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의 기쁨 누가복음 10 : 17 - 24 / 시편 4 : 7 손세용 목사 어느 신부가 신도들과 자신의 젊은 시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나도 한때는 결혼할 뻔한 여자가 있었지요. 하지만 난 신부가 되기로 결심했지요. 예수님을 사랑하는 게 더 큰 기쁨이란 걸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한 중학생이 손을 들며 질문했습니다. "신부님, 그 여자가 예뻤어도요?"^^ 글쎄요, 그 여자가 예뻤는지 안 예뻤는지는 몰라도, 신령한 기쁨은 세상의 모든 즐거움을 초월합니다.
한국의 슈바이처로 알려진 장기려 박사는 80회 생일을 맞았을 때 몇 가지 생의 기쁨을 말했습니다. 첫째는 결혼한 후 아들을 낳았을 때 하나님이 주신 아들로 천하를 얻은 기쁨이었다고 했습니다. 둘째는 손기정 선수가 올림픽 마라톤 경기에서 우승했을 때 민족 감정에 의해 기뻐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고,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 죄 사함을 받았다는 확신을 가졌을 때의 기쁨에 비교하면 다른 기쁨은 하찮은 것에 불과하다며, 구원받은 기쁨이 가장 컸다고 말했습니다.
사람들의 기쁨에는 몇 가지 유형이 있습니다. 첫째로 물질적이고 육체적인 기쁨입니다. 이것은 욕구 충족에서 오는 기쁨입니다. 누가복음 12장에 나오는 어리석은 부자는 농사가 풍년이 들어 곡식을 쌓아 둘 곳이 없자, 말합니다.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눅12:19). 이 어리석은 부자는 '오랫동안 쓸 것이 있으니 먹고 마시고 즐기자'며 오직 '먹고 마시고 즐기자'는 그런 동물적인 기쁨을 찾습니다.
둘째로 정신적 기쁨이 있습니다. 잠언서의 말씀입니다. "사람은 그 입의 대답으로 말미암아 기쁨을 얻나니 때에 맞는 말이 얼마나 아름다운고"(잠15:23). 어떤 진리나 몰랐던 사실을 깨닫는 지적인 기쁨입니다. 매튜 헨리는 어느 날 지갑을 도둑맞고서 다음 네 가지로 기뻐했다고 합니다. '첫째, 많고 많은 날들 중에서 오늘 처음 도둑맞았기 때문이요, 둘째, 지갑만 빼앗기고 생명은 빼앗기지 않았기 때문이며, 셋째로는 작은 것을 잃고 큰 것을 잃지 않았기 때문이고, 넷째는 세상에 별의별 사람이 다 있지만 매튜 헨리 자신은 도둑이 되지 않고 도둑맞은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기뻐했다'고 합니다. 이 모두가 합리적이고 지당한 이야기입니다.
셋째, 신령한 기쁨이 있습니다. 하박국 선지자의 고백입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합3:17-18). 바로 신앙인이 누리는 거룩한 기쁨입니다. 그리스도인도 추수로 인한 기쁨, 출세에 대한 기쁨, 건강에 대한 기쁨도 느끼지만, 진정한 기쁨은 하나님의 은총에서 누립니다.
기쁨에 대한 성경의 교훈은, 첫째, 기쁨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증거입니다. 기쁨은 성령의 열매 가운데 하나입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5:22-23). 성령이 우리를 다스리면, 기쁨이라는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하나님이 없는 사람은 주어진 환경에 의해서만 울고 웃고 일희일비하지만, 믿는 사람은 환경을 초월한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하여 절대적인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제인이라는 믿음이 좋은 학장은 매일 천국에 다녀온 사람처럼 기쁨이 넘치자, 어느 학생이 물었습니다. "선생님은 어떻게 이렇듯 화평하고 늘 기쁨으로 사십니까?" 학장님은 대답합니다. "그것은 마치 깃발과 같다. 어느 성에 깃발이 올라가 있으면 그곳에 임금님이 와 계시다는 뜻이듯, 그리스도가 나와 함께 계시니 나는 기쁠 수밖에. 내가 누구에게 잘 보이려고 하거나, 내가 누구에게 덕을 나타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내 마음이 기쁘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충만하니, 내게 기쁨이라는 깃발이 휘날리는 것이 아니겠느냐?" 주님이 우리 안에 계실 때, 기쁨이 넘칩니다.
