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정철의 자료를 찾다 보니 그의 조상에 대한 기록도 찾아 진다.
남양주에 있는 조말생의 후손이요, 서산에 있는 조태채의 증손이었기에 그 자료를 가지고
관련 인물을 찾다 보니 조정철이 나왔다.
그리고 조정철의 선정비를 찾으러 멀러 서천까지 갔다 왔다. 조정철의 선정비는 최초로
소개하는 것 같다.조정철에 관련된 기록 보다는 홍윤애와 이룰수 없는 사랑이 지금도 많이 소개되고 있으며,무덤에 가보 니 문중에서 허락하여 묘비에 홍윤애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정조암살미수사건에 뜻하지 않게 연루돼, 제주도로 유배 온 조정철과 사랑하는 조정철을 살리기 위해 기꺼이 자신을 희생한 탐라 토박이 비바리 홍윤애의 이야기가 소설로 재탄생했다. 이 책은 ‘정조암살미수사건’에 근거한 실화 소설로, 조정철이 제주도로 유배를 오면서부터 시작된다. 과거 급제자이며, 명문가 출신인 조정철은 1777년(정조 1년)에 27세 나이로 탐라 제주에 유배돼온다. 당시 정조의 암살미수사건, 즉 정유역변에 연루된 장인 때문에 무고를 당해 유배됐던 것이다. 이로 인해 결국 부인 홍씨는 어린 아들을 남겨둔 채 자결을 하고 말았다.
출처 : 중부일보 - 경기·인천의 든든한 친구(http://www.joongboo.com)
평소 조정철을 눈앳가시로 여긴 판관은 제주에 온 지 하루 만에 하인마저 빼앗아갔고 조정철은 3년간 홀로 유배 생활을 견뎌야 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홍윤애라는 탐라 토박이 처녀 비바리가 조정철의 시중을 들게 됐다. 호기심 반으로 시작한 윤애는 점점 조정철의 사람됨에 빠져들었고, 조정철 역시 윤애를 사랑하게 됐다. 하지만 둘의 사랑은 그 누구도 알아서는 안 되었기에 철저히 비밀에 부쳐졌다.
둘의 비밀스런 사랑 이야기는 홍윤애의 자결로 끝맺음 짓는다. 그로 인해 조정철은 29년 만에 유배에서 풀려나게 되고 순조의 신임을 얻어 제주 목사로 부임한다.
조정철趙貞喆:1751(영조27)~1831(순조31), 학자이며 문신. 제주목사. 본관은 양주(楊州)이며 참판 영순(榮順)의 아들, 자는 성경(成卿) 혹은 태성(台城), 호는 정헌(靜軒) 또는 대릉(大陵).
그는 1810년(순조10) 이현택(李顯宅)의 후임으로 도임하고 1812년 6월에 사직, 1775년(영조51) 정시문과(庭試文科)에서 병과(丙科)로 급제, 신(新)목사는 구실을 만들어 “읍비(邑婢)를 간음하였다.”고 해 조정철은 힐문을 당하고 또 읍비 홍의랑(洪義娘)을 신문, 김시구 목사는 홍랑(洪娘)에게 참장 70을 내린 후 폐사, 때는 윤 5월 15일이었다.
6월 2일 주성 남문 밖에 장(葬)을 지냈다. 조정철은 1811년(순조11) 제주목사로 부임, 홍의랑의 묘소를 찾아 칠언율시(七言律詩)를 지어 돌에 새김으로써 그녀의 원혼을 달랬다.
1777년(정조1) 강용휘(姜龍輝) 등이 정조를 시해하려고 한 사건에 연루돼 죄가 참형에 해당했으나 조태채(趙泰采)의 증손이므로 감형되어 제주(濟州)에 유배된 뒤 정의(旌義)·광양(光陽)·토산(兎山) 등지로 이배됐다.
전 정언 조정철은 1810년(순조10) 9월, 전라도 무장(茂長)현감으로 도임하고 1811년 5월에 제주방어사 즉 제주목사로 옮겨졌다. 1810년(순조10) 풀려나와 정언(正言)·동래부사(東萊府使)를 거쳐 1813년 충청도 관찰사가 됐다.
1816년 이조 참의가 된 뒤 이조참판·대사성·형조참판·좌참찬·대사헌 등을 지내고 1831년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가 됐다.
저서로는 ‘정헌영해처감록(靜軒瀛海處坎錄)’이 있다. 이 책은 조정철의 시집인데 4권 2책으로 된 활자본이다.
1824년(순조24) 저자 자신이 간행했고 권두에 자서와 유한준(兪漢寯), 권상신(權常愼)이 쓴 서문이 있다. 책명을 ‘영해처감록’이라 한 것은 저자가 제주도에서 유배 생활하던 당시에 기록했다는 뜻이다.
당시 제도상 유배생활 중에서 소리 내어 독서하는 것을 금했기 때문에 저자는 무료한 나날을 독서 대신 시작(詩作)으로 보냈던 것이다. 이 책은 시 635수로 구성돼 있다.
대개 정조시해 음모사건에 연루된 억울하고 울분한 심정, 유배지에서 명절을 맞이했을 때의 감회, 그리고 제주도 특유의 풍습, 경물, 기후, 인정 등을 읊은 것들이다.
또한 고인들의 적중음(謫中吟)을 차운한 것이 많고 시제 중에는 자도(自悼)·견민(遣悶)·원회(寃懷)·비원(悲寃)·객한(客恨)·축한(逐恨)·비신세(悲身世)·적중유감(謫中有感) 등 주로 자신의 불우한 신세를 비탄하는 것들로 점철돼 있다.
이러한 감정은 한라산을 읊은 ‘망한라산(望漢拏山)’ 33수와 제주도의 모든 풍경을 읊은 ‘탐라잡영(耽羅雜詠)’, 그밖에 ‘설월(雪月)’, ‘침상(枕上)’, ‘청두우(聽杜宇)’, ‘추흥(秋興)’ 등 어디에서나 나타나 있다.
출처 : 제주일보(http://www.jeju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