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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대학생들 중 6월 항쟁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이들이 80%에 이른다는 조사결과가 나오고 있다. 6월 항쟁은 이제 교과서 속에 남은 과거의 기억으로만 남았을까?
<민중의소리>는 97년 6월 월간 『말』특별부록에 게재된 6월항쟁의 기록을 다시 꺼내 사이트에 게재한다. 이 특집이 바라건데 젊은 세대들의 6월항쟁에 대한 재인식에 도움이 되길 기대한다.
* 기사에서의 '현시점'은 모두 97년을 의미한다. /편집자주 | | |
긴 겨울이 지나고 봄이 왔다. 한반도 남녘의 방방곡곡은 호헌철폐와 독재타도를 외치는 성토장으로 변했다. 사람들은 척박하고 눈물뿐인 마른 줄기에서 민주의 꽃을 피우기 위해 일어나기 시작했다. 정국은 어떤 계기와 조직적 구심만 생긴다면 곧 폭발할 기세였다.
87년 5월 18일 오후 6시 30분. 명동성당에서는 김수환 추기경의 집전으로 5.18 희생자 추모미사가 열리고 있었다. 미사가 끝난 오후 8시 30분.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사제단) 대표인 김승훈 신부가 단상에 올라가 떨리는 목소리로 성명서를 읽어내려가기 시작했다.
"박종철 군을 직접 고문하여 죽게 한 하수인은 따로 있다."
대성당을 가득 메운 2천여 명의 신도들은 깜짝 놀랐다. 한 수녀가 타자를 쳐서 사제단이 밤을 새우며 인쇄한 성명서 1천여 장이 돌려졌다. 일간지를 반으로 접은 크기의 성명서 맨 위쪽에는 '박종철 군 고문치사사건의 진상은 조작되었다'는 제목이 선명하게 인쇄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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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구현전국사제단 대표인 김승훈 신부가 87년 5월 18일 명동성당에서 박종철 고문치사 축소은폐조작을 폭로하고 있다. 이 폭로는 6월항쟁의 결정적인 동인이 된다. ⓒ박용수 제공 |
사제단의 폭로는 '유언비어'가 아니었다. 이 사건을 담당한 서울지검 검사들은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이는 안상수 한나라당 의원의 '박종철 사건 수사검사의 일기-이제야 마침표를 찍는다'에서도 소상하게 밝혀졌다.) 검찰은 5월 21일 사제단의 주장이 사실임을 마지 못해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순간에도 다시 한 번 파문의 축소를 기도했다. 황정웅 경위, 반금곤 경사, 이정호 경장 등 3명의 고문 경찰관을 구속하는 선에서 사건을 종결지으려 한 것이다.
그러나 손바닥으로 해를 가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법무부 검찰 고위 관계자 석달 전부터 '조작' 안듯"('동아일보' 5월 23일자) 등의 기사가 잇따라 터져 나오면서 여론이 악화되자 검찰은 수사주체를 서울지검에서 대검 중앙수사부로 바꾸었다. 그리고 5월 29일 박처원 치안감, 유정방 경정, 박원택 경정을 은폐조작 모의혐의로 구속하기에 이르렀다.
죽은 박종철이 산 장세동을 쫓아내다
진실이 세상에 알려지기까지는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우여곡절이 있었다. 박종철 군이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조사를 받다 고문으로 숨진 것은 1월 14일. 경찰은 처음에는 책상을 '탁'치니 '억'하고 쓰러졌다며 쇼크사로 발표했다. 그러나 부검에 참여한 황적준 씨의 증언과 언론의 추적보도로 타살이라는 사실이 밝혀지자 마지못해 고문에 의한 사망임을 시인했다. 조한경 경위와 강진규 경사가 고문치사 혐의로 영등포 교도소에 수감됐다. 마침 그 곳에는 86년 5.3 인천사태 배후주동혐의로 구속된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 사무처장 이부영 씨가 수감돼 있었다.
"두 경찰관은 우연히도 내가 있던 특별사동으로 배치됐다. 조한경은 찬송가만 부르며 지냈고, 강진규는 매일 울기만 했다. 뭔가 이상하다는 감을 잡았다. 그러던 중 그들이 면회 도중에 자신들은 억울하다는 말을 하더라는 이야기를 한 교도관으로부터 전해 듣고 뭔가 엄청난 것을 숨기고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양심적인 교도관을 통해 그들과 간접적인 대화를 하면서 검찰에 재수사를 요구하라고 설득했다."
