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영화 한편을 감상하는 일은 훌륭한 문학작품 한 권 읽는 것만큼 감동적입니다. 특히 거의 60년 가까이 되는 명작 고전영화를 감상하는 일은 더욱 감회가 깊습니다. 특히 영화사를 빛낸 명감독과 명배우들의 솜씨와 연기로 빚어낸 전설적인 영화를 감상하는 일은 더욱 우리들의 가슴을 설레게 합니다. 영화산업의 메카라고 일컫는 할리우드에서 역사상 몇 안 되는 영화장인이라면 요즘 영화 팬들은 스티븐 스필버그나 제임스 카메론 같은 이름을 떠올릴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보다 전 세대에 활동했던 윌리엄 와일러는 이들보다 나으면 나았지 못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거장 윌리엄 와일러는 사회극, 대형 역사서사물, 로맨틱 코미디, 서부극 등 어느 장르건 장르를 넘나들며 최고 경지의 작품을 뽑아냈던 장인 중의 장인이었습니다.
* 아들의 참전과 관련해 골머리를 앓는 가족
그 윌리엄 와일러가 완숙기에 접어든 1956년에 발표한 영화가 바로 <우정 있는 설복> 입니다. 그의 널리 알려진 명작인 <우리 생애 최고의 해>, <로마의 휴일>, <벤허> 같은 명작들보다 덜 알려진 영화이지만 대단히 훌륭한 영화입니다. 이 영화는 윌리엄 와일러가 역시 완숙기에 접어든 당대 최고의 배우 게리 쿠퍼와 막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풋풋한 안소니 퍼킨스, 그리고 도로시 맥과이어를 기용해서 만든 명화입니다. 이 영화는 1957년도 칸느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하면서 기염을 토했습니다.
이 영화는 남북전쟁이 시작되던 1862년, 미국 남부 인디아나주 농촌의 어느 퀘이커교도 가족의 이야기입니다. 지극히 아름답고 평화로운 전원풍경이 펼쳐지지만 언제 전쟁의 불길이 닥필지 모릅니다. 가장 제시 버드웰(게리 쿠퍼 분), 아내 엘리자(도로시 맥과이어 분), 딸 베티, 큰아들 죠쉬(안소니 퍼킨스 분), 막내아들 리틀 제시는 평화롭고 행복한 일상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퀘이커교도는 예배와 외출 때에는 검은 정장을 입고, 상대를 호칭할 때는 ‘당신’ ‘너’라는 호칭 대신 ‘그대’라는 독특한 호칭을 사용합니다.“그대는 좋은 사람입니다.”“그대를 만나서 반갑습니다.”심지어 누가 시비를 걸거나 폭력을 휘둘러도 “난 그대에게 감정 없습니다. 난 그대를 용서합니다.”라고 하면서 그대로 얻어 맞아주기도 하는 독특한 종교입니다.
* 퀘이커 교도들의 예배장소를 찾아와 참전을 설득하는 북군 장교
그러한 퀘이커교도들에게도 남북전쟁의 검은 구름이 덮쳐오는 것을 막을 길이 없습니다. 그들에게 전쟁에 참전하느냐 마느냐는 엄청난 고민거리였습니다. 일단은 단호하게 사람을 죽여야 하는 전쟁에 참전할 수 없다고 거부하지만 남군이 점점 가까이 진격해오자 고민과 갈등이 깊어집니다. 하루는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는 도중 북군 소령이 뚜벅뚜벅 걸어 들어와 그들을 설득합니다. “북부는 2년 동안 참혹한 전쟁을 치러왔습니다. 우리 조국의 자유를 위하여 수만 명이 죽어갔습니다.”퀘이커교도 중 한 원로가 일어나 답합니다.“우리도 노예제도를 반대합니다. 하지만 한 명의 자유를 위하여 다른 이를 죽이는 것은 결코 옳지 않습니다.”
“이 전쟁은 자유나 원칙을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니라 우리 지역과 가정을 지키기 위해 싸우는 것입니다. 당신들을 위하여 다른 이들이 죽어가는 것을 보고만 있을 겁니까? 나쁜 뜻으로 하는 말은 아니지만 당신들은 전쟁을 외면하고 교회 벽 뒤에 숨어 지내는 것이 사실 아닙니까? 당신들을 위해 다른 이들이 죽게 놔두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요? 당신들의 생명과 재산을 위해서요?” 원로가 말합니다. “그 누구도 나에게 다른 사람들을 죽이라고 설득할 수 없소! 내 집을 공격하시오! 내 농작물을 파괴하시오! 내 가족을 공격하시오! 그래도 난 분명히 선언합니다. 아무도 나에게 폭력을 쓰도록 강요하지 못할 것이오!”
