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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도 한없이 맑은 지난 10월 세 번째 일요일에는 조촐하지만 소중한 모임이 있었다.
경기도 남양주시에 위치한 ㅇㅇ재활원에서 나눔의 모임 활동 10년째 되는 해를 기념해서 말이다.
중소기업에서 만년 부장의 직함으로 있는 이 선생,
제기동에서 한의원을 운영하고 있는 또 다른 이 선생,
그리고 나까지 포함하여 50대 나이가 모두 셋이다.
50대 삼인방은 늘 부부가 함께 오고, 누나, 남동생의 남매가 있는가 하면,
중학생 아들과 함께 오는 이들도 있었다.
이 활동을 하면서 만나 결혼하였고 그 사이에 둔 4살짜리 아들까지 데리고 이도 있었다.
지난 번 바자회에서 구입한 5,000원짜리 연미색 꼬마용 파티 복장을 하고 온 제자의 딸도 있었다.
그러니까 50 여년의 나이를 뛰어 넘어 함께 어울리는 셈이다.
비록 한 달에 한 번이지만 몇 년을 계속 이어지다 보니,
시설에 있는 원생이나 찾아가는 ‘나누미‘들이 서로의 이름은 물론 사연까지 공유하면서
속속들이 알고 지낸다.
그러하기에 서로가 자신이 할 일을 찾아 익숙하게 적응해 나간다.
주방에서는 밥하고 반찬 만들고, 창문을 활짝 열어 청소하고,
세탁기 돌려 빨래를 널고, 어울려 몸싸움도 하며 이야기 나누고. 오목이나 장기를 두기도 하고 한다.
이미 한 달 전에 미리 다음 메뉴를 계획하고 전날 청량리 경동시장에서 장을 보아 온다.
음식점 요리사 몇몇이 중심이 되어 70․80명 분량의 식사를 준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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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처음에는 무엇을 할지 몰라 한참동안이나 망설였었다.
한의사는 침을 놓고 부황을 뜨기도 하고, 중년들은 지압과 안마를 하는 이도 있고,
여자들은 주방에서 이런저런 일을 하고, 유치원 교사는 음악이나 율동을 지도하는데,
도대체 나는 할 줄 아는 게 있어야지, 해서 처음에는 이발 기술이라고 따로 배워 볼까 생각도 했었다.
가만히 살펴보니 젊은 원생들과 어울려 웃고 떠들고 어울리지만,
나이 든 원생들이 모여 있는 방은 가기를 꺼려하기에 40대 나이의 중년들은 우두커니 있기에
주로 그 방에 들어가서 말을 걸고 같이 둘러 앉아 밥을 같이 먹고 하였다.
그러기를 2년 정도 하였더니, 한번은 휠체어를 탄 어떤 이가 발을 씻어 달라고 하였다.
양말을 벗기니 차마 볼 수 없을 정도로 일그러진 형태와 속이 울렁거릴 정도의 역한 냄새가 났다.
정말 내키지 않았지만 “그래도 내가 못 할 일도 아니지.‘” 하면서
몇 번이나 반복하여 발을 씻으면서 나 스스로를 돌이켜 보는 계기가 되었다.
다음 달에 갔더니 옷 깊숙이 감춰 두었던 딸아이의 사진을 보여주기도 하였고,
자신의 이야기, 또 주변의 이야기도 털어 놓았다.
또 어떤 이는 유효기간이 훨씬 지난 요구르트도 챙겨 놓았다가 슬쩍 내주기도 하였다.
그러하기에 각종 사고 등으로 인한 후천적 장애가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는 사실,
하나가 아닌 다중 장애가 많다는 거,
신체적으로는 불편하나 정신적으로는 일반인과 다를 바 없기에 갖는 고충을 이해할 수가 있었다.
해서 듣고 느낀 내용들을 모아 몇 편인가는 글로 정리하기도 하였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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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서, 모임에 오는 이들에게 다른 방에 거주하는 누구를,
여자 방에 거주하는 누구를 주목하여 어울려 보라고 슬쩍 코치(?)도 해주었다.
보람이 있어서인지, 시 문집을 전해 준 이의 글을 부분적으로 수정하여 응모하였더니 백일장에서 상을 탔고,
또 어떤 이는
보치아(boccia) 국내 대회에서 2위를 하였고,
그로 인해 세계 대회에 한국 대표로 참가하느라고 2주일 동안 캐나다에 다녀오기도 하였다.
유치원 교사들이 연말에는 나눔의 모임과 재활원생들이 어울려 연극도 하였고,
자신이 근무하는 유치원생들이 단체로 방문하여 좋은 결과가 있었다기에
동작 교육구청으로부터 사례 발표도 있었다.
