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일본 유학 시절은 온통 붉은 색이었다.
내가 다녔던 학교를 동경 사람들은 아까몽(あかもん,赤門)이라 불렀다.
원래 도쿠카와 집안의 딸이 결혼할 때 지어준 건물의 일부라고 하는데 근처에 화재가 나서 모두 소실되고 이 문만 남았는데 동경대를 지을 때 부수긴 아깝다고 생각해서 이 문을 살려서 동경대 건물을 지었다고 한다.
그리고 일본 공산당 기관지인 적기(あかはた,赤旗)와 적군파(赤軍派), 그리고 내가 유일하게 좋아했던 일본 음식 참치 초밥의 붉은 빛의 살.
적군파는 극렬 학생운동 조직의 일부였다. 일본 공산당의 보수적인 활동에 불만을 품은 극좌 조직이 학생운동권에 침투하였다.
일본 적군파였던 시게노무 후사코가 1971년 팔레스타인과 레바논으로 건너가, 당시 PLO 의 한 분파였던 PFLP와 함께 대사관을 점거하고, 항공기 납치를 위해 이스라엘 벵그리온 공항에서 전투를 벌이다가 단 한명의 적군파를 남기고 전부 전사했다.
적군파의 지도자였던 시게노부 후사코는 PFLP 의 한 단원를 만나, 딸 메이를 출산했다.
그 중 일부가 동경대 의대에서 인턴 투쟁을 시작한 도쿄대 투쟁(속칭 도쿄대 분쟁)을 전개한다. 이 후 투쟁은 격화되어 1968년 3월 12일에는 의학부 총합중앙관을, 3월 27일에는 야스다 강당을 일시 점거하면서 다음날로 예정된 졸업식이 중지되었다.
의학부 학생이 야스다 강당을 점거하면서 결국에는 야스다 강당은 불타 버렸다.
나는 자전거를 타고 아까몽을 지나서, 외국인 유학생 가족을 위한 일본어 교실에 아내를 태워주고, 불타버린 야스다 강당의 작은 연못에 앉아 있곤 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적군파 지도자였던 시게노부 후사꼬와 그의 딸 메이를 생각했다.
赤旗는 내가 살던 학교 앞 다다미방 문틈 사이로 늘 끼워져 있었다.
처음 적기를 본 아내는 놀라서 부들부들 떨었다.
붉은 색 대신에 아내는 노란 색을 좋아했다.
학교에 심어져 있던 수백년 된 아름드리 은행나무의 노란색이 겨우 아내의 불안함을 잠재울 수 있었다.
가을이면 무릎까지 쌓인 은행잎 사이에서 열매를 골라 손질해서 후라이판에 구워서 일본주를 마시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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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세다 대학도 역사가 깊고 볼 것이 많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