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이 웨이
누가복음 13:31-35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말씀을 듣는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길 빈다.
사순절 둘째주일이다. 봄이 왔다. 어제 색동가족 20명이 관악산으로 산책을 다녀왔다. 봄이 왔는지 살펴보았다. 국기봉 능선에는 아직 간밤에 내린 눈이 남아있었지만, 올라가는 길에는 생강나무와 산수유가 피었고, 진달래도 곧 꽃을 터뜨리려고 잔뜩 벼르고 있었다.
오늘은 3월 가족예배이다. 세대가 함께 어울려 예배드리니 마치 봄이 온 것 같다. 얼마나 평화로운가? 청년들이 모처럼 찬양대에 서니 므흣하다. 어린아이에게도 어른들의 경건한 예배를 익히게 하면 좋겠다. 지루하다는 편견을 버리도록 우리 어른들이 더 즐거워하고, 반응해야 한다.
사순절은 예수님과 함께 걷는 절기이다. 일 년 365일 모두가 그렇지만 사순절은 훈련하는 기간이다. 어떻게 훈련이 가능할까? 인디안 슈익스는 “우리가 남에 대해 얘기하려면 그 사람의 신발을 신고 6일을 걸어 보라”고 했다. 우리가 예수님의 샌달을 신고 걷는다고 생각해 보자. 헐렁해 질질 끌고 다니건, 발에 꼭 끼어 고통을 느끼던 간에 어떤 경우든 우리들의 신앙성찰에 도움이 될 것이다.
사순절은 우리를 새로운 신앙의 길로 인도한다. 내 길을 찾는 기회이다. 새로 오신 분들이 여럿이니 이 시간 색동교회의 인사를 함께 배워보자.
모든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주님의 이름으로 모인 모임에서 평화의 인사를 나눈다. 색동교회만 유별나서 하는 것이 아니다. 초대교회부터 오래 행해온 전통이다. 3세기 초 작성한 것으로 추정하는 히폴리토의 ‘사도전승’ 4장에 평화의 인사가 나온다. 이 인사법은 하나님이 우리 안에 현존하심을 기원하는 유대인의 일상적 인사인 ‘샬롬’, 곧 ‘평화가 당신과 함께’에서 빌려온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더욱 자주 “주님의 평화”를 반복할 뿐 아니라, 그런 평화의 마음을 간직하고, 표현하고, 증거하고, 그 평화의 마음을 품고 살아야 한다.
1)
오늘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길가는 법을 가르쳐 주신 예수님 이야기다. 어떻게 ‘내 길’(My Way)을 걸어갈까? 배경은 예수님 일행이 예루살렘을 향해 걸어가던 도중에 일어난 일이다. 어떤 바리새인들이 짐짓 예수님을 위해 조언하면서 예루살렘으로 가지 못하게 한다.
“곧 그 때에 어떤 바리새인들이 나아와서 이르되 나가서 여기를 떠나소서 헤롯이 당신을 죽이고자 하나이다”(31).
당장 예수님의 평화가 위협을 받고 있다. 단지 일상이 훼방 받는 것이 아니라, 죽일 음모에 직면한 것이다. 당시 예루살렘에서는 헤롯 왕이 주인노릇을 하는데 그가 예수님을 죽이려 한다는 것이다. 그는 이미 세례 요한을 죽인 바 있으니 그럴 만도 하다.
그런데 예수님을 배척하는 세력은 헤롯뿐이 아니다. 당시 성전을 독점한 권력자들이요, 성전의 권위를 유지하려는 대제사장과 바리새인 등 종교인들도 같은 편이었다. 그런데 그들 중 어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일러주니 예상이 가능한 심각한 일이었다.
물론 사람들이 예수님을 적대시하고, 하나님의 복음을 배척한 것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었다. 공관복음에 따르면 예수님은 가난한 이방의 땅 갈릴리에서 오히려 크게 환영을 받았다. 그런데 예루살렘은 사정이 전혀 다르다. 그리고 지금 예수님은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중이다.
헤롯 이전에도 예루살렘의 권력자들은 하나님의 공의를 전하던 선지자들을 박해하고, 죽였다. 예수님은 이러한 역사와 현실을 회고하면서, 탄식하셨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34).
예루살렘은 왜 그렇게 무시무시한 음모의 도시가 되었을까? 예루살렘이 처음부터 그런 것은 아니다. 다윗이 통일왕국을 이룬 후 여부스 족속이 살던 이방인의 땅에 시온성을 세우고 수도로 삼았다. 그 아들 솔로몬은 그곳에 성전을 세웠다. 본래 이름은 ‘예루와 샬롬’이 합하여 ‘평화의 토대’, ‘평화의 도시’라는 뜻이다. ‘살렘’은 이름 그대로 ‘하나님의 평화’이다.