그 효과는 당장 나타났다. 남영동 대공수사단의 상관들이 뻔질나게 면회를 왔다. 두 경찰관의 입을 막기 위해 면회를 오는 것이 분명했다. 면회내용은 교도관들을 통해 이부영 씨에게 속속 전해졌다. 동아일보 해직기자 출신인 그는 철저한 취재(?)를 통해 사건의 윤곽을 잡아 나갔다. 그리고 범인이 세 명 더 있다는 사실과 축소, 은폐 조작이 치밀한 각본에 의해 진행됐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이부영 씨는 2월 중순경 휴지조각 등에 이러한 사실을 깨알같이 적어 밖으로 내보냈다. 비밀쪽지는 전직 교도관 전병용 씨를 거쳐 김정남 씨(전 청와대 교문수석)에게 전달됐다. 이 때가 3월 초순. 이부영 씨를 숨겨줬다는 혐의로 수배 중이던 전병용 씨는 김정남 씨에게 쪽지를 전달하고 이틀 뒤 경찰에 붙잡혔다. 며칠만 늦었더라도 모든 일은 수포로 돌아갔을 것이다. 이부영 씨가 처음으로 밝힌 또 하나의 비사.
"바로 옆방에는 통일국시 발언으로 구속된 유성환 의원이 있었다. '감방동지'에게 차마 숨길 수 없어 사실을 말해 주었더니 3월로 예정된 재판에서 폭로하겠다고 했다. 다혈질인 그를 만류하느라 애를 먹어야 했다. 그가 만약 법정에서 폭로했다면 사건은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전개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한편 역촌동의 고영구 변호사 집에서 숨어 지내고 있던 김정남 씨는 비밀쪽지를 받아 보고 사건의 심각성을 직감했다. 그는 고 변호사와 상의하는 한편 이 씨의 메모를 완결된 형태로 재구성했다. 세상에 어떻게 알리느냐는 문제만이 남았다. 우선 5월 임시국회에서 폭로해 주기를 기대하며 통일민주당(민주당) 관계자들과 은밀히 접촉했다. 그러나 사안의 심각성에 부담을 느꼈던지 민주당은 거절했다. 결국 비밀쪽지는 사제단으로 전달됐다. 이 때 이부영 씨는 감옥 안에서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다.
"정권의 폭압통치가 절정에 이른 때여서 사실이 알려질 경우 자칫 보복을 당할 수도 있다고 보았다. 저들이 역추적을 하다 보면 옆방에 있는 나를 제일 먼저 의심할 것이 분명했다. 갇혀 있으니 도망도 못 가고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만이 아니라 도와준 사람들까지 고초를 겪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사제단의 폭로가 있기 20여일 전에 조한경과 강진규가 의정부교도소로 이감을 갔다."
아무도 말하지 않을 때 터져나온 한 장의 성명서가 정국의 물줄기를 완전히 바꿔버렸다. 구속, 수배, 고문, 연금, 폐쇄라는 강철군화로 재야를 무참하게 짓밟는 한편 야당을 궁지로 몰아넣으며 정국을 주도하던 군사정권은 하루아침에 수세에 몰렸다. 당시 이 폭로가 얼마나 정권에 부담이 되었는지는 다음과 같은 경찰의 출판물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여야 대립의 정치상황에서 어느 정도 중립을 견지하던 일반시민들이 박종철 군 사망 은폐조작사건의 발생으로 정부의 도덕성을 의심함으로써 동요하기 시작했고, 이는 호헌철폐 움직임에 엄청난 상승효과를 불러일으킨 것이다."(치안본부, '1987년, 그 격동과 경찰' 55쪽)
노신영 국무총리와 장세동 안기부장 등 강경파가 이 사건의 책임을 지고 경질되었다. 시중에는 "죽은 박종철이 산 장세동을 쫓아냈다"는 말이 돌기도 했다. 폭로의 여파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고립분산적으로 호헌반대 투쟁을 전개하던 야당과 재야가 이를 계기로 손을 잡은 것이다.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국민운동본부)의 출범은 바로 그 구체적인 성과물이다. 고문치사 은폐조작 폭로는 마른 섶과도 같은 정국에 던져진 하나의 불씨였다.
민청련, 5공화국 폭압 뚫고 첫 깃발 올려
"열사 앞에 살아 있는 우리들이 부끄럽다. 열사 앞에 우리의 고개를 자신 있게 들 수 없다. 처절하게 죽은 열사 앞에 살아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부끄러울 뿐이다."
