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기독교를 믿음의 종교라면 불교는 이해의 종교
예수님이 첫 번째 제자인 빌립을 거두는 방법은 놀랍다.
"나를 따르라" 한 마디 하니 빌립은 그냥 예수님을 따라나선다.
석가모니의 첫 번째 제자는 한 명이 아니라 다섯이었다.
그 다섯은 석가모니가 완전한 깨침을 얻기 전에 함께 수행하던 자들이었는데, 그들을 찾아가 며칠을 함께 살며 많은 토론을 거쳐 한 사람 또 한 사람.. 다섯이 모두 석가의 뜻을 이해하고 난 후 석가의 제자가 된다.
불교는 믿음이 아닌 이해의 종교라고 하는 이유다.
만일 다섯 사문이 끝내 존재를 넘어선 세계인 마음, 마음이 법임을 이해하지 못했더라면
석가는 세상에 불교 전하는 것을 포기했을지도 모른다.
한편 그 두 장면은 우리에게
예수와 제자 사이에는 물이 흐르듯 믿음이라는 이심전심이 보이고,
석가와 제자는 명료한 이해의 합일이라는 두 종교의 차이를 선명하게 보여준다.
기독교는 존재를 느끼는 감성을 소중히 여기고, 불교는 법을 이해하는 이성이 앞서고 있다고 할 수 있으리라.
특히 불교는 '없으면 말할 수 없다'는 철학의 존재론을 넘어선 이해를 요구하니 쉽지 않음이다.
석가모니가 당신이 깨친 법을 세상에 전하지 않고 침묵 속에 열반에 들려했던 이유도 '존재 지평선을 너머'였기 때문이다.
그 이해는 석가와 함께 수행했던 다섯 사문조차도 어렵다고 보았다.
왜 석가는 존재 세계를 넘어선 반야 지혜를 설해야만 했을까..
석가는 지금 여기서 일체 고를 멸하고자 출가하여 수행을 했다.
그런데 존재 세계에 머물고 있는 한 살아서 일체 고를 멸하는 것은 임파시블임을 확인했다.
하여 포기하려는 순간 반짝 떠오른 게 바로 존재를 넘어선 '그것'이었다.
'그것'은 그때까지 세상에는 전혀 알려진 바가 없었다.
'그것'을 표현하는 말로 처음으로 사용한 언어가 '법 dharma'이다.
그 당시 세상에서 알고 있는 법은 진리라는 뜻인데.. 깨치고 보니 일체가 진리인 법이었다.
그러니 선지식은 말한다. "산은 산(진리)이요, 물은 물(진리)이다"
그러나 일반인에게 '산은 산, 물은 물'이란 틀린 말이 아니지만, 유치한 언어 반복일 뿐으로, 그것을 진리라고 하면 비웃음이 나온다.
그런데 비웃지 못할 분위기라면?. 모르겠습니다 라고 실토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예수 제자라면 이심전심이 될 것이요, 석가 제자라면 이해와 통찰로 깨쳐야 한다.
그것을 돌아가신 베트남 팃낫한 스님은 숨 하나하나.. 발걸음 하나하나가 기적 아닌 것이 없기에.. 한 걸음 한걸음 걸을 때마다 기적을 경험하라고 한다. 진리는 세상 사람들에게는 기적이요 아름다움인가 보다.
기적이 되는 일체는 존재가 아니다. 그러기에 석가세존은 일체는 존재를 법 dharma이라고 했다.
산을 존재로 보는 자는 죽을 것이요, 산을 법으로 보는 자는 죽음에서 벗어나리라.
우리가 세상을 알 수 있는 것은 감촉이 있기 때문이다. 감촉은 감촉하는 자와 감촉되는 게 있다. 즉
보는 눈이 감촉하는 자라면 보이는 색은 감촉되는 대상이다.
석가모니 전에 성현들은 눈과 색을 존재로 보고 '눈으로 색을 보면 보았다는 안식이 생긴다'라고 가르쳤다.
당연하다. 눈으로 대상(색)을 보니 안식이 생긴다고 아는 것은..
그런데 석가는 깊은 통찰 속에 이와 같은 사실을 통찰했다.
'내 눈이 대상인 색을 보고 그것을 안다' 라고 생각하는 것의 실상은..
보았다는 안식이 생기면.. 이게 첫 번째다.
안식이 생긴 것은 보는 자[안입처]와 보이는 것[색입처]이 있기에 생긴 것으로 안다. 두 번째.
그런 후에 비로소 보는 자를 눈[안근]으로 알고, 보이는 것을 색[색경]으로 안다.
통찰이 없는 우리는 첫 번째와 두 번째를 인식못하고 세 번째 언저리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게 그거 아닌가!.
석가가 수행자가 되어 정신 공부인 명상법을 배웠는데.. 명상할 때는 일체 괴로움이 사라지지만 명상이 끝나고 깨어나면 다시 괴로움이 샘처럼 생기는 것을 보았다. 하여 명상법을 버리고 몸 수행인 고행을 시작했다.
