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방日記>
선방일기의 상원사
불교는 처음부터 끝까지
인간으로 시작해서 인간으로 끝난다
부조리한 백팔번뇌의 인간이
조화된 열반에 이르는 길이 바로
불교이기 때문이다
-지허스님 선방일기에서..
1월 14일
뒷방에서는 바랑 꾸리기에 바쁘다. 내일이면 동안거가 끝나기 때문이다. 나도 바랑을 꾸려 놓았다.
봄이 밀려오는 탓인지 양광이 따사로운 오후다. 지객스님과 같이 빨래터에서 내의를 빨아 널고 양지 쪽에 앉았다. 내일 헤어진다고 생각하니 아쉬움이 앞선다. 앉을 때도 잠자리도 바로 이웃이었고 며칠 만큼씩 얘기도 나누었던 사이인 탓이다.
지객스님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인간은 자기 스스로가 스스로를 완성시켜야 한다는데 선방에서의 햇수를 더할수록 알 수 없는 어떤 타의에 그리고 신비에 끌려가는 기분이 가끔 드는데 그게 정상일까요?"
"어려운 질문이군요. 그러나 선객에게 가끔씩 찾아오는 극히 자연스러운 감정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아함경을 통해 가르치고 있습니다.
<여기 한사람이 독이 묻은 화살을 맞아서 쓰러져 있다고 하자. 친구들은 의사를 부르려고하였으나 그 사람은 먼저 화살은 누가 쏘았는지, 이 화살을 쏜 활은 어떤 모양인지, 그리고 독은 어떤 종류의 것인지 등을 알기 전에는 그 화살을 자기의 몸에서 빼내서 치료해서는 안된다고 하자. 그렇게 되면 그사람은 어떻게 되겠는가. 그는 그 사실들을 미처 알기 전에 죽고말 것이다.>
형이상학적 문제만 붙잡고 공론에 시간을 보내는 동안 그 사람은 죽어가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 세상은 유한한가, 무한한가, 또 신이 있는가, 없는가 라는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해서 지금 괴로와 하고 있는 인생의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는 것이 부처님 교설의 의취(意趣)입니다. 극히 실존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란 자기의 존재에 있어서 자기의 존재가 문제가 되는 존재'라고 샤르트르가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나는 타인에 대하여 필요 이상의 존재이며 타인도 나에 대하여 필요 이상의 존재'라고 결론을 내립니다. '원죄란 타인이 있는 세계 중에 내가 태어난 것'이라고. 비정하나마 인간실재의 참된 표현입니다.
인간은 자기의 존재를 문제 삼아야 하고 또 자기 자신이 그 문제를 풀이 하지 않을 수 없는 존재입니다. 이것이 불교의 출발점이며 실존주의의 출발점이기도 합니다. 현대의 지식인들이 불교에 귀를 기울이는 이유는 실존주의가 배후세계(背後世界)의 망상(神學)을 거뜬히 파괴하기도 하고 타기했다면서도 신의 율법을 제정하지 못하고 인간은 무책임하게 던져진 단독자라고 하기 때문이며 (하기야 그들은 아무리 현명해도 중생이기 때문에 인간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파헤칠 순 있었지만 수습하고 구원할 수 없을 뿐입니다만), 또 하나의 보다 큰 이유는 근래의 기계문명이 인간을 평균화하고 집단의 한 단위로 화함으로써 인간 실존을 위협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불교는 백팔번뇌를 지적하면서 열반의 길을 가르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스님, 인간은 끝내 인간의 범주 내에서 인간의 조건과 같이할 뿐이지 초월하거나 탈피할 수는 없잖을까요?"
"물론이지요. 인간은 초월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완성될 수 있고 인간의 조건은 조화될 수 있습니다. 불교는 인간의 완성을 위해 선을 내세웠고 인간은 선을 통하여 완성을 가능케 하고 있습니다. 선은 신비가 아니고 절대자의 조종을 받는 그 어떤 것도 아닙니다. 인간완성을 위한 길입니다. 즉 열반으로 이르는 길입니다."
"인간완성을 열반에 귀결시키는데 그렇다면 열반은 현실태(現實態)입니까? 가능태(可能態)입니까?"
"실존주의는 말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은 현실태로 있는 것이지 가능태로 있는 것은 없다.' 즉 일원론적인 현상인 현실 밖에 없다고 하면서 현상 뒤의 어떤 실재, 어떤 영원한 세계를 말하는 것은 잠꼬대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현실에서 인간이 완성될 수 있는 길을 열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실존주의의 함정입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열반은 생명이 단절된 죽음의 저편에 따로 존재하는 세계를 말함이 아니고 부조리하고 무분별한 실재(백팔번뇌)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조화시킨 생명력을 말하는 것입니다. 무의 인식에서 반야를 밝히는 힘이 열반인 것입니다. 이 무여열반은 아집의 색상(色相)에서 해방된 세계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진제(眞諦)는 열반이고 속제는 유뮤(有無)입니다. 유무에 얽매임은 현실적인 생사이나 열반에 들어옴은 영겁에 의해 해탈된 것입니다. '열반이란 신없는 신의 세계이며 시여(施興)함이 없는 신의 시여'라고 하일러는 말했습니다. 신없는 세계의 신 이것은 곧 완성된 인간을 의미함이요, 주는자 없이 주어지는 것은 완성된 인간의 내용을 의미합니다."
"완성된 인간이 곧 신이 아닐까요. 그래서 인간의 의식이 가능했던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갖가지 신이 창조되고 군림했던게 아닐까요?"
"전지전능하다는 신을 동경하고 메시아 재림(再臨)의 날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만일 그런 시일이 미리 결정되어 있다면 인간은 자유없는 꼭둑각시에 불과합니다. 절대자의 괴뢰(傀儡), 신의 노예, 그러한 천국이 있다면 나는 차라리 고통스러워도 자유로운 지옥을 택하겠습니다. 그러한 극락이 있다면 나는 차라리 도망쳐 나와 끝없는 업고의 길을 배회하렵니다."
"극히 인간적이군요."
"불교인이기 때문입니다. 불교는 처음부터 끝까지 인간(衆生)으로 시작해서 인간(道人)으로 끝납니다. 부조리한 백팔번뇌의 인간이 조화된 열반에 이르기 까지의 길을 닦아놓고 가르치는 것이 바로 불교니까요."
"좀 더 화두에 충실해야 하겠군요."
"그렇지요. 순간의 생명도 보장받지 못한 채 살아가는 것이 바로 인간입니다. 어찌 순간인들 화두를 놓을 수가 있습니까. 화두를 놓으면 중생이요, 화두를 잡고 있는 한 열반의 길에 서 있는데....."
저녁 공양을 알리는 목탁소리가 들렸다. 우리는 일어섰다. 그리고 천천히 걸었다. 천천히 걸어가지만 선객은 내심 그렇게도 무서운 절박감 속에서 살아간다.
출처 :클래식과 불교 원문보기▶ 옮긴이 : 기광
진흙속에 피는 연꽃
도반님들 성불하소서_()_
성불로가는도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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