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진강을 따라가는 길은 언제나 환상적이다. 하동읍에서 19번 국도를 따라 섬진강을 거슬러 상류로 가는 길은 봄이면 길 양쪽으로 하얀 배꽃이 소복단장을 한 여인처럼 강변을 수놓고 있다. 배꽃잎이 봄바람에 날리는 모습은 겨울 함박눈이 내리는 것 같다.
박경리의 대하소설 「토지」의 무대가 되었던 악양 가는 삼십리 길은 넓은 고속도로를 휑하니 달려가는 여유 없는 여행길이 아니라 옛날 선비들이 짚신을 신고 유유자적하던 마음으로 떠날 수 있는 여행길이다.
하동읍 화심리에는 섬진강에 건물을 내리고 있는 작은 리조트 호텔 미리내(Mininae Hotel)가 있다. 섬진강을 따라가는 길목에서 하루를 쉰다면 가장 아름다운 풍경을 만날 수 있는 곳이다.
온통 통유리로 된 커피숍에 앉아 있으면 저녁 무렵에는 서쪽으로 지는 황금빛 노을에 빛나는 물결이 고기떼가 여울을 오르는 것처럼 매우 아름답다.
이른 아침에는 섬진강 하류쪽 동쪽에서 떠오르는 일출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새삼 자연의 아름다움을 만끽 할 수가 있다.
하동군 악양면은 북으로 지리산을 등에 업고 그 지맥이 병풍처럼 둘러있으며 악양천이 섬진강으로 유입하는 넓은 평야가 있으니 그야말로 산수가 수려하고 아름다운 고장이다. 하동 사람들은 악양의 아름다움을 소상팔경(瀟湘八景)의 표현을 빌려 말하고 있다.
「소상야우(瀟湘夜雨, 고소산성 중턱 소상반죽에 밤비 내리는 정경) 산시청람(山市晴嵐, 수목 울창한 산허리 감도는 아지랭이의 풍경) 원포귀범(遠浦歸帆, 섬진강 먼 포구에 돛단배가 들어오는 풍경) 어촌낙조(漁村落措, 섬진강변의 개치 마을에 해가 지는 모습) 동정추월(洞庭秋月, 저녁 노을 물든 섬진강변 어촌의 모습) 평사낙안(平沙落雁, 평사리에 기러기가 앉아 있는 모습) 한사모종(寒寺募種, 해질무렵 들려오는 한산사의 저녁종 소리) 강천모설(江天募雪, 저무는 섬진강 하늘의 눈 내리는 정경)」이 그 표현이다.
평사리는 5부 16권의 방대한 양으로 25년에 걸쳐 완성한 박경리의 대하소설 「토지」의 고향이다. 대하소설 「토지」는 농민전쟁과 갑오개혁, 을미의병 등이 차례로 근대사의 연표를 채우고 지나간 1897년부터 해방까지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격변하던 혼란기를 시대 배경으로 삼았다.
그러나 소설을 집필하는 동안 작가가 평사리를 직접 답사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소설 속 동네구조와 실제 평사리의 모습이 다르다. 작가가 모델로 삼았다는 조부잣집은 평사리에서 악양면사무소를 지나 한참을 더 들어가야 한다.
산쪽으로 다가앉은 마을쪽에는 넓은 악양들판과는 달리 돌이 흔하다. 거의 모든 동네 집의 담장이 검은 색을 띠는 산골 작은 호박돌로 되어있고 마을 뒤편 다랑이논의 축대도 역시 돌을 쌓아 만들어 놓았다.
지금은 마을 입구에 최참판댁 이정표가 달려있어 다른 마을을 헤매는 수고는 덜고 있다.
악양 들판이 시원스레 보이는 낮은 언덕 산자락에 자리잡고 있는 평사리는 갖가지 나무와 꽃들이 정겨웁게 어우러진 돌담길이 있다.
올라가는 고샅길에서부터 편안함이 우러나는 고향같은 마을 위쪽에 최참판댁을 복원해 놓 았다. 마을 한가운데 갈림길에는 소설 속 임이네와 강천댁, 두만네, 막딸네 등 아낙들이 시름을 털어놓거나 신세를 한탄하는가 하면 사소한 일로 아웅대기도 했던 공동우물과 빨래터가 동네 구판장 앞에 있다.
하동군 악양면 평사리 상평마을 2천880평의 부지에 건평 110평으로 세운 최참판댁은 안채, 사랑채, 별당채, 행랑채, 초당과 사당까지 모두 갖추고 있어 토지 문학제를 기점으로 문인들과 독자들의 발길이 더욱 잦아질 것 같다.