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화가 하인두씨가 1989년 11월 12일 별세했다. 하인두씨는 우리나라 현대미술의 전후 제세대로서 평생 고집스레 추상화만을 추구해 온 집념의 화가였다.
1987년 사형선고와도 같은 직장암 선고를 받고 다섯차례의 입원을 거듭하면서도 전시회를 개최하고, 투병기를 저서로 출간하는 등 예술과 생애의 지칠 줄 모르는 정열을 보이다가 끝내 한창 원숙한 예술세계를 펼칠 나이에 세상을 떴다.
전쟁의 포연속에서 서울대 미대를 졸업, 1957년 박서보 김창렬씨 등 당시 청년미술가들과 함께 현대미술가 협회를 조직, 표현추상운동의 기치를 들었던 그는 이후 온갖 새로운 사조의 유행에도 불구하고 죽는날까지 그 맥락을 유지해왔다. 다작이며 대작인 뚝심의 작가인 그는 자신의 개인전에 1백호 내외의 큰 작품을 내놓곤 했다. 그의 작품에는 대중적 인기가 따르지 않았지만, 그는 독특한 자기세계를 고집한 작가였다./조선
[1980년] 미국 보이저 1호, 토성 근접 촬영
← 보이저1호가 보내온 토성의 사진
3년 2개월 간 태양계 여행을 계속해 온 무인혹성탐사선 `보이저1호`가 1980년 11월 12일 토성에 12만4천2백km까지 접근, 근접촬영에 성공했다.
1977년 미항공우주국이 ‘보이저2호’와 함께 발사한 이 탐사선에 의해 과학자들은 토성에 관한 새로운 지식을 얻을 수 있게 됐다. 우주개발의 지평을 더욱 넓혀준 2대의 탐사선(2호는 1981년 8월 토성에 도달)은 지구로부터는 도저히 탐지할 수 없었던 토성의 8개 위성을 새롭게 발견했고 이제까지 `빛의 점`으로밖에 확인할 수 없었던 위성에 대한 새로운 정보도 전달해 주었다. 특히 극적인 발견은 토성의 트레이드 마크인 3중의 띠로 실제는 수많은 가는 띠가 모여 생긴 것이다.
보이저호는 토성에 접근하여 놀랄 만큼 상세한 구조를 보여주는 고리의 화상을 보냈다. 토성의 고리는 구름의 정상으로부터 약 7000km에서 30만km 이상의 높이까지 퍼져 있는 것이 아니라 군데군데 틈이 있고, 밝기의 정도가 다른 띠가 동심원상으로 연결되어 있다. 이러한 겉모양으로부터 고리는 A, B, C, D, E, F, G의 일곱 가지로 분류된다. 지구에서 똑똑히 보이는 것은 A고리와 B고리이다.
보이저는 이들 고리가 더욱 가느다란 무수히 많은 고리로 되어 있다는 것과 완전한 간극으로 생각되었던 곳에서도 가느다란 고리가 있음을 발견했다. 고리의 형태는 원형뿐만 아니라 타원형의 것과 비틀어져 있는 것도 있다. 또 고리위를 방사상으로 가로지르는 어두운 줄인 ‘스포크’를 관측했다. 고리의 두께는 최대 20m라는 데이터가 나왔다. 고리의 너비를 생각하면 이것은 굉장히 얇은 것이다./조선
[1969년] 중국 전 국가주석 유소기(劉少奇, 류사오치) 사망
← 중국 전 국가주석 유소기
유소기 전 중국 국가 주석이 문화대혁명 시기에 홍위병의 학대에 시달리다 1969년 11월 12일 후난성(湖南省)에서 사망했다. 향년 71세였다. 유소기의 시신은 ‘유위황’이라는 가명에 ‘무직’의 노인으로 화장됐다.
