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밖으로 잔뜩 몸을 웅크린 사람들이 종종걸음으로 지나가고 있었다. 간간이 눈발이 날리고, 텅 빈 듯한 카페에는 부부인듯한 두 사람이 도란도란 나누는 이야기 소리만 들려왔다. 수수한 투피스를 입은 여자는 연신 무슨 말을 하고 말끔한 수트 차림의 머리칼이 희끗희끗한 남자는 하얀 이를 보이며 미소 짓고 있었다. 마주 앉은 두 사람의 모습을 보며 문득 오래전 어떤 부부가 연상되었다.
겨울의 끝자락이었다. 겨우내 집 안에서만 지내다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고 집으로 오던 길이었다. 날씨는 아직 쌀쌀한데 계절을 앞서가는 옷 가게는 벌써 화사한 봄옷들로 사람들을 부르고 있었다. 친구와 함께 들어간 옷 가게 안쪽 벽에 웬 겨울 코트 하나가 걸려 있었다. 고급스러운 검은색 여자 코트에는 완불이라는 메모지가 붙어 있었다. 내가 관심을 보이자 주인아주머니는 팔 수 없는 것이라고 하며, 지난가을 어느 중년 부부가 옷값을 미리 지불한 것이라고 했다. 길이가 길어 수선을 맡기고 곧 오겠다고 했는데 소식이 없다고 했다. 전화번호를 몰라 연락할 방법이 없다며 예사롭지 않은 일이라고 고개를 저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기에 그들은 겨울이 다 가도록 오지 않는 것일까? 사놓은 옷도 기억하지 못할 만큼 큰일이라도 생긴 걸까. 돌아가는 길에 같이 사고를 당한 것은 아닐까. 이런저런 상상을 하며 집에 와서도 그 일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 무렵 우리 집에도 주인 잃은 옷 한 벌이 있었다. 산책할 때 입을 남편의 새 운동복이었다. 입던 옷이 낡아서 오랜만에 마음먹고 장만해준 것이었다. 남편은 그 옷을 입어보지도 못했다. 잠깐 일을 보러 외출했다가 다시 돌아오지 못하고 말았으니….
남편은 무엇이 그리 바빴는지 추운 겨울을 앞둔 어느 날, 얇은 베옷 한 벌만 입고 서둘러 떠났다. 영정으로 쓸 시간조차 없었다. 딸아이 대학 졸업식 날 찍은 사진에서 남편만 오려내어 확대했다. 그런 날이 오리라는 생각도 못 하고 함께 찍은 마지막 가족사진이었다. 사진 속의 남편은 시동생의 반코트를, 나는 옆집에 사는 친구의 코트를 입고 있었다. 그날따라 갑자기 추워진 날씨 탓에 입을 옷이 마땅하지 않아 모두 빌려온 것이었다. 그래도 초라하다는 생각은 갖지 않았다. 잠시 삶의 우선순위가 바뀌었을 뿐이라고만 생각했다. 시부모님은 오랜 병석에 있었고 아픈 아들의 재활에 매달리고 있을 때였다. 옷을 사러 가거나 갖춰 입는 데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하지만 뒤늦게 사진을 보니 남편에게 너무 소홀했다는 자책이 들었다.
결혼할 때 시부모님이 해준 코트가 있었다. 남편은 양복점에서 나는 양장점에서 맞춰 입었다. 신혼 시절 엷은 갈색의 코트를 입고 출근하는 남편의 모습은 참 멋이 있었다. 그 옷을 체형이 변해 못 입을 때까지 남편은 즐겨 입었다. 올리브그린 색으로 종아리까지 내려오는 내 코트는 긴 허리띠가 있어 예쁜 리본도 묶을 수 있었다. 영화관에 가거나 친구들 결혼식이 있을 때는 남편과 같이 코트를 입고 집을 나섰다. 그럴 때면 무거운 시집살이도 내려놓고 날개라도 단 듯 걸으면 정말 따뜻해서 그대로 세상 끝까지라도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가 벗은 코트는 그때마다 꼼꼼한 남편의 팔에 걸려 있었다. 그런데 그 코트를 몇 번 입어보지도 못하고 그만 잃어버리고 말았다.
회갑을 맞은 친정어머니를 뵈러 남편보다 하루 먼저 내려가는 길이었다. 모처럼 친정 나들이에 한껏 들떠 있었다. 추워서 포대기로 아기를 업고 감싸 덮었던 코트를 아이에게 젖을 먹이면서 정류장 의자에 걸쳐두고 깜빡한 것이다. 버스를 타고 가다 한참 후에야 알아차리고 허둥지둥 다시 돌아가 보았지만 코트는 사라지고 없었다. 사람들에게 물어봐도 찾을 수 없었다.
다음 날 친정에 온 남편은 속상해하는 나를 애써 달랬다. 이미 잃어버린 걸 어쩌겠냐며 아무래도 더 필요한 사람이 입었나 보다며 그만 잊어버리라고 했다. 부모님께는 자신이 말할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하며 언제 새로 하나 사주겠다고 했다. 그러나 남편도 차마 부모님께 말을 못 하고 코트 사는 일도 차일피일 미루어지고 말았다.
한 사람이 없어졌는데도 집 안은 넓고 휑하기만 했다. 외출하기도 싫어 집 안에만 있었다. 보일러 온도를 올려보아도 한기는 여전했다. 싱거운 농담을 건네는 사람이 없으니 웃을 일도 없었다. 두꺼운 옷을 여러 겹 껴입어도 어쩌다 밖에 나가면 가슴으로 황소바람이 들어왔다. 남편을 잃어버린 사람이 나뿐인 것 같아 사람들을 만나면 창피해서 숨고 싶었다. 찬바람과 몸을 가릴 따뜻한 코트 생각이 절로 났다. 그동안 코트 없어도 추운 줄 모르고 잘 살지 않았던가. 그런데 혼자 견딜 겨울이 막막하기만 했다.
해마다 어김없이 겨울은 오고 추위가 계속되면, 어디선가 코트도 없이 떨고 있을 남편 생각이 났다. 그럴 때면 예전에 잃어버린 코트처럼 찾으러 갈 정류장이라도 있다면, 할 수만 있다면 다시 돌아가 찾아도 보고 거기 있는 사람들에게 물어보고도 싶었다. 그러다가 웬 부질없는 생각인가 하기도 했다.
여러 번의 겨울이 지나갔다. 장롱 속에 보관해두었던 남편의 헌 코트는 상표도 떼지 못한 운동복과 함께 새집으로 이사할 때 재활용함에 넣어두고 왔다. 그리고 마음에 걸려 사 입지 못했던 코트는 내 손으로 하나 마련했다. 아마 남편도 잘했다고 하지 않을까.
오지 않는 주인을 기다리던 코트가 있던 그 옷 가게는 이젠 카페로 바뀌었다.
오래 생각에 잠겨 있었는지 어느새 부부의 모습은 간데없고 앞자리는 비어 있었다. 마침 만나기로 한 친구가 눈을 털며 환한 얼굴로 가게 안을 들어서고 있었다. 그전까지 있던 부부의 모습은 잠시 내 눈에 비친 환영이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