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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
봉황성(鳳凰城).
이왕야(二王爺) 삼절신군 범고풍의 죽음에 이어 이번에는 전위공격대로 가장 먼저 출성한 삼왕야 옥수서생(玉手書生) 유세옥의 패전(敗戰) 소식은 봉황성을 침울하게 만들었다.
중원은 온통 혈운(血雲)에 뒤덮여 있었다.
전황은 시시각각 변했으나 어느 정도 교착국면을 유지하고 있었다.
지옥삼겁천과 중워무림과의 혈전은 극을 치달렸으나 양측이 거의 비슷하게 막대한 희생을 치루고 있었다. 이대로 가다간 승자도, 패자도 없는 무림의 종말을 초래하게 될 것이 분명했다.
천우.
그는 비밀 전서구로부터 자신에게 전달된 밀지를 읽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놀라움이 점점 더 강하게 떠오르고 있었다.
<녹상(綠桑)을 심문한 결과 이제야 그녀의 배후를 알아냈어요. 뜻밖에도 그녀를 군방원에 잠입시킨 세력은 천기장(天機莊)으로.......>녹상.
바로 낙화군방원 지하의 황금대총에서 팔대전시의 한 명인 여인이었다. 당시 우연히 그녀의 비밀접선 광경을 목도한 천우는 그녀를 아직도 잊지 않고 있었다.
<놀랍게도 천기장은 암중에서 지옥삼겁천(地獄三劫天)을 조종하고 있는 신비의 장본인임이 드러났어요. 현 천기장의 장주는 우문천릉(于文天凌)이며 그는.......>기인총의 초초로부터 전달된 비밀전서의 내용은 충격적이었다.
천우는 우문천릉이란 인간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하나 밀전을 읽는 순간 심장의 고동소리를 그는 느꼈다.
'바로 이 자다! 이 자야말로 오늘의 무림상황을 만든 자다......!'천우는 삼왕야 유세옥이 사천에 들어선 이후 패했다는 사실을 상기시켰다.
'병법(兵法)에 능하고... 지세에 밝은 자... 그는 광풍사에서 당한 것이 아니라 바로 우문천릉이란 자에게 당한 것이다.'그의 생각은 바로 그 당시 상황과 여지없이 맞았다. 이미 천우는 어느 정도 모든 것을 헤아리고 있었다. 그의 마음에는 무거운 중압감이 점점 더 커지고 있었다.
'천하는 정녕 누구의 것인가? 정말... 그 누군가를 위해 존재한단 말인가?'<... 만기서군 우문학의 독자로 그의 무공은 삼백 년 전에 남천신가의 육대조인 무종선사(武宗禪師) 송영(宋 )에 의헤 철살된 마물 사영환의 흡천대법으로 그의 절맥을 치료하고 금강불괴지신이 된 자에요. 그래서 소녀는 그가 사영환의 마공까지도 알고 있지 않나 염려되어요.......>천우는 중원의 평화는 아직도 멀고 멀다는 생각에 이루 말 할 수 없이 착잡한 심정이었다. 그의 진정한 상대는 바로 우문천릉이라는 확신이 깊어졌다.
여인(女人).
그녀는 세상이 자신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선천적으로 영리한 두뇌와 그보다 훨씬 뛰어난 미모를 가지고 태어났다. 그녀는 태어나면서부터 주위의 모든 사랑을 독차지했다.
백봉황(白鳳凰) 단목가영.
그녀는 세상에 손만 뻗으면 자신이 얻지 못할 것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무황의 무남독녀로서 자라났다. 그녀를 거스르는 것도 없었고 그녀가 두려워해야 할 것도 아직까지는 찾지 못했다.
그녀의 마음을 온통 빼앗아버린 한 사내로 인해 그녀는 모든 것이 만족스럽지가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야망이 있었다. 한 여인으로서의 삶과 강호의 야심가로서의 삶이 언제나 서로 충돌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그녀가 지금 자신이 도대체 왜 이런 곳에 있어야 하는지 그 까닭을 알 수 없었다.
'이곳은 어디지? 또 나는 왜 여기 있는 것일까......?'그녀는 화려한 방에 있었다. 그리고 입고 있는 옷도 그녀가 생전 처음보는 옷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자신이 봉황성으로 가던 중 바다의 배 위에서 정신을 잃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 나는 암살당했던 거야!'