유소기의 죽음은 공표되지 않았고, 가족들에게도 알려지지 않았다. 이후 유소기는 `4인방`이 체포되고 부활한 등소평이 최고지도자가 된 1980년 2월 명예회복이 되었다. 사후 12년이 지나 수습된 유골은 부인 왕광미에 의해 1980년 5월 19일 북해함대에 실려 보슬비 속을 헤치고 청도 앞바다에 뿌려졌다.
그는 등소평과 함께 모택동이 주도하는 문화대혁명의 1차 표적이었다. 유소기는 모택동이 뒤에서 사주하는 문화대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어린 홍위병들로부터 야만적인 언어적-신체적 모욕을 당했다. 급기야 1969년 10월 제8기 중앙위원회 확대 제12차 총회에서 ‘당으로부터 영구 제명과 당 내외의 일체 직무 해임’이 결의되어 축출됐다.
대약진운동 실패 책임을 지고 국가 주석직을 유소기에 물려주고 당주석 자리만 유지하고 있던 73세의 모택동은 농업의 기계화, 물질적인 유인, 자본투자 등을 지지하는 실무파들이 주도권을 쥐자 중국이 개인주의, 자본주의 경향인 우경으로 흐르게 된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공산혁명을 일으킨 모택동 자신의 몰락을 의미했다. 모택동은 먼저 군대를 자기편으로 만든 뒤 학생들로 홍위병을 조직, 지식인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조선
[1962년] ‘6억달러’ 김종필·오히라 메모 작성
← 1962년 11월 12일 일본 외무성에서 있었던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왼쪽)과 오히라 일본 외상의 회담장면
5·16 후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은 한·일회담을 서둘렀다. 산업을 일으키려면 돈이 필요했고, 돈은 ‘청구권’ 명목으로 일본에서 받아낼 요량이었다. 1961년 6월 20일 6차 회담을 재개했으나 양국간 이견이 좁혀지지 않자 박정희는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에게 조기 타결을 지시했다. 1962년 10월 20일 김종필은 오히라 외무장관과 이케다 총리를 만나 1차 탐색전을 펼쳤으나 일본은 3억달러 제공만 고집하고 있었다. 박정희는 “반드시 청구권이라는 문구가 들어가야 하고, 6억달러 이하는 양보할 수 없다”는 긴급훈령을 내렸다.
1962년 11월 12일 김종필은 오히라를 다시 만나 이른바 ‘김종필·오히라 메모’를 작성하는 데 성공함으로써 한·일회담의 가장 어려운 부분을 타결지었다.
금액은 6억달러(무상 3억달러, 유상 2억달러, 민간차관 1억달러)로 매듭지었으나 ‘청구권’이란 문구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또한 독도문제의 해결방안으로 독도 파괴를 일본 측에 제안하고 독도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에 회부하자는 일본 측의 의견에도 합의해줬다는 사실도 알려져서 충격을 주었다. 곳곳에서 졸속 타결이라며 비난의 화살이 쏟아졌지만 김종필측도 할 말은 있었다. 어떻게든 6억달러를 받아내려다 보니 일부 문구에 소홀하게 됐고, 일본의 외환보유액이 18억달러였을 때 6억달러는 결코 적은 금액이 아니라는 주장이었다./조선
[1961년] 코마네치(Nadia Comaneci) 출생
← 2008년 6월 10일 오전 현대캐피탈 인비테이셔널 Ⅱ-세계 체조갈라쇼에 참가하기 위해 나디아 코마네치가 인천 국제공항을 통해 입국 했다.
