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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개(李塏)는 고려 말 대학자였던 이색의 증손자였으며, 성삼문은 태어날 때 하늘로 부터 " 태어났느냐? 태어났느냐? 태어났느냐?" 3번 물음이 있다고 해서 이름 붙여졌다.
성삼문(成三問)은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에 공헌한 인물이다.
"너희들이 어찌하여 나를 배반하는가? " 라는 세조(世祖)의 국문에
" 옛 임금을 복위하려 했을 뿐이다. 천하에 누가 자기 임금을 사랑하지 않는 자가 있는가?"
"나으리가 남의 나라를 빼았고 나의 군주가 폐위 당하는 것을 보고 견딜수가 없어서 그러는 것이다. 나으리가 평소 걸핏하면 주공(周公)을 자칭하는데 주공도 이런 일이 있었소? 하늘에 태양이 둘이 없고, 백성은 군주가 둘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리라"
성삼문(成三問)의 당찬 말에 화가 치민 세조는 쇠를 달구어 다리를 뚫게하고 팔을 자르게 했으며, 아버지 성승과 함께 성삼문은 멸문지화를 당했다.
(아! 왕에게 나으리라고 하다니..대쪽 같은 선비의 기개여! 만고의 충신이여~~)
(성삼문)
유성원(柳誠源)은 붙잡혀 가기전에 부인과 함께 자결했고, 유응부(兪應孚)도 매우 청렴하여 죽은 뒤에 재산을 몰수 당했으나 방에는 해진 짚자리만 있었다고 한다.
죽어서 충성을 다한 사육신(死六臣)이 있다면, 살아서 단종에게 충성을 다한 생육신이 있다.
생육신(生六臣)은 살아 있으면서 귀머거리나 소경인 채, 또는 방성대곡 하거나 두문불출하며 단종을 추모했던 인물들이다.
김시습, 원호, 이맹전, 조려, 성담수, 남효온 등이 생육신(生六臣)으로 불린다.
세조의 비행을 가장 적극적으로 고발한 인물인 남효온은 그때 당시 겨우
두 살이었는데, 나중에 세조(世祖)의 찬탈행위를 비난함으로써 생육신이 된 인물이다.
원호(元昊)는 원주의 남송촌에서 세상을 등졌고, 이맹전(李孟專)은 선산 강정리 전원에 묻혀 살았는데 대궐을 향해 앉지도 않았다고 한다.
조려(祖旅)는 낙동으로 돌아와 낚시질로 생을 마쳤는데 세상을 등지고도 번민함이 없는 뜻이 김시습(金時習)과 같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성담수(成聃壽)는 부친 성희가 성삼문의 역모죄에 연루되어 벼슬길이 막힌 채 죽자 파주의 어버이 묘 밑에 살면서 한 번도 한양에 이르지 않았다고 한다.
생육신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이 김시습이다.
김시습(金時習)은 3살에 이미 시에 능했고, 5살에는 < 중용 > < 대학 > 에 통했다고 알려진 조선의 천재였다.
(헉! 그럼 천자문은 언제 떼었다는게지?)
김시습은 21세 때 수양대군이 왕위에 올랐다는 소식을 듣고 통분하여 책을 태워버리고 중이 되어 이름을 ' 설잠 ' 이라 짓고 방랑을 하다 죽었다.
(김시습)
김시습(金時習)은 유교, 불교, 도교에 모두 통하였으며 재주와 지혜가 탁월하였는데 아까운 천재 하나가 시대와 타협하지 못하고 스러져버렸다.
김시습은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 단편 소설집인 《금오신화》를 썼으며, 탁월한 문장으로 일세를 풍미하였다.
🌹 성삼문과 신숙주의 인연
집현전 출신 젊은 학자들의 리더였던 성삼문(成三問)은 충청도 홍성 출신이며, 오위도총부 총관(정2품) 성승의 아들로 안평대군과 동갑이었다.
신숙주(申叔舟)는 전라도 나주 출신으로 대제학을 지낸 '신장'의 아들로서 수양대군과 동갑으로 둘 다 세종에게는 아들 뻘이었다.
두 사람은 나이도 비슷하고 같은 시기에 과거에 급제하여 매우 친한 사이였으나, 둘의 인생 역정은 크게 엇갈리게 된다.
둘은 집현전에서 함께 일하는 동지로서 훈민정음 창제에 깊이 간여했다.
단종 1년(1453) 10월 수양대군이 주도한 계유정난이 일어났고, 2등 공신에 신숙주, 3등 공신에는 성삼문이 끼여 있었다.
성삼문(成三問)이 공신에 낀 것은 집현전에서 영향력이 큰 성삼문에 대한 회유책으로 여겨진다.
수양대군이 왕위를 찬탈했을 때 신숙주는 도승지, 성삼문은 동부승지였다.
세조를 제거하려는 사육신의 모의가 탄로난 후, 성삼문(成三問)은 국문을 받는 대역죄인이 되었고, 신숙주(申叔舟)는 병조판서로서 국문자의 입장이 되었다.
사육신은 거열형에 처해지고 효수되었으며, 신숙주(申叔舟)는 역모를 잘 다스린 공으로 우찬성이 되었다.
죄인들이 처형된 후 남은 가족들 중 여자들은 노비가 되어 공신의 집에 나뉘어졌다.
신숙주는 죽은 자들의 부인과 딸들을 차지하게 되었다.
사실 신숙주(申叔舟)는 뛰어난 언어학자이자 외교관이었으며, 다섯 임금을 모시고 20년이나 재상 노릇을 한 인재였다.
일본, 중국과의 외교에서 탁월한 업적을 남겼으며 《해동제국기》라는 일본대책론을 저술했다.
북방의 여진을 평정한 후에는 《북정론》을 썼고, 주요 외교문서들은 모두 그의 손을 거쳐야했다.
신숙주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명칭이 바로 숙주나물이다.
사육신(死六臣) 처형 때 절의를 지키지 않았다 하여 붙여진 명칭이다.
이는 상왕 복위 기도 사건이 실패로 돌아가고부터 신숙주(申叔舟)에게 붙여진 것이 아니라 200여 년이 지난 17세기 이후부터 성삼문(成三問)이 절의의 대명사로 받들어지면서 부터 신숙주가 폄하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숙주 보다 못한 놈~~이 가장 큰 욕이었다나?)
조청전쟁(병자호란) 이후 명에 대한 절의(節義)를 지켜야 한다는 풍조가 확산되면서 성삼문(成三問)을 절의의 상징으로 내세운 다음이었던 것이다.
신숙주(申叔舟)에 대한 악질적인 일화가 또 하나 있다.
사육신(死六臣)이 모두 처형되는 날!
신숙주의 부인이 멀쩡하게 들어오는 신숙주를 보자 어찌 살아 돌아왔느냐고 창피해서 못 살겠다고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다는 스토리가 있다.
이건 완전 소설이다.
신숙주의 부인은 사육신의 옥사가 있기 이미 5개월 전에 병사를 했다.
이 이야기는 춘원 이광수가 신숙주를 헐뜯기 위해 야사에서 흘러다니던 이야기를 주워 모아 소설 《단종애사》에 옮긴 것이다.
사실 신숙주(申叔舟)는 소문보다 훨씬 괜찮은 인물이었던 것이다.
🎓 다음은 백두산 호랑이 김종서와 세조의 장자방 한명회가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