그녀의 안색이 변했다. 그녀의 몸에서 아직 무형산공독이 완전히 빠져 나가지 않아서 정신이 혼미한 상태였다.
이때였다.
"하하하...! 가영, 이제 일어났소?"
문득 한 가닥 낭랑한 웃음소리와 함께 방 안으로 한 청년이 들어왔다. 그 목소리는 그녀가 너무나 애타게 갈망하든 것이었다. 그녀는 잠시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 정인의 목소리였다.
우문천릉, 바로 그였다.
"앗......!"
이 너무도 돌연한 꿈 같은 사실에 단목가영은 그만 자신도 모르게 비명과도 같은 신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우문천릉.
이제껏 그녀의 마음을 줄곧 처지해 왔던 이상의 남성이 아닌가? 그런 그가 섭선을 가볍게 흔들며 사랑스런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빙그레 웃는 것이었다.
"안심하구료. 가영, 이제 이곳에는 오직 당신과 나... 두 사람밖에 없소.""다... 당신... 어떻게...? 그리고 나는......?"
"하하... 가영, 내가 당신을 이리 오도록 한 것이오. 이곳이 어딘 줄 아시오? 바로 천기장(天機莊)이오.""......!"
단목가영은 너무나 놀랐다.
자신의 의지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이 그녀는 이곳에 와 있는 것이다. 이런 일은 상상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자존심이 상했다. 그녀에게 사랑과 야망은 별개가 아니었다. 하나를 위해서 다른 하나는 포기해야만 하는 그런 관계였다.
그러나 자신이 꿈속에서도 그리던 사내와 같은 방에 단 둘이 있게 된 것이었다.
"하하...! 가영, 나는 그대를 사랑하기 때문에 이곳으로 데려온 것이오. 이제 더 이상 나는 나 자신을 감출 필요가 없게 되었소. 왜냐면 내게 원하는 모든 일들이 모두 이루어질 것을 자신하고 있기 때문이오."단목가영은 떨리는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당신은... 이제까지 연극을... 했단 말인가요? 당신은 일개 서생이 아니었나요?""하하하...! 그렇소. 가영, 나는 천하라는 야망을 건지기 위해 그토록 오래도록 준비를 했었던 것이오. 하나 이제는 모든 것을 벗어던질 수가 있소. 가영, 당신과 함께 이젠 모든 것을 마음대로 행할 수 있소. 원하는대로 말이오."우문천릉은 팔을 벌리고 그녀를 껴안기라도 할 것처럼 다가왔다. 단목가영은 문득 발악을 하듯 외쳤다.
"어... 어떻게 된 거죠? 내 무공은? 왜 이렇게 힘이 없는 거죠?"그렇다.
그녀는 자신의 단전(丹田)이 텅 비어 있음을 느꼈다. 단 한올의 진기도 그녀는 끌어올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우문천릉은 여전히 팔을 벌리고 다가오며 말했다.
"가영, 당신에게 무공은 필요없소. 우리는 이제 서로의 과거를 바꾸는 것이오. 사랑하오. 가영, 당신은 나 우문천릉의 아내로써 천하를 굽어 볼 수가 있소."순간, 단목가영은 태산(泰山)이 무너지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그녀는 무언가 크게 잘못되었음을 순간적으로 직감했다. 그녀에게 있어서 사랑은 이런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너무나 급작스럽게 충격을 거듭 받은 것이었다. 그토록 그리던 정인과의 만남과 야망을 실현시켜줄 자신의 무공이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일방적으로 폐지된 것이 아닌가?"무... 무공이... 필요없다고? 내 무공을... 폐지시켰나요?""그렇소. 가영, 당신에게는 무공보다도 훨씬 위대한... 미색(美色)이 있소. 사랑하오. 가영."우문천릉은 마침내 두 팔을 벌여 단목가영을 껴안았다.
그러나 그 순간 실로 놀라운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단목가영은 미친 듯이 그를 때리고 할퀴며 부르짖었던 것이었다.
"누가! 누가 내 무공을 마음대로 폐지시키라고 했나요? 누가...! 으흐흐흑...! 나쁜 놈! 나를 사랑한다고! 흐으으윽... 차라리 나를 죽여라! 이건... 이건 아니야! 사랑은 내가 하는 거야! 네가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구! 흐흐으윽...! 이 나쁜 놈!"그것은 미친 여인의 발광이었다.