우리가 사랑하는 히브리어인 ‘샬롬’은 유대인 뿐 아니라 모두의 인사말로 사용한다. 유대인들은 “샬롬!”, 아랍인들은 “앗살롬알레이꿈!”이라고 서로 인사한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보면 예루살렘은 늘 곤경을 당하였다. 미국 유대교 잡지 <모멘트 메거진>(2008. 6)에 따르면, 예루살렘은 2차례 완전히 파괴되었고, 23차례 포위되었으며, 52차례 공격을 받았고, 44차례 점령과 탈환을 반복했다고 한다. ‘분쟁의 도시’의 대명사가 되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의 앞날을 미리 내다보셨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 바 되리라”(35).
예수님은 분노의 도시요, 동시에 평화의 도시인 예루살렘에서 승부수를 던지고자 하신다.
“그러나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33).
내가 살아도 예루살렘에서, 죽어도 예루살렘에서 죽겠다는 말씀이다. 그것이 ‘내가 갈 길’(My Way)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평화를 상실한 예루살렘과 그 사람들을 위해 울라고 하신다.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눅 23:28)
거룩한 성전의 도시, 예루살렘은 지금도 세계의 화약고와 같다. 지금 우리가 그곳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찾아보기 힘들다는 것은 큰 비극이다. 먼저 예루살렘을 비롯한 모든 분쟁의 땅에서 하나님의 얼굴, 곧 평화를 회복해야 한다. 그래야 온 세상의 평화의 질서가 회복된다.
2)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향하신다. 누가복음은 무려 10장 분량의 여정(눅 9:51-19:27)을 진지하게 담아냈다. 그 여정 속에 예수님이 하신 말씀의 정수가 담겨있다. 예수님과 주님을 따르는 제자 일행의 길 위의 행적을 보면 그들은 두려움은커녕 자유를 향해 새로운 출애굽(Exodus)을 하고 있다.
예수님은 내가 두려움 때문에 그 길을 포기할 성 싶으냐고 반문하시면서, 나는 ‘내 길’(My Way)을 간다고 단호히 말씀하신다.
“이르시되 너희는 가서 저 여우에게 이르되 오늘과 내일은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고치다가 제삼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 하라”(32).
예수님의 길은 오늘과 내일은 하나님 나라 운동을 쉼 없이 하고, 그리고 제3일에 그곳에서 죽임을 당한다고 하더라도 결코 피하지 않겠다고 단호히 말씀하신다.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33).
예수님은 그런 폭력적 음모와 계획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목적을 계속하신다.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한다’고 하시는 것이다.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은 평화를 잃은 상태를 보고, 주저 앉거나 포기하지 않는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과 그리스도인들이 남다른 용기가 있어서가 아니다. ‘제3일’에 대한 신앙 때문이다. ‘제3일’은 모든 것이 회복되는 부활의 사건이 있는 시간이다.
구약에서 호세아는 제3일의 구원에 대해 일깨우고 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호 6:1-2).
성경에서 제3일의 신앙은 부활의 날이요, 생명의 날이다.
우리도 모두 길을 가는 사람들이다. 그냥 ‘인생은 나그네 길’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의 길은 다르다. 분명한 목적지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리스도교의 역사관을 목적론적 역사관이라고 부른다. 존 번연의 ‘천로역정’(하늘가는 길)도 그것을 반증한다. 어떤 시인이 종교는 ‘강을 건너는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이미 강물에 몸을 적신 사람이다.
예전에 우리는 종교인을 가리켜 도인(道人)이라고 했다. 도인 혹은 도사는 점을 치고, 이상한 주문을 외우며, 신기한 일을 행하는 자로 알고 있다. 그러나 도인이란 ‘길 도’(道)자를 써서 말 그대로 ‘길 가는 자’를 의미한다. 진리의 길을 찾아가는 자, 진리이신 그 분을 따르는 자, 그가 도인이다.
나는 예수님의 길을 따르는 사람이다. 아주 젊은 시절만 하더라도 늘 도 닦는 기분이었는데, 나이가 들면서 직업의식만 발달하였다. 베드로처럼 ‘여기가 좋사오니’라고 내 이해관계를 앞세우고, 한 달란트를 땅에 묻어둔 종처럼 무사 안일함에 빠져 살기도 한다. 종종 하나님의 영광보다 내 명예와 자존심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 이런! 얼마나 형편없는 종놈인가.
우리 그리스도인은 모두 길가는 자이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과 함께 길을 찾고, 길을 따라 가며, 때론 나 자신이 다음 세대를 위해 길이 되어주어야 한다. 예수님은 주님의 길을 가시면서, 너희도 나를 따르라고 하신다. 우리 주님은 책망을 앞세우기보다 늘 나를 격려하시고, 등을 두드려주시며, 손잡아 주신다. 그리고 제3일의 기적을 꿈꾸게 하신다.