무엇보다도 다행인 것은
장마철이면 조마조마했던 10평 정도의 움막 생활에서 벗어나서 슬레이트로 얼기설기하게 만든 가건물로 옮겼고,
지난해부터는 보일러 시설을 갖춘 2층짜리 신축 건물로 옮겨 생활이 크게 편안해졌다는 사실이다.
그럭저럭 모임이 시작된 지 꼬박 10년이 되었다.
중간에 그만두고, 또 새로이 나오고 하여 지금은 40 여 명에 이른다.
집안 일로 바쁜 이 선생은 때로는 아침 7시에 왔다 가기도 했고,
팀장격인 노처녀(아닌 골드미시)가 해외 출장 갈 때는 동생들에게 반드시 다 챙겨 놓고 갔다.
주방장으로 있다가 작은 중국집을 직접 운영하는 이는
때로는 일용직을 구해 놓고 자신은 나와 식사를 해 놓고 가기도 했다.
누가 시켜서 하는 일도 아니고, 더더욱 돈이 생기거나 생색이 나는 일이 아닌데도 말이다.
나눔의 활동을 하면서 느끼는 건 정말이지 예쁜 짓(?)을 하는 젊은이들이 의외로 많다는 점이다.
늦게 일어나서 엄마가 해주는 밥을 겨우 먹고, 방은 또 어지럽혀 놓고 나가는 게
대부분의 우리네 아들, 딸이 아니던가?
엄마 생신 날 한 끼 미역국을 끓여 놓고 왜 그리도 생색은 내는지…아닌가, 우리 집만 그런가?
헌데, 어찌도 그리도 야무지게 부엌일을 잘 하는지,
심성(心性)은 또 얼마나 고운지, 남을 헤아리는 마음 씀씀이 하며,
생각이 그리도 깊은지 꼭 조카를 소개시켜 주었으면 좋겠다는 이 선생 부인의 말이 허투루 들리지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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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무원 시험이 1차는 필기시험이지만, 2차는 지역에 따라 심층 구술이나 실용 영어를 강조하는데,
경기도 지방직 시험은 봉사활동 여부를 중시하기도 한다.
그러하기에 3년 전 쯤부터 강의실에서 슬쩍 한번 운을 떼었더니
귀담아 듣고 있던 학생들도 참여하여 그럭저럭 내 제자들만 해도 20명 정도 된다.
모두가 학교 교육 마치고, 나름대로 사회생활도 해 보았고,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의 나이가 주류를 이르기에 영향력은 크다.
나는 그냥 수업 한번 들었다고 제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랫동안, 그리고 이런 저런 정(情)이 쌓여서 끈끈한 관계가 이어질 때
비로소 스승과 제자라는 관계가 형성된다고 생각하고 있다.
공무원이 되었거나, 설령 포기하고 다른 직장을 잡았더라도
계속 ‘나눔의 모임’ 활동을 통해 따르는 제자들을 대하면서 남다른 희열을 느끼곤 한다.
스스로도 몸이 불편한 제자 3명은 그 누구보다도 봉사활동에 적극적이었고,
“언니, 어떻게 교육을 시키면 애가 잘 될까요?”
하면서 찰싹 붙는 학부형인 여자 제자가 집사람도 싫지는 않은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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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인가 복지 시설을 운영하는 이를 바라보는 나의 입장도 그렇다.
아무래도 이건 아닌데 하는 게 뻔히 눈에 보이기도 하지만,
종교인이라고 투철한 신념을 갖고 실천하는 게 아니라
이를 운영하여 자신의 가족들 생활비를 충당하는 직업인이라고 치부하면 그리 실망할 것도 없다.
이른바 ‘봉사활동’도 그렇다.
무슨 대단한 사명감이 있어서는 아니라 그저 취미 생활 중의 하나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누구는 필드에 나가 공을 치고, 옷이나 가방 등 원하는 물건을 쇼핑하면서 만족을 얻듯이
이도 반복하다 보면 재미가 꽤 쏠쏠하기 때문이다.
‘자원봉사’한답시고 몇 번 가다 말거나, 돈 몇 푼 전하고 생색내는 게
누구에게는 큰 상처가 된다는 건 경계해야 하면서 말이다.
이 부장이 하는 말이 있다.
“오 선생, 야외에 나와 같이 어울리고, 결 고운 젊은 친구들로부터 대우받고 이 얼마나 좋소?
이게 훌륭한 노후대책이 아니고 무엇이겠소?”
또 동갑 나이인 이 선생 부인은 집사람에게 자주 그런 이야기를 건넨다.
몇 년 후 쯤 서울 외곽으로 같이 이사해서 앞, 뒷집에서 이웃하여 살자고 말이다.
허허, 지금도 부인들끼리 단짝이 되어 남편들 흉보기에 여념이 없는데,
행여나 더욱 그렇게 되지는 않을까 심히 걱정을 하면서
아무래도 오늘은 남자들끼리 모여 대책회의 삼아 가볍게 한 잔 해야 하겠다.
(2007.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