둘째, 기쁨은 하나님의 선물이요 축복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요15:11). 희로애락의 감정도 스스로 어찌할 수 없는 것인데, 예수님은 당신을 믿고 따르는 자에게 하늘의 기쁨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아무리 밥을 많이 먹어도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속이 텅 빈 것처럼 허전하고, 마음은 씁쓸하지만,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실 때, 우리는 세상이 줄 수 없는 참된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최효섭 목사님이 뉴욕에서 목회할 때, 어느 무더운 여름, 주일에 예배와 회의를 마치고 지쳐서 의자에 앉아 쉬고 있는데, 40대 나이에 신학교에 다니면서 청소를 하는 교회 청소부가 즐겁게 노래를 부르며 청소하고 있었습니다. "오늘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습니까?"하고 최 목사님이 묻자, 그는 명랑한 목소리로 대답했습니다. "목사님, 모든 날이 좋은 날이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좋은 날을 주시는데, 사람들이 나쁜 날로, 우울한 날로 만드는 것이 아닙니까?" 최 목사님은 뜨끔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창조의 하루하루를 좋은 날로 규정하셨는데, 그 은혜 가운데 살아가는 성도는 매일매일을 복된 날이요, 좋은 날로 알고, 기뻐하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셋째, 기뻐하는 삶은 주님의 명령입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4:4). 누가 예수님을 잘 믿고, 더 하나님께 가까이 간 사람이냐는 그 기준은, 어떤 일까지 감사할 수 있고, 얼마나 기뻐할 수 있느냐 입니다. 감사와 기쁨, 이 두 낱말의 헬라어 어원은 같습니다. 기쁨은 내면적인 것이고 감사는 외적인 것으로, 기쁨은 그 내용이요, 감사는 외적인 표현입니다. 그런고로 기쁨 없는 감사는 외식이요, 처세술일 뿐입니다. 기쁨이 있으면 감사는 자연히 우러납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전도하라고 파송했던 70명의 문도들이 예수님께 돌아와 신나게 보고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선택하여 그들에게 말씀을 전하고, 병을 고치며, 사귀를 내쫓는 권세를 주시고 파송하셨더니, 이들이 나가 권세를 행사하자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병든 자가 일어나고, 귀신이 쫓겨나고 사람들이 하나님께 돌아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전도하러' 보내셨는데, 그런데 이 70명이 돌아와서 보고하는 것은 전도했다던가, 불쌍한 사람들 병 고쳐줬다는 말은 없고, "나가 귀신을 명했더니 귀신이 항복하더이다"라며 신나고 흥미 있는 이야기만 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하시는 말씀이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눅10:20)고 하십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기뻐할 것과 기뻐하지 말 것을 가르쳐 주십니다. 제자들이 기뻐한 것은 결코 소유의 기쁨, 추수에 의한 기쁨, 자식을 얻은 기쁨, 돈을 벌거나 출세한 기쁨, 혹은 잃어버린 것을 다시 찾은 기쁨도 아닙니다. 이것은 오묘한 것으로 "내가 병자를 고쳤다는 기쁨이요, 내가 귀신을 내쫓았다는 기쁨이며, 주의 이름으로 명했더니 귀신이 쫓겨났다는 것"으로 '내가 무엇을 했다는 기쁨'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와는 반대로 생각하십니다. 누가복음 13장에서 보면 18년이나 귀신들린 여자를 깨끗이 고쳐주시자, 이 일이 안식일에 일어난 때문에 바리새인들과 시비가 벌어졌습니다. 회당장이 "일할 날이 엿새가 있으니 그 동안에 와서 고침을 받을 것이요 안식일에는 하지 말 것이니라"(14절)고 비난하자, 예수님은 "외식하는 자들아 너희가 각각 안식일에 자기의 소나 나귀를 외양간에서 풀어내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이지 아니하느냐? 그러면 열여덟 해 동안 사탄에게 매인 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하지 아니하냐"(눅13:15-16)며 도리어 한 불쌍한 여인이 병에서 놓여 고침 받은 사실로 인해 기뻐하십니다.
그리스도인들의 기쁨을 본문 20절은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고 말씀합니다. 이 기쁨은 어떤 기쁨입니까? 첫째, 구원받은 기쁨입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누구든지 생명 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지더라"(계20:15)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생명책에 기록된 것을 말합니다. 영혼이 구원받았다는 것은 절대적인 기쁨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선택되어 우리 이름이 천국의 생명책에 기록되는 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이 기뻐해야 할 첫 번째 이유입니다.
제자들이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는 말은 '내가 귀신을 쫓아냈다'는 것으로 권력을 행사했다는 말입니다. 사람에겐 소유나, 깨닫고, 인정받는 기쁨도 있으나, 이보다 더한 기쁨은 권세를 누리는 기쁨이라고 합니다. 사람들이 돈을 벌려는 것도 돈 자체 보다, 돈을 통한 권력을 누리려는 의도라고 합니다. 사장이 좋은 것은 남의 밑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내 권리를 향유하는 즐거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귀신이 항복했다는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됐다는 그것이 중요한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생명 책에 기록된 것'이란 구원을 뜻합니다. 선택과 사명자의 축복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수고가 하늘에 기록될 수 있는 그런 수고가 될 수 있다면, 얼마나 복된 생애이겠습니까? 하늘에 기록될 만한 그런 가치, 그런 의미 있는 일을 한 적이 있습니까? 목이 갈하다고 바닷물을 마시면 더 목마를 뿐입니다. 생수를 마셔야만 갈증을 해갈할 수 있습니다. 돈은 벌어도 한이 없고, 업적을 내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토록 고생하여 세상 모든 돈을 벌고나면 근심이 많습니다. 공부 많이 하면 생각만 많아지고 머리만 복잡해집니다. 헛된 수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진정한 기쁨이 되지 못합니다.