전남사회문제연구소가 펴낸 '윤상원 평전:들불의 초상'은 '광주'에 대한 '원죄의식'을 이렇게 적고 있다. 6월항쟁의 출발점에 바로 광주가 있거니와 80년대는 '살아남은 자의 부끄러움'에서 시작되었다. 광주는 6월항쟁의 생장점이자 새싹이었다. 슬픔이 분노의 자양분이듯이 부끄러움은 새로운 다짐의 연료가 된다. 다음은 최장집 교수의 분석.
"(5월 광주는) 5공독재의 역사적 정통성을 박탈하고 변혁지향적인 민중운동의 등장과 반독재투쟁의 가속화에 도덕적이고 정서적인 기초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장래에 다가올 한국의 민주화과정에 거의 절대적인 변수가 되었다."
광주의 비극은 결코 패배만을 의미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전두환 정권은 어떤 시대였는가. 이돈명 변호사는 이렇게 짤막하게 답했다.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면서 유신정권 뺨치는 폭정이 시작됐다. '긴조시대'가 가고 '집시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감옥에 가는 것이 도리어 영광스러운 시대였다."
민족민주세력은 신군부의 군홧발에 짓밟힌 폐허에서 일어나 전두환 정권에 맨몸으로 맞섰다. 학생운동이 그 선봉에 섰다. 광주학살의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투쟁이 끊임없이 이어졌고, 많은 학생들이 감옥에 가고 군대에 끌려가고 그리고 죽었다. 박관현, 김태훈, 황정하, 문부식......'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역사의 수레바퀴를 굴리기 시작한 청춘들의 이름이다. 그들은 '변혁의 주체는 누구인가' '미국은 진정 우리의 우방인가'라는 화두를 던졌다.
84년에 접어들면서 군사정권은 물리적 강경책 대신 유화조치를 취하게 된다. 이에 따라 해직교수 86명과 제적학생 1천3백63명의 복직과 복학을 허용하는 학원자율화조치가 발표되었다. 학원에 상주하던 경찰 병력도 철수했다. 물론 여기에는 장영자, 이철희 어음사기사건 등을 계기로 드러난 집권층의 부패에 대한 민심이반의 해소. 84년 5월의 교황 방문과 86년 아시안게임 등과 관련한 국제적 이미지의 개선이라는 필요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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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항쟁의 도화선이 된 박종철의 죽음은 민주화를 요구하는 국민들의 투쟁으로 부활했다. 87년 초 추모제를 마친 서울대 학생들이 박종철의 영정을 들고 교문으로 나오고 있다. 영정을 들고 있는 주인공은 오현규씨(서울대 정치학과 85학번). ⓒ로이터 윤석봉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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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민주세력은 각 부문과 지역에서 조심스럽게 재기를 모색하던 역량을 모아 공개적인 연대조직을 구성하게 된다. 83년 9월 30일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이 깃발을 올렸다. 민청련의 출범은 사회운동 전반에 스며있던 패배감을 불식시켰고, 타 부문운동과 지역운동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다.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민가협) 결성과정에 대한 유시춘 씨의 증언.
"85년 7월 15일 서소문 대법정에서 미문화원 점거농성 학생들에 대한 재판이 열리던 날, 사상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 법정 안을 가득 채운 3백여 명의 어머니들이 '광주사태의 진상을 밝혀라' '독재정권의 하수인 사법부는 각성하라'고 외친 것이다. 재판은 아예 진행될 수 없었다. 어머니들의 '변신'에 재판부, 검사, 기관원들은 물론이고 변호사와 외신기자들도 놀랐다.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눈물을 흘리며 자식을 꾸짖고 반성문을 쓰라고 했던 사람들이 아닌가. 다음날 아침 법무부장관이 이 사건을 책임지고 물러났다."
어머니들의 여세를 몰아 85년 12월 28일 민가협을 발족시켰다. 민족민주세력이 가장 강력한 별동대를 얻는 순간이었다. 민가협 초대의장은 강영목(강길호 부친) 김춘옥(김민석 모친) 이소선(전태일 모친) 이정숙(이태복 모친) 이청자(이 춘 모친) 장수향(안재구 부인) 조만조(이 철 장모) 씨 등 7명이다.
민통련은 깨고 신민당은 회유하라?
