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류석동의 <성서조선> 창간사
▲김교신 선생은 서구로부터 번역된 신앙이 아닌 '조선산 기독교'를 강조했다. 그는 기독교의 본질은 자신의 삶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일치라는 것을 몸소 보여줬다. 사진 속 김교신 선생은 두번째 줄 오른쪽에서 네 번째.ⓒ김교신선생기념사업회 제공
<성서조선> 창간사는 1절과 2절로 구분되어 있다. 1절 끝에는 ‘교신敎臣’, 2절 끝에는 ‘삼안三眼’으로 글쓴이가 표시되어 있다. ‘삼안’은 동인의 한 사람이었던 류석동의 필명이다. 김교신의 <성서조선> 창간사는 유명하지만 류석동의 창간사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류석동의 창간사에 드러나는 목소리는 김교신의 창간사와 비슷하다. 하나는 조선인의 억눌린 자로서의 정체성을 분명히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심장육편에 「조선인」이라는 낙인이 꽉 박혀있는 우리는 어찌하면 좋을까.’라고 고통스럽게 묻는다. 이 물음은 김교신이 연락선 갑판을 발로 구르며 ‘아무리 한대도 조선인이로구나!’라고 외쳤을 때의 그 외침과 정확히 같은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기성 교회에 대한 비판이었다. 그는 조선에 예수 이름 부르는 교회가 많이 있음을 기뻐한다고 하면서도 신앙 없는 교회, 의식儀式과 사업에 떨어진 교회, 사교장이 된 교회에 대해 증오를 느낀다고 했다. <성서조선>이 처음부터 기성 교회를 비판하고 나선 데는 무교회주의자 우치무라 간조의 영향이 컸을 것이다. 류석동이 '신앙의 절대 자주를 고창'하고자 한 데도 우치무라의 가르침이 바탕을 이루고 있었다.
류석동에 대해서는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창간사’를 쓴 것으로 보아 <성서조선> 초기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것 같다. 김교신의 ‘창간사’는 <성서조선>을 펴내게 된 경위를 다음과 같이 알려주고 있다. 조선을 같은 마음으로 사랑하고 염려하는 이들 5, 6인이 도쿄 시외 스기나미촌에 처음으로 모여 ‘성서조선연구회’를 시작하였고, 매주 정기적으로 모여 조선을 염려하고 성서를 공부한 지 반 년 만에 <성서조선>을 펴내게 되었다는 것. 처음 몇 년 간 정상훈이 편집인을 맡았고 류석동은 창간호부터 7호까지 발행인을 맡았다.
류석동은 <성서조선> 창간호에 「아브라함의 신앙」을, 2호에 「고민의 사도 욥」을 발표했고, 3호와 6호에는 ‘고-데’의 「예수그리스도」를 번역하여 수록하였다. (‘고-데’는 <성서조선> 동인들이 성서 연구를 위해 많이 참고했던 신학자인 것 같다. 또 다른 <성서조선> 동인이었던 정상훈도 9호부터 몇 회에 걸쳐 ‘고-데’의 「생명의 발달」을 번역 수록하였는데, 이 번역 첫 회 수록분 서두에 ‘고-데’를 스위스의 경건한 성서학자로 소개하고 있다.) 「아브라함의 신앙」과 「고민의 사도 욥」은 성서 본문을 구체적 상황을 상상적으로 떠올려 이해하려 한 글로 류석동의 문학적 감수성을 엿볼 수 있다.
류석동은 성서연구회 모임에서 영어사를 강의하기도 했다. 특히 그의 글과 활동에서 밀턴 애호가로서의 면모가 드러난다. <성서조선> 초기부터 「밀톤의 신앙시 3수」, 「밀톤 어록」 등 밀턴의 글을 번역하여 발표하기도 했고, 일본인 연구자가 쓴 「밀턴의 「실낙원」 연구」라는 논문을 소개하기도 했다. 1930년 여름 김교신과 류석동, 송두용 3인은 오산과 선천을 차례로 방문하였고, 오산에 있던 함석헌과 선천에 있던 양인성을 만나 두 곳에서 이틀씩 집회를 열었는데, 이 집회에서 류석동은 「청년기의 존 밀턴」, 「종교시인 존 밀턴」을 강연하였다. 류석동의 밀턴 연구가 어느 정도 수준이었는지, 어떤 맥락에서 수용하였지는 분명하지 않다. 「밀톤 어록」 말미에 다음과 같은 짧은 후기를 덧붙이고 있다.
1930년 9월, 송두용이 오류동으로 이주하여 농사에 전념하게 되자 류석동도 송두용과 함께 오류동에 자리 잡은 것 같다. 오류동에서 별도의 성서연구회 집회를 열어 1931년과 32년 사이 김교신도 오류동 모임에 참여하였고 차차 모임이 안정되자 분리한 듯하다.
이 무렵 류석동은 모종의 신앙 체험을 하게 된다. 1932년 말부터 1933년 한 해 동안 「나의 신앙」, 「나의 걸음」 등 많은 글을 발표하였는데 그의 활동이 신앙 체험과 관련된 것 같다. <나의 걸음(3)>에서 류석동은 이 체험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류석동은 1934년 2월 「갈라디아서 연구(6)」을 끝으로 <성서조선>에 더 이상 글을 발표하지 않았다. 1934년 초 류석동은 <성서조선>과 절연한 것으로 보인다. 이 무렵 류석동의 사정을 김교신이 전하는 '성조통신'(1934년 4월)으로 짐작해 볼 수 있다. 류석동은 1934년에도 갈라디아서 연구와 예언서 연구를 계속해서 발표할 예정이었으나, 스스로 지식을 쌓고 <성서조선>의 내실을 도모할 필요가 있으니 기독교 역사, 고전 독해를 하자는 제안을 했고 이를 김교신이 고맙게 수용하였으나, 일주일 후 더 이상 <성서조선>에 글을 쓰지 않겠다고 알려왔다. 이에 김교신은 독자에게 대한 약속이 있으니 다시 생각할 것을 촉구하였으나, 이틀 후 김교신은 결국 절연장을 받게 된다. 1934년 1월 말에서 2월 초 사이에 있었던 일이다.
