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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진의 중갑기병 투구 1부 (여진군을 창과 활로 죽이는 것은 불가하다) http://cafe.naver.com/booheong/88903
링크를 참고하시면 더욱 흥미로울 듯싶습니다.^^ ---------------------------------------------------------------- 여진 거란을 멸하다 3부 - 여진군의 전투 방식 http://cafe.naver.com/booheong/85824 송나라 병사 2천 vs 여진 기병 17기 그 처절한 패배 http://cafe.naver.com/booheong/87600 여진놈은 때려야 한다. 타여진(打女真) http://cafe.naver.com/booheong/85485 1126년1월 금군 1차 [개봉포위병력]과 [송근왕병]의 규모 http://cafe.naver.com/booheong/86934 무슨 여진족이 용, 호랑이, 물개, 원숭이냐? http://cafe.naver.com/booheong/87535 투구 따윈! 아골타 (만화) http://cafe.naver.com/booheong/88632 ----------------------------------------------------------------
일전에도 한번 소개해 드린 적이 있는데요. 여진군의 1모극 100명 중에 중갑기병의 비율이 40명으로 40%에 이릅니다. 본시 여진이 살고 있던 지역에는 철이 거의 생산되지 않아 갑주가 매우 귀했다고 금사에 기록되어 있는데요, 금사 태조 이전의 기록에도 갑주 90벌 때문에 부족 간에 전쟁이 벌어지기도 하였습니다.
여진군이 본격적으로 무장을 하게 된 계기는 1102년 요의 소해리가 반란을 일으켜 여진 지역으로 도주한 후 완안부가 이를 진압하면서 갑주 500벌을 획득하고 부터입니다. 이후 1114년 대요전쟁을 기점으로 거란에서 다량의 갑주를 획득한 여진군은 더욱더 강해지게 됩니다.
이번에는 저번 글과 마찬가지로 보통의 창과 활로는 도저히 죽일 수 없었던 여진의 중갑기병 부대를 박살낸 남송의 전략에 대해서 간단하게 알아보고자 합니다.
여진군 1모극 (100명) 구성도 여진 거란을 멸하다 3부 - 여진군의 전투 방식 http://cafe.naver.com/booheong/85824 참고
때는 남으로 달아난 고종에 의해 건국한 남송이 점차 금나라에 반격을 가하고 있던 1140년 남송의 유기가 4만 명의 남송군을 이끌고 순창성(順昌城)에 입성하여 금군 3만과 격돌하기 직전이었는데, 휘하 장수들이 모두 이렇게 말했습니다.
송사 유기(劉錡) 열전中 召諸將計事,皆曰: 「金兵不可敵也,請以精銳為殿,步騎遮老小順流還江南。」 錡曰: 「吾本赴官留司,今東京雖失,幸全軍至此,有城可守,奈何棄之?吾意已決,敢言去者斬!」 제장(諸將)을 소집(召)하여 계사(計事/일을 계획함)하였는데, 모두 말하길 「금병(金兵)을 대적(敵)하기는 불가(不可)하오니, 청(請)컨데 정예(精銳)를 후군(後軍)으로 삼고, 보기(步騎/보병과 기병)가 노소(老小)를 숨겨 (강을 따라) 순류(順流)하여 강남(江南)으로 되돌아가야 합니다.」 유기(劉錡)가 말하길 「나는 본래 유사(留司)로 부관(赴官/관직에 오름)하였는데, 지금 동경(東京)을 비록 잃어버렸으나, 다행(多幸)히 전군(全軍)이 여기에 이르렀고, 성(城)이 있으니 가(可)히 지킬 수 있는데, 어찌 (순창성을) 버리겠는가? 나의 뜻은 이미 결정되었으니, 감히 (후퇴하라) 말하는 자는 참(斬)한다!」
*1140년에 유기가 동경부유수(東京副留守)로 임명되었으나 동경이 금에 함락 되었음.
병력이 남송군이 많고, 성도 가지고 있고, 적은 오래된 진군으로 지쳐 있는데도 남송이 보낸 정예군인 유기의 장수들 조차도 금군을 이길수가 없다고 토로하고 있지요.
유기는 오랜 행군에 지친 금군을 기습하여 대승을 거두었고, 금군은 퇴각하였는데, 얼마 안 있어 금의 장수 올출(兀朮)이 10만병을 이끌고 순창성에 당도하게 됩니다.
이때 순창성에 남은 병사는 채 2만도 되지 않았는데, 유기는 겨우 5천 병사만 이끌고 요격에 나서게 됩니다. 당시 올출군에는 순수 여진족 3천 명으로 이루워진 금이 자랑하는 괴자마(拐子馬) 철부도(鐵浮圖/鐵浮屠) 부대가 있었는데요. 이 부대가 위에 언급한 중무장 기병으로 당시에는 무적하여 전장에서 패한 적이 없었다고 합니다. 중갑 기병을 선두에 세워, 3기의 말을 쇠가죽으로 하나로 묶어 전진시켜 적진을 돌파하는 것으로 유명하였는데요. 당시 철부도 부대는 일반 창이나 화살로는 죽일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하여 유기가 세운 전략은 창으로 중기병을 말에서 떨어뜨린 후, 창으로 투구를 벗겨내고 도끼로 죽이는 전략을 세웠다고 합니다. 이 전략은 대성공을 거두어 괴자마 부대는 심각한 타격을 받고, 마침 큰 비가 내려 올출은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고 하네요.
송사 유기(劉錡) 열전中 官軍以槍標去其兜牟,大斧斷其臂,碎其首。敵又以鐵騎分左右翼,號「拐子馬」,皆女真為之 관군(官軍)이 창(槍) 끝으로 그 두무(兜牟/투구)를 제거(除去)하고, 대부(大斧/큰 도끼)로 그 팔을 끊거나, 그 머리를 부수었다. 적(敵)이 또한 철기(鐵騎)로써 좌우익(左右翼)으로 나누었는데, 부르기를 「괴자마(拐子馬)」라 하는데, 모두 여진(女真)으로 이루워졌다.
1126년 심관의 전략에서 한층 더 업그레이드된 셈이었지요. 심관은 옛날 거란족이 여진족하고 싸울 때 곤봉으로 여진 기병을 말에서 떨어트려 싸운 것을 모방해 송 기병의 반의 무기를 곤봉으로 할 것을 추천하였는데, 성과는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네요.
헌데 1140년에는 유기는 보병으로 여진 중기병을 상대할 묘책으로 도끼와 창을 선택하였습니다. 일단 긴 창으로 중기병을 떨어뜨린 후, 도끼로 죽인다!
송사에서는 당시 5천의 유기군이 10만의 올출군을 물리친 이 승첩을 순창지첩(順昌之捷)이라 기록하였지요.
두달 후 악비가 10만 악가군을 이끌고 언성(偃珹)에서 다시 10만 올출군과 싸우게 되었는데요, 올출은 역시 이번에도 1만 5천의 괴자마 부대를 선봉으로 내세웠습니다. 이때 악비가 준비한 작전 또한 대부와 대도로 이루워진 보병부대로, 이번에는 창으로 여진 기병을 떨어뜨리는 것이 아니라 모든 도끼로 적의 말 다리를 치라고 명령하지요. 이 전략은 적중하여 괴자마 부대는 치명적인 타격을 받았고, 올출은 다시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