“고된 훈련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것이 나만의 비법이고 내가 승리할 수 있었던 까닭이다.” - 나디아 코마네치
코마네치는 올림픽 대회 체조부문에서 최초로 10점 만점을 획득한 루마니아의 체조선수이다. 체조 국가대표 선수단의 코치인 벨라 카롤리의 눈에 띄어 6세 때부터 체조를 시작한 그녀는 1972년 처음으로 참가한 국제경기인 공산주의 국가연합 청소년 체조선수권대회에서 3개의 금메달을 땄으며, 그후 1973, 1974년 대회에서도 전 부문에서 우승을 기록했다. 1976년 미국 뉴욕 시에서 개최된 아메리카 컵 대회에서 여자 체조선수로서는 최초로 이단평행봉에서 2회전 뒤로공중돌기를 하면서 착지하는 고난도의 기술을 성공시키며 우승했다.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대회에서 7차례의 만점을 기록했고, 평균대와 이단평행봉에서 금메달을 획득했다. 그러나 1978년 세계선수권대회에서는 4위에 그치는 부진함을 보였고, 1979년에는 손이 감염되어 대부분의 시합에 출전하지 못했다.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 대회에 출전해 평균대에서 다시 우승을 차지했고 마루운동에서는 소련의 넬리 킴과 동점을 기록하면서 공동우승했다. 1976년의 올림픽 대회 이후 루마니아의 국민적 영웅으로 화려한 인기를 누렸지만 1984년 선수생활을 그만둔 후 1990년 미국으로 망명했다./브리태니커
[1948년] 일본 전범자들 유죄 선고
1948년 11월 12일 제2차 세계대전 중 전쟁범죄를 저지른 일본의 전범자들에게 유죄가 선고되었다. 1946년 1월 19일 연합국 최고사령관인 D. 맥아더는 전쟁범죄를 심리·처벌하기 위한 '극동국제군사재판소의 설립에 관한 명령'을 발포했다. 이에 기초해 A급 전범 용의자 28명에 대한 기소장이 발표되어 5월 3일 재판이 개시되었다. 2년 반의 심리를 거친 끝에 내려진 판결에서 사망 등으로 인해 제외된 3명을 빼고는 모든 피고인이 유죄를 선고받았으며, 도조 히데키[東條英機] 등 7명이 12월 23일에 처형되었다. 이 재판은 뉘른베르크 재판과 함께 전쟁범죄의 개념에 새로운 내용을 부여한 재판으로서 국제법 역사상 커다란 의의를 갖는다. 그러나 당시 재판관이나 검사가 전승국만으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당사국과 제3국으로 구성되어야 하는 국제재판소의 공평성 원칙에 위반된 처사라고 보는 견해가 있다. 또한 일본 국민을 재판에 참가시키지 않음으로써 그들에게 전쟁에 대한 책임감을 심어 줄 수 있는 기회를 놓쳤다는 점이 지적되기도 했다./브리태니커
[1929년] 영화배우 겸 모나코 왕비 그레이스 켈리 출생
본명은 그레이스 패트리시아 켈리(Grace Patricia Kelly). 우아하고 고상한 매력의 대명사로서, '영화계의 공주'라는 별칭을 전혀 무색하게 만들지 않는 여배우다. 내적인 정열과 외적인 차가움 사이의 패러독스를 체현한 켈리는 알프리드 히치콕이 선호한 이상적인 금발 미인이기도 했다.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브로드웨이에 먼저 발을 디딘 켈리가 첫 출연한 영화는 <14시간>(1951). 이 단역을 시작으로 그녀는 프레드 진네만의 <하이 눈>(1952), 존 포드의 <모감보>(1953)에 출연하면서 할리우드에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그뒤 히치콕의 영화에 출연하면서 스타덤에 오른 그녀의 다른 대표작들로는 <상류 사회>(1956), <백조>(1956) 등이 있다. 그녀는 히치콕과 세편의 영화를 찍었는데, 그 첫 번째 작품이 바로 <다이얼 M을 돌려라>이며, 두번째 작품 <이창>에서 제임스 스튜어트의 상대역을, 그리고 다음해에는 <나는 결백하다>에서 캐리 그랜드와 짝을 이뤄 출연했다. 모나코 왕자와 결혼 뒤 은막에서 은퇴했던 켈리는 62년에 히치콕의 <마니>(1964)에 주연을 맡으면서 할리우드로 돌아올 것이라고 공표했다. 하지만 모나코의 국민들은 공주가 도둑 역을 맡는 것도, 그리고 숀 코너리와 로맨스에 빠지는 역을 연기하는 것도 원치 않았다고 한다. 결국 나중에 켈리는 그 프로젝트에서 손을 뗄 수밖에 없었고 결코 다시는 연기 세계로 돌아오지 못했다.
