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yphoid Mary-9】
2년 3개월에 걸쳐 소퍼와 파크는 강연과 논문 발표 등 왕성한 활동을 펼치며 의학계에서 명성과 악명을 동시에 얻었다.
그동안 메리는 자신의 오명을 씻고 퇴소 결정을 얻어 낼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1909년 6월 일요일 아침
메리는 ‘뉴욕 아메리카’ 일요판을 펼쳤다.
그리고 두 면 전체를 알록달록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는 자신의 이름과 자신과 흡사하게 그린 그림을 보았다.
“악의는 전혀 없으나 미국에서 가장 위험한 여자 ‘Typhoid Mary'
기괴한 곤경에 빠진 메리 앨런, 뉴욕의 격리 병원에 갇힌 수감자.
병 때문이 아니라 장티푸스균을 번식해서 가는 곳마다 뿌리고 다니는 탓“
자신이 앞치마를 입고 해골처럼 생긴 장티푸스균을 깨뜨려 프라이팬에 넣고 있는 커다란 삽화
자신이 병원 침상에 누워 있는 사진
큼지막한 특종 기사 제목 자리에서 행진하고 있는 자신에게 희생된 사람들의 실루엣 등이 실린 지면을,
메리는 눈이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일찌감치 메리 관련 기사를 터뜨렸던 ‘뉴욕 아메리칸’ 신문
또다시 최초로 메리 앨련의 신분을 공개한 신문
이 신문에는 소퍼가 학술대회에서 발표했던 논문이 실려 있었다.
그런데 제목이 ‘메리 앨런이 지나온 죽음과 질병의 기괴한 길’로 바뀌어 있었다.
그 논문 밑에 파크 박사가 쓴 글이 달려 있었다.
“그 불운한 여성을 치료하기 위해 온갖 방법을 시도해 봤지만 헛일이었다.
그러한 위협으로부터 시민을 안전하게 지키는 것이 보건 당국자들의 명백한 임무이다. “
메리가 오랫동안, 어쩌면 평생 동안 수감자가 될 것이라는 예측도 내놓았다.
담당 기자의 생각도 같았다.
“메리 앨런은 아마 평생 수감자가 될 것이다.”
그다음에는 동정적인 어조로 몇 마디 보탰다.
“그러나 그 여자는 어떤 범죄도 저지른 적이 없고, 부도덕하거나 사악한 행위로 비난받은 적도 없다.
징역형을 선고받기는커녕 죄인으로 법정에 서 본 일조차 없었다.”
34세의 변호사 조지 프랜시스 오닐
그도 ‘뉴욕 아메리칸’ 구독자였고, 메리 앨런 이야기를 다룬 일요판을 읽었다.
정황 증거만으로 메리를 수감하다니 터무니없다고 여겼다.
명백한 시민권 침해에 경악한 그는 메리 앨런의 법률 대리인을 자청하고 나섰다.
오닐 변호사는 메리에게 재판을 받을 기회를 마련해 줄 작정이었다.
그것은 수정 헌법 제 6조가 보장하는 권리였다.
오닐은 뉴욕주 대법원에 가서 인신 보호 영장 청구서를 제출했다.
그 영장이 발부되면 수감 기관 관계자는 반드시 법정에 출두하여 수감 사유를 밝혀야 했다.
오래 걸렸지만 마침내, 메리는 법정에서 재판을 받을 기회를 얻게 되었다.
메리는 신문 일요판에 자신의 이야기가 보도된 지 9일 만에, 구급차에 실려 끌려간 지 2년 4개월 만에
변호사와 함께 뉴욕주 대법원으로 향했다.
메리 앨런의 외모와 건강한 모습에 기자들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재판이 시작되었다.
오닐 변호사는 어떤 법으로도 메리의 체포와 수감을 정당화하지 못한다고 주장했다.
더 나아가 적법 절차에 의해 보호받을 메리의 권리도 박탈당했다고 주장했다.
보건국은 메리를 체포하고, 병실에 가두고, 본인의 동의 없이 표본을 채취할 권리가 전혀 없다는 사실도 지적했다.
마침내 메리에게도 자기편이 생겼다.
메리는 법정에서 이렇게 말했다.
“저는 아무런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는데, 사회에서 추방되어야 할 범죄자 취급을 받습니다.
기독교 사회에서 방어할 능력이 없는 여성을 이런 식으로 대우할 수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습니다.“
오닐은 법적으로 보건국이 메리를 계속 사두어 둘 수 없다는 주장을 펼쳤다.
오닐은 변론을 통해 다음과 같은 문제를 제기한 셈이다.