그 때 제시(게리 쿠퍼)가 일어나 자신의 심정을 토로합니다.“만약 누군가가 우리를 공격한다면 사실 어떻게 대처해야할지 나도 잘 모르겠소. 내 자신이 의문이오. 가끔씩 생각해보는데 만약 내 가족이 위험에 처한다면 난 과연 어떤 행동을 하게 될지 말이오.”
* 전쟁터로 떠나는 아들을 착잡한 심정으로 바라보는 어머니
그 날 이후로 제시의 아들 죠쉬는 점점 갈등과 고민에 빠집니다. 전쟁에 참여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가족과 주민이 위험에 빠지는 것을 그대로 보고만 있을 것인가?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지켜주기 위해 우리 대신 싸워주는 것을 무심히 보고 있는 것이 옳은 일일까? 죠쉬는 마침내 전쟁에 지원해서 가족과 지역을 지키는 일에 참여하는 것이 옳은 일이라고 가닥을 잡고 방위군에 지원하기로 결심합니다. 살인과 폭력을 반대하는 어머니는 간곡하게 반대하지만 아버지는 죠쉬에게 “네가 옳다고 판단하는 대로 결정하라.”고 아들의 참전을 막지 않습니다. 그리고 아내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저 애의 애비일 뿐 그의 양심도 아니며, 더구나 그 애의 인생 그 자체도 아니오. 따라서 나는 그를 붙잡을 수가 없소. 그의 인생의 주인은 그 자신이니까…….”
총을 한 번도 쏘아보지 못한 죠쉬는 방위군에 들어가 전투에 투입되지만 적군을 향해 총을 쏘는 일이 두렵기만 하고, 죄책감에 괴롭기만 합니다. 강을 건너오는 남군에게 어쩔 수 없이 총을 쏘면서 죄스러움과 미안함에 조쉬의 얼굴은 눈물범벅이 됩니다. 아들이 무사하기만 기원하던 부모는 아들이 타고 갔던 말이 집으로 달려오는 것을 보고 아들이 죽었거나 큰 부상을 당했나보다고 당황하며 어쩔 줄 모릅니다. 마침내 그토록 살인과 폭력을 원하지 않았던 아버지 제시는 총을 들고 아들을 찾겠다고 전쟁터로 달려갑니다.
* 평화로운 마을에 나타나는 남군, 아래는 막내 리틀 제사
시신들이 널브러진 격전지 강가에서 제시는 친구가 죽어가는 것을 발견하고 임종을 지켜보다가 남군 패잔병이 쏜 총이 빗나가 가까스로 위기를 모면하고, 그와 육탄전을 벌여 총을 빼앗지만 적군을 죽이지 않고 살려 보내는 등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마침내 부상으로 신음하고 있는 아들을 발견합니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죠쉬가 자기 앞에 죽어 있는 남군 시체의 손목을 부여잡고 “내가 죽였어요. 내가 죽였어요.”하며 펑펑 울기도 하는 가슴 뭉클한 장면을 연출하기도 합니다.이 영화는 이와 같이 무거운 주제를 담고 있지만 어둡거나 무겁지 않고 시종 밝고 유머가 넘쳐흐릅니다.
한편으로는 유머는 깊이와 품위가 있으며, 영화를 보는 내내 가슴이 훈훈해지고 입가에 미소가 가시지 않으면서 은근한 기품까지 느껴집니다. 이 영화의 재미는 이색적으로 거위 한 마리가 나와서 한 몫 단단히 합니다. 안주인이 애완용으로 기르는 거위가 막내아들과의 사이가 좋지 않아서 둘이 보기만하면 으르렁댑니다. 막내아들 리틀 제시가 나타나면 거위 사만다가 가만히 숨어 있다가 뒤에서 갑자기 습격해서 엉덩이를 물거나 종아리를 물고 늘어지고, 리틀 제시가 화가 나서 길길이 뛰며 욕을 퍼부으면 엄마가 나타나 거위 편을 들어줍니다. 그렇게 둘 사이는 앙숙입니다. 그러나 영화 마지막에 둘 사이에 화해가 이루어집니다. 어떻게 그렇게 똑똑한 거위가 있는지 신기하기만 합니다.
* 교회로 가는 길에서 친구네 가족과 항상 마차 경주가...