[1918년] 오스트리아 제1공화국 출범
1918년 11월 12일 오스트리아가 민주공화국을 선포했다. 이로써 1278년 이래 오스트리아를 지배해왔던 합스부르크 왕가의 전제정치가 막을 내리게 되었다. 합스부르크 왕가는 수세기 동안 오스트리아·보헤미아·헝가리를 중심으로 광대한 영토를 지배했다. 그러나 19세기에 이르러 프로이센이 강성해지고 제국의 각 지역에서 민족주의가 뿌리를 내리자 차츰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은 합스부르크 왕가의 제국을 해체하는 결과를 낳았다. 1918년 11월 제1차 세계대전이 동맹국(독일·오스트리아-헝가리·터키)의 패배로 끝나자 합스부르크 왕가의 카를 황제는 국사에 일체 간여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제국은 폴란드·체코슬로바키아·헝가리·유고슬라비아 등의 독립국들로 분할되었고, 오스트리아 역시 개별적인 공화국이 되었다. 사회민주당의 카를 레너가 오스트리아 제1공화국의 초대 총리에 취임했다./브리태니커
[1917년] 국악인·작곡가·교육자. 김기수(金璂洙 일본식 이름:光山哲三) 출생
1917. 11. 12 서울~1986. 10. 21 서울.
아호는 죽헌(竹軒), 또는 순한국어로 풀어서 '대마루'라고도 한다. 김영제와 전주이씨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일찍이 이연상이 음악적 소질을 인정했을 정도로 재능이 뛰어났다. 예술을 하는 사람을 천시하던 시대였기에 경성농업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입학금이 없어 진학을 포기하던 중 이왕직아악부에서 국비로 학생을 모집한다고 하여 15세에 국악의 길에 들어섰다. 대금을 전공한 후, 이왕직에 근무하며 아악(雅樂)을 오선보로 채보하기 시작했다. 1939년 12월 이왕직 공모 선곡에 〈황화만년지곡 皇化萬年之曲〉이 당선되면서 신국악 창작을 시작하였다. 태평양전쟁이 막바지에 이른 1942년 12월 만주로 도피해 동광국민우급학교를 세웠다. 1945년 금강귀국단 부단장으로 귀국한 그는 상명여고에서 잠시 교편을 잡다가 1950년 구왕궁아악부에 들어가 다시 국악과 인연을 맺었다. 1955년부터 국악사양성소에서 후진양성에 힘쓰는 한편, 1958년 문교부 전문위원으로 있으면서 〈한국민요 50곡집〉과 국악관계서적을 출판했다. 1962년 국립국악원 악사장 겸 국악사양성소 부소장으로 임명되었고, 1964년 중요무형문화재 제1호 종묘제례악 기·예능보유자로 지정받고, 1971년 처용무 예능보유자로 지정받았다. 1973년 국립국악원장에 취임, 1977년 퇴임과 동시에 국립국악고등학교장에 취임했다. 1983년 정년퇴임 후 국립국악원 원로로 있다가 사망했다.