단목가영은 우문천릉의 품안에서 미쳐 날뛰며 고래고래 외치고 있었다. 머리카락이 헝클어지고 옷자락이 찢어지는 것도 모르고... 그녀는 우문천릉을 꼬집고, 때리고, 할퀴며 욕을 해댔다. 그녀는 정말 미쳐버린 것이다. 미치지 않고서는 도저히 눈앞의 현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사랑.
그것은 그녀가 해야 했다. 우문천릉은 아무래도 좋았다. 그녀는 이제까지 모든 것을 자신 중심으로만 생각했고 일방적으로 자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이루어졌다.
감정도 마찬가지다.
그녀가 생각하는 사랑도 결국 그녀 본위의 사고방식에서 우러나온 것이었다. 사랑은 그녀가 해야했고 그녀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이 파괴된 것이다. 그녀는 선택되었고 또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무공이 폐지되었다. 그리고 일방적으로 이곳에 납치되었다. 우문천릉은 또 제멋대로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녀의 도도한 자존심에 엄청난 상처를 입힌 것이다..
"오호호홋...! 호호호... 깔깔깔......."
그녀는 우문천릉의 품에 안겨 입에서 흰 거품을 뿜어대면서 끝없는 웃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우문천릉 또한 적지않은 충격에 휩싸였다. 그는 말을 잃었다. 자신의 앞에서 벌어진 일을 믿을 수 없었다.
단목가영과 마찬가지로 그의 사랑 또한 너무도 강렬한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여인에게 강호의 피냄새를 묻히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무공을 폐지시키고 자신과 함께 백년해로 할 꿈에 부풀어 있었다.
그러나 그녀가 자신의 품안에서 그만 미쳐버리고 만 것이었다. 그는 한 순간 모든 것이 허무해짐을 느꼈다. 허무함은 뼛속 깊히 박혔다. 그리고 그것은 훗날 그의 삶을 완전히 뒤바꾸어 놓게 될 하나의 요인으로 작용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 그는 야망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기회가 온 거야. 그에게 복수를... 이 당옥교가 당한 복수를 하고 말 거야......."사천의 명문 당가보(唐家堡).
현 당문의 가주인 천수여래 당옥교는 이를 갈고 있었다. 그녀는 한 사내를 위해 지아비를 버렸으며, 가공(家功) 또한 모두 그에게 바쳤다.
하나 돌아온 것은 무엇인가?
자신은 이미 늙었으며 그녀가 그토록 모든 것을 바쳤던 그 사내는 지금 다른 계집의 치마폭에 있다.
"호호호... 천릉, 그 미쳐버린 계집을 그토록 애지중지하다니... 이 당옥교에게 그 반정도만 해 주었어도 이런 짓은 하지 않았을 거예요......!"그녀는 지금 발가벗은 채 한 사내 위에 누워 있었다.
"흐으윽... 복수할 거야...! 흐윽......."
그녀의 육체는 땀으로 번들거리고 있었으며 몸이 쉴 새 없이 율동했다. 그녀의 아래 깔려 있는 사내도 알몸이었다. 그러나 그는 바로 유세옥이 아닌가? 왜 그가 당옥교의 밑에 깔려 있는 것일까? 그렇다. 옥수서생 유세옥은 내상의 치료를 위해 당옥교에게 맡겨졌다. 지옥삼겁천과의 싸움에서 워낙 지독한 상처를 입었다. 그렇기 때문에 보통 방법으로는 그를 살릴 수가 없었다. 당옥교는 그를 보는 순간 잔인한 복수심이 끓어올랐다.
우문천릉은 그녀를 철저히 이용했다. 정작 그녀를 짓밟고 이용했으나 그가 사랑하는 것은 다른 여인이었다.
백봉황 단목가영.
그녀는 지금 천기장에 있었다.
당옥교는 그녀가 미쳤다는 말을 들었다. 그러나 우문천릉은 그녀가 미쳤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에 대한 사랑은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한시도 그는 단목가영의 곁을 떠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당옥교도 미칠 것만 같았다.
"헉......!"
유세옥은 눈을 떴다. 길고 긴 혼몽 속에 그는 무서운 꿈을 꾸었다. 그것은 가도가도 빠져나갈 출구가 보이지 않는 절곡 속에서 쫓기는 꿈이었다.
그는 눈을 떴다.