만일 사람은 몸과 정신 2원적 존재라면 그 둘 수행을 완성하면 일체 고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여겼기에..
그런데 몸을 괴롭히는 고행 수행의 정점에서 닦고 있음에도 고행을 멈추면 천천히 괴로움이 다시 생겨났다. 하여 다시 고행을 더욱 열심히 하니.. 어느새 6년 고행이 흐르고 있었지만 여전히 괴로움은 생겨났다.
정신과 몸 수행을 끝까지 했는데.. 괴로움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왜일까?.
괴로움은 어디에 있는가?. 하며 세세히 관찰하니..
몸과 정신의 주인인 '나(자아)'라는 것에서 생기는 것임을 알았다.
그것은 당연한 것으로 부모에게 잉태되는 순간 생기는 게 인식은 못하더라도 자아라는 자요,
윤회론으로 보면 정자와 난자가 수정될 때 외부에 있던 업식이 합류해 세상에 내가 나오는 것이고,
그렇게 세상에 나오면 '나'는 늙고 병들다 결국 죽는 게 아닌가.
그런데 석가 수행자는 의심이 생겼다.
몸과 정신의 주인인 나는 부모에게 잉태되면서 생겨 존재하는 것인가?..
최고의 정신 수행인 명상과 고행으로 나의 실상을 알 수 없어 자리를 박차고 나아가 보리수 아래에서 나가 없다는 무아를 통찰했다.
잠재의식 속에 항상 존재한다고 믿는 자아가 없다는 무아를 깨치니, 누구든 수행을 하면 존재 세계에서 무아로 나아가는 길이 보였다.
2. 중용은 존재 세계에서, 중도는 마음 세계에서
불교의 또 하나 핵심 단어인 중도다. 그러기에 중도란 존재에서 존재를 벗어나는 길이요, 존재를 벗어난 자체가 된다.
그에 반해 중용이란 존재 세계 안에서 평안과 행복을 찾는 공자가 발견한 인류 최고의 지혜 가운데 하나다.
그러기에 존재 세계를 벗어난 중도와는 같을 수 없다.
석가모니가 처음으로 설했다는 내용 가운데 나오는 '고락중도'에서
고행이란 세상 삶을 괴로움으로 보고 벗어나려는 수행이요, 락행이란 쾌락주의라는 말이 있듯이 이란 세상 안에서 즐거움을 추구하는 삶이다.
그에 반해 중도 수행이라 하려면 일체는 존재가 아닌 마음을 연해 생긴 법임을 알고 수행하는 것이다.
고로 '고락중도'의 뜻은 중도는 존재 세계에서 행하는 고락이 아니다'라고 하는 것이다.
따라서 존재를 벗어나는 중도는 존재 사이에 행하는 중용이 아니라고 간절히 속삭이듯 말하는지 이해가 되는가..
세간.. 산은 산, 물은 물 -> 우리가 의지하고 살아가는 존재 세계
수행..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다 -> 존재 세계가 아닌 법 세계가 있음을 이해하고 법 세계로 나아감
아라한.. 산은 산, 물은 물.. 존재가 아닌 법을 깨닫고 깨침에 도달함이다.
반복하지만 중도는 중용과 다르다.
중도는 존재 세계를 넘어선 곳을 향하고 있기에..()..
[덧붙임]
1. 중도 수행을 하게 되면 <잡. 265. 포말경>에..
그때 세존께서 이 뜻을 거듭 펴기 위하여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색(色)은 모인 물방울 같고
수(受)는 물 위의 거품 같으며
상(想)은 봄날 아지랑이 같고
모든 행(行)은 파초와 같으며
모든 식(識)과 법(法)은 허깨비와 같다고 관찰하라.
태양 종족의 존자께서 이렇게 말하였느니라..().
그에 반해 중용 삶이란 세상 삶에서 좌와 우 가운데 어느 한쪽에 기울지 않아 자신은 평안하고 세상에 편안을 전하는 삶이 된다.
진흙탕 싸움에 비견되는 정치판에서 바른 정치인이라면 중용을 지키는 자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정치인들은 중용을 생각하면서 본인은 중도라고 소리 높이고 있으니.. 웃어야 할지 아니면 화를 내야 하는 건지..
2. 그림자는 무언가가 존재할 때 빛을 받아 생긴다. 중도는 중용이 있을 때 생긴다는 것인가?.
중용이란 본래 있는 게 아닌데.. 탐욕으로 존재화를 시키니 이것과 저것이 양극이 생기고 다툼이 일어나니
그것을 고르게 하려는 중용이 나타난다.
중도란 양극은 물론 중간이라 할 수 있는 중용 또한 없지만, 탐욕이 있어 존재로 드러나니 그림자가 생기듯..
중도는 그림자처럼 존재를 통해 통찰할 수 있지만
존재가 아니기에 그림자에 비유했다.
첫댓글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_()_()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