민청련 결성 이후 우후죽순처럼 결성된 부문조직은 해직교수협의회, 한국노동자복지협의회(노협), 민족문화운동협의회(민문협), 민주언론운동협의회(언협), 민중민주운동협의회(민민협), 민주통일국민회의(국민회의), 민중불교운동연합(민불련), 서울노동운동연합(서노련), 인천지역노동자연맹(인노련), 민주교육실천협의회(민교협), 한국출판문화운동협의회 등이다. 지방에서도 전북민주화운동협의회, 전남민주청년협의회, 인천지역사회운동연합(인사련) 등이 속속 결성됐다. 그리고 마침내 각 부문운동과 지역운동을 총결집한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 의장 문익환)이 85년 3월 29일 출범한다. 민족민주세력이 군사정권의 가장 강력한 대항세력으로 부상한 것이다.
폭압통치로도 억누를 수 없는 도도한 민심을 바탕으로 민족민주세력이 역량을 강화하며 반독재투쟁을 전개하자 그 동안 숨죽이고 있던 야당세력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광주항쟁 3주년이 되는 83년 5월 18일 연금상태이던 김영삼 씨가 민주화를 요구하며 단식투쟁을 시작했다. 미국에서 망명 중이던 김대중 씨가 즉각 적극적인 지지의사를 표명했다. 잇따라 8월 15일 민주화 공동성명을 발표한 두 사람은 이듬해인 84년 5월 18일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을 결성하기에 이르렀다.
민추협을 중심으로 세를 규합하며 전두환 정권에 맞서던 두 김씨는 85년 2.12총선을 불과 한 달도 남겨 두지 않고 신한민주당(신민당)을 결성했다. 민한당, 국민당과 같은 이른바 2중대 야당을 통해서는 군사정권에 대항할 수 없다는 것을 일찌감치 깨달은 민심은 신민당을 지지했다. 총선을 4일 앞두고 결행된 김대중 씨의 귀국은 신민당 돌풍에 열기를 더해 주었다. 정치규제에 묶여 있던 두 김씨 대신 총재를 맡은 이민우 씨가 출마한 정치 1번지 종로, 중구 선거구는 2.12총선의 뇌관이었다. 구 서울고 운동장에서 합동유세가 있던 날을 6월항쟁추위 자료편찬위원장이 안병욱 교수(가톨릭대 사학과)는 이렇게 증언한다.
"광화문 지하도에서 나와 주변을 두리번거릴 때만 해도 '전두환 정권의 정치쇼에 들러리를 서는 것은 아닐까'라는 회의감에 젖어 있었다. 그러나 한 발짝씩 걸을 때마다 예상은 빗나갔다. 한명 두명 보이던 사람들은 곧 거대한 인파를 이루었고 유세장에 도착할 무렵에는 인파에 밀려서 걸어야 했다. 담장을 넘어 유세장이 한눈에 들어오는 언덕에 올라서자 연단을 향한 10만 인파의 까만 뒤통수가 마치 운동장에 연탄가루를 부어 놓은 것처럼 보였다. 민정당 후보가 시민 학생들의 일방적인 야유에 혼이 난 채 연단을 내려가자 야당 후보들은 선명경쟁에 들어갔다. 그들은 당시만 하더라도 금기시되던 광주문제까지 제기했다. 아무도 제동을 걸 수 없었다. 마지막 후보자는 군화를 가지고 올라와 연단에 내동댕이치며 군사독재를 질타했다."
안병욱 교수는 그 날의 3시간 대드라마를 연출한 사람들은 야당 후보들이 아니었다고 말한다. 평소 복덕방이나 구멍가게를 지키던 서민들이 실질적인 주역들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민심의 바다를 만들어 절대 권력자에게 민중이 아직 죽지 않고 살아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또한 민심의 바다는 패배주의에 젖어 있던 민족민주세력을 반성하게 했다.
민심은 5.16 이후 최고의 투표율(84.2%)을 기록하며 언론의 예상을 뒤엎고 신민당에 실질적인 승리(지역구의 경우 민정당 87석, 신민당 50석, 민한당 26석, 국민당 15석)를 안겨 주었다. 제1야당으로 부상한 신민당은 여기에 머무르지 않고 85년 초까지 무소속과 민한당 소속 당선자들을 대거 흡수해 1백3석이라는 해방 이후 최다의석의 강성야당으로 발돋움했다.