지금 내 믿음의 길은 어떤가? 몹시 미적지근하고, 어영부영하지는 않은가? 그 까닭은 무엇일까? 변화를 향한 모험이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부르심을 들어도,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아도 무감각하다. 우리 주위에 거룩한 모험을 방해하는 유혹이 너무 많은 탓이다. 그럼에도 이 세상에 변화가 필요 없을 만큼 거룩한 사람은 단 한사람도 없다. 하나님의 부르심과 인간의 응답은 그 어떤 경우에도 특별하고, 아름답다.
하나님은 내게 복된 시작을 허락하시려고 오늘 여기에 나를 부르셨다. 그리고 매번 우리에게 너의 출애굽을 하라며 결단을 촉구하신다.
우리가 내 길을 걸어가다가 아브라함처럼 마므레의 상수리 나무아래 쉬고 있을 때나(창 18:1), 요나처럼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정반대 방향인 다시스 행 배를 탈 때나(욘 1:3), 혹은 저마다 자기 인생의 여리고나 엠마오로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주님은 다양한 모습으로 우리를 만나 주신다.
내가 흔들리지 않으려면 무엇보다 자신만의 매뉴얼을 잘 아는 것이 필요하다. 나 자신을 살펴보자. 얼마나 고급 장비인가? 요즘 카메라를 구입하면 두꺼운 사전 하나가 매뉴얼로 제공된다. 그런데 나는 천하보다 귀한 존재이다. 나라는 장비와 시스템은 일평생 내가 직접 관리하고, 운영하며, 책임져야 한다. 내 인생의 관리자요, 운영자인 나는 과연 얼마나 엄격한 훈련과 실무능력을 갖춰야할지는 내가 잘 안다.
내가 나답게 잘 살기 위해서라면 공부와 훈련 없이 함부로 덤벼들어서는 안 된다. 나를 어떻게 관리해야 할지,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 문제가 생기면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내가 다 알고 있다고 장담하지 마라. 행여 나는 무면허인 채 나를 몰고 다니지는 않은가? 평생교육 없이 나이 타령이나 하고, 애정 없이 나를 다루고 있는 것은 아닌가?
지금부터라도 내 인생의 매뉴얼에서 가장 소중한 것들을 점검해보자. 내 소명, 내 가족, 내 직업의식, 내 정체성, 내 인간관계들, 나를 둘러싼 환경과 조건, 무엇보다 내가 평생 추구하고 걸어가야 할 믿음과 같은 것들이다.
그리하여 프랭크 시나트라가 부른 ‘마이 웨이’의 가사처럼, 내가 인생의 마지막 커튼의 막을 닫기 전에 ‘내 삶이 참으로 충만한 삶을 살았다’고 회고하며,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란다.
3)
사실 새봄맞이도 혼자하면 엄두를 못 낸다. 동네 산인 관악산 둔덕조차 너무 멀고 아득하게 느껴진다. 아직 날씨는 춥고, 토요일의 늦잠은 나를 유혹한다. 그런데 색동가족 산책처럼 함께하면 할 수 있다. 예수님의 길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믿음의 형제자매로서 동행하고 있는 중이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누구보다 예수님의 화해의 길, 평화의 길을 배워야 한다. 우리 민족의 화해와 통일의 경우만 보더라도 그것은 나중에 맛 볼 수 있는 그냥 비전의 문제가 아니라, 당장 감당해야할 일상의 관심사요, 일용할 숙제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매일매일 마주하고 있는 ‘그 불편한 현상들’과 부지런히 씨름해야 한다.
얼마 전 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에는 장애인을 위한 길이 없었다. 그런데 장애인의 이동권을 위한 투쟁이 그 길을 만들어 낸 것이다. 그것은 장애인 만 아니라 우리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편리하고 안전한 평화의 길을 만들어 주었다.
우리 시대에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 중에 프랑스 떼제공동체 신한열 수사가 있다. 그는 서강대 신문방송학과 학생이었는데 불어강독교실이란 수업시간에서 한때 떼제공동체 수사였던 안선재(안드레) 교수를 만나면서 나중에는 평생 떼제공동체 수사로서 헌신하게 되었다.
어리버리 한 새내기였던 그는 우연히 영어강독교실을 불어강독교실로 잘못 알고 들어갔다고 한다. 처음 교실을 잘못 찾은 결과, 그의 인생이 전적으로 바뀌었다. 하나님은 그렇게 평화의 일꾼을 부르셨다.
난 색동교회 전도법이 ‘젊고 따듯하며 평화로운 신앙공동체’의 모습이길 바란다. 평화를 위해 힘쓰는 우리 자신을 보고 사람들이 하나님의 샬롬을 느낄 수 있다면,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나라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우리 시대 1등 전도법이 아닐까?
예수님의 말씀처럼, 하나님의 평화를 먼저 내 마음에 모셔라. 늘 평화를 구하고, 찾으며, 그렇게 살라. ‘바다를 포기하지 않는 강물처럼’ 그렇게 평생 한 걸음으로 믿음의 길을 걷기 바란다.
하나님의 평화가 예수님의 길을 따라 걷는 우리 모두와 함께하시길,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