한때 미국 닉슨 대통령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던 챨스 콜슨 박사가 워터게이트 사건의 주범으로 몰려 투옥되었습니다. 그가 출옥 후 간증하기를 "4년 동안 매일 아침 대통령 중심으로 12명의 참모들이 모여 세계를 요리한다는 자부심에서 열띤 회의를 가졌으나 돌이켜 보면 세계는 변함이 없었고 내 자신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듭났다는 사실보다 더 중요한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다"라고 말했습니다. 어떤 정책이나 철학, 폭력도 인간을 변화시킬 수 없으나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만이 인간을 변화시키는 위대한 힘인 것을 깨닫고, 많은 보수의 유혹을 뿌리치고 감옥전도에 인생을 바쳤습니다. 전기가 흐르면 밝은 불이 켜지고 모터가 돌아가 기계가 움직이고 공장이 가동되어 제품을 생산하듯,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가 미치는 곳에는 죽었던 심령이 소생하고 기쁨과 평안의 열매를 맺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둘째, 내가 그리스도를 위해 수고하고 헌신하는 기쁨입니다. 요한계시록에는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 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계20:12)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구원받은 이름이 기록된 책과 함께, 사람의 행위가 기록된 책도 있음을 보여줍니다.이를 보면 우리가 주님을 위해 행한 수고와 봉사도 모두 하늘에 있는 책에 기록된다는 사실입니다. 사실 교회를 위해 수고하는 것도 특권이요,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을 위한 봉사가 부담이 아니라 은총이기에, 불평하거나 짐으로 여길 것이 아니라, 도리어 감사하며, 하나님의 크신 역사에 고용된 것으로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내가 권세를 주었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권세를 힘입어 주의 사역에 동참한다는 사실이 얼마나 귀한 것입니까? 사람은 하나의 그릇입니다. 이 그릇이 귀한 일, 사람을 살리는 일, 영원한 구원의 역사를 일으키는 귀한 일에 쓰여질 때, 이 그릇은 비록 질그릇일지라도 얼마나 귀한 그릇이 되겠습니까? 지난날을 헛되이 살아왔을지라도, 이제 하나님의 일에 다소나마 보탬이 된다면, 매우 귀한 일입니다.
고든 코스비는 그가 워싱턴에 소재한 구세주교회의 목사로 시무하고 있을 당시, 여섯 명의 자녀를 간신히 입히고 먹일만한 수입 밖에 없었던 어느 과부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그녀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매주 4불씩 변함 없이 헌금을 했습니다. 한 집사가 코스비에게 그녀를 찾아가 헌금을 하는 대신 그 돈을 가족을 위해 쓰도록 조언할 것을 제안했습니다. 코스비는 그 집사의 권고를 따랐다가 후회하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그녀에게 그렇게 말했더니 그녀가 "당신은 나의 품위를 지키게 하며 삶의 의미를 알게 하는, 내게 남은 단 하나의 일마저 빼앗아가려고 하는군요"라고 그녀가 말했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복이 있다는, 베풂의 진수를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궁핍한 사람들에게 재정적인 도움을 주는 일은 필요합니다. 하지만 그들도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을 통해 참된 기쁨과 자존감을 갖게 하고, 또 이를 통해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길을 막아선 안 됩니다. 아무리 가난하고 약한 사람도 그 나름으로 주님을 섬길 수 있는 길은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거룩한 사역에 고용된 기쁨과 견줄 기쁨이 없습니다. 천한 자가 귀하게 쓰여집니다. 헛된 생을 살던 자가 이제 가장 고귀한 일에 부름을 받아 쓰여집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육체에 채우노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고난이 있을수록 기뻐했고, 어려움이 있을수록 그는 감사했습니다. 이것은 업적도 실적도 아닙니다. 다만 그에게 충성이요, 자기 의나 선행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쓰여진다고 하는 그 자체의 기쁨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불의하지 아니 하사 너희 행위와 그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으로 이미 성도를 섬긴 것과 이제도 섬기고 있는 것을 잊어버리지 아니하시느니라"(히6:10). 이런 기쁨이 있어야 합니다.