작품
〈황화만년지곡〉(1939)을 비롯하여 관현합주곡 〈정백혼 精白魂〉, 관악4중주곡 〈명단풍 明旦風〉, 관악합주곡 〈송광복 頌光復〉, 가악(歌樂) 〈개천부 開天賦〉, 합악곡 〈하원춘 賀元春〉(1952), 관악합주곡〈새동산〉(1969)·〈마파람〉(1969)·〈허튼가락 새가락〉(1971)·〈그로텔 드마르잘(Grottel DeMarzal)〉 의 인상(印象)〉(1973)·〈뿌리깊은 나무〉(1976)·〈무궁한 등불〉(1977), 취타곡 〈신작로〉·〈행군〉·〈여명〉·〈승리〉, 단가집 〈고가신조 古歌新調〉·〈속고가신조〉, 가야금독주곡 〈향란 香蘭〉, 대금독주곡 〈설죽〉, 피리독주곡 〈가람〉, 해금독주곡 〈등롱 燈籠〉, 무용음악 〈내마음의 전설〉·〈처용랑〉·〈산제 山祭〉·〈영지 影池〉·〈만파식적 萬波息笛〉, 행사의식음악 〈현충제례악〉(1977)·〈춘향제례악〉(1980), 판소리 〈강감찬 장군〉·〈춘향가〉 등과 영화·방송주제가·찬불가 등 500여 곡을 작곡했다. 악보로는 대금·단소·거문고·가야금·해금·피리·성악의 교본을 간행했다. 1954년 서울시문화상, 1961년 국악상, 1962년 5월 문예상, 음악부문 본상 대한민국면려포장, 1977년 대한민국예술원상, 1983년 국악대상 특별대상 특별공로상 등을 수상했고, 1981년 예술원 회원이 되었다.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선정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음악인 부문에 포함되었다. 일본 건국 2600주년을 기념하여 천황을 칭송하는 내용의 《황화만년지곡》은 이능화의 시에 곡을 붙인 것이다. 김기수는 이 명단에 수록된 음악인 가운데 친일자료의 편수는 많지 않으나 친일행위의 정도가 노골적이라고 평가된 경우이다/브리태니커
[1912년] 시인·국문학자 박노춘(朴魯春) 출생
충남 연기 출신. 40여 년 동안 국어 교육과 국문학 연구에 몰두했다. 자는 자인(子仁), 호는 노강(蘆江). 1933년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한 뒤, 1940년 도쿄[東京]에 있는 호세이대학[法政大學] 고등과에 들어가 일본어와 한문을 공부했다. 1학년 겨울방학 때 귀국하여 자비로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한국 민족의 슬픔을 노래한 시집 〈여정〉을 펴냈다. 1946년에 귀국하여 성신여자중학교 등에서 교사로 근무했다. 1946년 시 〈핏방울〉(학병, 1946. 1)·〈불여귀 不如歸〉(우리 문학, 1946. 2) 등을 발표한 뒤, 더 이상 시를 쓰지 않고 국문학 연구에만 열중했다. 1966년 건국대학교 국문과 대학원을 졸업하고, 문교부국정교과과정 편집위원과 국어국문학회 위원을 역임했다. 1972년 국어국문학회에서는 제55~57호 통합호에 '박노춘 교수환력 기념호'라는 부제를 붙여 펴내기도 했다. 평론에 〈기류시조문학잡고 妓流時調文學雜稿〉(자유문학, 1958. 12~1959. 1)·〈고시조 작자의 신빙성 문제〉(사상계, 1961. 10) 등이 있다.
[1901년] 교육학자 오천석(吳天錫) 출생
1901. 11. 12 평남 강서~1987. 10. 31 서울.
1925년 미국 코넬대학교와 노스웨스턴대학교에서 교육학을 전공했으며, 1931년 미국 컬럼비아대학교와 1982년 청주대학교에서 각각 철학박사 및 명예행정학박사학위를 받았다. 1932~50년 보성전문학교(지금의 고려대학교), 1945~47년 미군정청 문교부장, 1950년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장 및 대한교육연합회장을 지냈고, 1950~55년 미국 극동총사령관 자문, 1955~60년 한국교육학회장, 1960~61년 문교부장관 등을 지냈다. 1962~63년 미국 맥머리대학·일리노이대학교·피바디대학 등에서 초빙교수를 지냈고, 1963~67년 주멕시코 대사, 1965년 국제연합 총회 한국대표 등을 지냈으며 1976년 학술원 회원(교육철학 분야)이 되는 등 한국 교육계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대한민국학술원 공로상을 수상했으며, 저서로 〈민주주의 교육의 건설〉(1946)·〈교육철학신강〉(1972)·〈교육사상전집〉(1975) 등이 있다./브리태니커
[1870년] 독립운동가 차희식(車喜植) 출생
1870. 11. 12 경기 화성~1939. 12. 18.