남군이 쳐들어와서 전쟁에 참전한 제시 집을 약탈할 때 안주인 엘리자는 그들에게 만찬을 베풀고 곳간에 있는 식량을 다 내주면서도 그들이 거위를 잡아먹으려고 하자 급한 마음에 빗자루를 휘둘러가며 거위를 해치지 못하게 하는 모습을 딸 베티와 막내아들 리틀 제시에게 들켜 말할 수 없이 민망해하는 대목도 재미있습니다. 나중에 아버지한테 엄마가 폭력을 휘둘렀다는 사실을 고자질하지 못하도록 사정했는데도 비밀이 지켜지지 않아 어쩔 줄 모르는 장면도 무척이나 유머러스합니다.
[ 세기의 명배우, 게리 쿠퍼 ]
쿠퍼는 미국 몬태나 주 헬레나에서 출생했습니다. 본명은 프랭크 제임스 쿠퍼입니다. 전성기 시절 '가장 미국적인 미남'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할리우드를 대표했던 미남배우였으며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2회 수상하기도 했던 명배우입니다. 또한 존 웨인과 함께 서부극을 상징하는 배우이기도 합니다.
영국에서 몇 년간 학교에 다녔으며, 대학은 아이오와주에서 나왔습니다. 졸업 후에는 잠시 만화가로 활동하기도 했으나 이내 때려치우고 이후 몇몇 영화에서 엑스트라로 출연한 것을 계기로 배우의 길을 걷게 됩니다.1927년 윌리엄 웰먼 감독의 무성 영화 <날개>에 화이트 생도 역으로 출연했는데, 이때 190센티미터가 넘는 큰 키와 잘생긴 얼굴로 강한 인상을 남겼습니다. 이후 1929년 <버지니아>에서 인상적인 서부극 연기를 선보였으며 1930년 <모로코>에서는 전설적인 여배우 마를레네 디트리히와 함께 출연해 드디어 스타덤에 오릅니다.
* <하이 눈>에서...
한때 쿠퍼는 가장 수입이 많은 스타였고 세금도 가장 많이 냈습니다. 쿠퍼는 일생동안 크고 작은 역 모두 합쳐서 115개의 영화에 출연했는데 대표작으로는 <요크 상사>, <하이 눈>, <무기여 잘 있거라>,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등이 있습니다. 특히 <요크 상사>와 <하이 눈>은 쿠퍼에게 2번이나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의 영광을 안겨주었습니다.<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주인공 레트 버틀러 역도 처음에는 게리 쿠퍼가 맡기로 되어 있었으나 대본을 본 쿠퍼가 단번에 거절했고, 이후 버틀러 역에 동갑내기 미남 배우 클라크 게이블이 낙점되자 쿠퍼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할리우드 역사상 최악의 실패작이 될 것이다. 그 실패작과 함께 몰락하는 게 내가 아닌 클라크 게이블이라서 다행이다."라고 씹어대기도 했습니다.
*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에서...
쿠퍼는 1933년 샌드라 쇼와 결혼하고 외동딸 마리아 쿠퍼를 두었습니다. 그는 많은 여배우들과 염문을 뿌렸던 플레이보이이기도 했는데 딸 마리아도 못 말리는 바람둥이 아버지에 대해 여러 번 구시렁거리기도 했습니다. 쿠퍼는 여성을 꼬시는데 단 세 마디면 충분했다고 합니다. "설마" "정말?" "처음 듣는 말인데"였습니다. 요컨대 이 세 마디 말이 의미하는 것은 그만큼 상대방 여성의 말을 성의껏 들어주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물론 쿠퍼가 장신에 미남인 것이 무시할 수는 없었겠지만. 이 세 마디는 본인이 직접 얘기한 건 아니고 옆에서 그를 쭉 지켜봤던 빌리 와일더 감독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고 합니다.
* <요크 상사>에서...
쿠퍼는 1960년 4월 자신의 전립선에 암이 생겼음을 알고 수술을 받았으나, 이미 폐와 뼈로 전이된 상황이었습니다. 이후 쿠퍼는 요양 생활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병세는 좀처럼 나아질 생각을 하지 않았고, 결국 1961년 5월 13일 쿠퍼는 이 세상을 하직했습니다. 쿠퍼가 암으로 투병중이라는 사실은 절친한 친구이자 배우였던 제임스 스튜어트가 쿠퍼를 대신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특별 공로상을 받던 중 "쿠퍼가 위중한 상태이다."라고 울먹이면서 알려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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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잘 보고 잘 읽고 잘 듣고 있습니다.. 좋은 글 감사 드림!!
팻분이 부르는 주제곡인 '내가 사랑하는 당신'이 참 좋네요. 이 노래 찾느라고 애를 좀
먹었는데...언제 들어도 구수한 팻분 목소리와 고전적인 냄새가 물씬 풍기는 멜로디가...
건승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