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그분을 여러분에게 넘겨주면 나에게 무엇을 주실 작정입니까?(마태 26,15)” 유다 이스가리옷은 왜 이런 생각과 선택을 하였을까요? 무엇이 예수님보다 더 크고 중요했기에 그는 예수님을 팔아넘길 생각을 했을까요? 우리는 유다 이스가리옷을 ‘배신자’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에 대한 이해를 단순히 ‘배신(背信)’에 두지 않았습니다. ‘팔아넘김’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이 말 속에는 ‘이해타산과 합의’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유다의 이해타산과 합의 ‘끝’에는 예수님이 아닌 다른 그 무엇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 점에 주목하면서 지금 나의 신앙을 봅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느님과 ‘거래’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신앙을 순수하게 이루지 않고 조건부나 이해타산 아래에서 합의하여 주고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신앙은 사실 신앙이라고 말할 수 없으며, 하느님을 올바로 알아 믿고 있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구약성경을 통해서, 그리고 신약성경, 특별히 오늘 유다의 배신을 예고하는 자리인 최후 만찬 자리에서 하느님을 보게 됩니다.
성찬 전례문의 절정에서 사제를 통해서 바쳐지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해 봅시다. “받아먹어라.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주는 내 몸이다. 받아마셔라. 너희의 죄를 용서하기 위하여 흘리는 내 피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로서 당신을 온전히 우리에게 주십니다. ‘모든 이의 모든 것’이 되시는 분으로서 당신을 계시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유다는,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해타산과 합의 끝에 예수님이 아닌 다른 것이 있어 그것을 얻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참되고 영원한 것을 찾지 못하니 두렵고 불안하고, 두렵고 불안하니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것들을 붙잡으려고 합니다. 그것이 재물일 수 있고, 권력일 수 있고, 쾌락일 수도 있고 그밖에 그 무엇일 수 있습니다. 유다는 그것을 재물로 선택했을 뿐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제자들과 사람들의 불안과 두려움에 대해 예수님은 끊임없이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마태 14,27)” 하시며 불안과 두려움을 잠재우시려고 애쓰셨음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또한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입을까?’ 하며 걱정하지 마라. 이런 것들은 모두 다른 민족들이 애써 찾는 것이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함을 아신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마태 6,31-34)” 하시며 걱정과 근심의 노예로 살아가는 이들을 해방시켜 주시고자 하셨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예수님과 함께 3년이라는 시간 동안 동행하면서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자신의 생각에 묶여 예수님을 넘겨주는 대신 은전 서른 닢을 택했습니다.
이제 우리 자신에게 묻습니다. 일상에서 예수님을 대신해서 얻고자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께 대한 신앙의 조건으로 무엇을 얻고자 합니까? 예수님과 그분의 복음을 포기하면서까지 행하고 있고 얻으려고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리고 그렇게 해서 얻으려는 것이 여러분에게 무엇을 주고 있으며 그것이 얼마나 여러분을 영원불변에로 이끌어 주고 있습니까?
그러나 ‘주님의 종’과 예수님은 하느님의 말씀과 도우심을 확신하며 자신의 길을 끝까지 걸어갑니다. 그 길이 죽음마저도 거치는 길이지만 두려워하지 않고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마주합니다. 그 길의 끝에서 하느님의 영광을 마주할 것이고, 하느님을 만나 그분을 얻음으로써 모든 것을 얻을 수 있음을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아니겠지요?(마태 26,25)” 예수님께 물을 질문이 아니라 내 자신을 향해서 솔직하게 물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