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가보는 아무리 다 써도 다함이 없나니
중생을 이롭게 하고 기연에 응하면서 끝내 아끼지 않는다
<原文>
無價珍用無盡(무가진용무진)
利物應機終不恡(이물응기종불인)
@자귀 해설
1)無價珍은 無價之寶를 말한다. 無盡寶藏, 如意寶, 無價寶라고도 한다.
증도가에서는 마니주라 표현하고 있다.
2)利物應機終不恡이라(이물응기종불린)
*利物應機는 應機接物(응기접물)을 도치하고,
무가보를 강조하기 위해 接物을 利物로 바꾸어 놓았다.
*應機接物은 상대를 따라 바른 應對를 하는 것.
機物은 중생이나 수행자를 가리키며,
應接은 상대에 따라 지도하는 것을 말한다.
*物은 여러 뜻이 있다. ⓵생명이 있는 살아 있는 것.
⓶중생 또는 世人⓷물건
⓸ 實體를 생각하지 않고 感覺, 경험되는 일반적인 것.
⓹실체의 본성, 자성 같은 것. 一物이라 할 경우는 心性을 가리킴.
여기서는 두 번째의 중생과 세인을 가리킨다.
*機는 보통 根機, 機緣이라 함. 발동하는 원동체, 心機, 理機의 뜻.
진리에 결합하는 機關을 말한다.
여기서는 근기보다는 기연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어떤 곳에서는 利物應時라 등재된 곳이 있는데 이는 利物應機의 오류임.
*恡(린)은 悋과 음과 뜻도 같은 자임.
<해설>
깨친다고 함은 본래의 참 마음을 깨치는 것을 말한다.
그 참 마음은 일체 허망을 여의고 진실하고,
상주(常住)하여 불변(不變), 불개(不改) 하므로
진여(眞如)라도 한다.
이 참 마음의 신통 묘용은 깔파타루(kalpataru) 나무와
마니주 같아서 그 지닌 공덕이 한량없다.
그래서 무가보라 했다.
깔파타루 나무는 인도 신화에 나오는
천국에 있다는 나무로 이 나무 밑에 앉아 있기만 해도
모든 소원이 성취된다는 나무다.
<지도론 제59>에서 이 마니주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마니주가 있다. 이 보주의 이름은 여의(如意)라 하고
형상은 없으며 맑고 사무치고 가볍고 묘하여서
사천하(四天下)의 물건들이 모두 다 훤히 나타난다.
이 보주(여의주)는 항상 온갖 보물과
의복과 음식 등을 바라는 바대로 다 그에게 주며
또한 모든 쇠뇌(衰腦)와 병고(病苦) 등을 없애 준다.」라고 했다.
《유마경》 <향적불품>에 이런 이야기도 있다.
「공양할 때가 되자 유마힐거사는 42개 불국토를 지나
중향국(衆香國)에 한 바리의 밥을 빌어와
부처님과 모인 여러 보살과 월계 장자가 다리고 온
8만 4천 명의 사람들에게 공양을 드렸다.
모인 사람들이 어찌 한 바리의 밥으로
이 많은 대중과 보살들이 공양할 수 있을까 걱정하니
유마거사가 말했다. 사해(四海)의 바닷물이 다 말라도
이밥은 다 없어지지 않는다.
모인 여러 보살과 성문 연각, 하늘 사람들이
모두 배불리 먹고도 그 바리의 밥은 없어지지 않았다.」
깨친 이 마음 곧 진여의 신통 묘용의 작용은 이처럼 한량없다.
그래서 중생이 아무리 써도 다함이 없다고 한 것이다.
남명천화상은 이렇게 주(註) 했다.
「거듭해서 무가의 보배라고 말한 것은
이 보배가 실로 세간의 보배가 아님을 밝힌 것이다.
‘쓰고 써도 다함이 없다[用無盡]’라고 한 것을 말해 보자.
세간의 보배는 모두 한량이 있어서 쓰임에 다함이 있다.
설사 팽조(彭祖)와 같은 수명과 석숭(石崇)과 같은
부자일지라도 이것은 한 세대의 영화일 뿐이다.
오직 이 마음의 보배만은 쓰고 써도 다함이 없으니,
위로는 시방제불(十方諸佛)에 이르기까지
무량겁이 지나도록 수용(受用)해도 다함이 없고,
서천(西天) 이십팔(二十八) 조사가 써도 다함이 없고,
당토(唐土)의 6조(祖)가 써도 다함이 없고,
천하(天下)의 노화상(老和尙)이 써도 다함이 없고,
지금, 이 산승(山僧)이 써도 다함이 없다.
“중생을 이롭게 하고 기연에 응하면서
끝내 아끼지 않는다[利物應機終不吝]”라고 한 것을 말해 보자.
십자가두(十字街頭)에서 당당하게 분부(分付)하였으니,
어찌 아끼고 애석해하겠는가.
이로부터 당시 사람들이 받아들이려 하지 않기 때문에
고덕이 말하기를
“여주(驪珠)는 여룡(驪龍)이 아끼는 것이 아닌데,
본래 사람들이 알지 못할 뿐이다”라고 한 것이다.」
본문에 나오는 <응기(應機)>라는 말의 의미에
이해를 돕고자 이에 대한 풀이를 첨삭한다.
이는 윗글 주석서에 함께 설해져 있다.
「『현의(玄義)』에서 말하기를 “기(機)에는 세 가지 의미가 있는데,
첫째의 기는 은미함이란 뜻이다”라고 하였다.
이 때문에 『역(易)』에서는 말하기를
“기(機)는 활동의 은미함이니
길한 조짐이 앞서서 나타난다”고 하였다.
또 『아함경』에서는 말하기를
“중생에게 선법(善法)의 기미가 있으므로
성인이 와서 감응하는 것이다.
중생이 장차 선법을 일으키려 하는 경우,
이 선법이 미미하게 움직이려 하는 것이 기미가 된다”라고 하였다.
가령 장차 선법을 일으키려 함이 기미가 된다면,
이 말은 촉급하게 말한 것이다.
지금 여기에서 일으킬 수 있는 선법을 밝힌다고 말한 경우,
이 말은 넉넉하게 말한 것이다.
비유하면 마치 활[弩]에 발사할 수 있는
기틀이 있기 때문에 활 쏘는 사람이 발사할 수 있는 것과 같으니,
발사하면 화살이 움직이고 발사하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중생도 선법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에
성인이 감응하면 선법이 일어나고
감응하지 않으면 일어나지 않으니,
그래서 ‘기는 은미함이다’라고 말한 것이다.
둘째 『능가경(楞伽經)』의 고주(古注)에서는 말하기를
“기는 연다는 의미[開義]이다. 무엇을 말하는가?
중생에게 선(善)도 있고 악(惡)도 있는데,
성인의 자비(慈悲)를 열기 때문에
기는 연다는 의미이다”라고 하였다.
셋째, 기(機)는 마땅히 해야 한다는 의미[宜義]이다.
가령 무명(無明)의 고통을 뿌리 뽑으려 한다면
마땅히 비(悲)를 행해야 하고,
법성(法性)의 즐거움을 주려 한다면
마땅히 자(慈)를 행해야 하니,
이 때문에 기는 마땅히 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