일명 봉습(鳳習:또는 奉習). 1919년 3·1운동 이후 전국적으로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자 장안면과 우정면의 차병혁(車炳爀)·차병한(車炳漢)·이영쇠(李永釗) 등과 4월 3일 독립만세시위를 벌이기로 계획하고, 장제덕(張濟德)·장소진(張韶鎭)과 함께 장안면 석포리 주민들에게 참여하도록 홍보했다. 4월 3일 석포리에서 시작된 시위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를 선창했다. 이어 군중을 이끌고 장안면사무소로 행진, 면장 김현묵(金賢默)에게 강권하여 시위행렬에 동참시켰으며, 투석과 몽둥이로 면사무소 건물과 집기류를 부수고 공문서를 파기했다. 군중이 1,000여 명으로 늘어나자 이들을 인근의 쌍봉산(雙峰山)으로 인솔하여 그곳에서 독립만세를 외쳤다. 계속해서 차병혁·차인범(車仁範) 등과 함께 시위군중을 이끌고 우정면사무소로 행진하여 면사무소 건물을 파괴하고 집기류와 공문서를 파기했다. 이어 차병한의 제의로 화수리주재소를 습격·방화했는데, 이때 일본 순사 가와바타[川端豊太郞]가 발포하며 도주하자 차인범·정서송(鄭庶松)·이순모(李順模) 등과 함께 추격하여 살해하는 등 격렬하게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다가 검거되었다. 1920년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요·살인·방화와 보안법 위반 등의 혐의로 15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던 중 9년 2개월 만에 출옥했다. 1968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브리태니커
[1866년] 중국 건국의 아버지 손문 출생
청조와 일제, 그리고 군벌 등의 정적들에게 평생 추적을 당하면서 중국 국내외 여행이 많았던 그는 여러 차례 가명을 사용하였으며, 이 때문에 그의 호칭은 잘 알려진 쑨원 (孫文)과 중산 (中山)외에도 여러 개가 있다.
잘 알려지지 않은 그의 호적상의 본명은 쑨더밍 (孫德明 손덕명)이며 아명은 쑨디샹 (孫帝象 손제상)이다.
쑨원 (孫文 손문)이라는 이름은 그가 10여 세 부터 사용한 이름이다. 자 (字)는 재지 (載之). 원래의 호 (號)는 일신 (日新)이었으나 홍콩 서양 의학원의 중문학 스승의 권유로 일선 (逸仙)으로 바꾼다, 일신과 일선은 광동어로 발음하면 "얏센"으로 같은 발음이다.
잘 알려진 중산 (中山)은 정식으로 만든 호가 아니라 1897년 무렵부터 사용한 "나까야마"라고 하는 일본 성씨 가명이다. 쑨원이 광주에서 1895년 17세의 나이로 가담한 혁명이 실패한 후, 외국으로 수 년간 피신했을 시기에 일본에서 사용한 가명 中山樵 (중산초: 중국 산의 나뭇군. 땔나무 樵 초)에서 유래한다.
1895년 무렵부터 평생 동안 청나라에 반대하는 혁명을 주도했다. 1905년 남경에서 동맹회 (1912년의 신해혁명 후에 국민당으로 개편) 를 조직해서 삼민주의(三民主義)를 제시했고 1913년 중국국민당을 창시했다. 중화인민공화국의 기록은 쑨원 말년의 "소련, 코민테른, 중국공산당과의 합작"을 자세히 기록하면서 강조하는 면이 있다. 반면, 중화민국(대만)의 기록은 장제스가 1918년 이후로 쑨원의 휘하에서 활동하였다는 점을 감안하여서, 그리고 중화민국의 정통성을 잇는다는 점에서 쑨원에게 지극히 우호적이나, 그의 국공합작 내용이나 공산계열에 우호적이었던 활동은 다소 축소되어 기술되는 경향이 있다.