셋째, 나의 수고로 인해 하나님께 영광이 돌려지고, 다른 이들이 행복하게 되는 모습을 보는 기쁨입니다. 본문 21절에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셨다"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4장에는 예수께서 사마리아 수가성 우물가에서 한 불행한 여인에게 전도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불행한 여인에게 복음을 전하여 구원하셨는데, 제자들이 음식을 가지고 와서 "랍비여 잡수소서"하고 말씀드리자, 예수님은 시장하신 것도 잊으시고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다"(요4:32)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이 의아하여 "누가 잡수실 것을 가져다 드렸는가?"하고 생각하자,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요4:34)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아무 것도 잡수지 못하셨지만, 한 영혼이 구원받은 사실로 인해 그토록 만족해하시고 기뻐하셨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의 기쁨은 대체로 이기적이고, 육체적이며, 찰나적일 때가 많습니다. 우리의 기쁨이 왜 그렇게 순간적이고, 허무합니까? 소유의 기쁨은 더 큰 소유를 지향하기에 고통으로 변하고, 성취감은 다른 욕심으로 더 큰 성취를 갈망하기에, 그 성취감의 노예가 되고 맙니다.
뉴욕의 유명한 피프스 애비뉴 장로교회(Fifth Avenue Presbyterian Church) 커클런드(Bryant Kirkland) 목사가 3시간을 비행기를 타고 서부를 여행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리에 앉자마자 설교준비를 하려고 가방에서 필요한 자료를 꺼낸 뒤, 마치 '나는 바쁜 사람이니 아무도 나를 방해해서는 안 된다'는 식으로 장로교 목사다운 근엄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그 때, 아기를 안은 젊은 여인이 목사의 옆자리에 앉았습니다. 목사는 속으로 '이것은 좀 쉬운 상황이 아니로군'하고 생각하며 여전히 근엄한 표정을 유지했으나, 그 아기는 목사를 향해 웃으며 '빠빠빠~'하며 손을 흔드는 것이었습니다. 목사는 더 이상 아기를 못 본 척 할 수 없어, 가방에 자료들을 집어넣고서 아기를 받아 안고서, 아기를 예뻐하며 사랑해주었습니다. 드디어 비행기가 목적지인 로스앤젤레스에 착륙하자, 그 젊은 어머니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선생님, 우리 아기를 그렇게 귀엽게 사랑해주셔서 참으로 감사드립니다. 아기 아버지가 얼마 전에 세상을 떠났어요. 그 후로 우리 아기에겐 그렇게 귀여워해 주고 사랑해줄 사람이 주변에 아무도 없었어요.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커클런드 목사는, 자신이 아기를 사랑해주었다기보다 그 아기로 인해 마음에 기쁨과 평화가 가득 찼습니다.
신학자 폴 틸리히는 기쁨과 즐거움을 구별합니다. 기쁨은 슬픔의 반대 개념입니다. 그런데 슬픔은 고통과 구별됩니다. 기쁨과 고통은 언제나 상반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즐거움은 고통과 상반됩니다. 여인이 해산을 하는 것은 분명 고통스러운 일이기에 이것은 즐거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고통스러우니까 기쁘지 않은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고통스러우면서도 기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즉 고통과 기쁨이 동시에 있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기쁨 중에는 고통의 기쁨도 있습니다. 누구를 사랑할 때, 그 사랑으로 인해 고통을 겪으면서도 기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사랑의 고통은 즐거움을 빼앗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기쁨을 빼앗지는 못합니다.
칼 힐티는 그의 책 [잠 못 이루는 밤을 위하여]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만약 당신이 우울하거나 불안하거든 곧 진지한 일에 착수하라. 쉽사리 그렇게 할 수가 없을 경우에는 이웃에게 적은 기쁨이나마 주도록 하라. 그것은 언제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닌가. 그렇게 하는 것이 기쁨이다." 몸이 지쳤을 때 꿀물을 마시듯 마음이 아프고 힘들 때 한 모금 기쁨을 마십시오. 스스로 기쁨을 마시기가 어렵거든 누군가에게 기쁨을 주십시오. 남에게 기쁨을 주는 것이 나에게도 기쁨을 얻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과 이웃과 자신이 기뻐할 일을 얼마나 하십니까? 그 외의 일은 헛되고 허무한 일입니다. 권세를 얻으면 무엇하고, 많은 것을 얻었으면 어떻다는 것입니까? 시편 기자는 신령한 기쁨을 이렇게 노래합니다.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그들의 곡식과 새 포도주가 풍성할 때보다 더하니이다"(시4:7). 벌써 한해의 절반을 보냈습니다. 지난 반년 동안 무엇을 고민해 오셨습니까? 하늘에 기록될 만한 일을 얼마나 하셨습니까? 이제 남은 날들을 우리는 기쁨으로 살아야 하겠습니다. 그것은 곧 하늘에 기록될만한 선한 일을 이루는 것입니다.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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