대공분실 요원의 호언 "이제 재야를 다 평정했다"
민족민주세력이 민통련을 중심으로 결집하고 야당세력이 제1야당으로 원내에 진입하자 전두환 정권에 대한 투쟁이 본격적으로 전개됐다. 광주학살의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재야와 야당의 공동투쟁이 불붙기 시작할 무렵인 85년 5월 23일 함운경 서울대 삼민투 위원장 등 전학련(의장 김민석) 소속 대학생 73명이 서울 미문화원을 점거한 채 농성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80년 광주 미문화원 방화사건, 82년 부산 미문화원 사건의 연속선상에 놓여있는 이 사건으로 미국의 개입과정 등 광주학살의 실상이 국내외에 폭로되었으며 국민의 민주화 열망을 짓밟고 쿠데타를 통해 집권한 전두환 정권의 정통성을 위협하기에 이른다.
83년 말에 전개된 블랙리스트 철폐운동과 84년 청계피복노조 합법성쟁취투쟁으로 가열되기 시작한 노동운동도 85년에 이르러 더욱 뜨거워졌다. 10여 일간의 파업투쟁과 10개 사업장 2천5백여 명이 참여한 6월의 구로동맹파업은 그 절정이었다. 농민들의 수세싸움과 소몰이투쟁도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전두환 정권에 대한 반대투쟁이 이제는 기층민중으로까지 확산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위기의식을 느낀 전두환 정권은 유화정책을 완전히 포기하고 민족민주세력에 대한 강력한 탄압으로 응수했다. 이른바 삼민투 사건을 조작해 학생운동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선풍을 일으키고 학원안정법을 제정하여 학생운동을 원천적으로 봉쇄하려는 음모를 꾸민 것이다. 탄압은 파상적으로 이어졌다. 김근태 민청련 의장 고문사건, 민중교육사건, '창작과 비평' 등록취소사건...... 재야와 야당은 '학원안정법반대투쟁 전국위원회'와 '민주화운동에 대한 고문수사 및 용공조작대책위원회'(고문공대위)를 만들어 대항했다.
86년은 3천4백여 명에 달하는 구속자와 김세진, 이재호 군 분신투쟁 등이 상징하듯 어느 때보다 반독재투쟁이 치열하게 전개된 해였다. 내무부가 국회에 보고한 자료에 의하면 1월부터 10월까지 발생한 학생시위는 모두 1천6백97건. 전국에서 하루 평균 5~6건의 교내외 시위가 있었던 것이다. 부천서 성고문사건을 통해 군사정권의 폭력성과 부도덕성이 다시 한 번 폭로됐고, 지식인들의 개헌촉구 시국선언이 연쇄적으로 발표됐다.
86년 전반기까지 군사독재정권에 대한 국민의 염증과 신민당의 개헌 현판식에서 분출한 민심에 힘입어 국면을 주도하던 민족민주세력은 점차 어려운 상황을 맞게 된다. 주요한 원인은 정권의 노골적인 탄압과 분열공작이었지만 개헌운동의 내용과 방식에 대한 내부의 차이와 야당과의 분열을 극복하지 못한 주체적 요인도 컸다. 6월항쟁 범추위 사무총장을 맡고 있는 황인성 씨(당시 한국기독학생총연맹 총무)의 증언.
"86년 3월 11일 '민주화를 위한 국민연락기구'(민국련)를 구성해 개헌투쟁을 전개하던 재야와 야당은 4월 29일 모임에서 신민당이 반미, 반핵논리를 지지할 수 없다는 입장을 천명하면서 결정적으로 등을 돌렸다. 5.3인천투쟁은 야당과 재야가 분열된 상황에서 나온 필연적 산물이었다. 정권의 대대적인 공안탄압과 재야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자 하는 야당의 태도가 맞물려 이후의 개헌 현판식은 흐지부지됐고, 신민당은 결국 국회로 들어갔다."
5.3인천투쟁의 여파로 재야에 대한 강도 높은 탄압이 가해지면서 문익환 의장, 강희남 대의원총회 의장, 백기완, 이창복 부의장, 이부영 사무처장, 장기표 정책연구실장, 김정환 대변인, 장영달 총무국장 등 민통련 간부 전원이 구속되었다. 나머지 간부들도 대부분 수배당했다. 85년 말 언협 사무국장을 그만둔 성유보 씨는 민통련의 명맥이라도 유지해 달라는 이창복 씨의 부탁을 받고 86년 6월 사무처장을 맡았다고 한다. 성유보 씨의 증언.