의사들은 얼마나 큰 권한을 가져야 하는가?
실험실 검사 결과에 얼마나 큰 비중을 두어야 하는가?
한 개인을 평생 격리하는데 의사들의 단순한 진술만으로도 충분한가?
실험실 검사 결과에 한 사람을 평생 격리할 만큼 큰 비중을 두어야 하는가?
메리가 체포당했던 1907년에 새로 발생한 장티푸스 사례로 보고된 것은 4,426건이었다.
원인을 밝히기 위해 경로를 역추적한 결과, 그중에서 메리가 일했던 집에서 발생한 사례는 2건뿐이었다.
오닐이 판단한 바로는, 메리에게 불리한 것은 정황 증거뿐이었다.
메리가 재판을 받고 있던 1909년 6월까지, 보건국은 뉴욕시에 거주하는 건강 보균자 5명을 이미 확인했다.
미국 전역에서 건강 보균자로 확인된 사람은 총 50명이었다.
그러나 격리자는 오직 한 사람, 메리뿐이었다.
오닐은 그 문제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리버사이드 병원 측의 대표자는 이렇게 해명했다.
“직업이 요리사였기 때문입니다. 그 환자는 위험한 사람이고 공중 보건 전반에 지속적인 위협을 가할 자라고
보건국은 결론 내렸던 것입니다.”
재판은 세 시간 동안 진행되었다.
흥미로운 사실은 아무도 메리에게 불리한 증언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심지어 딸을 잃은 바운 부부도 마찬가지였다.
재판이 끝난 뒤 메리는 격리 장소로 돌아가 판결 결과를 기다렸다.
메리에게 동정적인 신문 기사가 잇따라 보도되었다.
결혼 신청을 한 남자도 있었다.
재판이 끝난 지 3주가 지난 7월 16일에 판결 결과가 나왔다.
인신 보호 영장은 기각되었다.
메리를 구금한 것은 위법이 아니라는 게 내용이었다.
“본 재판부는 이 불행한 여성에게 깊은 동정심을 표합니다. 그러나 질병 확산의 재발로부터 공동체를 반드시 보호해야 합니다.”
메리는 ‘뉴욕 월드’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미국에는 두 종류의 정의가 있다. 살인자들에게조차 허용되는 무죄 추정의 원칙마저 나에게는 적용되지 않았다.” 】
2년 3개월에 걸쳐 소퍼와 파크는 강연과 논문 발표 등 왕성한 활동을 펼치며 의학계에서 명성과 악명을 동시에 얻었다.
그동안 메리는 자신의 오명을 씻고 퇴소 결정을 얻어 낼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1909년 6월 일요일 아침
메리는 ‘뉴욕 아메리카’ 일요판을 펼쳤다.
그리고 두 면 전체를 알록달록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는 자신의 이름과 자신과 흡사하게 그린 그림을 보았다.
“악의는 전혀 없으나 미국에서 가장 위험한 여자 ‘Typhoid Mary'
기괴한 곤경에 빠진 메리 앨런, 뉴욕의 격리 병원에 갇힌 수감자.
병 때문이 아니라 장티푸스균을 번식해서 가는 곳마다 뿌리고 다니는 탓“
자신이 앞치마를 입고 해골처럼 생긴 장티푸스균을 깨뜨려 프라이팬에 넣고 있는 커다란 삽화
자신이 병원 침상에 누워 있는 사진
큼지막한 특종 기사 제목 자리에서 행진하고 있는 자신에게 희생된 사람들의 실루엣 등이 실린 지면을,
메리는 눈이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일찌감치 메리 관련 기사를 터뜨렸던 ‘뉴욕 아메리칸’ 신문
또다시 최초로 메리 앨련의 신분을 공개한 신문
이 신문에는 소퍼가 학술대회에서 발표했던 논문이 실려 있었다.
그런데 제목이 ‘메리 앨런이 지나온 죽음과 질병의 기괴한 길’로 바뀌어 있었다.
그 논문 밑에 파크 박사가 쓴 글이 달려 있었다.
“그 불운한 여성을 치료하기 위해 온갖 방법을 시도해 봤지만 헛일이었다.
그러한 위협으로부터 시민을 안전하게 지키는 것이 보건 당국자들의 명백한 임무이다. “
메리가 오랫동안, 어쩌면 평생 동안 수감자가 될 것이라는 예측도 내놓았다.
담당 기자의 생각도 같았다.
“메리 앨런은 아마 평생 수감자가 될 것이다.”
그다음에는 동정적인 어조로 몇 마디 보탰다.