쑨원과 군벌의 관계를 말하면, 1912년 위안스카이와의 회합 후 그에게 배반을 당해 북양군에 의해서 그의 조직이 와해되고, 다시 1917년 광주 지역에서 서남군벌과 합작한 조직에서 1918년 축출되었으며, 1921년 광동에서 조직한 세력도 1922년 진형명의 반란 등으로 타격을 입는 등, 군벌 조직으로 부터 많은 피해를 입었다. 실제로 그의 대표적인 수장(首長) 직위를 살펴보면 1912년 1월에 신해혁명으로 중화민국 임시 대총통 (中華民國 臨時大總統)으로 있다가 2월에 위안스카이에게 자리를 넘겨주며, 1917년에 광주에서 대원수 (海陸軍 大元帥)로 있다가 1918년에 축출되며, 1921년에 비상 (임시) 대총통 (非常(時期)大總統)으로 있다가 진형명의 반란을 맞이한다. 중화민국의 실제적 실권을 쥐는 1923년에야 민정적 명칭인 대총통이 아닌, 군사적 성격이 강한 대원수 (海陸軍大元帥)가 된다.
그는 광동 지역에 기반을 두고 국내는 물론이며, 하와이에 있던 큰 형 손메이 (孫眉 손미) 등의 도움으로 해외의 화교와 유학생을 규합하며 해외에서도 많은 활동을 하였다.
그의 삼민주의 등의 사상은 민중의 많은 지지를 받았으며, 그의 삼민주의는 중국과 대만 양 측에서 모두 높이 인정받고 있다.
그의 중국 혁명 정신이 남긴 영향은 아직도 그의 초상화가 본토 중국 및 대만의 정치 행사에 자주 사용될 정도로 크다.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 기념일 등에는 그의 대형 초상화가 천안문 광장에 걸리며, 2004년 대만의 천수이볜 총통 취임식에서도 쑨원의 대형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대만의 국부 (國父)로 칭송받으며. 본토 중국에서는 국부라는 호칭보다는 혁명선행자(革命先行者)라는 호칭을 주로 쓴다.
[1840년] 프랑스 조각가 로댕(Auguste Rodin) 출생
1840. 11. 12 프랑스 파리 ~ 1917. 11. 17 뫼동.
오귀스트 로댕은 프랑스의 조각가이며, 프랑스 파리 중산층 가정에서 그의 어머니 메리 체퍼와 경찰청 사무원이었던 그의 아버지 진 밥티스트 로댕 사이에서 출생했다. 로댕은 10세 때부터 혼자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였고 14세부터 17세까지 미술과 수학이 전문화된 프티 에콜(Petite École)이라는 학교에서 드로윙과 페인팅을 공부하였다. 그의 드로윙 선생님이었던 르코크 드 브아도드랑(Horace Lecoq de Boisbaudran)으로부터 교육을 받았다.르코크 드 브아도드랑은 그의 학생들이 그들의 회상을 그리고 두 눈으로 관찰하는 것이 그들의 인격이 첫 번째로 발전되는 계기라고 믿었다. 이러한 사상은 로댕의 조각품들에 큰 영향을 미쳤다. 1857년 로댕은 에콜 데 보자르(École des Beaux-Arts)에 입학하기 위해서 자신의 동료를 모델로 만든 찰흙작품을 제출하지만 입학하지는 못하였다. 그로부터 두 작품을 더 제출하였으나 거부되었다. 그랜드 에콜에 입학하기 위한 요청사항도 그 당시 높지 않았으므로 로댕은 심히 좌절하게 된다. 그의 작품들이 거부되었던 가장 큰 원인은 판정가들이 로댕의 새로운 감각적인 조각품들보다는 신고전주의적인 작품들을 추구하였기 때문이라고 알려지고 있다. 1857년 로댕은 프티 에콜을 떠나게 된다. 그 후 20여년간을 장식품들과 건축장식들을 제출하는 일을 하는 장인으로 살았다.