"10월 28일 건국대사건이 터졌을 때 재야는 무인지경이었다. 성명서를 내는 단체조차 거의 없었다. 한 달 정도가 지난 뒤에야 민통련이 성명서를 냈는데 이를 빌미로 수백 명의 전경이 장충동 분도회관에 있던 민통련 사무실을 봉쇄했다. 계훈제 부의장, 김인환 동아투위 위원장 등 30여 명과 철문을 닫고 며칠 동안 농성을 했다. 5일 정도 지나자 경찰이 새벽에 용접기로 철문을 부수고 들이닥쳤다. 수많은 재야인사들이 고문을 당한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로 연행되어 일주일 동안 조사를 받았다. 그 때 담당 형사가 했던 말을 잊을 수 없다."
담당 형사는 김근태, 이부영 등 민통련 간부들의 산더미 같은 조서를 보여 주면서 성유보 씨에게 자신 있게 말했다. "우리가 이제 재야를 다 평정했다"라고. 그는 6월항쟁이라는 거대한 해일이 몰려오고 있다는 것을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86년 겨울은 새봄이 오기 전까지 유난히 춥고 지루했다.
각계각층 저항 부른 최대 악수 4.13호헌조치
87년 벽두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한 박종철 군 고문치사사건은 전두환 정권의 말기적 현상이었다. 비보를 접한 국민들은 놀라고 슬퍼하고 분노했다. 그리고 마침내 궐기했다. 유시춘 씨의 증언.
"김근태 씨 고문사건, 권인숙 양 성고문사건 등이 잇따라 터지는 것을 지켜보며 '이러다가 저것들이 필경 사람을 죽이고 말지......'라는 예감을 떨칠 수 없었다. 그 예감은 적중했다. 박종철 군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고문에 의한 죽음이라고 확신했다. 민가협은 제일 먼저 남영동 대공분실로 달려가 시위를 했다. 몽땅 용산경찰서로 연행되어 구류를 받았지만 우리는 목이 터져라 외쳤다. '전두환 정권은 반드시 망한다'라고."
기소유예로 풀려난 뒤 동료들의 옥바라지를 하다 소식을 들은 성유보 씨는 처음엔 막막함을 느꼈다. 정권의 가혹한 탄압에 재야는 진이 다 빠진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저앉아 있을 수는 없었다. 정의구현전국사제단, NCC 인권위, 불교계, 변호사, 해직교수 등과 만나 고문치사 규탄대회를 열기로 합의했다. 실무자들은 대회를 준비하면서 일반시민들이 공감하고 참여할 수 있는 방식에 대해 많은 고민을 했다. 화염병이나 돌멩이 투석 등과 같은 이전의 방식을 지양하고 평화적인 시위방식을 택했다. 그 방침은 확고하게 지켜졌고 6.10대회에서 더욱 풍부하게 원용되었다.
졸속으로(?) 준비했지만 2.7 국민대회는 시민들이 가세하기 시작한 것을 처음으로 느낄 수 있었던 좋은 기회가 되었다. 3.3 평화대행진도 기대 이상으로 치러졌다. 한편 두 대회를 주도한 혐의로 뒤늦게 당국의 수배를 받게 된 성유보 씨는 잠수함 생활을 하던 중 4.13호헌조치를 들었다. 그의 증언.
"그때서야 재야와 학생들에 대한 엄청난 탄압이 4.13호헌조치를 위한 사전 정지작업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정권은 어느 정도 물리력과 동원력을 갖춘 학생운동과 민통련을 집중적으로 폭격하는 대신에 야당에 대해서는 회유와 협박을 병행하는 이중전략을 썼던 것이다."
4.13호헌선언의 배경과 관련한 또 하나의 흥미 있는 비사가 있다. 87년 4월 초 민통련 간부 박우섭 씨는 미대사관 스티븐스 참사관으로부터 만나자는 연락을 받았다. 말하자면 스티븐스 참사관은 미국 대사관의 '재야담당'. 가끔씩 그녀와 공식적인 만남을 가져온 터라 박씨는 거부하지 않았다.
"그녀는 2.7, 3.3대회를 거치면서 국민의 저항을 물리력으로 제압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정부가 오히려 얻은 것으로 보이며 자신도 같은 견해라고 말했다. 전두환 정권이 양보보다는 강공으로 나올 것이니 알아서 기라는 메시지였다. 당시의 상황에서 물론 현상적으로는 맞는 말일 수도 있었다. 두 대회 모두 공식적으로는 경찰력에 의해 무산된 것이 사실이었으니까. 그러나 그들은 정작 밑에서부터 분출하기 시작한 대중의 힘을 발견하지는 못했다."