“그러나 그 여자는 어떤 범죄도 저지른 적이 없고, 부도덕하거나 사악한 행위로 비난받은 적도 없다.
징역형을 선고받기는 커녕 죄인으로 법정에 서 본 일조차 없었다.”
34세의 변호사 조지 프랜시스 오닐
그도 ‘뉴욕 아메리칸’ 구독자였고, 메리 앨런 이야기를 다룬 일요판을 읽었다.
정황 증거만으로 메리를 수감하다니 터무니없다고 여겼다.
명백한 시민권 침해에 경악한 그는 메리 앨런의 법률 대리인을 자청하고 나섰다.
오닐 변호사는 메리에게 재판을 받을 기회를 마련해 줄 작정이었다.
그것은 수정 헌법 제 6조가 보장하는 권리였다.
오닐은 뉴욕주 대법원에 가서 인신 보호 영장 청구서를 제출했다.
그 영장이 발부되면 수감 기관 관계자는 반드시 법정에 출두하여 수감 사유를 밝혀야 했다.
오래 걸렸지만 마침내, 메리는 법정에서 재판을 받을 기회를 얻게 되었다.
메리는 신문 일요판에 자신의 이야기가 보도된지 9일 만에, 구급차에 실려 끌려간 지 2년 4개월 만에 변호사와 함께 뉴욕주 대법원으로 향했다.
메리 앨런의 외모와 건강한 모습에 기자들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재판이 시작되었다.
오닐 변호사는 어떤 법으로도 메리의 체포와 수감을 정당화하지 못한다고 주장했다.
더 나아가 적법 절차에 의해 보호받을 메리의 권리도 박탈당했다고 주장했다.
보건국은 메리를 체포하고, 병실에 가두고, 본인의 동의 없이 표본을 채취할 권리가 전혀 없다는 사실도 지적했다.
마침내 메리에게도 자기편이 생겼다.
메리는 법정에서 이렇게 말했다.
“저는 아무런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는데, 사회에서 추방되어야 할 범죄자 취급을 받습니다.
기독교 사회에서 방어할 능력이 없는 여성을 이런 식으로 대우할 수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습니다.“
오닐은 법적으로 보건국이 메리를 계속 거두어 둘 수 없다는 주장을 펼쳤다.
오닐은 변론을 통해 다음과 같은 문제를 제기한 셈이다.
의사들은 얼마나 큰 권한을 가져야 하는가?
실험실 검사 결과에 얼마나 큰 비중을 두어야 하는가?
한 개인을 평생 격리하는데 의사들의 단순한 진술만으로도 충분한가?
실험실 검사 결과에 한 사람을 평생 격리할 만큼 큰 비중을 두어야 하는가?
메리가 체포당했던 1907년에 새로 발생한 장티푸스 사례로 보고된 것은 4,426건이었다.
원인을 밝히기 위해 경로를 역추적한 결과, 그중에서 메리가 일했던 집에서 발생한 사례는 2건뿐이었다.
오닐이 판단한 바로는, 메리에게 불리한 것은 정황 증거뿐이었다.
메리가 재판을 받고 있던 1909년 6월까지, 보건국은 뉴욕시에 거주하는 건강 보균자 5명을 이미 확인했다.
미국 전역에서 건강 보균자로 확인된 사람은 총 50명이었다.
그러나 격리자는 오직 한 사람, 메리뿐이었다.
오닐은 그 문제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리버사이드 병원 측의 대표자는 이렇게 해명했다.
“직업이 요리사였기 때문입니다. 그 환자는 위험한 사람이고 공중 보건 전반에 지속적인 위협을 가할 자라고 보건국은 결론 내렸던 것입니다.”
재판은 세 시간 동안 진행되었다.
흥미로운 사실은 아무도 메리에게 불리한 증언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심지어 딸을 잃은 바운 부부도 마찬가지였다.
재판이 끝난 뒤 메리는 격리 장소로 돌아가 판결 결과를 기다렸다.
메리에게 동정적인 신문 기사가 잇따라 보도되었다.
결혼 신청을 한 남자도 있었다.
재판이 끝난 지 3주가 지난 7월 16일에 판결 결과가 나왔다.
인신 보호 영장은 기각되었다.
메리를 구금한 것은 위법이 아니라는게 내용이었다.
“본 재판부는 이 불행한 여성에게 깊은 동정심을 표합니다. 그러나 질병 확산의 재발로부터 공동체를 반드시 보호해야 합니다.”
메리는 ‘뉴욕 월드’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미국에는 두 종류의 정의가 있다. 살인자들에게 조차 허용되는 무죄 추정의 원칙마저 나에게는 적용되지 않았다.”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