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연정사는 조선 중기의 명신이며 대학자요, 문인이었던 서애 류성룡 선생께서 세워 학문을 연구하고 제자를 양성하던 곳이다. 부용대 동편 기슭에 자리 잡고 있는데 겸암정과는 부용대를 좌우로 하여 대칭되는 위치에 있다. 서애 선생은 부용대 아래 물빛이 옥과 같이 고운 곳에 정사를 짓고 나서 정사를 지은 배경과 과정 그리고 주변 풍광을 기문에 적어 남기고 있다. 기문에 의하면 원지정사를 지어 그윽하게 마음공부를 하려고 했으나 마을 안에 있어 부족한 점이 많아 강 건너 북쪽 돌벼랑 동쪽에 터를 잡아 집을 짓고 늙도록 거처하고자 했다. 그러나 경제적인 이유로 일을 진행시키지 못하다가 마침 산승(山僧) 탄홍(誕弘)이란 자가 스스로 그 건축을 주관하고, 속백(粟帛, 조와 비단)으로 물자를 대겠다고 하여 집 짓는 일을 추진하게 되었다. 그 일은 1576년부터 1586년에 걸쳐 이루어졌다고 적혀 있다.
물빛에 드리운 옥연정사
당호를 옥연서당이라 한 것은 이 아래가 깊은 소이고, 그 물빛이 옥과 같은 까닭에 그렇게 한 것인데, 구슬의 깨끗함과 못의 맑음은 모두 군자가 귀하게 여길 도(道)라고 하였다. 선생은 벼슬살이의 험난한 영화를 벗어나 이곳에서 주변의 아름다운 풍광 속에서 자연을 벗 삼아 소박한 삶을 꾸려가면서 수양하고 학문을 닦고자 했을 것이다.
옥연정사 위에서부터 간죽문, 세심당, 감록당이다.
정사의 규모는 동쪽에 6칸의 ‘一’자형 대문채를 두었고 ‘一’자형 안채를 동향해서 앉혔는데 안채는 부엌을 한가운데에 두고 그 양편에 방을 두어 평면이 도투마리집의 형태를 띄고 있다. 정사는 서당과 사랑채로 구성되었다. 서당의 당호는 세심재(洗心齋)로 정면 3칸, 측면 2칸 반의 규모이며, 당호는 주역의 계사에 “여기에 마음을 두어 만에 하나라도 이루기를 바란다”는 뜻을 담고 있다. 마루는 ‘감록헌’이라 했으니 왕희지의 '우러러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아래로 푸른 물 구비를 바라보네'라는 시어에서 따온 것이다. 감록헌 마루를 가운데로 두고 좌우 방 1칸이 있으며 서애 선생께서 서당으로 썼다.
사랑채는 2칸 방과 마루를 두었다. 방은 완적재(玩寂齋)로 서애 선생께서 이 방에서 징비록을 저술하셨다. 마루는 애오헌으로 도연명의 시에 '오역애오려(吾亦愛吾廬, 나 또한 내 오두막집을 사랑하노라)' 라는 시어에서 따온 것이다. 정면에 원락재(遠樂齋) 편액이 걸려있다. 원락재는 논어의 “有朋 自遠方來 不亦樂乎(유붕자원방래 불역락호)”에서 따온 이름으로 ‘친구가 먼 곳으로부터 오니 어찌 즐겁지 아니하겠는가’라는 멋스러운 방이다. 옥연정사는 울창한 숲을 끼고 있어 그 경치는 하회마을 안에서도 손꼽히는 곳에 자리 잡았다.
간죽문, 간죽문을 나서면 층길로 이어진다.
정사의 옛 경관은 서애의 옥연정사 기문에서 충분히 짐작할 수 있고, 손자인 졸재 류원지의 하회 16경 중 옥연정사와 관련된 부분에도 잘 묘사되어 있다.
“옥연서재의 서쪽에는 솟아오른 대(臺)가 세 개 있으니, ‘쌍송(雙松)’과 ‘광제(光霽)’와 ‘달관(達觀)’이다. 모두 강물에 임했는데, 달관대(達觀臺)는 가장 높은 곳에 겸암과 서로 마주 보고 있다. 마암(馬巖)은 그 사이에 있는데, 석벽(石壁) 아래와 강둑 위의 중간에 있어 계선암(繫船巖)과 형제를 이뤄 서로 위아래로 위치해 있다. 도화천(桃花遷)도 그 동쪽에 있고 오솔길이 산허리까지 이어져 있어 왕래할 만하다.
두 곳의 정사는 모두 하회마을을 굽어볼 수 있다. 밥 짓는 연기가 뽕나무숲으로 스며들고, 어부와 나무꾼이 서로 답하며, 닭 우는 소리와 개 짖는 소리가 서로 들리니 또한 매우 한적하여 그윽한 정취를 만들어 준다. 산천의 맑고 아름다움은 기상이 달라지는 것에 따라 사시(四時)의 경치를 달리하니, 한결같지 않고 아침저녁으로 각각 달라 언어로 이름 짓고 묘사하기가 어렵다. 마을의 승경은 모두 강의 북쪽 일대에 있는데, 이를 거두어 정사가 가지고 있다.
정사의 오른쪽으로는 간죽문이 있다. 아쉽게도 간죽문 주변에 대나무는 무성하지 않다. 간죽문을 들어서면 바로 사랑채, 이어 별당채 이렇게 이어진다. 서애는 정사에서 징비록을 쓰다가 잠시 쉬는 틈에 간죽문을 나서 빈터에 앉아 쉬었을 것이다. 간죽문을 나서면 천혜의 절벽인 부용대 벼랑 3부 능선으로 겸암정까지 당도할 수 있는 길이 열려 있다. 그 길을 ‘층길’이라고 부른다. 지금은 다소 위험하지만 마을 사람들 말로는 나무지게를 지고도 내왕했을 정도였다고 하니 당시 두 형제분께서 즐겨 이 길로 왕래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절벽에서 마을을 바라보는 경치가 일품이며 이곳을 오가며 바위에 새겨진 암각서를 통해 선생의 발자취도 더듬을 수 있다.
간죽문에서 바라보는 하회마을, 화천을 유유히 건너는 나룻배가 그림같다.
지금은 배가 다니지 않아 아쉬움이 크다.
다시 나룻배가 물길을 가를 날을 기대해 본다.
봄이 와 강 위에 부슬비 내리고 / 細雨春江上
앞산은 그윽하게 저녁 노을이 지는데 / 前山淡將夕
마음에 그리는 사람 볼 길 없고 / 不見意中人
매화가 홀로 피었다 지고 있네 / 梅花自開落
- 서애, 간죽문(看竹門) -
간죽문에서 나오면 층길로 이어진다.
화산과 화천 위로 솟아오르는 월출 장면은 압권이다.
서애는 임진왜란의 쓰라린 경험을 거울삼아 다시는 그러한 수난을 겪지 않게 후세를 경계하기 위해 옥연정사에서 『징비록(懲毖錄)』을 저술했다. 정사 안마당에는 멋진 노송이 있다. 노송은 옥연정사의 세월을 묵묵히 기억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