전두환 정권은 정말 6월항쟁의 전주곡이었던 2.7, 3.3대회에서 아무런 징후를 느끼지 못했던 것일까. 그래서 자신 있게 4.13호헌선언을 내놓은 것일까. 사실여부를 확인할 길은 없지만 분명한 것은 하나 있다. 호헌선언이 최대의 악수(惡手)였다는 점이다. 이를 계기로 신부, 목사, 교수, 교사, 문인, 법조인, 의료인 등 각계각층에서 호헌철폐와 민주개헌을 요구하는 성명이 쏟아져 나왔다.
한편 전국경제인연합회, 한국반공연맹 등은 4.13호헌선언을 지지하고 나섰다. 관제성 지지성명은 한국문인협회와 한국노총에서도 나왔다. 특히 4.13호헌선언이 나온지 열흘 뒤 한국노총은 '구국의 결단을 환영한다'는 지지성명을 냈다. 그 때 당시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반란이 발생했다. 5월 6일 한국노총 산하 금융노련 제2금융권 노조대표 20여 명이 이에 대한 반박성명을 낸 것이다. 그들은 성명서를 통해 "현 정권은 비민주적 작태를 그만두고 호헌을 철폐하라"고 외쳤다. 그것은 6월항쟁 당시 거리를 가득 메웠던 이른바 '넥타이 부대'의 출현을 예고하는 서곡이었다. 성명을 주도했던 노조 대표 중 한 사람인 정일영 씨의 증언.
"노총의 성명은 정부의 일방적 요구에 따른 것으로 전체 조합원의 견해로 볼 수 없으니 즉각 철회하라는 것이 우리의 요구였다. 그 뒤 남해어망, 삼정펄프 등 제조업체 노조에서도 잇따라 호헌에 반대하는 성명을 냈다. 우리는 그 작은 성명서 하나가 그렇게 큰 파문을 일으킬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마른 줄기에서 피어나는 꽃이 되어라
"결코 누구에게도 빼앗길 수 없는 우리의 동지여/마침내 그날/우리 모두가 해방춤을 추게 될 그 날/척박한 이 땅 마른 줄기에서 피어나는/눈물뿐인 이 나라의 꽃이 되어라."
87년 1월 20일 박종철 군 추모제에서 한 여학생이 낭송한 추모시 '우리는 결코 너를 빼앗길 수 없다'의 마지막 구절이다. 이 시 구절처럼 80년대의 긴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자 한반도 남녘의 방방곡곡이 호헌철폐와 독재타도를 주장하는 성토장으로 변했다. 사람들은 '척박하고 눈물뿐인 마른 줄기'에서 '민주주의의 꽃'을 피우기 위해 일어나기 시작했다. 정국은 어떤 계기와 조직적 구심만 생긴다면 곧 폭발할 기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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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 5월에서 87년 6월까지 1980.5.17/비상계엄령 전국 확대.5.18/광주민중항쟁 발생. 5.31/국가보위비상대책위 설치. 8.16/최규하 대통령 하야. 9.1/전두환 11대 대통령 취임. 11.14/언론통폐합 조치 발표. 1981.1.15/민주정의당 창당. 3.3/전두환 12대 대통령 취임. 3.25/11대 국회의원 선거. 9.30/제24회 하계올림픽 서울개최 결정. 1982.1.5/야간통금 전면해제. 3.18/부산미문화원 방화사건. 4.26/의령 우 순경 총기난사사건. 5.7/장영자, 이철희 어음사기사건. 7./일본 역사교과서 왜곡사건. 1983.8.17/명성그룹사건. 9.1/KAL항공기 격추사건. 9.30/민주화운동청년연합 결성. 10.9/버마 아웅산묘소 폭발사건. 12.21/해직교수 복직과 제적생 복교 허용. 1984.5.18/민주화추진협의회 발족. 6.29/정래혁 국회의장 부정축재사건. 9.6/전두환 대통령 일본 방문. 11.14/대학생 민정당사 점거농성. 1985.1.18/신한민주당 창당. 2.12/12대 총선과 신민당 돌풍. 3.29/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결성. 4.16/대우자동차 파업. 5.23/대학생 서울미문화원 점거농성. 6.24/구로동맹파업 발생. 1986.2.12/신민당 민추협 주최 1천만 개헌추진서명운동 돌입. 3.17/재야, 야당 민주화를 위한 국민연락기구 결성. 4.28/김세진, 이재호 분신자살. 5.3/5.3인천사태 발생. 5.27/김대중, 김영삼 헌특위 참여선언. 7.2/부천서 성고문 사건 폭로. 10.14/유성환 의원 통일국시 발언사건. 9.29/민주당 헌특위 불참선언. 10.28/건국대 애학투련 사건 발생. 12.24/이민우 구상 발표. 1987.1.14/박종철 고문치사사건. 4.13/전두환 대통령 호헌조치 발표. 5.1/통일민주당 창당. 5.18/정의구현사제단 박종철 고문살인 은폐조작 폭로. 5.27/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 발족. 6.9/이한열 최루탄 부상. 6.10/민정당 대통령 후보 지명대회. 박종철 고문살인 은폐조작 규탄과 호헌철폐 국민대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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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의 사람들/박종철 추모시 쓴 장지희 씨
종철이에게 부끄럽지 않은 삶 살고 있나?