그 순간 그는 넋을 잃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 속에 자신이 누워 있었다. 자신은 알몸이었고 또 자신의 몸 위에 포갠 채 한 여인이 땀을 폭포수처럼 쏟으며 격렬하게 움직이는 것이 아닌가?"아아... 흑......."
여인은 고개를 뒤로 젖히며 막 열락의 고비를 넘기고 있었다.
그녀의 입이 딱 벌어졌다. 희열에 몸부림치고 있는 한 여인, 그 절정에 오른 표정을 본 순간 유세옥은 갑자기 구토를 느꼈다. 하지만 그의 위장 속에는 구토를 할만한 아무런 내용물도 들어 있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귀를 틀어막고 싶었다.
유세옥이 어느 정도 체력을 회복하기까지에는 당옥교의 집요할 정도의 간병이 절대적이었다. 그녀는 무엇에 쫓기듯이 필사적으로 그의 건강이 회복되도록 애를 썼다.
그녀의 그런 집념은 옥수서생 유세옥이 놀랄 정도였다.
그녀는 당가(唐家)의 비전 의술을 총동원시켰으며 영약이란 영약은 그에게 모두 복용시켰다. 그러나 유세옥은 괴로웠다. 그는 하루에 한 번 마음에도 없는 일을 해내야 했다. 그녀는 밤만 되면 불덩이가 되어 그의 침상에 오르곤 했다.
그녀의 정욕은 무서울 정도였고 밤새워 몸을 불태웠다.
당옥교는 미인이었다. 세상에 미인이 스스로 몸을 던져오는데 마다할 사람이 누가 있으랴? 그러나 유세옥은 그때마다 거의 자학에 가까운 절망과 환멸을 느껴야만 했다.
그것은.
"아아... 천릉... 천릉......."
당옥교가 절정에 이르러 부르짖는 것은 그의 이름이 아니라 유세옥이 치를 떠는 우문천릉의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유세옥은 그때마다 수치와 모멸감에 할 수만 있다면 그녀를 죽이고 싶었다. 아니, 자기 자신의 귓구멍에 말뚝을 박고 눈을 후벼 파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런 식의 모욕은 남녀의 차이가 없을 것이다. 그는 인내심이 거의 다 고갈되어 갔다.
유세옥이 어느 정도 체력을 회복한 것은 그로부터 보름 후였다. 그는 본신 공력의 삼분지 일밖에 발휘할 수 없었지만 그 정도만 해도 기적이랄 수밖에 없었다.
실상 그가 살아날 가능성마저도 희박했었던 것이다. 그런 그에게 당옥교는 한 자루의 검을 주며 말했다.
"가세요! 이제는 도망쳐요! 탈출에 성공하고 못하건 그건 당신의 운(運)에 달렸어요."유세옥은 검을 받아들었다.
그의 심장이 격렬하게 뛰고 있었고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 동안 그는 무수히 그녀와 본의 아니게 살을 섞었다.
그는 확실히 느낄 수가 있었다.
당옥교는 분명 우문천릉을 사랑하고 있었다. 아니, 사랑하는 정도가 아니라 그녀에게 그의 존재는 가히 절대적인 것이었다.
"왜......?"
그는 물었다.
"그를... 죽이고 싶도록 증오해요! 그를 파괴시키는 일이라면... 그가 아끼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그에게서 떠나도록 할 거예요! 가요! 어서 달아나요! 어서! 호호호홋...! 당신이 달아난 줄 알면 아마 그는 미칠 듯이 분노할 거예요!"번뜩!
피가 튄다. 살점이 낙화(落花)처럼 떨어져 내린다. 사위는 정적에 휩싸여 있었고, 아주 멀고 아득한 옛날처럼 아름다운 사내가 있었다. 그는 수천 명의 장한들에게 둘러싸인 채 눈부신 검무(劍舞)를 추고 있었다.
무(無)의 초식.
그 어떤 검결도 필요 없었다. 그는 지금까지 이런 극치감(極致感)을 맛본 적이 없었다. 그의 생애에서 가장 완벽한 순간이었다. 그는 한바탕 질펀한 난무(亂舞)의 춤사위에 녹아들었다.
비명도 없었다. 아니 들리지 않았다. 그는 오감(五感)을 모두 닫고 오로지 본능에 따라 찌르고 베는 단순한 동작만을 지루하게 되풀이 하고 있었다.
본능무학(本能武學).
벌써 삼만 초의 검이 발출되었다. 주위 백여 장은 이미 초토화되었다. 잡풀 한 포기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러나 끝없이 몰려드는 인영들은 지칠 줄 몰랐다.