1862년 그의 누이였던 마리아(Maria)는 수도원에서 복막염으로 사망하게 된다. 그녀에게 믿음직스럽지 않은 구혼자를 소개해 주었던 로댕은 이 일에 죄책감을 느끼고 괴로워한다. 로댕은 결국 조각을 그만두고 카톨릭교로 들어가게 된다. 그러나 신부인 피터 주리안 데이말드(Peter Julian Eymard) 는 로댕이 카롤릭교에있어서 둔각을 발하지 못하는 것을 느끼고는 그가 다시 조각을 하기를 격려한다. 로댕은 다시 장식품들을 조각하는 일을 하게 되고 동물 조각가였던 안토니 루이즈 베리(Antoine-Louis Barye)의 수업에 참여하게 된다. 동물들이 움직일 때의 정교한 근육조직들을 훌륭히 표현했던 안토니 루이즈 베리의 작품들은 의미심장하게 로댕에게 큰 영향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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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4년 평생의 반려자인 재봉사였던 로즈 뵈레를 만나게 된다. 그들은 아들 오귀스트 외젠 부렛(Auguste-Eugène Beuret)을 낳았다. 그 당시 처음 조각 전시회를 가졌다. 전시회를 계기로 명성 높은 조각가 카리에 벨뢰즈 아틀리에(Albert-Ernest Carrier-Belleuse)의 작업실에서 작업을 하게 되었다. 지붕, 계단, 그리고 출입문 장식들을 도맡아 하였다. 1870년 프로이센-프랑스전쟁으로 인해 로댕은 경제적 어려움을 겪게 된다. 그러나 카리에 벨뢰즈 아틀리에의 요청으로 벨기에, 브뤼셀에서 증권 거래소를 건물장식들을 만들며 활동을 하였다.
1875년부터 이탈리아에서 체류했고 1877년에 프랑스로 귀국하였다. 대표작으로는 《칼레의 시민》, 《지옥문》, 《생각하는 사람》 등이 있다. 카미유 클로델은 그의 연인이다. 지옥의 문은 로댕이 1880년에 주문받은 평생 작업하게 될 작품이었다. 1881~1882년 자신의 제자이자 동업작가인 카미유 클라로델(작가 콜로델의 누이동생)과의 인연이 시작된다. 클로델은 16년 뒤 그와의 결별 후 정신이상이 되고 로댕은 <칼레의 시민들>, <빅토르 위고>, <발자크> 같은 중요한 여러 작품의 주문을 받는다. 이 중 마지막 두 작품은 거절을 당한다. 1900년에 로댕은 조각가로서 대성공을 거둔다.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1905년 그의 비서로 활동했으며 1908년에는 현재의 로댕 미술관인 비롱 호텔을 빌리도록 촉구하였다. 1916년 작품과 전시물을 국가에 기증하고 1917년에 사망하였다./위키백과
그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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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홈런왕 맥과이어 명예로운 은퇴
2001년 미국 여객기 뉴욕서 추락. 260명 사망
1999년 안산 SW 지원센터 설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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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영국의 소설가 스튜어트 사망
1992년 영종도 국제공항 기공식
1991년 아태지역 경제협력(APEC) 제3차 각료회의 서울서 개최
1990년 빌게이츠 컴덱스쇼 기조연설에서 `손가락 끝의 정보`라는 문구로 미래 컴퓨팅의 비전 제시
1990년 아키히토(明仁), 일본 제125대 왕에 즉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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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공화당총재 김종필 선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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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동아일보, 천주교도 인권회복기도회 기사로 경영진과 기자들의 의견충돌 12일자 휴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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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 런던에서 제1회 영국-인도 원탁회의
1921년 워싱턴 군축회의 개막
1920년 조선징발령 공포
1918년 독일 사회민주당, 민주공화국 선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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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7년 우루과이의 제2대 대통령(1835~38) 오리베 사망
1848년 그리스 언어학자 하드지다키스 출생
1746년 프랑스 물리학자 샤를 출생
1463년 동국지도 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