김교신이 발췌하여 전하는 류석동의 절연장에 따르면 동인들, 또는 이 둘을 잘 아는 이들 사이에서 류석동에게 <성서조선> 주필을 맡으라는 요구가 있었던 것 같다. 이런 요구가 얼마나 진지한 것이었는지 알 수 없으나, 수년간 김교신이 홀로 <성서조선> 편집의 부담을 져 온 데다 류석동이 1933년 한 해 동안 많은 글을 발표하며 활발한 활동을 펼치자 자연스럽게 제기되었을 수는 있겠다. 하지만 류석동이 생각하기에 자신은 김교신과 신앙의 색채가 달랐고, 이 시기 <성서조선>은 김교신의 책임 아래 간행되고 있었기에 주필에 관한 요구가 부담스러웠던 것 같다. 한편 류석동은 송두용과도 불편한 관계에 있었던 듯하다. 송두용이 농촌에 사명을 가져 정착한 데 반해 류석동은 그렇지 못하였고, 이런 사정 때문에 송두용과 함께 모이던 모임도 분리하게 된다. 김교신에게 보낸 절연장의 마지막 구절에서 류석동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저는 아마 아직도 방황하여 걷습니다. 방황하는 자의 신앙으로써 일생을 마칠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면 서로 고독 속에서 주를 따라가옵시다.’ 혼자서 <성서조선> 편집을 도맡아 하면서 건강을 상하기까지 악전고투하고 있던 김교신으로서는 류석동의 절연장이 못내 섭섭하였을 것이다. 다음 글에 이 무렵 김교신의 내면이 드러나 있다.
아래에 류석동의 <성서조선> 창간사 전문을 옮긴다.
앞길 뒷길 다 막힌 조선이다. 낮이면 낮 밤이면 밤 그칠 새 없이 반도의 중축中軸을 흔드는 단말마의 신음이 들려온다. 벌써 최후의 날이 온 것 같다. 푸른 창궁蒼穹과 아름다운 산천은 석별의 눈물을 흘리고 있다.
심장육편心臟肉片에 「조선인」이라는 낙인이 꽉 박혀있는 우리는 어찌하면 좋을까. 참혹한 운명에 전율하여 자살을 할까. 그렇지 아니하면 운명에 전부를 맡겨버리는 숙명론자가 될까. 아니, 아니. 우리의 조선에 대한 사랑은 자살하며 숙명론자 되기에는 너무 강하며 너무 열렬하다. 소망 없는 중환重患에도 그의 쾌유를 믿고 임종에도 그의 회복을 믿고 시체 보고도 그의 소생을 바라는 우리의 심정이다. 우리의 사랑은 엄정한 사실을 무시하는 듯하다.
그의 비참한 최후를 새로운 최초의 전조로 만들려 한, 또한 하고 있는 선배와 동배들의 피눈물과 피땀에 무한한 감사를 표한다. 동시에 우리도 그들의 발자취 따르려 한다. 그렇다. 우리의 무력과 무지 안 돌아보고 목숨을 바치려 한다. 같은 피 같은 땀 흘리려 한다.
우리가 그를 위하여 하려는 일은 무엇인가. 성서의 연구이다. 옛날 것 같으나 영원히 새것인 성서의 진리를 그에게 제공하려 함이다. 여호와를 아는 지식 백두산부터 한라산까지 가득 차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부활, 재림의 신앙 온 조선 사람의 마음을 잡게 함이다. 사람의 생명 중추인 영혼의 각성이다. 천상에 민적民籍을 옮기게 함이다. 독일을 암흑에서 꺼낸 루터의 믿음, 영국을 멸망에서 구제한 크롬웰의 신뢰, 미국을 건설한 청교도의 신앙을 조선도 갖게 함이다.
우리는 현세를 말 아니하고 내세를, 사회를 말 아니하고 영원을, 사람을 말 아니하고 하나님을 열렬히 주장한다. 따라서 이 세상 이상에 흥미 못 갖는 사람에게는 우자愚者의 잠꼬대에 지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와 아무 관계 없는 사람이다. 우리는 신앙의 절대 자주를 고창한다. 신앙의 강제는 우리가 할 최후의 일이다. 다만 우리 믿는 것, 참으로 아는 것, 가만히 있으면 못 견딜 것을 말할 뿐이다. 결과를 고려치 않고 물 위에 빵을 던질 뿐이다.
조선에 예수 이름 부르는 교회 많이 있음을 기뻐한다. 그러나 신앙 없는 교회, 의식과 사업에 타墮한 교회, 사교장이 된 교회에는 절대로 반대한다. 억제할 수 없는 증오를 느낀다. 영이신 하나님은 영으로 예배해야 한다. 사람 손으로 만든 집 속보다 하나님이 만드신 자연 속에 송풍과 새소리와 함께 여호와를 찬미함을 그는 기뻐한다.
새 조선을 현실에 지지 않을 만큼 확신하면서 「성서조선」을 내보낸다. 소수나 적당한 독자를 구한다. (<성서조선> 창간호, 1927. 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