유세옥은 검을 휘둘렀다. 그것은 이미 무공이 아니었다. 무공이라고 하기엔 너무도 아름다웠다. 그는 이미 생과 사의 집착에서 벗어나 선인(仙人)의 경지에 들어서 있었던 것이었다. 그를 가로막는 수많은 고수들.......
그는 그들이 누구인지 아예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다만 그의 앞을 가로막는 자가 있으면 그는 허공을 베었다. 동작은 지극히 단순했다.
휙!
"으아악!"
막 그의 앞길을 가로막던 자는 정수리가 쪼개져 나뒹굴었다.
"잡아라--!"
펑!
맹렬한 장세(掌勢)와 함께 엄청난 충격을 느낀 유세옥은 자신이 검을 쥐고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제부터는 맨손으로 병장기들과 맞서야 했다. 유세옥은 틀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담담했다. 지금 그의 관심은 생(生)에 있지 않았다.
무의 극치(武極).
그는 팔과 다리에 불어넣었던 공력을 모두 거두었다. 그는 마지막 생에 대한 집착마저도 버린 것이다. 그 사이 사방에서 그에게 달려드는 인영의 숫자는 다시 수천 명으로 불어나 있었다.
다시 모욕을 당할 수는 없었다. 그가 택한 길은 오직 하나!자신의 한계에 도전하는 것이었다.
"으아아악!"
단말마의 비명이 천지를 뒤덮고 있었다. 먹장구름을 뚫고 달빛이 교교하게 빛나고 있었다.
유세옥의 시야는 온통 암흑뿐이었다. 그것은 상대방으로부터 뿜어진 끈끈한 핏덩이가 온몸을 덮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피비린내를 맡을 수 없었다.
진한 목단향이 코끝에서 아찔하게 진동했다.
그리고 숨막히는 정적(靜寂)의 순간, 그는 너무도 거대한 환희의 절정을 느ㄲ다. 그는 이로써 모든 것을 이룬 것이었다. 더 이상 고함소리도, 장풍, 검풍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거의 완벽에 다다른 정적이 그의 의식을 지우고 있었다. 그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그는 자신의 무게를 느낄 수 없었다. 너무도 가벼워진 자신이 한편으론 놀라웠다.
그는 비틀거리며 앞으로 나아가다 팔꿈치까지 잘려나간 팔로 땅을 콱 찍었다. 그는 두 다리도 잘려나가 너덜거리고 있었으나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모두... 죽었느냐?"
대답하는 자는 없었다.
"크크큭... 크크큭...! 죽었군. 그렇지, 이 유세옥의 앞을 감히 누가 막는단 말이냐?"유세옥은 잘려나간 팔을 지팡이 삼아 비틀비틀 앞을 향해 무작정 기어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느낌 뿐이었다.
그는 웃고 있었다. 승리의 미소를 지은 채 그는 그렇게 엎드려 있었다. 반이 잘려나간 그의 팔은 땅속에 박혀 있었지만 그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죽은 것이다. 그러나 그의 넋은 힘차게 앞으로 걸어가고 있을 것이다.
꽃다운 나이 이십칠 세의 옥수서생 유세옥은 그렇게 젊음을 산화(散花)했다. 언젠가 그의 화려하고 아름다왔던 시절을 기억하는 강호인이 있다면 이렇게 그에 대해 말 할 것이다.
- 옥수서생(玉手書生) 유세옥. 그는 마치 천상(天上)의 옥인(玉人) 같았다네. 그가 그토록 일찍 죽은 건 아마도 신이 그를 질투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네... 그는 비록 광인이 되어 자신의 손과 다리를 자르고 수천 명의 고수들을 죽인 후 마지막으로 자결을 택했지만 그는 진정한 검사였네... 그는 자신과의 대결에서 이긴 것이었네. 그러나 단 일초에 자신을 제압한 그는 더 이상 이 세상 사람으로 살 수 없었네. 자신의 검으로 자신을 이긴다는 것, 실로 놀랍지 않은가? 그의 검법은 너무도 단순했으나 그것이 바로 검의 완성이었네. 신검합일의 경지를 넘어 무검무아의 경지를 그는 성취한 것이었네. 그는 고금을 통틀어 가장 아름다운 무인이었네. 하지만 이제 다시는 우리는 그를 볼 수 없네... 다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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