하도록 우리에게 명령하십니다. 그러나 일부 사람들은 그런 부담을 항상 귀찮게 여깁니다. 그래서 안일한 가운데 누워 있습니다. 또 어떤 자들은 태만 때문에 제재를 받습니다. 또 자기 재물이나 자기 명예 때문에 방해를 받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자기 부정이나 자기 희생을 감수하면서 하나님을 따르는 자는 마침내 극소수에 지나지 않게 됩니다. 이는 손해자가 되려는 사람은 백에 하나도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극히 일반적이고, 또 물리적이며, 인간적인 관찰이 되겠지만, 앞으로는 지도자로부터나 일반 신자로부터 교회가 나오기가 점점 어려울 것입니다. 그 대신 자꾸 허망하고 엉뚱한 집단이 돌출할 것입니다. 그것은 진리를 보유한 것 같으나 자기 희생들이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재산을 정리하여 유학을 떠난 이남규 목사는 잘 떠난 것으로 보입니다. 또 튜울립 장로교회 정지수 목사도 교회를 가정에서 시작한 것을 보았습니다. 참 잘 시작하였습니다. 그런 일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서 진리를 보존하는 차원이라면 큰 희생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면 다시 시작해 보겠다는 생각이 저의 중심에 가득합니다. 사람으로는 가능하지 않으나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면 시대마다 진리와 함께 교회가 세워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3) 다시 야곱의 행적을 더 살펴 보십시다.
야곱은 사자들 사이에 간격을 띄어서 각기 다른 시각을 따라서 내보냈습니다. 이것은 자기 형이 가지고 있는 흉포성을 점차 경감시키기 위해서입니다. 이로서 우리는 그가 자기 일을 슬기롭게 처리할 수 없을 정도로 두려움에 사로잡히지는 않았다고 추론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생각과 말과 행동들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부여하신 통합 방식의 지략입니다. 어떻든 언약의 자손들이 보존되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3. 본문 22-23절은
“(22) 밤에 일어나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한 아들을 인도하여 얍복 나루를 건널새 (23) 그들을 인도하여 시내를 건네며 그 소유도 건네고” 입니다.
1) 지금 야곱의 중심에는 조부 아브라함으로부터 출발된 하나님의 약속과 명령이 있습니다.
아버지 이삭도 이 같은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약속과 명령에 근거하여 여생을 살았습니다. 야곱의 삶에 있어서 하나님의 명령과 약속, 곧 이것이 그의 전부입니다. 이런 문제로 야곱은 지금까지 여호와께 기도 드렸습니다. 그리고 자기 계획도 세웠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주시는 모든 은혜를 총동원 한 것입니다. 그가 지금까지 계시로 받고 경험하고 다져진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총동원하였습니다. 또 하나님과 관계된 지식을 총동원하였습니다. 그런 뒤에 이제 그는 자신을 갖고 위험을 맞이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모든 은혜의 혜택으로 자신을 무장하고 상대가 누구이고 무엇이든 간에 맞선 것입니다.
2) 신자들은 이 사례로부터 위험이 닥쳐 올 때는 언제든지 이런 순서로 일을 진행시켜야 한다는 가르침을 받습니다.
첫째는, 살아 계신 하나님을 아는 총체적인 지식과 그분으로부터 받은 바 은혜의 혜택으로 무장하고 자기 위치에 굳게 선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누구 혹은 무엇보다도 여호와께 의지하고 호소한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이면 어떤 구조의 수단이든지 나타나기만 하면 즉시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넷째는, 어떤 사건에 총체적으로 대비한 자답게 여호와께서 명하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용감하게 나아간다는 것입니다.
야곱도 그와 같이 행하였습니다. 야곱은 그 길이 위험 투성이라는 것을 잘 알았습니다. 그렇지만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마치 하나님을 향하여 눈을 뜨고, 사람을 향 하여는 눈을 질끈 감은 것처럼 진행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주의 은혜로, 주의 진리로 무장한 그의 본을 받아서 복잡다단한 일에서 불안을 극복하여야 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우리가 소명을 따라서 우리 의무를 행하는 일에 방해를 받거나 지체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3) 이제 야곱은 자기 아내들과 자녀들을 먼저 보내고 혼자 남습니다.
이것도 막연히 남기 위해서가 아니라 기도하기에는 한적한 곳이 더욱 알맞기 때문입니다. 그는 극도의 위기를 두려워한 나머지 하나님께 대한 열렬한 간구에 완전히 몰입되었습니다. 이것은 의심할 나위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야곱이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한 아들을 인도하여 얍복 나루”를 건너게 한 이유는 자기만 홀로 남아 있어서 기도하기 위한 것입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을 대면하여 그분의 음성 듣기를 원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런 모습이 그가 살아 계신 하나님으로부터 거저 받은 은혜의 혜택이기도 합니다.
이제 우리는 어떤 일들을 하나님께서 자기 손으로 야곱을 위해 이루실 줄 알게 되었습니다. 야곱 뿐 이겠습니까?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한 가정, 한 가정, 그리고 우리 교회를 위하여 같은 방식으로 역사 하실 것이기에 오늘날에도 우리에게 이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출처: 예장 서울노회 원문보기 글쓴이: 최정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