"오늘 우리는 뜨거운 눈물을 삼키며 솟아오르는 분노의 주먹을 쥔다." 1월 20일 서울대 교정에서 박종철 군 추모제가 열리던 날 사람들은 한 여학생의 가냘픈 목소리를 통해 울려퍼지던 '우리는 결코 너를 빼앗길 수 없다'라는 제목의 추모시를 들으며 모두 울었다.
모든 사람을 울리고, 모든 사람에게 두 주먹 불끈 쥐게 만들었던 그 시를 쓰고 낭독한 '언어학과 여학생'은 바로 박종철 군의 학과 선배인 장지희 씨(33). "학과 사무실에 마련된 빈소에서 밤을 지새며 시를 썼다"고 회고하는 그녀는 "지금도 내가 직접 썼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고 말한다. 종철이를 사랑하고 그 시대를 아파했던 모든 이들의 마음이 함께 그 시를 썼다는 것이 그녀의 확신이다.
10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그녀는 같은 학과 동기와 결혼했고, 일곱살 난 아들과 세살배기 딸을 둔 평범한 가정주부가 되었다. 가정주부라고 해서 학생시절 간직했던 뜻이 쉽게 잊혀질 리 없다. 박종철 군의 생일인 4월 1일이 돌아올 때마다 부끄럽지 않게 살고 있는지 항상 되돌아본다는 장지희 씨의 고백이 어디 그 혼자만의 것이겠는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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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의 사람들/'넥타이 부대' 주역 정일영 씨
넥타이 풀 각오하고 호헌반대 성명 발표
한국노총이 4.14호헌조치 지지성명을 낸 것은 87년 4월 23일. 일단의 노동자들이 이를 비판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그들은 한국노총의 어용성을 지적했고 호헌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성명발표 주도자 중 한 사람이었던 정일영 씨(41. 당시 한일투자금융 노조위원장).
그는 민주노총 출범을 앞두고 한국노총에서 탈퇴한 보험연맹과 사무금융노련을 합쳐 전국사무노련으로 발족시킨 산파의 일원이기도 하다. "정치문제에 관한 한 노동운동에 대한 공안당국의 탄압이 노골적이었고 제3자개입 금지조항의 서슬이 시퍼렇던 상황이었다. 더욱이 보수적 성향이 강한 금융권 노조 분위기에서 정권에 정면으로 맞서는 성명을 낸다는 것은 그 때까지 상상할 수도 없던 일이었다."
이런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계기는 당시 LG화재 쟁의부장이었던 이상재 씨의 복직투쟁 승리. 86년 12월 31일 이씨가 해직당하자 동료들은 모두 넥타이를 풀 각오를 하고 금융노련 사무실 점거농성에 들어갔고 곧 복직 약속을 받아냈다. 이 작은 승리는 양심적인 한국노총 실무자들까지 기뻐할 정도로 고무적인 사건이었다. 그 여세를 몰아 한국노총 어용성명이 발표되자 13개 조합의 노동자 20여명이 반대서명을 전개했던 것이다.
6월 20일 가리봉 오거리 시위 등 6월항쟁 내내 선두에 섰던 이들은 '5.8선언 동지회'라는 모임을 만들어 오늘도 그 날의 뜻을 기리고 있다. | | |
월간 말 정지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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