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풍부원군 윤택영(尹澤榮·1876~1935)씨
"해풍부원군 윤택영(尹澤榮·1876~1935)씨가 여러 가지 빚진 것으로 빚쟁이의 독촉을 받아 심히 곤란을 받고 있다는 것은 세상이 다 아는 바거니와, 근일에 들은즉 전후 곤란한 사정을 황제 폐하께 아뢰고 처분을 기다린다더라."(대한매일신보 1909년 5월 28일자)
윤택영은 순종의 장인이다. 장인이라곤 하지만 1876년생인 그는 1874년생인 순종보다 두살 어렸다. 오백년 사직이 풍전등화 같던 시기, 마지막 황제 순종은 하루가 멀다 하고 찾아와 "빚 갚아달라"고 보채는 철부지 장인의 등쌀에 시달렸다.
윤택영이 '빚의 제왕'으로 등극한 것은 190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해 황태자 순종의 태자비 민씨가 3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여러 가문에서 동궁계비(東宮繼妃) 책봉 운동을 벌였다. 윤택영도 이 대열에 가세했다.
'로비 자금'을 아낌없이 쏟아부은 덕분에 1906년 윤택영의 13세 난 셋째 딸(순정효황후·1894~1966)이 동궁계비로 책봉되었다. 황실과 사돈을 맺은 지 1년 만인 1907년 순종이 황제로 등극하자, 윤택영은 서른둘 새파랗게 젊은 나이에 국구(國舅·임금의 장인)가 되었다.
▲ 1906년 윤택영의 13세 난 셋째 딸(순정효황후·1894~1966)이 동궁계비로 책봉되었다. (결혼 축하의식 장면)
당시 국정의 실권은 일본인 손에 넘어가 한국인 관리들이 할 일은 많지 않았다. 허울뿐인 감투를 쓴 윤택영을 비롯한 한국인 고관대작들은 다른 일로 밤낮없이 분주했다.
"해풍부원군 윤택영, 황후궁대부 윤덕영, 중추원 고문 이지용, 심상익 등은 작일 하오 6시에 화월루에서 질탕히 연회를 벌리고, 10시에 동대문 안 광무대로 가서 또 한 번 놀았다더라."(대한매일신보 1907년 12월 5일자)
이 중 윤덕영은 윤택영의 친형으로, 훗날 고종에게 한일 강제병합의 결단을 요구하고 1910년 8월 22일 당일 순정효황후가 치마폭에 숨겼던 국새를 강제로 빼앗아 전권위임서에 도장을 찍게 한 인물이다. 세상 모르고 방탕하게 놀던 윤택영에게도 남모를 고민은 있었다. 바로 빚이었다.
신한민보(1909년 9월 1일자)는 "윤택영씨는 황후 폐하 가례(嘉禮) 시에 50만원 빚을 졌는데 황실에서 물어주기를 운동하다가 아니 되므로 장차 일본으로 건너가 운동코자 한다더라"고 보도할 정도였다.
빚 독촉에 시달리던 윤택영은 황제와 황후, 심지어 일본을 상대로 자기 빚을 대신 갚아달라고 매일같이 떼를 썼다. 그는 강제병합 이후 후작 작위를 얻고, 은사금 50만원을 지급받아 급한 채무를 상환했다.
그러나 그 후에도 닥치는 대로 빚을 얻어 호화생활에 탕진한 결과, 빚은 300만원까지 불어났다. 당시 서울 시내 고급주택 한 채가 1만원 정도였다. '채무왕(債務王)'이라는 별명을 얻은 윤택영은 1920년 빚 독촉을 이기지 못하고 베이징으로 줄행랑을 놓았다.
허랑방탕한 생활로 가산을 탕진한 조선귀족은 윤택영 외에도 조민희, 민형식 등 33명에 달했다. 총독부는 창복회(昌福會)라는 재단을 설립해 몰락한 조선귀족을 구제했다. 조선귀족에 몸서리친 것은 한국 민중이나 총독부나 마찬가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